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어선 뚫리면 미군 철수할까 두려움 커
총 잘 못쏘면서 기적 바라며 앞장서 지켜
독립 70년만에 피·땀으로 ‘눈부신 성장’
우리 목표는 ‘평화’ 주변국 모두와 협력을
비상사태 대비 군사력 강화·군 신뢰 필요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중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950년 8월, 다부동에서 백선엽 장군이 후퇴하는 부대원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우리가 밀리면 저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중)
6·25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백선엽 장군이 창간 70년을 맞은 경인일보사를 방문했다.
올해 95세의 노 장군은 지팡이를 의지했지만 목소리 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혈기가 넘쳤다.
백선엽 장군은 직접 쓴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이라는 책을 전달하면서 70여 년의 세월을 회고했다.
-벌써 광복 70주년이 됐다. 70여년 전, 나라를 찾은 기쁨도 잠시, 우리는 동족상잔의 잔혹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를 회고해 달라.
“1945년 독립은 목숨 바쳐 일제에 항거한 선조들의 피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소중한 희생의 결과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반도 중심의 38선을 두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들어왔다. 우리 남쪽은 미군이 주둔, 미 군정이 실시 됐고, 북쪽은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점령한 상태였다. 전쟁의 서막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남·북의 군사력은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이북에는 전차 300대, 대포 1천200문, 폭격기 200대 등 소련의 군사원조로 20만 대군을 양성했지만 이남에는 9만명의 국방경비대와 대포 100여 문이 전부였다.
1950년 6월 25일, 치밀하게 준비된 김일성의 기습남침에 우리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3년을 싸웠다. 문제는 중공군이었다. 대규모로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의 남하에 우리 강산은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뤘다. 유엔감시하에 이뤄진 선거로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2년 만에 일어난 전쟁에 온 국민의 삶은 피폐해 졌다. 아니, 하루를 산다는 것조차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 죽어갔다.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는지를 말하자면 소나무 껍질이 하나도 없었다. 먹거리가 없어 주민들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물에 담가 뒀다가 식량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정말 빈곤했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동족상잔의 비극이 끝난 뒤 우리 국민들은 정말 온몸을 바쳐 열심히 일했다.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시대는 이들의 피와 땀의 결과물이다. 전쟁 당시 우리는 16개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다른 나라를 돕는다. 독립 쟁취 70년 만에 이룬 눈부신 성장이다.”
-전투마다 죽을 고비를 넘겼을 텐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가 있다면….
“1950년 8월, 대구방어의 핵심인 다부동 전투를 잊을 수 없다. 한적한 촌락인 다부동은 민가가 30호도 채 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다부동은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로 방어선이 뚫리면 대구 전체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탓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구를 내주면 제주로 향해야 하는데, ‘결국 미군이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컸던 것 같다. 반드시 다부동을 지켜야 하는 이유였다.
다부동으로 향하는 길, 운전병이 포탄 파편에 맞는 바람에 위생병에게 보내고 전장까지 뛰고 또 뛰어가며 기도를 했다. ‘이번의 위기에서 구해주신다면 앞으로 열심히 믿겠습니다’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전투에서는 선봉에서 적들을 맞아 싸웠다. 솔직히 말해 총도 잘 쏘지 못하는 장군이지만 ‘기적’을 바랐다. 누군가 “사단장님 이제 그만 나오세요.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라며 나 대신 뛰어 나가기 전까지 사지(死地)를 누볐던 전장이 바로 다부동이다.
지휘관이 선봉에 선 것은 바보짓이었다. 전쟁에서는 이등병 소총수부터 참모총장까지 자기 자리가 있다. 이중 사단장은 전략의 단위에 있는 사람이다. 더 넓은 측면에서 전장을 다뤄야 할 장군이 총을 뽑아 들고 돌격을 감행했으니….
다부동의 승리 후 나는 수원을 통해 평양으로, 압록강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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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95세의 노장 백선엽 장군이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6·25전쟁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말을 이어가고 있다. /김종택기자 |
“지금의 대한민국은 전쟁 당시 군적(軍籍)도 없이 사라진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생 정도의 청년들이 기초적인 군사훈련만 받고 전장에 투입, 구국의 정신으로 적과 맞서 싸웠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 나온 내용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아주 짧은 훈련을 받은 뒤 바로 전선으로 올라갔다.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보면서 무척이나 겁이 났을 것이다. 분대장의 지휘를 받아 참호로 들어가 공격을 준비하다가 소변을 보러 분대장이 참호 밖으로 나가면 어찌할 줄을 몰라서 따라 나가던 어린 병사들이었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1128일의 기억 중)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다부동 구국전투사 중 이우근(李佑根) 학도병의 부치지 못한 편지 일부)
-정말 힘들게 지켜온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동북아 5국 사이에서 또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정부는 물론 국민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하나.
“동아시아 극동에는 한반도가 중심에 있다. 동쪽에는 일본이, 북쪽은 연해주와 시베리아의 러시아, 서쪽에는 거대한 인구와 경제력을 갖춘 중국이, 우리의 우방국인 미국은 이들의 한 가운데에 있으며 대한민국은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
누구와 어떻게 합종연횡(合從連衡)을 할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평화 아닌가. 오로지 평화를 위해 이들과 협력해야 한다.
이와 함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강력한 군사력도 갖춰야 한다. 우리는 60만 대군을 50년 이상 유지하고 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국민들의 노력에 의해 이뤄낸 결과다. 동시에 군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줘야 대한민국 국군이 선진강군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 출생
▲ 1940년 평양사범학교 졸업
▲ 1942년 봉천군관학교 졸업
▲ 1952년 최연소 육군 참모총장
▲ 1960~1965년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
▲ 1969년 제19대 교통부 장관
▲ 1971~1980년 충주, 호남 비료와 한국종합화학 사장
▲ 2000년 자유수호의 상
▲ 2003년 한미우호상
▲ 2006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
▲ 2010년~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 2013년 주한미8군 명예사령관
/대담 = 박승용 사회부장·정리 = 강영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