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4년 강제징집 日軍 탈출 독립군 투신
광복후 백범선생과 정부수립에 ‘한평생’
광복군 국내진격 불발 통일안돼 ‘아쉬움’
과거 기억·순국선열 존경이 ‘애국의 시작’
요즘 日행태 ‘착잡’ 일제때보다 험한시대
강대국에 민족성 자신감 갖고 상대하길
김 동지!
힘이 제일 센때가 20대적이야.
20대에 독립운동을 못하는 자는 사내가 아니고, 20대에 나라에 목숨을 내놓지 못하는 자는 독립투사가 아니야
-김우전 저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 중
任命狀(임명장)
右 同志를 本 主席 辦公室 機要秘書로 任命함.(위 동지를 본 주석 판공실 기요비서로 임명함)
大韓民國臨時政府 主席 金九(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大韓民國 二十七年 三月(대한민국 27년 3월)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찼던 시계를 보이며, “윤 의사가 거사를 하기 전 내 시계와 바꾸자고 했었는데, 나는 이것을 조선으로 들어가는 날 윤 의사의 아들을 찾아서 돌려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김 동지! 힘이 제일 센때가 20대적이야. 20대에 독립운동을 못하는 자는 사내가 아니고, 20대에 나라에 목숨을 내놓지 못하는 자는 독립투사가 아니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으며 나의 젊은 투지는 또 한번 불탔다.(김우전 저 ‘김구선생의 삶을 따라서’ 中)
1944년 8월 강제 징집된 일본군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독립군에 투신한 김우전 선생이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백범 선생에게 직접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와의 연계뿐 아니라 국내 조직 또는 개인간 연결을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였다.
생명을 담보로 활동해야 하는 임무이니 만큼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는 백범 선생과 당시 주석판공실장(비서실장) 민필호 선생 등 3명만이 자리했다.

“지금 중국 중경에 있는 독립운동가는 모두 임시정부에 집결되었고 의열단 계열연안과도 장건상 선생이 왕래하여 임시정부와 연합해서 항일투쟁을 하고 있고, 미주동포와도 완전히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으며 조국 본토에서도 김 동지와 같이 많은 애국청년이 임시정부를 찾아왔지만 막상 조국 본토에서는 민족통일전선구축이 미흡한 상태이므로 하루 속히 국내 지도자와 연대하는 것이 임시정부의 남은 과제니 이때 김동지가 국내에 잠입하여 그 임무를 수행해 주기를 바란다.”
독립군에 투신한지 1년만인 20세 약관의 나이, 김우전 선생의 어깨엔 조국 광복이라는 대업이 짊어지어 졌다. 김 선생은 곧바로 조국으로 돌아갈 준비에 돌입했다. 임시정부의 도움을 받아 조국내 독립운동가와 애국청년들의 명단을 확보했고, 이들과 연계할수 있는 각각의 방법과 일정을 짰다.
하지만 김 선생은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4개월여만의 준비기간을 마치고 조국으로 출발하는 날짜를 잡아 놓고 기다리던중 일본군의 패망과 함께 꿈에도 그리던 광복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백범 선생을 모시고 조국으로 돌아온 김 선생은 정부수립과 조국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몸바쳤다.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일제치하 암울했던 시절, 조국광복을 위해 강제징집된 일본군에서 탈영해 사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벌여온 김우전 선생을 만났다. 올해 93세의 광복군은 ‘또랑또랑’ 총기어린 눈동자뿐 아니라 우렁차고 단호한 목소리가 여느 젊은이들 못지 않았다.
김 선생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남다른 아쉬움을 토로하며, 그 시절을 회고했다. 또 일본을 비롯 중국, 미국, 러시아 등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통해 현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역할과 지침, 애국심에 대해 전했다.
-생존해 있는 몇 안되는 광복군으로서, 광복 7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를 텐데.
