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막신 신고 전등사 올라가고 내려왔다
송나라 사신 서긍, 신분에 따라 소개
국사(國師) ‘방울’… 재가화상은 ‘맨발’
일반적으로 짚신 신거나 가죽신
신문기자들끼리 주고받는 농담 혹은 훈계 중에서 상대에게 가장 모욕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 ‘발로 써도 그것보다는 낫겠다’는 표현이 아닐까 한다. 손으로 쓴 네 원고가 내가 발로 쓴 것보다 못하다는 얘기다. “이걸 글이라고 썼냐” 이런 뜻이다. 은근히 발을 손에 비해 하찮게 여기는 태도가 깔려 있다.
인천 출신 시인 김영승의 시에도, 선풍기의 하얀 스위치를 발로 눌러 끄다 보니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싶어 선풍기한테 정말 미안했고 괴롭기까지 했다는 내용이 있다. 배꼽을 쥐게 만드는 역발상의 시이지만, 발의 입장에서는 이 또한 손에 비해 깔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발은 그렇게 하찮지가 않다. 발은 우리의 모든 장기와 연결된 혈자리가 모여 있는 중요 신체 부위라는 게 한의학의 설명이고 보면, 발이 비록 우리의 얼굴이나 가슴 부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꽤 신경 써서 대우해야 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신발을 새로 살 때 발이 편한 것을 으뜸으로 따진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떤 신발을 신고 다녔을까. 그들은 신발을 어떻게 대우했을까.
고려 말의 목은 이색(1328~1396)은 ‘전등사(傳燈寺) 대조루(對潮樓)’라는 시에서, 전등사의 노승이 길을 안내해 나막신을 신고 산에 오르니 기분이 맑고 흥겹다고 읊었다. 나막신을 신고 정족산을 올랐다는 얘기다. 그 딱딱한 나막신을 신고 어찌 산을 올랐을까 싶은데 옛날에는 그랬나 보다.
이규보는 한 편의 시에서 나막신과 짚신을 한꺼번에 노래하기도 했다. ‘또 백거이의 운을 따라 문 장로의 짚신을 두고 짓다’라는 시. 그대가 멀리서 오느라 산 넘고 물 건너 천만 구비나 지났겠고, 누가 짚신을 삼았는지 촘촘한 게 그대의 발에 맞는구려, 하면서 당나라 ‘주도추’라는 사람의 고사를 인용한다. 주도추가 짚신을 얼마나 튼실하게 잘 삼았는지, 그가 길가에 짚신을 놓아 두면 지나는 사람들이 쌀을 놓아 값을 치르고 짚신을 가져갔다는 고사를 써서 문 장로가 신고 온 짚신을 드높였다. 또한 중국 진(晉)나라 사람의 예를 인용해, 나막신을 신고 산을 오를 때는 앞쪽의 굽을 떼고, 내려 올 때는 뒷굽을 떼었다는 데 그럴 필요도 없이 짚신을 신고 온갖 꽃 구경 다 했고, 온갖 풀을 다 밟았으니 나도 멀리 갈 때는 그 짚신을 좀 빌리겠다는 내용이다.
신발의 울타리 격인 총이 촘촘하고 얽기도 잘했으며 발에 꼭 맞는 짚신을 찬양한 시다. 이규보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 돋보인다.
12세기 초반 중국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당시 고려 사람들의 신발 신는 모습이 신분에 따라 다르게 소개돼 있다. 스님 중에서도 지덕이 높은 ‘국사(國師)’는 방울 달린 신발을 신는다고 했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집에서 생활하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의 경우에는 간혹 신발을 신은 사람도 있지만 주로 맨발로 돌아다닌다고 서긍은 적었다. 일반 백성들 중에서 ‘진사(進士)’는 가죽신을 신고, 마을의 어른 격인 ‘민장(民長)’은 검은 가죽의 네모난 신발을 신는다고 했다. 신분 계층에 따라 신는 신발의 유형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규보나 이색의 시에 언급된 내용이나 서긍의 ‘고려도경’에 나오는 얘기를 종합해 보면, 고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짚신을 신었으며, 가죽신을 신는 이들도 있었고 산을 오르거나 할 때는 나막신을 신었다. 짚신이나 미투리, 나막신 같은 신발은 서민들이 신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규보나 이색의 경우처럼 고려시대에는 적어도 짚신이나 나막신이 하층민들이 신는 서민의 상징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최고 법전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에 보면, 신발의 종류도 다양하고 그 각각의 신발을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었다. 짚신이나 나막신 이외에, 장화처럼 목이 있는 신발, 목이 없는 검은 가죽신, 앞 부분에 장식을 한 붉은 비단 신발, 목이 없는 검은 가죽신의 바닥에 징을 박은 신발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가죽신을 파는 가게가 따로 있었으며, 가죽신의 바닥인 신창만을 교체해 주는 가게도 있었다. 경국대전이 고려시대의 제도를 본받은 게 많으므로 고려 때의 신발도 조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강도(江都) 시기를 살아간 강화의 고려 사람들도 물론 이규보나 이색처럼 짚신을 신고 산굽이를 돌았으며 나막신을 신고 전등사를 오르내렸을 것은 뻔하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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