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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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관통한 잊혀진 방어선, 대전차 방호벽 '용치'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 프롤로그] 지면기사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 프롤로그] 반백년 전 한국전쟁 재발 방지 목적 건설 이제는 기억하는 이 찾아보기 드물어져다양한 문화유산 보존하려는 의식 증가급속한 도시개발 영향 나날이 소실위험경인일보, 道·경기역사문화원과 협력비지정 문화재 발굴·보존 등 꾸준히 노력경기북부와 접한 강원도, 북한과 경계를 맞댄 이곳 논 위로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경기도와 강원도를 가로질러 끝없이 펼쳐진 벽의 정체는 지도엔 나타나지 않았다. 군사시설이기 때문이다.촬영을 하거나 위치를 발설해선 안 되는 군사시설은 구글에 접속해 이 지역 항공사진을 보자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대전차방호벽이었다. 벽은 시군 경계를 넘어 논과 밭 위로 주욱 뻗어 있었다. 누군가 지도 위에 연필로 그어 놓은듯, 주변 지형지물을 무시하고 산과 강과 들판에 벽이 도열했다.반백년 전에 지어진 대전차방호벽의 정체를 기억하는 주민은 많지 않다. 대전차방호벽은 용의 이빨을 닮아 '용치'라고 불린 콘크리트 구조물, 전쟁 시 폭파해 도로를 막는 용도인 낙석과 더불어 대전차방어선을 구축한다.1970년대 만들어진 대전차방어선은 파주, 연천, 양주, 의정부, 고양, 포천, 동두천 등에 구축됐고 임진강까지 확장해 수도권방어선으로 기획됐다. 강원도 고성, 인제, 양구에서도 관찰되며 멀리는 서해안 강화까지 뻗어 있다. 강원도에서 경기도까지 수십킬로로 연결된 대전차방어벽의 모습은 가히 38도선, 휴전선과 더불어 제3의 휴전선이라고 할만하다.한국전쟁의 경험으로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지만 50여년 이상 단 한 번도 쓰인 적은 없었다. 쓰임을 다하지 못한 대전차장애물은 2000년대 도시개발이 활발해지며 이해관계에 따라 하나 둘 철거되고 있다.지난해 연중 게재된 '전쟁과 분단의 기억'은 바로 이 대전차방어선을 구축하는 대전차장애물 '용치'를 시작으로 근현대 시기에 만들어져 경기도에 소재한 여러 건조물의 현재를 확인했다.용치를 보존해야 하는가, 없애야 하는가. 기사는 이 물음에서 시작했다. 도시의 흉물이며 냉전의 상징이지만 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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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21·끝)] 되짚어 본 전쟁 문화 유산·(下) 지면기사
'역사의 흔적 있어… 기억이 안 난다' 무관심속에 사라져 가는 유산들… 폐허로나마 남아줘 가슴에 간직 파주 장파리에 있던 미군 클럽 럭키바자갈밭으로 이뤄진 주차장만 덩그러니경기도 내 건조물들 열악한 환경 방치불에 그을리고 흉물 상태로 멸실 위기아름답지 않아 잊고 싶은 상처라 해도우리가 기억 안하면 영영 사라질 것들전쟁과 분단의 유산은 사라지고 있다. 지난 8월 찾아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348-8. 미군 클럽 럭키바가 있어야 할 자리엔 자갈밭으로 이뤄진 주차장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1960년대 만들어져 근처의 DMZ홀, 라스트찬스와 함께 당시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지만, 무관심 속에 사라진 날짜도 특정할 수 없게 어느 사이엔가 허물어진 것이다.럭키바, DMZ홀, 라스트찬스는 파주 장파리 미군 클럽의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다. 1960년대 서울 번화가보다 번영했다는 장파리는 미군에 기대어 성장한 당시 미군 기지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한국 대중음악사의 기원이 되는 장소다.사라짐은 비단 럭키바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채 50~70년 가량 시간이 지나면서 경기도 곳곳의 건조물들이 사람들 뇌리에서 잊혔고 지금도 열악한 보존 상태 속에 멸실 위기를 맞았다.이런 상황은 전쟁 문화유산이 대체로 북한과 가까운 접경 지역,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지역에 자리잡았다는 사정과 맞닿아 있다. 피난민의 안식처인 '파주 장곡리 움집', 옛 미군거리 쉼터 '동두천 샬롬하우스', 캠프 스탠리 옛 기지촌 '의정부 뺏벌마을'이 모두 그렇다.1950년대에 움집이라니. 신석기나 구석기 시대가 아니라 피난민들이 전쟁 물자로 얼기설기 엮은 움집 마을이 아직 파주 접경 지역 장곡리에 자리 잡고 있다. 2020년대에 이르러 여전히 그곳에 사람이 산다. 6채 가옥은 50년대 당시 피난 시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다. 동두천 샬롬하우스는 2019년 화재 이후 방치돼 있지만 건물 외관은 온전하다. 화마가 할퀸 실내는 불에 그을린 채로 말이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고아와 클럽에서 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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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20)] 되짚어 본 전쟁 문화 유산·(上) 지면기사
