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日 기업 현위치에… 1998년 삼성 매입

전력 인프라 필수품 생산·2014년말 가동 중단

인천영상위와 사용 협약, 100편 이상 제작

영화·드라마·광고까지 ‘문화생태계’ 확산 조력

청라 ‘영상문화복합단지’ 추진, 부지 활용 제언

인천 제물포구 화수동에 위치한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시바우라제작소’를 기원으로 한다. 수차례 소유주가 바뀐 뒤 2014년 12월을 끝으로 가동을 멈췄다. /인천영상위원회 제공
인천 제물포구 화수동에 위치한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시바우라제작소’를 기원으로 한다. 수차례 소유주가 바뀐 뒤 2014년 12월을 끝으로 가동을 멈췄다. /인천영상위원회 제공

에스파, 스트레이키즈, 에이티즈.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K팝 아이돌 그룹들이다. 음원 발매와 함께 유튜브에 공개하는 뮤직비디오의 조회수만 하더라도 1억회를 가볍게 돌파하는 아티스트들이다.

이들 세 그룹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진행한 제작업체들은 하나같이 인천 제물포구에 있는 ‘일진전기 인천공장’을 촬영 장소로 택했다. 이 공장은 2014년 12월을 끝으로 10년 넘게 생산을 멈췄다. 수천만 명에 달하는 전 세계 팬들을 몰고 다니는 정상급 K팝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가 촬영된 곳이 가동이 중단된 폐공장이라니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는 콘텐츠도 이 공장을 여럿 거쳐 갔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일진전기 인천공장에서 제작된 뮤직비디오와 영화, 드라마, 광고 영상 등을 다 합치면 100여편이 넘는다. 전력 인프라 구축에 반드시 필요한 변압기와 전선 등이 만들어지던 공장이 이제는 K-콘텐츠 확산을 조력하는 문화 인프라로 자리매김했다.

■ ‘말모이’ ‘환불원정대’ 등 영화·예능 촬영지 급부상

/영화 ‘말모이’ 갈무리
/영화 ‘말모이’ 갈무리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를 통해 영상 콘텐츠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배우 유해진과 윤계상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일제가 ‘내선일체’를 내세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말살하는 강압통치가 행해지던 1942년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모티브로 다뤘다. 인천영상위원회에 따르면 이 영화의 일부 촬영분이 2018년 7월 진행됐다.

일자리를 잃은 주인공 김판수(유해진)는 중학생 아들의 학비를 내기 위해 경성역에서 한 남성의 가방을 훔친다. 가방을 도둑맞은 인물은 조선어학회 대표인 류정환(윤계상)이다. 판수가 원했던 건 돈이었지만, 정환의 가방에는 황해도 사투리를 연구한 원고와 책밖에 없다. 판수는 정환에게 가방을 돌려주고, 이를 계기로 조선어학회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게 된다.

문맹이었던 판수는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며 한글의 중요성을 깨닫고 정환을 비롯한 학회 회원들과 ‘말모이’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표현 그대로 ‘말을 모은다’는 의미의 말모이는 ‘사전’의 순우리말 표현이다.

말모이 활동을 눈치챈 일제 경찰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자 정환과 판수는 중요한 한글 원고를 챙겨 달아나다 추격을 받는다. 정환은 먼저 경찰에 붙잡히고, 판수는 경성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려다 실패하자 역 인근 우체국 창고에 원고가 담긴 가방을 숨긴다. 뒤이어 판수는 경찰들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판수의 희생으로 일제가 확보하지 못한 한글 원고는 해방 뒤 발견돼 우리말 대사전으로 탄생하게 된다.

일진전기 인천공장이 제물포구 화수동 현 부지에 들어선 시기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맞물리는 1930년대다. 일제의 문화 탄압이 이뤄지던 시절에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동시대에 지어진 공장에서 촬영됐다는 점이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MBC ‘놀면 뭐하니’에 등장한 일진전기 인천공장. /MBC 놀면 뭐하니 갈무리
MBC ‘놀면 뭐하니’에 등장한 일진전기 인천공장. /MBC 놀면 뭐하니 갈무리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드라마와 예능 콘텐츠도 일진전기 인천공장에서 제작됐다. 2020년 10월 MBC 예능 프로그램인 ‘놀면 뭐하니’에 등장한 프로젝트 걸그룹 ‘환불원정대’의 음반 뮤직비디오 촬영이 이곳에서 진행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후 K팝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나 앨범 티저 영상을 촬영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떠오르며 콘텐츠 제작업계에서 선호하는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다. 걸그룹 에스파는 콘서트를 앞둔 올해 6월 이곳에서 콘서트 배경 영상을 촬영했다. 스트레이키즈도 신규 음원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찍는 등 유명 아티스트들의 촬영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김병구 인천영상위원회 촬영지원팀장은 “공장 부지 면적이 워낙 넓은 만큼 촬영에 필요한 차량과 각종 장비를 둘 공간이 충분해 콘텐츠 제작 업계에서 선호하고 있다”며 “가동이 중단된 폐공장이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촬영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도 제작자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 1938년 조성 뒤 수차례 주인 바뀐 공장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7만㎡가 넘는 부지에 12개의 건축물로 구성돼 있다. 넓은 공간을 제약 없이 쓸 수 있어 국내 영상 제작사들이 선호하는 K-콘텐츠 촬영 장소로 거듭났다. /인천영상위원회 제공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7만㎡가 넘는 부지에 12개의 건축물로 구성돼 있다. 넓은 공간을 제약 없이 쓸 수 있어 국내 영상 제작사들이 선호하는 K-콘텐츠 촬영 장소로 거듭났다. /인천영상위원회 제공

