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야기 20:동일방직>
인천시 동구 만석동에 자리잡고 있는 동일방직(주)는 한 기업으로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일제시대 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숱한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한 것이다.
동일방직은 면포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후 청인과 일본상인이 독점하던 광목시장을 민족자본으로 흡수했고, 국내 노동운동의 한 획을 그은 사태를 맞았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또 인천사람이 설립해 지금 까지 일궈 온 유일한 업체라는 점과 여성들에게 마땅한 직업이 별로 없었던 시절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동일방직은 1934년 만석동 해변 매립지에 들어선 후 65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주변엔 옛 자취가 더러 남아 있다.
이 일대엔 해방과 분단, 그리고 60~70년대를 거치며 인천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긴 사람들이 정착, 애환을 보듬고 살아갔다.
지금도 동일방직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판자집과 선술집, 구멍가게 등은 어려웠던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동일방직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풍경인 셈.
동일방직 인천공장 안으로 들어가면 옛 정취를 한결 더 느낄 수 있다. 1950년에 지은 기숙사와 작업장, 의무실 덕분에 얼마 전엔 「육남매」라는 드라마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왕초」도 이 곳에서 촬영했다.
그런가 하면 유니폼을 입은 여성근로자들을 보면 군사독재 시절 국내 노동운동에 전환점을 마련했던 「오물세례 사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렇듯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동일방직은 1934년 설립된 동양방적을 모태로 한다.
「인천 한세기」의 저자 愼兌範씨(85)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1930년대 만주사변에 성공한 일본은 중국시장을 목표로 제반 공업의 확장을 서둘렀고 노동집약적인 방직업이 대두됐다.
이에 따라 1934년 만석동 해변 매립지에 동양방적주식회사 인천공장이 건립됐다. 이후 국가에서 운영하다 1955년 순수민간 형태로 바뀜과 동시에 문패를 동일방직으로 바꿔 달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동일방직을 비롯 7개 계열사를 이끌고 있는 徐敏錫회장(57)은 동양방적 창립 직원이기도 한 부친 故 徐廷翼씨의 말을 빌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1955년 동양방직 발족과 함께 1천5백여명에 이르는 여자 종업원을 공개 채용했는 데, 당시 여성들이 마땅히 취업할 직장이 없어서인 지 재치있고 똑똑한 처녀들이 앞다퉈 지원했습니다.
당시 보수가 쌀 두가마니 수준이어서 종업원들의 자부심도 대단했죠.
항간엔 동양방직에 다녔던 사람을 동대(東大)출신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 무렵 인천지역 여성근로자라야 정미소의 선미여공 3~4백명, 성냥공장에 다니는 포장여공이 20~30명 등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동일방직은 현 徐회장을 비롯, 徐회장의 부친과 조부인 徐丙薰·徐廷彬 등 4대가 가업으로 이어 왔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徐廷翼씨 일가는 인천지역 경제의 산증인이자 개척자였던 셈이다. 특히 徐廷彬씨는 객주조합의 전신인 신상회사 사장으로 인천 경제계에서 많은 활약을 했을 뿐아니라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해 재령학교(1905~1907)를 세우기도 했다.
6.25동란으로 피난 내려와 만석동에서 40년째 살고 있다는 張태성씨(71)는 『과거 만석동엔 대성목재와 동일방직 등 굵직굵직한 회사들이 많아 인천에서 제일 북적대고 활기가 넘쳤다』며 『주민수도 다른 곳보다 많아 동을 나눠야 한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고 말한다.
20년 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李鍾根 인천공장 사무장은 『입사 무렵만 해도 동일방직 주변은 출퇴근 때 몰려나오는 직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며 『동일방직에 다닌다고 하면 웬만한 식당이나 술집에서 외상을 줄 만큼 동일방직에 대한 인식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순탄한 길을 걷던 동일방직에 1978년 온 나라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조대의원 선거일에 회사측에 매수된 남자노동자들이 여성종업원에게 오물세례를 퍼붓고 그들을 집단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
당시 경찰은 이를 방치했고 회사측은 노조원 1백24명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해고 노동자들은 당시 각종 시위, 농성 등을 통해 회사의 만행을 규탄했으며 각계 각층의 민주세력들이 이들을 지원했다. 일각에선 이를 본격적인 국내 여성노동운동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90년대 들어 섬유산업의 쇠퇴와 함께 동일방직의 규모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1970년만 해도 1천3백여명이었던 종업원은 현재 4백50명으로 감소했으며 실을 짜는 추도 97년도 6만추에서 지난해엔 4만추로 줄었다. 제2공장이었던 4만여평의 안양공장도 매각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딛고 동일방직은 이제 21세기인천이야기>
[激動한세기…인천이야기··20]동일방직
입력 1999-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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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7-07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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