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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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5)어린이 눈높이 음악]인물·동물 악기로 묘사 '피터와 늑대' 지면기사
러 동화 바탕 프로코피예프 작품'청소년을 위한 관현악'과 쌍벽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1891~1953)는 러시아 동화를 바탕으로 직접 쓴 이야기와 어우러지는 음악 '피터와 늑대, Op 67'을 1936년에 완성했다. "어느 날 아침, 호기심 많은 소년 피터는 문을 열고 집 앞의 넓고 푸른 목장으로 나갔습니다. 피터가 처음 만난 친구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 지저귀는 작은 새로, 즐겁게 노래하고 있습니다…."내레이터의 해설로 시작하는 '피터와 늑대'는 회색 늑대를 사로잡은 용감한 소년 피터의 이야기를 줄거리로 한다. 프로코피예프는 간결한 문장과 음악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작곡자는 음악을 듣는 어린이들을 위해 등장인물과 동물을 성격에 맞춰 각각의 악기로 묘사했다. 주인공 피터는 현악합주의 울림으로 표현되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화사한 음색의 플루트, 늑대에 잡아먹히는 오리는 근심 어린 모습을 연상시키는 오보에, 고양이는 스타카토(음을 짧게 끊어서 연주하는 기법)로 이어지는 클라리넷, 할아버지는 바순, 늑대는 호른을 중심으로 한 당당한 금관 악기의 울림, 사냥꾼은 행진곡과 함께 나타나며, 총소리는 팀파니에 의해 표현됐다.순수 음악에 흥미를 잃기 쉬운 어린이들을 클래식으로 이끄는 마력을 지닌 '피터와 늑대'는 브리튼(1913~1976)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과 함께 가장 뛰어난 어린이를 위한 음악으로 평가받는다.영국 작곡가 브리튼의 '청소년을 위한 관현악 입문, Op 34'는 1945년 영국 정부가 만든 교육영화 '관현악단의 악기'의 음악으로 작곡됐다. 바로크 시기 영국을 대표했던 작곡가 헨리 퍼셀의 곡에서 모티브로 삼은 이 작품의 부제는 '퍼셀 주제에 의한 변주와 푸가'이다. 주제부 연주에 이어 13곡의 변주곡에서 각각의 악기를 소개하며, 푸가에서 모든 악기가 차례로 등장해 다 함께 연주하며 마무리된다. 악기를 설명하는 해설을 붙여 연주할 수 있도록 했다. 두 작품이 함께 수록된 음반들이 많은데, 특히 동화를 구연하는 '피터와 늑대'의 경우 화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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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4)브람스-차이콥스키]독일음악 3B vs 발레의 최고봉 지면기사
'브' 모델로 삼고 극복 노력 '차'러시아 교향·협주곡에도 큰 획 브람스(1833~1897)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3B'로 꼽힌다. 세 작곡가는 자신들이 자부했던 '위대한 독일 정신'을 담은 최고의 작품들을 선보였다.극장 관현악단의 더블베이스 주자였던 아버지에게서 기초를 배운 브람스는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드러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10대 초·중반부터 술집과 식당, 사교장 등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브람스는 17세 때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이를 알게 되었다. 3년 후 둘은 첫 연주 여행을 떠났다. 이때 브람스는 레메니이의 친구인, 헝가리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 친교를 맺었다. 헝가리 음악과 집시음악의 감수성을 익힌 브람스는 1869년 스물한 개의 '헝가리 춤곡'을 완성했다. 1868년 어머니의 죽음 앞에 바친 대작 '독일 레퀴엠'을 잇는 걸작이 탄생한 것이다. '헝가리 춤곡'은 두 사람이 한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도록 작곡됐다. 그중 브람스가 1번과 3번, 10번을 관현악으로 편곡했고, 드보르자크를 비롯해 후대 작곡가들이 나머지 곡에도 오케스트라 버전을 더했다. 에너지 넘치는 헝가리의 민속 선율이 브람스에 의해 불후의 명작으로 다시 태어났다. 브람스는 1876년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으로 불리는 '교향곡 1번'을 작곡했으며 이후 걸작들을 줄줄이 발표했다.차이콥스키(1840~1893)는 어려서부터 음악과 문학에서 재능을 보였다.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다녔으며, 졸업 후 법무성에 근무한 차이콥스키는 1862년 공무원 생활을 접고 음악에 전념했다. 브람스 앞에는 바흐와 베토벤을 잇는 독일 음악의 전통이 있었지만, 차이콥스키 앞에는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만이 펼쳐져 있었다.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음악이 새롭게 부상하던 때,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와 서유럽의 음악을 유기적으로 결합했다. 차이콥스키를 '러시아 5인조'로 대표되는 국민악파로 분류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5인조'가 외면했던 협주곡들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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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3)베르디 vs 바그너]19세기 오페라의 쌍두마차 지면기사