일진전기 인천공장이 현재 위치에 들어선 건 1938년이다. 일제가 화수동 연안을 매립해 대규모 공업단지로 조성한 부지를 시바우라제작소가 사들여 공장을 세웠다. 시바우라제작소는 이후 ‘도쿄시바우라제작소’로 이름을 바꾸는데,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기업인 도시바의 전신이 바로 이 회사다.

공장이 본격적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춘 건 1945년 해방 이후다. 대한민국 정부가 1949년 ‘조선도시바’라는 이름으로 공장을 운영하다가 1956년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이천전기공업으로 소유권을 넘겼다. 현재 7만4천147㎡ 면적에 총 12개 건축물로 구성된 일진전기 인천공장의 모습이 갖춰진 것도 이 시기로 추정된다.

공장에서는 변압기와 전기모터, 전선 등 전기·전자 관련 제품과 부품이 주로 생산됐다. 그러다가 1993년 삼성그룹이 공장을 사들였고, 1998년 일진전기로 다시 소유권이 넘어가 ‘일진전기 인천공장’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2014년 12월 가동이 중단된다. 일진전기가 충남 홍성으로 생산 공장을 옮기면서다. 이후 공장 부지를 상업지구 겸 공원으로 개발하는 계획이 추진됐으나, 인천시와 동구(현 제물포구), 일진전기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면서 잠정 중단된 상태다.

방치될 위기에 놓였던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2018년부터 콘텐츠 촬영 장소로 활용됐다. 인천영상위원회가 이곳을 영상 미디어 촬영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일진전기 측과 협약을 맺으면서 쓰임새를 찾게 된 것이다.

■ 인천 산업단지 공장, ‘K-콘텐츠’ 촬영지로 각광

/에이티즈 뮤직비디오 갈무리
/에이티즈 뮤직비디오 갈무리

일진전기 인천공장뿐 아니라 인천의 주요 산업단지 내 공장도 영화와 드라마 등 주요 콘텐츠 촬영지로 활용되고 있다. 올해 2월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레이디 두아’는 인천 미추홀구 인천기계산업단지에 위치한 부국철강공업 공장에서 촬영됐다.

남동구 남동국가산업단지, 계양구 서운산업단지, 서해구 서부산업단지 등도 콘텐츠 제작업계가 자주 찾는 단골 촬영 장소다. 스릴러나 액션 장르 콘텐츠를 촬영하려면 제법 큰 규모를 갖춘 공장이 최적의 장소로 꼽히는데, 1970년대부터 제조업 공장이 들어선 인천의 주요 산업단지 내 공장을 콘텐츠 업계가 주목하는 이유다.

일진전기 인천공장과 달리 정상 운영되고 있는 공장들도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촬영 장소로 탈바꿈하는 사례가 많다. 인천 서부산업단지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지난해에도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을 촬영할 수 있느냐는 문의가 와서 평일 저녁 촬영에 협조했고, 뮤직비디오 촬영을 진행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인천의 공장들이 촬영 장소로 주목받는 이유에 대해 “제작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과 촬영 장비 규모를 고려하면 서울에서 가까운 외곽지역을 많이들 선호하는데, 인천이 우선순위로 꼽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특히 해외 스케줄이 많은 가수들의 경우에는 인천공항으로 가는 동선과 연계하기 수월하다는 이점도 있다”고 했다.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챗GPT AI이미지 재가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챗GPT AI이미지 재가공

■ 산업유산·문화예술 공존 잠재력 품은 인천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2018년부터 영화·드라마·예능·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유형의 영상 콘텐츠를 촬영하는 문화 인프라로 거듭났다. /인천영상위원회 제공
일진전기 인천공장은 2018년부터 영화·드라마·예능·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유형의 영상 콘텐츠를 촬영하는 문화 인프라로 거듭났다. /인천영상위원회 제공

일진전기 인천공장이 있는 인천 제물포구는 개항장, 차이나타운, 북성포구 등 오래전부터 영상 콘텐츠 촬영지로 인기를 끌었다. 개항기 이후 들어선 근대 양식 건축물이 많아 콘텐츠 제작업체들이 자주 찾는 공간이다.

이를 고려해 일진전기 인천공장 부지를 영상 콘텐츠 제작 거점으로 조성해 산업유산을 문화예술 인프라로 활용하자는 제언도 나온다. 인천시는 청라국제도시에 영상문화복합단지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데, 구도심과 신도시 간 균형발전 차원에서 일진전기 인천공장 부지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시각이다.

/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