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되면 독서의 계절 클리셰

친숙하고 평화로운 위안 주고

새로운 삶의 충전 꾀하는 산문

우리 손에 들릴 책은 무엇일까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기적처럼 가을이 왔다. 폭염과 폭우, 재난으로 얼룩진 긴 여름이 가뭇없이 지나갔다. 어김없는 자연의 질서는 이렇게 또 새로운 계절을 선사한다. 또 다른 기적처럼 우리는 여러 순간을 견디고 품으며 살아가야 한다. 고마운 은총이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우리는 으레 독서의 계절 같은 클리셰를 떠올리곤 한다. 이 계절에 나는 ‘산문’이라는 양식을 생각해본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산문집을 냈다. ‘단정한 기억’이라는 책이다. 그동안 펴낸 비평서들이 워낙 전문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지인들에게 읽어보라고 주지 못했는데, 산문집의 경우에는 과감하게 조금 더 부드러운 섭렵과 경험의 기억을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산문’이란 무엇인가.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리듬에 언어를 대응시켜 낭독과 음송에 어울리는 형식을 입힌 글을 ‘운문’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산문’은 외적 리듬보다는 내용상의 명료함과 서사성을 강화한 줄글 형식을 말한다. 장르로 말하면 소설, 수필, 비평 등이 모두 산문이다. 사전에서는 ‘운문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리듬이나 정형성에 제약받지 않는 자유로운 문장’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산문에 무한정한 자유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장르적 관습과 함께 오랫동안 사람들이 그 장르를 통해 경험하고 또 기대해왔던 기율이나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사에서 산문을 가장 잘 쓴 작가들을 뽑는다면 누구를 말할 수 있을까. 내 기준으로 본다면 가장 큰 예술적 개성을 담은 산문을 쓴 작가는, 일제강점기로 한정하면, 정지용과 이태준과 이효석과 김기림과 이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분들은 본인들 주력 장르였던 시나 소설이나 비평만큼 아름다운 산문을 문학사에 남겨주었다. 아쉽게도 김소월, 한용운, 백석, 윤동주 등은 그분들이 남긴 탁월한 시적 성과에 비해 산문적 충격은 약한 편이다. 반대로 산문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로는 변영로, 양주동, 김진섭, 이양하, 피천득 등을 떠올리게 된다. 그 점에서 일제강점기는 산문의 일대 부흥을 이룬 시대라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산문을 일러 ‘영혼의 서정적 격정에도, 몽상의 파동에도, 의식의 충격에도 능히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면서도 강한’ 글이어야 하고, ‘이러한 이상은 무엇보다도 도시와 서로 무수하게 얽힌 복잡한 관계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운문인 서정시가 격정과 몽상과 충격을 순간적으로 주는 근대 이전의 잔광이라면 산문은 막 떠오르는 근대 도시의 문학이요 서정시를 유연하고도 강하게 감싸고 있는 서광임을 말함으로써, 자본주의가 형성시켜가는 ‘산문적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그만큼 산문은 근대의 본격적 산물인 셈이다.

어쨌든 ‘산문’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을 욕망하면서, 특정 토픽에 대해 독자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타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줌으로써 그들의 삶과 생각에 충격과 변형을 주려는 계몽 의지가 그 안에 흐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계몽이 위압적 훈계나 자기 확신의 강요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공감에의 간곡한 요청이요, 오랜 경험과 기억을 나누자는 호소일 뿐이다. 그러니 문장이 글쓴이의 인격이나 사람됨을 담고 있다면 그 대표 사례는 산문일 것이다. 그동안 진력해온 비평과 달리 산문이 이러한 소통과 공감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산문집을 건네니까 비평집에는 시큰둥하던 친구들도 반색을 해주었다.

우리는 지금, 충격적 정보를 스캔들화하는 데 앞장서는 과잉 문장들에 상처가 깊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말을 고르고 다듬고 세련화해야 할 주체들이 언어 과잉을 통해 존재론적 잔명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럴 때 한편으로는 친숙하고 평화로운 위안을 주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의 충전을 꾀하는 산문을 통해 그러한 한시적 소음에서 벗어나 항심을 가다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 가을에 우리 손에 들릴 책은 과연 무엇일까.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