伊 노래-獨 드라마에 초점 맞춰두 작곡가 작품세계 확연히 달라베르디(1813~1901)는 이탈리아를, 바그너(1813~1883)는 독일을 각각 대표하는 오페라 작곡가이다. 19세기 오페라의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탄생 연도와 활동 시기가 일치한다. 그러나 개인적 성격과 취향, 작품세계는 확연히 구별된다.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는 노래를 중시한다. 그래서 가수 중심의 오페라로 불린다. 드라마는 노래를 묶어내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진다. 반면, 문학과 연극의 전통이 강한 독일의 오페라는 드라마의 완성도에 비중을 둔다. 노래만큼이나 기악 부분을 중시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두 작곡가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난다. 바그너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으며, 혁명가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미래의 예술작품'(1849년)을 통해 "분리된 예술 장르를 하나의 종합 예술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혁명 예술"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이론을 기반으로 '음악극(Musikdrama)'을 창안했다. 노래가 지배하고 대본은 주로 음악을 위한 윤곽의 역할만 하는 전통적 오페라와 달리 '음악'과 '극'의 일치와 조화를 꾀한 거였다. '음악극'의 면모는 '트리스탄과 이졸데'(1859년)와 '니벨룽의 반지' 4부작(1854~1874년), '파르지팔'(1882년)에서 여실히 드러냈다.베르디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바그너처럼 멀리 보고 전진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했다. 베르디의 작품을 관통하는 '휴머니즘'은 더욱 깊어졌으며, 극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수년 전 한 해외 매체는 세계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공연되는 오페라의 순위를 발표했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1853년)가 1위였으며, 비제의 '카르멘'과 푸치니의 '라보엠' 등이 뒤를 이었다. '리골레토'(1851년)와 '아이다'(1871년) 등 베르디의 또 다른 작품도 10위권 안에 들었다. 멜로디의 아름다움과 호소력 짙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더 자주 공연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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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2)원전(原典)음악]옛 음악 원형 재현 '순수성 되살리기' 지면기사
바로크 등 '그 시대 악기'로 연주약동하는 템포·사운드 신선 매력"원전음악이 도대체 뭐야?""옛날 악기로 연주하는 거 있잖아. 그것도 다 유행이어서 곳 사라질 거래."2000년대 초반 한 연주회장에서 들었던 옆 청중 일행의 대화다. 옛날 악기로 연주한다는 말은 맞았고, 유행이 사라질 거라는 얘기는 틀렸다. 원전(原典)음악은 1980년대 중반 국내에 소개되었다. 2000년 이후 원전음악 연주단체의 내한 연주회가 간헐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완성도가 높은 음반도 수월하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자생 연주단체도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유행으로까진 번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았다.원전음악은 'Authentic Music'을 번역한 것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고전주의 등 옛 음악을 그 시대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정격(正格)음악으로도 불린다. 21세기엔 연주에 관한 연구나 해석에 의미를 부여해 '음악'보다는 '연주(Performance)'로 표기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유럽에서 원전연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스톤 다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등에 의해 시작됐다. 이어서 존 엘리엇 가디너,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프란스 브뤼헨,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안너 빌스마 등의 노력으로 1980년대 이후 대중화에 성공했다.원전연주가들은 악기와 연주법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근대식 악기로 연주하는 옛 음악이 아닌, 옛 음악 본래의 순수성을 되살리자는 거였다.원전연주가들은 관악기는 키와 밸브가 달리지 않은 19세기 초반 이전의 악기를, 현악기는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금속제 현 대신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거트'를 사용했다. 현대 관점으로 봤을 때 연주법은 더 어렵고 음량은 작아졌다. 또한, 이들은 작곡가가 필사한 악보나 필사본에 가장 가까운 원형을 재현해 연구했다. 이를 통해 연주 속도와 강약, 비브라토(음을 떨어주는 기법) 등도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부드러우면서도 순수한 소리, 작위적이지 않은 템포에 많은 사람이 매료됐다.원전연주가들의 원본 악보와 음향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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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1)표절(剽竊)Ⅱ]표절 앞에 '내로남불'이었던 로시니 지면기사
