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궁중 진상공예품 구전, 강화 대표 특산품

‘외올닥이 바디’ 지역것만 사용, 화문석과 달라

인천의 한 고미술수집가가 최근 일본에서 구입한 1910년 조선 왕실에서 하사품으로 받은 백석(白席) 돗자리. 조선 왕실 궁중 진상품이었던 교동 등메의 100여 년 전 원형을 살필 수 있다. 2026.9.15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인천의 한 고미술수집가가 최근 일본에서 구입한 1910년 조선 왕실에서 하사품으로 받은 백석(白席) 돗자리. 조선 왕실 궁중 진상품이었던 교동 등메의 100여 년 전 원형을 살필 수 있다. 2026.9.15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1910년 국권 피탈 당시 ‘한국병합 하사품’으로 일본에 반출됐다가 이번에 한국으로 되돌아온 ‘백석(白席) 자리’는 말로만 전해지던 ‘민무늬 교동 등메’ 연구에 결정적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시대 궁중에 진상품으로 올려졌다는 얘기만 전해지는 ‘교동 등메’를 온전한 형태로 볼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인천 강화도에서 만드는 특산 공예품이라고 하면 으레 화문석을 꼽는다. 요즘 화문석을 만드는 장인도 몇 남지 않았는데 이들 화문석 장인조차도 교동 등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궁중 진상품에 오를 정도로 교동을 상징하는 특산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래전에 재료 생산과 제조 과정을 비롯한 등메 만드는 명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교동 등메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자료는 1976년 강화문화원에서 발간한 ‘강화사’라고 할 수 있다. 이 ‘강화사’ 공예품 제조 부분에 보면 강화 화문석을 소개하면서 교동의 꽃무늬 등메장 이산용(李山龍) 선생의 인터뷰를 통해 화문석과 등메가 다르다는 점, 등메 만드는 과정 등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책이 발간된 1976년 시점에서도 이미 교동 등메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해방 이후 등메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교동 등메는 재료부터가 우리가 흔히 화문석이라고 부르는 꽃돗자리와는 달랐다. 꽃돗자리의 재료는 왕골이라고 하는 완초(莞草)이고, 등메는 교동면 읍내리에서 ‘골’을 재료로 만드는 것이라고 1976년 ‘강화사’는 이산용 선생의 이야기를 빌려 설명하고 있다.

만드는 공정에 있어서도, 꽃돗자리는 왕골 껍질을 손으로 엮는 것이고, 등메는 골을 한 올씩 가마니 치듯 바디로 다져서 짜는 것으로 차이가 컸다. 또 색깔 있는 문양을 놓는 것도, 꽃돗자리는 물들인 왕골을 덧겹쳐 엮어서 무늬에 따라 잘라낸 것이고, 등메는 물들인 골로 수놓듯 무늬를 놓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화문석 꽃돗자리의 재료인 왕골(완초)은 사초과(莎草科)에 속한 1년생 풀로, 줄기가 삼각형이며 줄기 꼭지에 꽃이 나와서 잔꽃이 핀다. 등메의 재료인 골은 ‘참골’이라고 하는 데 줄기가 둥글둥글하고 가는 ‘조리풀’이라고 하는 1년생 풀이었다.

이 ‘강화사’가 발간된 1976년까지만 해도 교동의 논두렁에는 참골의 원재료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생골(돌골)이 덤불져 있었다고 한다. 이 돌골을 물이 있는 논에 떠다 옮겨 심은 뒤 1년을 공들여 잘 가꾸어야 등메를 만들 수 있는 ‘부들부들한 참골’로 새로 태어났다.

교동 등메의 특징 중의 하나는 ‘외올닥이 바디’에 있었는데, 이 바디는 교동의 참죽나무로 만들어야지 외지 것은 쓸 수가 없었다고 1976년 ‘강화사’는 덧붙이고 있다. 바디는 베틀이나 가마니틀처럼 등메틀에 딸린 기구이다.

강화 화문석 문화관에는 ‘등메’를 설명하면서 ‘강화도 교동에서 한때 은경밀직법으로 널리 제작되었던 자리를 말하며 오래전에 사라져 구전으로만 전해진다’고 소개하고 있다. 강화 화문석 문화관에는 또 ‘1890년경 제작된 현존하는 최고의 유물’이라면서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고 해진 무늬 등메를 전시하고 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