인천이 세계 만나는 근대사 관문
화려한 건물 짓는데 그쳐선 안돼
빈땅 아닌 켜켜이 쌓인 시간 가치
역사 인식… 도시 미래와 연결을
지난 일요일 경인선 전철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을 출발해 부평역과 도원역, 동인천역을 지나 종착역 인천역에 내렸다. 역 앞에는 ‘한국철도 탄생역’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증기기관차 조형물이 서 있었다. 1899년 9월 18일,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열차가 서울 노량진을 향해 출발했다. 걸어서 한나절 걸리던 길은 한 시간 반으로 줄었다. 역 뒤편 내항과 맞은편 차이나타운 일대를 걸었다. 철도와 항구, 개항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의 옛 이름이 제물포다.
81년 만에 제물포라는 이름이 돌아왔다. 인천 중구 내륙과 동구를 합친 제물포구가 지난 7월 1일 공식 출범했다. 1945년 미군정이 인천부를 ‘제물포시’로 바꿨다가 17일 만에 환원한 뒤 공식 행정 지명으로 부활한 것이다. 제물포는 인천이 바다를 통해 세계와 만나고 철도를 통해 서울과 이어진 근대사의 관문이다. 제물포의 귀환에 담긴 의미는 가볍지 않다. 이제 개항장 제물포에 걸맞은 도시 이야기를 구축할 때다.
때마침 지난 8월 인천항 내항 1·8부두 재개발 실시계획도 승인됐다. 20년 가까이 표류하던 사업이 마침내 닻을 올린 것이다. 2029년까지 6천372억원을 투입해 43만6천㎡ 부지에 문화·관광시설과 공원, 도로 등을 조성한다. 오랫동안 접근이 차단됐던 항만 공간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사업이다. 제물포구 출범과 내항 재개발은 원도심 부활에 더없이 좋은 기회다.
‘뭣이 중한가?’ 제물포 르네상스는 화려한 건물과 고층 아파트를 짓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제물포의 가치는 빈 땅이 아니라 켜켜이 쌓인 시간에 있다. 인천역의 두단식 승강장, 경인철도 옛 역터, 항만으로 이어지던 인입선, 배다리와 우각로, 옛 창고와 부두가 그 시간을 증언한다. 노동자들은 화물을 나르고 상인들은 시장을 열었으며, 학생들은 철길을 건너 학교와 헌책방을 오갔다. 제물포의 역사는 사람과 길, 노동과 생활이 함께 쌓아 올린 시간이다.
인천역 광장의 조형물만으로는 한국 최초 철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개통 당시 인천역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항구에 도착한 화물이 어떻게 철도에 실려 서울로 옮겨졌는지 설명이 부족하다. 축현역과 우각동역 터도 그 위치와 의미를 알기 어렵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자랑하면서 정작 최초의 흔적과 이야기는 소홀히 다루는 셈이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항만 재생은 오래된 시설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독일 함부르크 하펜시티는 창고와 부두의 흔적을 남겨 도시 정체성으로 활용했다. 일본 요코하마는 붉은 벽돌 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바꾸고 옛 철길을 산책로로 살려냈다. 하코다테와 오타루도 운하와 창고 건물을 감각적으로 재생했다. 낡은 시설을 없애는 대신 자산으로 바꾼 것이다.
인천도 그래야 한다. 인천역에서 내항까지 옛 화물철도 선형을 따라 걷는 길을 만들고, 남아 있는 레일과 창고·부두 시설을 보존해야 한다. 경인선과 수인선, 항만철도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철도문화공간도 매력적인 자산이다. 개항장과 차이나타운, 배다리, 수도국산, 월미도를 하나의 역사문화권으로 연결할 때 제물포의 이야기는 비로소 완성된다. 사진만 찍고 떠나는 도시가 아니라 머물면서 이야기를 만나는 도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중심은 주민의 삶이다. 주민과 상인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공간의 교체에 불과하다. 보존과 개발, 관광과 정주가 함께 가야 한다. 유산과 이야기는 개발의 장식물이 아니라 일자리와 지역경제를 살리는 기반이 돼야 한다.
도시는 기억을 잃는 순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 된다. 제물포라는 이름에 담긴 이야기와 기억이야말로 인천의 경쟁력이다. 바다와 철도, 원도심과 항만, 과거의 기억과 오늘의 삶을 연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높이, 얼마나 많이 짓느냐가 아니다. 개항장이 간직한 내밀한 기억과 시간을 얼마나 온전히 지키고, 그 이야기를 얼마나 많은 사람과 나누느냐가 중요하다. 돌아온 것은 이름만이어서는 안 된다. 제물포의 역사와 사람, 삶의 기억도 함께 돌아와야 한다. 역사에 대한 깊은 인식을 도시의 미래로 연결하는 것, 박찬대 시장의 진짜 실력은 이제부터다.
/임병식 국가유산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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