여러 작품 섞어낸 제자에 비아냥본인은 마감일 코앞 베끼기 빈번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 궁정과 교회에 고용돼 창작활동을 했던 음악가들의 작품은 고용주의 소유였다. '작곡가=작품의 주인'이라는 인식은 베토벤 시대에 와서야 자리 잡았다. 18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작곡가들은 산업도시에서 주로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형성된 작곡가의 '자기 작품'이라는 개념은 예술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지적 재산권 개념의 등장이었다.그러나 19~20세기에 와서도 자신 혹은 남의 작품에 대한 도용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영감을 받은 선대 작곡가의 작품 일부분을 자신의 작품에 배치하는 경우는 꾸준히 이어졌다. 이는 특정 영화의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해 해당 작품과 연출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오마주(Hommage)'와 유사성을 띤다. 또한 선배들의 음악이나 민요 등의 특정 주제를 활용한 변주곡과 광시곡들도 탄생했다. 몰래 가져다 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1792~1868)는 '표절'과 관련한 일화를 다수 만들었다. 어느 날 로시니는 제자가 작곡한 오페라 '사막'의 초연을 봤다. 공연 후 로시니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좀 전에 본 오페라 말이야, '사막'이 아니라 '네거리'더군. 알 만한 사람(작곡가)들은 다 만나게 되던 걸." 여러 작곡가의 작품들을 요소요소에 도용한 것을 힐난한 거였다. 이처럼 남의 표절을 지적했던 로시니는 정작 자신의 표절에 대해선 관대했다. 깊은 사색이나 고뇌 끝에 작품을 만들어 내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로시니는 출판업자나 흥행사가 정한 마감 일에 이르러서야 쉽게 작곡했다. 창작력이 떨어지면, 자신이든 남의 작품이든 도용도 빈번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은 오페라 '영국 여왕 엘리사베타'와 '파르미라의 아우레리아노', '너무한 오해'에서도 서곡으로 쓰였다.또한 로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에 하이든의 '현악 4중주 46번'의 일부분을 갖다 썼다. '면도칼'이라는 부제가 붙은 하이든의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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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20)표절(剽竊)Ⅰ]서로 베끼면서 기반 다진 바로크시기 지면기사
당시엔 '고유 창작품' 개념 없어바흐·헨델도 숱하게 편곡·인용"클래식에도 표절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18세기 중반 바로크 시기까지, 특정 작곡가의 '고유한 창작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작곡가들은 궁정과 교회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서 연주될 곡을 만들었다. 이처럼 궁정과 교회에 고용돼 창작활동을 했던 작곡가들의 작품은 행사 후에는 궁정이나 교회의 문서고로 들어갔다. 작품은 작곡가의 소유가 아닌 고용자의 소유였던 거였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곡가들은 수시로 열리는 행사에 맞춰 새 작품을 쓸 때 자신의 이전 작품이나, 다른 이의 작품을 다시 쓰고는 했다. 작곡가끼리의 표절이 공공연하게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요즘의 표절 기준에 대입해서 본다면, 바흐와 헨델은 도덕적 비난은 물론이고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할 정도로 심각했다. 바흐의 작품에 이바지한 작곡가로 비발디를 비롯해 파헬벨, 프레스코발디, 북스테후데 등 많은 이들이 거론된다. 바흐는 또 자신의 이전 작품을 편곡해 숱하게 재활용했다. 바흐의 대작 '마태 수난곡'이나 '요한 수난곡'의 일부는 이전에 발표했던 칸타타들이다.헨델은 '표절의 제왕'이라 할 만큼 남의 것 베끼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3막으로 구성된 오페라 '무지오 스케볼라'의 경우 3막만 헨델의 작품이며, 1막은 아마데이, 2막은 보논치니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헨델은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단 3주 만에 완성했다. 몇몇 전기 작가들이 "경건한 신앙심(하늘에서 받은 영감)으로 헨델이 3주 만에 대작을 완성했다"고 기술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후대의 전문가들은 순수한 창작 시간이 아닌 다른 이들의 작품을 더러 인용하는 과정이었을 것으로 의심했다. 20세기 전반기의 음악학자 앨프리드 아인슈타인은 "헨델은 도둑질을 통해 뭔가를 만든 사람이다. 그를 거치면 돌이 금이 된다"고 평가했다.이처럼 바로크 시기 작곡가들은 서로의 작품을 '표절'하면서 음악사의 기반을 다졌다. 18세기 후반부를 지나 19세기에 진입하면서 소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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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9)리베르탱고]춤이 아닌 감상을 위한 '탱고' 지면기사