“쓸쓸하다. 매번 광복절이 되면 쓸쓸하다.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중국에 있는 OSS(CIA의 전신)본부 장교식당에 있었다. 이날 원폭 투하 소식이 전해지고 미군들은 난리였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지만 김구 선생을 비롯해 우리들은 허탈했다. 광복군이 국내로 진격을 못해서였다. 그 이후로 김구 선생이 남북이 분열되는 걸 막기 위해 남북협상에 나설 때 함께였다. 남북협상을 이뤄내지 못한 것도 허탈했다. 나는 두 가지를 못했다. 광복군이 국내로 진격하는 걸 못 봤고, 통일 운동을 완성하지 못했다. 광복절이 되면 그 두 가지 다하지 못한 임무가 생각난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으로 허탈한 마음이 더 크다.”
-광복군 입대 후 활동 당시를 이야기 해달라.
“당시 중국 각지에 한국광복군간부 훈련반이란 게 있었다. 거기서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간 훈련을 받았다. 같이 훈련을 받았던 사람 중에 장준하도 있었다. 훈련이 끝난 뒤 전방으로 가게됐다. 거기서 만난 OSS장교가 미군이 상륙작전을 할 때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귀띔해 줬다. 그래서 국내에 있는 독립군이랑 연락을 해서 지원할 수 있다고 전했다. 첩보를 맡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글을 숫자 암호화 하는 작업을 했다. 일본군과 일본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선전물도 제작해 배포했다. 그렇게 일하고 있던 중 김구 선생이 불러 독립군 좌우 합작이 완료돼 곧 국내로 진격할 건데, 이 사실을 국내에 알려야 한다고 임무를 주셨다. 45년 4월 6일이다. 광복 후에는 국내로 들어가서는 경교장에서 비서로 김구 선생을 모셨다. 48년 남북협상을 위해 김구 선생이 평양에 가셨을 때 옆에서 수행했다.”
-정말 힘들게 지킨 대한민국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국민들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광복군 중에 한성수라는 사람이 있다. 나와 같이 한국광복군간부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 졸업생 중 5명이 일본군 안에 침투하는 임무를 받았는데 한성수는 정체를 들켜 체포됐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한성수는 일본말을 한 마디도 안했다. 일본어가 유창했지만, 한국말로만 말했다.
독립운동했다고해서 무조건 사형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성수는 재판장에서 일본을 모욕했다고 사형을 받았다. “나는 조국에 충성한 것 같지만 사실은 조선에 충성한거다. 나는 조선인이니까 조선에 충성할거다”며 끝내 한국말로 말했다. 2001년부터 한성수 재판 기록을 찾으려고 노력해서 2005년 동경지방검찰청에서 판결문을 입수했다. 판결문을 보니 한성수에게 사형을 언도한 날이 5월 10일이었고, 사형이 집행된 날은 5월13일이다. 3일 만에 사형한거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이름없이 사라져 간 무명용사들이 이룩한 나라다. 목숨과 맞바꾸며 소중히 지킨 나라다. 지난날을 기억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역사에 누가 되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또 요즘 일본의 행태를 보면 항일 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착잡하다. 일본과 중국 등 강대국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민족성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임했으면 좋겠다.”
-매년 광복절 즈음이면 애국심이 대두된다. 애국심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독립운동을 할 당시 광복군들을 보면 “이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를 했구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국심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먼저 애국을 위해 목숨을 달리하신 순국선열들을 존경하는 것이 애국심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특히 한국은 열강 틈에 끼어 고생하고 있다. 중국·미국·러시아·일본 등의 틈바구니에서 상당히 어렵다. 일제시대보다 지금이 더 험한 시대라고 본다. 선진국에 돌입했다고 하지만 갈 길이 멀고, 이런 시기에 젊은이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통일’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이 돼서 국력을 강화해 이북을 경제적으로 발전시키고 안보 문제도 해결해야 길이 생긴다고 본다. 통일을 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달라. 이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전부다.”

▲ 1922년 2월 12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출생
▲ 1935년 고덕보통학교 졸업
▲ 1937년 교토 리쓰메이칸대학 법학과 입학
▲ 1944년 강제 징집
▲ 1944년 김구 주석 기요비서, OSS본부 파견근무
▲ 1945년 김구 주석 비서
▲ 1992~1999년 광복회 부회장
▲ 1999년 제10대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 2003년 제15대 광복회 회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고문
/글 = 김대현기자 kimdh@kyeongin.com · 사진 =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