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를 맞는 태도, 문명·야만 가르는 기준

이주민 노동 의존하지만 임시 체류자로 관리

‘잠시 머무는 손님’ 아닌 삶터를 함께할 이웃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오디세우스의 귀향 장면은 인상적이다. 십년의 표류 끝에 늙은 걸인으로 변장하여 고향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를 처음 맞아들인 사람은 옛 신하였던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이다. 경비견들이 낯선 노인에게 달려들자 개들을 쫓아내고 노인을 오두막으로 안내한다. 자리를 마련하고 고기와 빵, 포도주를 내놓는다. 에우마이오스가 차린 음식은 소박했지만 “나그네와 걸인은 모두 제우스에게서 오는 법”이라며 노인을 따뜻하게 대접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영화 ‘오디세이’에서 환대를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지만, 호메로스가 공들여 묘사한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은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관통하는 질서는 환대, 곧 크세니아(xenia)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낯선 나그네에게 먼저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 뒤에야 이름과 여행 목적을 물었다. 신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제우스를 ‘제우스 크세니오스’, 곧 나그네와 손님을 보호하고 환대의 규범을 보증하는 신으로 섬겼다. 환대는 우리의 ‘접빈객’ 문화처럼 개인의 호의가 아니라 공동체가 지켜야 할 규범이었다.

크세니아는 사람과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파이아케스인들은 표류한 오디세우스에게 음식과 옷, 귀향할 배를 제공하지만 키클롭스 폴리페모스는 손님을 잡아먹는다.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은 손님의 지위를 악용하여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축내고 주인 행세를 한다. 초라하지만 환대의 법이 살아 있는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과 구혼자들이 점령한 화려한 왕궁이 대비된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기준은 신분과 재산이 아니라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환대에는 물론 손님도 집의 질서를 존중해야할 의무가 있다. 프랑스어 hôte도 접대하는 사람과 접대받는 사람을 함께 가리킨다. 오늘의 주인은 어제 도착한 손님이고, 오늘의 손님은 내일 이곳을 돌볼 주인이 될 수 있다. 먼저 왔다는 사실이 장소를 독점할 권리가 될 수 없으며, 나중에 왔다는 이유로 이방인으로 남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문화사회가 된 한국을 이 오래된 크세니아 코드로 보면 어떨까? 지금 우리에게 온 손님은 공장과 건설현장, 농어촌과 음식점, 물류와 돌봄 현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이다. 외국인 주민과 유학생, 결혼이민자와 귀국동포들도 같은 동네에서 마주한다. 이들은 세금을 내고 소비하며 한국 사회의 생산과 일상을 함께 유지한다. 팝뮤직이 그렇듯 자랑스러운 K-컬처도 도래자들이 전파한 문화로 우리를 갱신해온 결과 아닌가?

2025년 말 국내 체류외국인 수는 278만3천247명으로 내국인 인구의 5.45%에 달하며, 외국인력이 제조업 일자리의 10%를 담당하고 있다. 지방 중소 제조업과 농어촌에서는 외국인노동자 없이 작업장을 유지하기 어려운 곳이 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는 이들의 노동에 의존하지만 제도는 ‘잠시 일하고 돌아갈 사람’으로 관리한다. 고용허가제 노동자는 체류기간과 취업 업종이 제한되고 숙련을 쌓아도 장기체류로 이어지기 어렵다. 산업현장은 이들을 상시 노동력으로 요구하면서 이민제도는 임시 체류자로 묶어두고 있다.

국민의식도 양가적이다. 2024년 국민 다문화수용성 조사에서 성인의 78.3%는 이주민 증가가 인력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보면서도 복지체계 부담, 사회갈등과 범죄 문제의 악화를 우려했다. 출신 국가와 피부색, 언어와 직업에 따라 사람을 서열화하는 경향도 있다. 저출생과 고령화, 지역소멸이 심화되면서 인구 이동은 확대되어 다문화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정책의 중심도 노동력 도입에서 주민의 정착과 사회통합으로 이동해야 한다. 사업장 이동과 권리구제의 실효성을 높이고 장기체류와 가족결합의 길을 넓혀야 한다. 언어교육과 의료, 주거와 자녀교육도 함께 보장해야 한다. 이주노동자와 외국인, 귀국동포는 우리의 일터와 동네를 유지하는 이웃이다. 환대란 문을 잠시 열어주는 일이 아니다. 먼저 온 사람과 나중 온 사람이 삶터를 함께 책임지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