'아르헨티나 작곡가' 피아졸라바로크 기법 가미 새음악 내놔아르헨티나의 반도네오니스트이자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는 1974년 '리베르탱고'를 발표했다.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졸라의 작품인 '리베르탱고'는 춤곡인 고전 탱고가 아니라 콘서트장에서 감상하는 '새로운(Nuevo) 탱고'를 상징하는 곡이다. 탱고는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 동네 술집에서 생겨났다.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어린 피아졸라는 아버지가 사준 반도네온으로 탱고를 연주했다. 피아노도 배운 그는 10대 후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의 제자가 되면서 작곡을 익혔다. 피아졸라는 탱고 편곡과 연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한편으로는 교향곡과 소나타 등을 작곡했다. 이 시기의 그는 허름한 카바레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작곡에 매진한 이유가 됐다. 1953년 발표한 교향곡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파비엔 세비츠키 작곡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1년 동안의 파리 유학길에 오른 피아졸라는 파리음악원에서 작곡과 교수 나디아 블랑제를 만났다. 블랑제는 피아졸라가 제출한 작곡 과제에 대해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 이 부분은 버르토크, 여기는 라벨, 어디에도 피아졸라는 없다"고 평가했다. 블랑제는 제자에게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연주했는지 과거를 캐물었다. 피아졸라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카바레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했다"고 밝혔다. 탱고를 연주해 보라는 스승 앞에서 피아졸라는 자작곡 '승리'를 선보였다. 연주 후 블랑제는 이같이 말했다. "아스토르, 이게 바로 너야. 탱고를 절대로 그만 둬서는 안돼."고국으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바로크 시기의 모음곡(Suite) 양식과 작곡 기법을 탱고에 가미했다. 피아졸라의 '새로운 탱고'가 태동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탱고는 춤을 위해 존재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피아졸라의 음악을 외면했다. 그로 인해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하지만 피아졸라는 '고인 물은 썩듯이, 탱고도 진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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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8)말러의 시대]사후에 인정받은 '교향악 절대기준' 지면기사
기존 체계 탈피 시도 외면당해동화 요소·폭력등 골고루 담겨"나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작곡가 말러(1860~1911)가 생전에 남긴 이 말은 완벽하게 실현됐다. 20세기 후반 이후, 클래식을 얘기할 때 말러는 피해갈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전 세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말러 교향곡의 연주 성과에 의해 평가받는다. 말러가 교향악의 절대 기준으로 떠오른 것이다.1889년 초연된 '교향곡 1번'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기존 교향곡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대담한 시도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그의 작품은 사후 50년 가까이 지나서 평가받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는 1960년대, 우리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다.'후기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말러의 음악에는 동화적인 요소, 아름다움과 모성애에 대한 동경, 전쟁과 폭력에 관한 묘사 등이 골고루 담겼다. 세기말의 염세적이며 퇴폐적 풍조와 어우러지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탐미적이고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당대 최고 지휘자 중 한 명이기도 한 그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에 의한 풍부한 음향과 함께 매우 정제된 실내악적 음향으로 작품의 미묘한 분위기를 극대화 시킨다. 말러의 음악에는 다양한 매력적인 요소들이 있으며, 그만큼 열혈팬들도 많다.말러를 테마로 1999년 국내 인터넷 포털에 문을 연 한 카페는 아직도 활발하다. 올해가 20주년이다. SNS의 발달로 오래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가 쇠퇴했지만, 이 카페는 11일 현재 2천200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으며, 하루 평균 100명 정도가 꾸준히 카페를 찾고 있다. 카페는 정기적으로 서울에서 음악 감상회를 여는 등 말러 음악에 대한 매력과 묘미를 공유하고 있다. 월간 '객석'의 편집장을 지낸 박정준씨는 말러의 음악을 '고요의 바다'(달의 표면에 있는 달의 바다)로 지칭했다. 그는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1악장에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는 듯한 악상의 움직임이 보인다고 했다. 말러는 교향곡을 통해 '하나의 우주'를 구현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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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7)'카르멘']비제의 하층민 이야기 '사실주의 오페라 효시' 지면기사
