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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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8)] 교인들이 힘모아 세운 '수원교회' 본당 지면기사
수원시 팔달구 교동 2-7의 수원교회 본당이 조성된 건 1954년이다. 교회는 1946년 11월 27일 수원의 장로교 신도 12명이 가정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린 것에서 출발했다. 16일 교회 측 관계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중심으로 수원에 장로교 교회가 없다는 걸 아쉽게 생각한 교인들이 모인 것이 교회의 시작이었다"고 설명했다. 1956년 미군의 물자 도움으로 준공장로교 교회 필요, 신도들 직접 지어콘크리트 건물 외부 벽돌 감싼 구조1980년대 시국모임 등 거점 활용돼 인근에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건물"행궁 하천 자재 가져다 썼다" 증언준공년도·육면체 화강암 외벽 비슷수원교회도 하천 돌들 사용 가능성 가족여성회관, 국가등록문화재 지정'뜨거운 역사' 수원교회도 가치 충분이들은 남창동 소재 일본인 불교사원을 빌려 예배처소로 사용해오다 1954년 1월 미 제5공군으로부터 2층의 건물 신축 물자를 받아 1956년 11월 교회를 준공했다. 미 제5공군으로부터 불하받은 건물이지만 미군이 교회 건축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신도가 직접 교회 건축에 참여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북측으로 팔달산과 팔달공원과 붙어 있고 수원향교에 인접한 수원교회는 중동사거리·교동사거리 인근 수원 화성 팔달문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 교회인 수원교회(본관)는 장방향의 평면에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장변은 7칸으로 나눠 세로 돌출띠가 보이고 방형의 돌을 조적조(벽돌을 차례로 쌓아 올리는 방식)로 올렸다. 콘크리트 건물에 외부가 조적조 형태로 마감된 것인데 외벽 공사는 교인들이 손수 작업했다. 이런 마감 방식은 이천 양정교회, 화성 남양고등학교 건물과 유사하다.이천 관고동 양정교회(4월 18일자 11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도 수원교회와 마찬가지로 1956년 지어졌고 조적조 형태를 하고 있다. 외벽을 돌로 마감해 언뜻 보기에도 수원교회와 많이 닮았다. 수원교회가 교인들이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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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7)] 김포 애기봉평화생태공원 지면기사
'사십년 반평생을 나는 나비로 살았다…'. 시인 신경림이 쓴 '나비의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비의 꿈에는 '철원에서'란 부제가 달렸다. 각주엔 '철원에는 통일이 되면 남 먼저 돌아가겠다고 주저물러앉아 사는 실향민들이 많다'고 썼다.호접지몽(胡蝶之夢)에서 따왔을 꿈 이야기는 이렇다. '훨훨 철조망을 날아 넘어가 / 어머니 밤늦도록 바느질하는 / 뒷방 문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 누이한테 매달려 사방치기하던 / 마당가 빨랫줄에 앉아 쉬기도 했다'.'철조망'이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것이 헛된 꿈임을 안다. 38선이라 부르든 휴전선이라 하든 저 철조망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꿈도 과거형이다. 꿈이자 회상이다. '두엄 썩는 냄새 코 찌르는 / 학교 뒷문으로 날아들어가면 / 2학년 아이들 제각기 소리내어 / 국어책 읽는 소리 / 벌소리처럼 잉잉댔다'.어머니와 누이, 마당가와 학교를 앗아간 전쟁은 영영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철조망을 남겼다.'문득 생각하는 날이 많다 /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 나비인 내가 / 사십 반평생을 좌판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 군고구마나 팔고 있는 /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한낮 철원 거리 좌판 행상이 꾸벅 졸며 꾸는 꿈의 모습은 강력한 최루탄이다. 최루가스는 내 뜻과 무관하게 고향과 가족을 앗아간 전쟁, 상처를 봉합하지 못한 정치, 오랜 기간 공전하는 외교를 동력으로 삼는다. 그리고 사십 반평생이라고 표현한 세월이 이젠 칠십 년을 넘겼다는데서 서글픔은 현재 진행형이다(신경림은 시 '나비의 꿈'을 1991년 펴낸 시집 '길'에 담았다).한강·임진강 만나는 '한국전쟁 154고지'1954년 치열한 전투현장에 소나무 트리박정희, 조선 기생 이름 따와 비석 건립끝내 만나지 못한 설화, 이산가족 닮아1971년 등탑 설치… 남북관계따라 점멸2014년 안전문제 철거… 평화공원으로고향 못 가는 실향민 위한 망배단 설치이산가족 상봉, 2018년 8월 이후 중단그 뒤로 신청자 1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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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6)] 파주·의정부 '주한미군한국인노동조합' 건물 지면기사
파주 장파리 '럭키바'(8월 22일자 11면 보도)처럼 '블루문홀', '메트로홀' 역시 장파리에서 자취를 감춘 문화유산이다.블루문홀(파평면 장파리 370-94)과 메트로홀(파평면 장파리 437-5)은 미군 주둔이 시작된 1950년대 조성돼 특정할 수 없는 시기에 사라져 현재는 멸실 상태다. 미군 기지촌 장파리의 이야기, 그곳에 종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도 사라진 문화재와 함께 대부분 소멸했다.장파리 '장마루 극장' 현재는 사라져1959년 흥행 '장마루촌 이발사' 촬영당시 번영했던 일대의 분위기 보여줘블루문홀, 메트로홀 인근 장파리 349-4 일대에는 '장마루극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장마루극장 역시 1950년대 들어선 것으로 알려졌는데 파주 지역에서 두 번째로 생긴 극장으로 추정된다. 장마루극장도 멸실 상태지만, 장마루극장에서 촬영된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장마루촌 마을 청년 동순은 여대생 순영과 사랑하는 사이인데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게 잡혀간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군에 입대했지만 전쟁 중 성 불구가 되고 만다. 순영은 그런 동순을 이해하고 함께 장마루촌의 재건을 돕는다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다.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1959년 9만5천82명의 관객을 동원해 그 해 흥행 7위를 기록했다. 