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장면이다. 한쪽에서는 한국인 근로자 300여 명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대한민국 외교의 두 축인 미국과 북한이 동시에 한국인과 한국의 소송 당사자로 등장한 것이다.
지난해 9월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공장 건설 현장에서 미국 이민당국의 대규모 단속으로 한국인 근로자들이 체포·구금됐다. 한국 근로자들은 불법 체포·구금과 열악한 구금 환경, 통역 없이 서류 서명을 강요받은 점 등을 주장하며 미국 연방정부를 상대로 행정상 손해배상 청구 절차에 들어갔다. 이들은 현대차 현지 공장 건설 인력이었다. 극진히 지원해야 할 동맹국이자 투자국 국민을 미국은 쇠사슬로 엮어 인권을 유린했다.
동맹은 조약이나 군사훈련만으로 유지할 수 없다. 상대국 국민과 기업의 상호 신뢰와 교류, 상호 권리와 존엄의 존중도 중요한 동맹의 토대다. 트럼프 재집권 이후 한미동맹은 관세·투자 분야에 이어 한미군사 훈련 축소와 파병 압박 등 안보분야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일방주의로 흔들리고 있다. 이런 마당에 조지아주에서 모욕당한 한국 근로자들이 미국 정부를 법대에 세울 작정을 했다. 미국의 동맹국민 집단 인권유린과, 피해 한국인들의 대미 집단소송 모두 동맹 역사에 없던 일이다. 한미동맹의 이상 징후다.
한편 서울중앙지법은 16일 2020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북한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에 446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심 판결이지만 북한의 행위에 법적 책임을 지운 첫 국가 기록이다. 북한은 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핵무장국가로 질주하며 한반도 냉전을 주도하고 있다. 대화의 상징이었던 건물은 폭파됐고, 그 잔해에 446억원이라는 손해배상 판결문이 떨어졌다.
이상 징후를 보이는 한미동맹과 북한이 주도하는 남북냉전의 틈바구니에 끼인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미, 대북 소송이다. 법으로 이겨봐야 미국은 예전의 미국이 아니고, 북한은 배상 대신 핵무장 고도화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국가 사이의 가해와 피해는 법과 도덕 대신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결정된다. 약소국의 피해 호소는 정의로울 순 있어도 무력하다. 경제대국 대한민국이다. 경제력에 맞는 국방자산 보유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국가와 국민이 피해를 호소할 일이 없어질 테다.
/윤인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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