기존 신화·귀족서 탈피 여공 다뤄초연 '혹평' 반면 작곡가들은 '찬사'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선 구노와 마스네의 그랑 오페라,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베르디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유행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바그너의 '음악극(Musik Drama)'이 뿌리를 내리고,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파리 태생으로, 파리음악원을 나온 비제(1838~1875)는 오페라 '진주조개잡이'(1863), '페르트의 아름다운 아가씨'(1867) 등을 발표했다.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이름을 알렸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했다. 빈곤한 생활 속에서 슬럼프에 빠진 비제는 몇 개의 오페라를 작곡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완성에 이르지 못하지만, 당시 작곡한 음악들은 이후에 나오는 오페라 '카르멘'을 비롯해 극 부수음악 '아를르의 여인'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비제는 1873년 '카르멘'의 작곡을 시작했다. 메리메의 동명 소설에 의한 이 작품은 1875년 초에 완성됐으며, 그해 3월 파리의 오페라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됐다. 혹평이 쏟아졌다. "바그너와 베르디의 예술적 성과가 공존하는 시대에 이 같은 저질 이야기를 다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오페라계의 쓰레기" 등의 표현마저 나왔다. 악평 속에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비제는 '카르멘' 초연 3개월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불과 37세의 나이였다.'카르멘' 이전, 오페라는 화려한 신화나 귀족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카르멘'에는 담배공장 여공과 집시, 사병 계급의 군인과 밀매업자 등이 나온다. 스페인 하층민의 어두운 삶을 배경으로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강하게 대비시켰다.동시대 작곡가들은 이 작품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재공연에서는 청중의 평가도 호평으로 돌아섰다. 청중의 격렬한 찬사 속에 '카르멘'은 오페라코미크에서 무려 48회에 이르는 공연을 이어갔다. 1876년 오페라코미크에서 작품을 접한 차이콥스키는 "모든 면에서 걸작인 '카르멘'은 세계에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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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의 재밌는 클래식·(16)플라시도 도밍고]60년간 4천회 공연 '오페라의 제왕' 지면기사
고령 무색 "쉬면 녹슬 것" 의지테너서 바리톤으로 바꿔 '활약' 젊은 시절 반짝 빛나는 스타는 많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사랑을 받는 스타는 많지 않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전성기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후배들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몸이 악기인 성악가의 경우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기량의 퇴조는 빠르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세계 오페라 무대를 누비는 스페인 출신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78)는 독보적이다.2008년 영국의 권위 있는 음악 저널인 'BBC뮤직매거진'의 평론가들은 투표를 통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로 도밍고를 선정했다. 스리 테너의 일원이었으며 오랜 라이벌이었던 루치아노 파바로티뿐만 아니라 엔리코 카루소와 베니아미노 질리, 마리오 델 모나코 등 전설적인 테너들의 평판도 넘어선 것이다. 그즈음 도밍고는 테너로서 고음이 흔들리는 부침을 겪고 있었다. "그만 품위 있게 은퇴해"라고 평론가와 동료들은 이야기했다. "쉬면, 녹이 슬 것(When I rest, I rust)"이라며 의지를 꺾지 않은 도밍고는 2009년부터 바리톤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전성기의 테너 시절에 비하면 성량이 줄었지만, 바리톤으로서 깊이 있는 음색을 선보이고 있다.도밍고는 지난 4월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의 주역으로 오스트리아의 빈 슈타츠오퍼 무대에 올랐다. 그의 4천 번째 오페라 공연이었다. 4천 회는 레코딩을 뺀 순수 무대 출연 횟수이다. 18세이던 1959년 멕시코시티에서 공식 데뷔한 이래, 60년 만이다. 도밍고는 그동안 테너 132개와 바리톤 18개를 합한 150개의 오페라 배역을 소화했다.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한정된 30여 개의 배역을 맡았으며, 20세기를 풍미한 테너 카루소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생전에 맡은 배역은 각각 60개와 50개였다.도밍고는 지난 5월 미국 LA 오페라와 독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무대에 올랐다. 이달 초엔 드레스덴 잼퍼오퍼 무대에 섰다. 많은 성악가들이 성대 보호를 위해 오페라 출연 횟수를 조절하고 나이가 든 뒤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