지난 2월 연재를 시작한 '전쟁과 분단의 기억'은 매월 2차례씩 19번에 걸쳐 경기도 전역의 미등록 전쟁 문화유산을 찾았다. 정전 70주년, 여전히 분단 상태인 한반도에서 북한과 경계를 접한 경기도엔 한국전쟁의 상흔인 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道-문화재연구원 실태조사… 조사목록 154건 올라소재 파악 어렵거나 이미 소멸된 건조물 44건 달해보도에 앞서 경기도와 경기도문화재연구원은 분단 상황과 관련한 유산을 목록화하는 실태조사를 벌였다. 모두 154건의 유산이 조사목록에 올랐는데 건조물(건축물)이 100건이었고 전쟁과 분단의 기억이 첫 번째로 찾아간 유산, '용치'가 54건이었다. 목록에는 올랐지만 사라진 유산도 여럿이었다. 미군 부대 안에 소재해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하거나 이미 사라진 건조물들이 44건에 달했다. 사라짐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지난해 여름 실태조사에선 건재했던 '파주 럭키바'가 올해 들어 사라졌다는 사실(8월 22일자 11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기억·(15)] 파주 옛 미군 위락시설 '럭키바·DMZ홀·문화극장')도 취재 과정에서 확인됐다.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전쟁 문화 유산을 등한시 한다면 또 다른 유산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우리 곁 유산을 발견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보전하는데 이르기까지 인식 변화를 촉구하며 연간 진행된 보도를 통해 다시금 전쟁 문화 유산의 현실을 되짚는다. '용치' 한탄강 바라보던 주민 제보로 세상에 드러나장갑차·전차 차단용 콘크리트 구조물… 도내 32곳대북 경계심 고조 1970년대 추정… 최소높이 1.5m전쟁 문화 유산 '용치'와 노르웨이 야전병원 '노르매시'는 우연히 발견됐다. 용치는 어느 날 집 밖의 한탄강을 바라보던 한 주민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대전차 장애물 용치 설치는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용의 이빨(Dragon's Teeth)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용치(龍齒)'는 장갑차나 전차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통로에 설치된 콘크리트 구조물로 경기도엔 32개소(고양 2, 양주 1, 연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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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9)] 동두천 보산동 구시가지 지면기사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 번쩍이는 신호등 /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동두천1·김명인)보산역에서 멎은 기차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떠난 기차를 뒤로하고 역사를 내려가자 기둥에 색색으로 이방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기다랗게 늘어선 좌판 매점은 일률적으로 문을 닫았고 이스탄불이라 쓰인 케밥 집에 아랍계가 모여 마작을 친다.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보산동관광특구'에 도착했다. 캠프 케이시는 한강 이북에서 가장 큰 미군 주둔지다. 한국전쟁으로 1951년 7월부터 미군이 주둔했는데 1990년대엔 1만2천명 수준에 달했다고 한다. 미군 주둔으로 사라진 '보안리'와 '축산부락'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 보산동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미군 주둔으로 사라진 보안리·축산부락 이름에서 딴 '보산'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무질서하게 건물 들어섰던 60년대2007년 보산역 들어서고 광역교통망 개발로 유동인구 감소주둔병력 나날이 줄고 기지들 폐쇄·반환 잇따라 상권 축소1981년 동두천이 시로 승격했고 1997년 1월 보산동을 중심으로 중앙동, 소요동 일대가 보산동관광특구로 지정됐다. 동두천시 30년사는 "그 이전부터 미 2사단 정문 맞은 편에 위치, 미군 상대 나이트클럽·주점·상가 등의 영업. 내국인보다는 미국이나 외국인 상대. 1960년대부터 무질서하게 들어선 건물로 낙후되어 도시미관 정화와 지역경제, 도시 이미지 제고를 위해 관광특구 지정 개발 시작"이라고 설명한다.1997년 시작한 보산관광특구의 역사는 10년 뒤인 2007년 결정적인 타격을 받는다. 전철 개통이다. 2007년 지상 3층 규모의 선하역사로 보산역이 들어서면서 일대의 미군들이 이태원이나 용산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광역교통망 개발로 유동인구가 도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전형적인 빨대효과가 나타난 것이다.지난 29일 찾아간 보산동은 쇠락한 흔적이 역력했다. 보산동 구시가지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3번국도(평화로)변과 신천 동측 구역으로 범위를 한정해 돌아봤다. 보산역 역사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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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8)] 교인들이 힘모아 세운 '수원교회' 본당 지면기사
