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적이 없어 헤어진 것이 아니오.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모두를 위한 시간' 조각 앞에서
난 기어이 오고야 말 세상의
기적의 순간을 기다릴 것이오."
파리에는 여섯 개의 큰 기차역이 있다. 북역(가르 드 노르), 동역(가르 드 레스트), 리용 역(가르 드 리용), 오스테르리츠 역(가르 도스테르리츠), 몽파르나스 역(가르 몽파르나스), 생 라자르 역(가르 생 라자르)이 그것들이다. 행선지에 따라 기차역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여행을 하려면 출발역이 어디인지 잘 알아두어야 한다.
내가 유학시절 자주 기차를 탔던 '생 라자르 역'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이나 도버 해협 지방으로 가는 출발점이 되는 역이다. 파리에 방 하나를 얻어 살면서 노르망디의 수도인 루앙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사흘 정도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야만 했다. 훗날 나는 그 생 라자르 역의 추억에 얽힌 시 두 편을 썼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가 헤어진 건 생 라자르 역 광장,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조각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서였지. 여느 때처럼 "다음 주 토요일 정오에 여기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약속을 하고 무심히 헤어졌었지. 하지만 그게 영원히 다시 못 볼 삼도내의 작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운명의 시침(時針)이 너무 빨리 가는 시계를 찬 그대와 우연의 시침이 너무 늦게 가는 시계를 찬 내가 물의 도시 도빌 행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한 건 몇 억 광년의 세월 속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기적 중의 기적이었지.
어느 낯선 거리 건널목에선가, 발을 헛디디는 아주 사소한 실수로 오토바이에 치여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는 어처구니없는 우발사라도 그대에게 일어났던 것일까. 그날 이래 우리의 시계판은 납땜질 된 채 운행을 멈춰 버리고 말았지. 되돌아올 길 없는 망각의 나락에 떨어진 그대는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 다시 올 수 없었고, 그것으로 우린 영영 엇갈린 행로를 밟을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심술궂은 시간의 신(神)의 질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린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고, 다만 눈동자와 머리 빛깔과 목소리의 억양을 아는 것으로 이미 다정한 연인이 되어 버렸지.
비록 지금 그대의 이름을 알지 못해 부를 수 없다 해도, 그대의 눈빛과 웃음소리와 머리칼 향기를 기억하는 한, 그대는 내 안에 생생히 살아 있고, 그대 안에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오.

우린 '안녕히'란 차디찬 작별의 말을 입으로 말한 적이 없으므로 결코 헤어진 것이 아니오.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지만 누구도 틀린 것이 아닌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서 난 기어이 오고야 말 이 세상의 기적의 순간을 한사코 기다릴 것이오." -<투병통신(投甁通信) 2 -생 라자르 역 광장> 전문
물론 이 작품은 말할 것도 없이 시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1인칭 화자의 솔직한 개인적 고백처럼 보이지만, 시인 자신의 체험을 액면 그대로 고스란히 진술한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된다. 동시에 시인의 경험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공상적이고 허구적인 것으로만 읽어서도 안된다. 시는 진실한 삶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면서 상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게 있어 생 라자르 역은 시를 두 편이나 쓰게 만든 의미 있는 추억의 장소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생 라자르 역을 어떤 목적지로 가기 위해 이용하는 물리적 장소로서 뿐만 아니라, 심미적 예술적 장소로 받아들인 기억작용 때문일 것이다. 인상파 회화의 거장 클로드 모네의 그림 '생 라자르 역'의 현장이었고,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조각 '모두를 위한 시간'이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곳, 그 기차역은 번잡한 풍경 그 이상의 채색 판화같은 아름다운 영상으로 내 뇌리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몇 해 전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서 연 오르세 미술관 한국전시회를 보러 갔을 때, 무엇보다 나의 눈길을 오래 붙들어 맨 것 또한 모네의 '생 라자르 역'이었다. 그 그림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서가 아니라, 파리에서 루앙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수없이 드나들었던 생 라자르 역을 아련히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모네의 '생 라자르 역'은 산업혁명의 상징인 기차를 소재로 택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정경을 이차원적 평면성으로 뿌옇게 펼쳐지게 한 기법 면에서 인상주의의 새 차원을 열어 보여준 획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증기기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구름과 빛의 장난에 매료된 모네에게 있어 생 라자르 역은 수련이 피어 있는 지베르니의 자연풍경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시정(詩情)을 안겨주는 장소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대합실의 카페에 앉아 쓰디 쓴 에스프레소를 홀짝거리며 바라보던 생 라자르 역 구내의 풍경이 지금 내 눈 앞에 새삼 아른거린다.
/이가림 인하대 명예교수·시인투병통신(投甁通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