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피해자 ‘비공개’ 수차례 입법 무산
행안부, 주민등록제도 일관성 이유 반대 입장
조배숙 의원 “뼈아픈 경고” “입법 속도내야”
민사 소송 중 가정 폭력 피해자의 주소를 비공개하는 방안이 국회에서 논의됐지만, 수차례 입법이 무산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일 발생한 광주 능평동 살인 사건(9월 2일자 7면 단독보도)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정 폭력 피해자가 민사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개인 정보를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망이 조속히 마련돼야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보면 22대 국회에서 민사 소송 과정 중 관계성 범죄 피해자의 주소가 가해자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치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주민등록법 일부개정 법률안 5건이 발의됐다.
허영·양부남·최기상·박은정·조배숙 의원 등이 각각 대표 발의한 법안으로, 개정안을 발의한 구체적인 배경은 차이가 있지만 가정 폭력이나 스토킹 등 관계성 범죄 피해자가 민사 소송 과정에서 주거지 등 개인정보가 가해자에게 노출되는 2차 피해를 막아야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었다.
이 가운데 조배숙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지난해 2월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상정됐다. 이 법안은 형사 소송과 달리 민사 소송은 가정 폭력과 스토킹 범죄 등의 피해자가 소를 제기할 때도 개인정보를 모두 적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고,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조 의원 측은 입법 배경에 대해 “민사 소송에서는 피해자가 변호사를 선임하더라도 원고 본인의 이름과 주소지를 기재하는 원칙이 있어 아예 소송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며 “가정폭력, 스토킹 등 피해자들이 2차 가해 우려로 전입 신고를 하지 않아 주소지와 실거주지가 다르고, 주소지 노출은 피해자의 신변에 위협이 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대비책이 미비하다”고 밝혔다.
또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주소지 불일치로 인해 기초생활수급 등 복지 서비스부터 주거 지원 혜택 대상에서 제외돼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는 모순도 발생한다”며 “주민등록표상 주소지와 실거주지를 달리하는 ‘안심주소’를 발급하고 주민등록 등본, 초본에는 안심주소가 기재돼 실제 거주지가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안심주소 발급 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고 했다.
이 법안은 지난 2024년 11월 발의됐지만, 우선순위가 밀려 제대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행정안전부가 이 법안을 반대하고 있는 것도 논의가 더딘 주된 이유 중 하나다. 행안부는 행정적인 관리와 기존에 운영되고 있는 주민등록제도의 일관성 등을 이유로 개정안에 반대 의견을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정계 관계자는 “지난해 7월부터 제3자 열람 제한 제도 등을 이미 시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피해자의 안심 주소 도입 등의 추가적인 제안에 정부가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표한 상황”이라고 했다.
앞서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박대출·김상훈 의원 등이 주민등록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해 민사 소송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관계성 범죄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막아야한다고 했지만, 행안부가 제동을 걸어 입법이 무산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입법이 늦어지는 사이 광주시에서는 지난 1일 이혼 소장에 적힌 주소로 찾아가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피신해 있던 거처의 주소가 남편에게 알려졌던 사건으로, 만약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시행됐더라면 이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조 의원 측은 속도감 있는 입법을 위해 더욱 힘쓰겠다는 입장이다. 조 의원은 “제도의 미비가 피해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경고”라며 “복잡한 절차와 제도적인 허점 때문에 이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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