수원시 팔달구 교동 2-7의 수원교회 본당이 조성된 건 1954년이다. 교회는 1946년 11월 27일 수원의 장로교 신도 12명이 가정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린 것에서 출발했다. 16일 교회 측 관계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중심으로 수원에 장로교 교회가 없다는 걸 아쉽게 생각한 교인들이 모인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1956년 미군의 물자 도움으로 준공장로교 교회 필요, 신도들 직접 지어콘크리트 건물 외부 벽돌 감싼 구조1980년대 시국모임 등 거점 활용돼 인근에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건물"행궁 하천 자재 가져다 썼다" 증언준공년도·육면체 화강암 외벽 비슷수원교회도 하천 돌들 사용 가능성 가족여성회관, 국가등록문화재 지정'뜨거운 역사' 수원교회도 가치 충분이들은 남창동 소재 일본인 불교사원을 빌려 예배처소로 사용해오다 1954년 1월 미 제5공군으로부터 2층의 건물 신축 물자를 받아 1956년 11월 교회를 준공했다. 미 제5공군으로부터 불하받은 건물이지만 미군이 교회 건축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신도가 직접 교회 건축에 참여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북측으로 팔달산과 팔달공원과 붙어 있고 수원향교에 인접한 수원교회는 중동사거리·교동사거리 인근 수원 화성 팔달문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 교회인 수원교회(본관)는 장방향의 평면에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장변은 7칸으로 나눠 세로 돌출띠가 보이고 방형의 돌을 조적조(벽돌을 차례로 쌓아 올리는 방식)로 올렸다. 콘크리트 건물에 외부가 조적조 형태로 마감된 것인데 외벽 공사는 교인들이 손수 작업했다. 이런 마감 방식은 이천 양정교회, 화성 남양고등학교 건물과 유사하다.이천 관고동 양정교회(4월 18일자 11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도 수원교회와 마찬가지로 1956년 지어졌고 조적조 형태를 하고 있다. 외벽을 돌로 마감해 언뜻 보기에도 수원교회와 많이 닮았다. 수원교회가 교인들이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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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7)] 김포 애기봉평화생태공원 지면기사
'사십년 반평생을 나는 나비로 살았다…'. 시인 신경림이 쓴 '나비의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비의 꿈에는 '철원에서'란 부제가 달렸다. 각주엔 '철원에는 통일이 되면 남 먼저 돌아가겠다고 주저물러앉아 사는 실향민들이 많다'고 썼다.호접지몽(胡蝶之夢)에서 따왔을 꿈 이야기는 이렇다. '훨훨 철조망을 날아 넘어가 / 어머니 밤늦도록 바느질하는 / 뒷방 문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 누이한테 매달려 사방치기하던 / 마당가 빨랫줄에 앉아 쉬기도 했다'.'철조망'이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것이 헛된 꿈임을 안다. 38선이라 부르든 휴전선이라 하든 저 철조망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꿈도 과거형이다. 꿈이자 회상이다. '두엄 썩는 냄새 코 찌르는 / 학교 뒷문으로 날아들어가면 / 2학년 아이들 제각기 소리내어 / 국어책 읽는 소리 / 벌소리처럼 잉잉댔다'.어머니와 누이, 마당가와 학교를 앗아간 전쟁은 영영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철조망을 남겼다.'문득 생각하는 날이 많다 /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 나비인 내가 / 사십 반평생을 좌판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 군고구마나 팔고 있는 /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한낮 철원 거리 좌판 행상이 꾸벅 졸며 꾸는 꿈의 모습은 강력한 최루탄이다. 최루가스는 내 뜻과 무관하게 고향과 가족을 앗아간 전쟁, 상처를 봉합하지 못한 정치, 오랜 기간 공전하는 외교를 동력으로 삼는다. 그리고 사십 반평생이라고 표현한 세월이 이젠 칠십 년을 넘겼다는데서 서글픔은 현재 진행형이다(신경림은 시 '나비의 꿈'을 1991년 펴낸 시집 '길'에 담았다).한강·임진강 만나는 '한국전쟁 154고지'1954년 치열한 전투현장에 소나무 트리박정희, 조선 기생 이름 따와 비석 건립끝내 만나지 못한 설화, 이산가족 닮아1971년 등탑 설치… 남북관계따라 점멸2014년 안전문제 철거… 평화공원으로고향 못 가는 실향민 위한 망배단 설치이산가족 상봉, 2018년 8월 이후 중단그 뒤로 신청자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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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6)] 파주·의정부 '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건물 지면기사
파주 장파리 '럭키바'(8월 22일자 11면 보도)처럼 '블루문홀', '메트로홀' 역시 장파리에서 자취를 감춘 문화유산이다.블루문홀(파평면 장파리 370-94)과 메트로홀(파평면 장파리 437-5)은 미군 주둔이 시작된 1950년대 조성돼 특정할 수 없는 시기에 사라져 현재는 멸실 상태다. 미군 기지촌 장파리의 이야기, 그곳에 종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도 사라진 문화재와 함께 대부분 소멸했다.장파리 '장마루 극장' 현재는 사라져1959년 흥행 '장마루촌 이발사' 촬영당시 번영했던 일대의 분위기 보여줘블루문홀, 메트로홀 인근 장파리 349-4 일대에는 '장마루극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장마루극장 역시 1950년대 들어선 것으로 알려졌는데 파주 지역에서 두 번째로 생긴 극장으로 추정된다. 장마루극장도 멸실 상태지만, 장마루극장에서 촬영된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장마루촌 마을 청년 동순은 여대생 순영과 사랑하는 사이인데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게 잡혀간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군에 입대했지만 전쟁 중 성 불구가 되고 만다. 순영은 그런 동순을 이해하고 함께 장마루촌의 재건을 돕는다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다.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1959년 9만5천82명의 관객을 동원해 그 해 흥행 7위를 기록했다. 큰 인기를 끈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10년 뒤인 1969년 신성일·김지미 주연으로 리메이크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파리 일대가 번영했던 시기로 미군 주둔 파주지역이 당대에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지역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파주지부'1958년 '자유노조'란 이름으로 결성한국노총의 출범보다 2년이나 앞서파주서 미군철수뒤 사무실 방치 상태 장파리의 미군 클럽이 주둔 미군, 종사 여성, 관련 상인들이 얽힌 장소라면 미군과 관련한 노동을 한 사람들의 흔적이 남겨진 유산이 근처에 있다. '전국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파주지부'다.전국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파주지부는 1958년 자유노조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 이듬해인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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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5)] 파주 옛 미군 위락시설 '럭키바·DMZ홀·문화극장' 지면기사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348-8. 미군 클럽 '럭키바'가 사라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있었던 럭키바는 철거됐고 자갈 바닥의 주차장만 남았다. 1960년대 조성돼 미군부대 향락시설로 널리 알려진 럭키바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파주 파평면 장파리는 7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유동인구가 3만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이었다고 한다. 임진강 너머 미군 때문에 형성된 상권이었다. "동네 강아지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정도로 번창했던 장파리 일대는 지금 고요하다.장마루로와 장마루8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50m 가량 들어가면 골목에 '럭키바'가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3동의 건물 중 상부가 무너진 채 방치된 1동을 제외하곤 대체로 외형이 온전했다고 한다. 건물은 지상 2층에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구조인데 정면에 2개 창문이 있고 우측에 출입구가 났었다. 지난해에도 오랜 기간 방치된 건물 내부로 진입할 순 없었다고 한다. 다만 창문을 통해 넓은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고, 클럽 홀 하우스로 쓰였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확인됐다.모든 건 과거형이다. 지난해 어느 시점 건물주가 럭키바를 철거했기 때문이다. 럭키바가 있었던 자리 앞쪽에 거주하는 파평면 주민은 "작년에 철거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래 방치한 건물이니까 허물었을 것"이라고 전했다.연면적 550㎡, 지상 3층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미군과 접객원으로 붐볐던 럭키바는 없어졌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등록 문화재를 발굴해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사이 또 하나의 기억 장소가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럭키바는 장파리 내 가장 규모가 큰 미군 클럽이었다.1970년대만 해도 하루 유동인구 3만당시 최대 규모 '럭키바' 지난해 철거인근 'DMZ홀' 무명 조용필 무대도 장파리 내 또 다른 미군클럽 'DMZ홀'은 다행히도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럭키바에서 도보로 5분 내외 장파리 377-12에 위치한 DMZ홀은 장마루로와 장마루 14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40m 가량 들어간 골목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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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4)] 평화통일의 염원 모인 '파주 임진각' 지면기사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1972년 7월 4일 남북한은 3가지 원칙에 합의한 성명을 발표한다. 냉전이 완화되는 데탕트 시기에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남북한이 처음으로 정치적 대화 통로를 마련한 7·4 남북공동성명은 훗날 평화의 상징이 될 장소를 경기도에 남겼다.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후 개발 시작인근 민통선 해제·국도 1호선 개통 영향1985년 망배단… 2000년대 종합관광지로2018년 337만 방문… 연간 수백만명 발길'경의선 철교' 도라산역 등 신설되며 복구동측 상행선 교각만 남아… 120년간 부침포로 교환 '자유의 다리' 道기념물 지정시기별 다양한 시설… 분단 경험 최적지 국도 1호선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임진각'은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개발되기 시작했다. 최초에 7천500여평 대지에 8천만원 공사비가 들었는데 이를 해태제과가 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파주 문산까지였던 민간인통제선이 임진강까지 해제됐고, 국도 1호선(통일로)이 개통한 게 임진각 조성에 영향을 미쳤다.1972년 12월 23일 개관식을 한 임진각은 그 후로 1985년 망배단을 조성했고, 1991년 남북고위급회담으로 자유로 건설·국민 관광지 지정의 효과를 맛봤고, 2005년 평화누리·2017년 6·25전쟁 납북자기념관·2018년 평화누리 캠핑장·2020년 곤돌라·2022년 한반도 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 등이 연이어 들어서며 각종 시설을 갖춘 종합 관광지로 개발됐다.임진각 주변엔 임진강에 면해 서측으로 경의선 철로가 지나고, 동측으론 임진강을 건너는 통일대교가 있다. 그 사이 넓은 부지에 임진각이 위치한다. 주변은 대부분 군사시설구역과 농촌지역이다. 통일로와 자유로 끝에 임진각은 자리하고 있다.통계청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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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3)] 잊히는 용사들의 쉼터, 이천시 창전동 '보훈회관' 지면기사
195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천시 창전동 보훈회관에는 4개 보훈단체가 사무실을 두고 있다. 광복회 이천시지회와 6·25참전 국가유공자회는 1층, 고엽제전우회 경기지부 이천시지회와 월남전 참전자회 이천시지회는 2층을 사용한다. 1945년 광복(광복회), 1950년 한국전쟁(6·25 참전 국가유공자회), 1964~1973년 베트남전(고엽제전우회 경기지부 이천시지회·월남전참전자회 이천시지회)까지 1940~1960년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과 얽힌 사람들이 이천시 창전동 보훈회관에 모여든다.1950년대 건축·1970년대 2층 증축 추정여러차례 수선 거쳐 사용… 역사적 가치중앙로 시내 위치… 전역자들 찾기 쉬워참전유공자, 고령화로 빠르게 감소 추세3명중 1명 장애… 공적연금 미가입 39.9%유튜브 빠진 '극우 이미지' 사회와 유리삶 만족도 평가 '5.5'… 삶의 가치는 '5.8'사회 참여 감소… 그들 이야기 들어줘야 창전동 보훈회관은 과거 문화원·여성회관으로 쓰인 이력이 있다. 대지면적 347㎡에 건물면적 392㎡의 지상 2층 건물이다. 사무실과 회의실로 쓰이는 방이 있고 단체별 사무실 면적은 20㎡로 협소한 편이다.1950년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지만 1973년 건축됐다는 기록도 있다. 건물 현관 입구에 경비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1950년~60년대 사이 지어진 건축물에서 관찰되는 특징이다. 1층 본건물 서측에 계단실을 만들어 2층을 증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일부 기록에 1973년 건축이라고 표기됐을 가능성이 있다.2층을 올리며 계단면 입사면 파사드와 본건물 파사드 사이에 단차가 발생했다. 이 밖에도 활용을 위해 여러 차례 수선한 건물이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활용돼 왔다는 점에서 건물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보훈회관 기준으로 남측 200m 거리에 이천 중앙로 문화의 거리가 위치한다. 창전동 행정복지센터와 근접지며 시내와 가까워 전역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보인다. 다만, 지난 20일 오전 찾은 창전동 보훈회관에선 건물에서 활동하는 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