큰 인기를 끈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10년 뒤인 1969년 신성일·김지미 주연으로 리메이크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파리 일대가 번영했던 시기로 미군 주둔 파주지역이 당대에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지역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파주지부'1958년 '자유노조'란 이름으로 결성한국노총의 출범보다 2년이나 앞서파주서 미군철수뒤 사무실 방치 상태 장파리의 미군 클럽이 주둔 미군, 종사 여성, 관련 상인들이 얽힌 장소라면 미군과 관련한 노동을 한 사람들의 흔적이 남겨진 유산이 근처에 있다. '전국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파주지부'다.전국주한미군 한국인노동조합 파주지부는 1958년 자유노조라는 이름으로 창립됐다. 이듬해인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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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5)] 파주 옛 미군 위락시설 '럭키바·DMZ홀·문화극장' 지면기사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 348-8. 미군 클럽 '럭키바'가 사라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있었던 럭키바는 철거됐고 자갈 바닥의 주차장만 남았다. 1960년대 조성돼 미군부대 향락시설로 널리 알려진 럭키바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파주 파평면 장파리는 70년대까지만 해도 하루 유동인구가 3만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이었다고 한다. 임진강 너머 미군 때문에 형성된 상권이었다. "동네 강아지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 정도로 번창했던 장파리 일대는 지금 고요하다.장마루로와 장마루8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50m 가량 들어가면 골목에 '럭키바'가 있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3동의 건물 중 상부가 무너진 채 방치된 1동을 제외하곤 대체로 외형이 온전했다고 한다. 건물은 지상 2층에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구조인데 정면에 2개 창문이 있고 우측에 출입구가 났었다. 지난해에도 오랜 기간 방치된 건물 내부로 진입할 순 없었다고 한다. 다만 창문을 통해 넓은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고, 클럽 홀 하우스로 쓰였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확인됐다.모든 건 과거형이다. 지난해 어느 시점 건물주가 럭키바를 철거했기 때문이다. 럭키바가 있었던 자리 앞쪽에 거주하는 파평면 주민은 "작년에 철거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래 방치한 건물이니까 허물었을 것"이라고 전했다.연면적 550㎡, 지상 3층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미군과 접객원으로 붐볐던 럭키바는 없어졌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등록 문화재를 발굴해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사이 또 하나의 기억 장소가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럭키바는 장파리 내 가장 규모가 큰 미군 클럽이었다.1970년대만 해도 하루 유동인구 3만당시 최대 규모 '럭키바' 지난해 철거인근 'DMZ홀' 무명 조용필 무대도 장파리 내 또 다른 미군클럽 'DMZ홀'은 다행히도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럭키바에서 도보로 5분 내외 장파리 377-12에 위치한 DMZ홀은 장마루로와 장마루 14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동쪽으로 40m 가량 들어간 골목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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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4)] 평화통일의 염원 모인 '파주 임진각' 지면기사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1972년 7월 4일 남북한은 3가지 원칙에 합의한 성명을 발표한다. 냉전이 완화되는 데탕트 시기에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이다. 남북한이 처음으로 정치적 대화 통로를 마련한 7·4 남북공동성명은 훗날 평화의 상징이 될 장소를 경기도에 남겼다.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후 개발 시작인근 민통선 해제·국도 1호선 개통 영향1985년 망배단… 2000년대 종합관광지로2018년 337만 방문… 연간 수백만명 발길'경의선 철교' 도라산역 등 신설되며 복구동측 상행선 교각만 남아… 120년간 부침포로 교환 '자유의 다리' 道기념물 지정시기별 다양한 시설… 분단 경험 최적지 국도 1호선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임진각'은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개발되기 시작했다. 최초에 7천500여평 대지에 8천만원 공사비가 들었는데 이를 해태제과가 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파주 문산까지였던 민간인통제선이 임진강까지 해제됐고, 국도 1호선(통일로)이 개통한 게 임진각 조성에 영향을 미쳤다.1972년 12월 23일 개관식을 한 임진각은 그 후로 1985년 망배단을 조성했고, 1991년 남북고위급회담으로 자유로 건설·국민 관광지 지정의 효과를 맛봤고, 2005년 평화누리·2017년 6·25전쟁 납북자기념관·2018년 평화누리 캠핑장·2020년 곤돌라·2022년 한반도 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 등이 연이어 들어서며 각종 시설을 갖춘 종합 관광지로 개발됐다.임진각 주변엔 임진강에 면해 서측으로 경의선 철로가 지나고, 동측으론 임진강을 건너는 통일대교가 있다. 그 사이 넓은 부지에 임진각이 위치한다. 주변은 대부분 군사시설구역과 농촌지역이다. 통일로와 자유로 끝에 임진각은 자리하고 있다.통계청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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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3)] 잊히는 용사들의 쉼터, 이천시 창전동 '보훈회관' 지면기사
195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천시 창전동 보훈회관에는 4개 보훈단체가 사무실을 두고 있다. 광복회 이천시지회와 6·25참전 국가유공자회는 1층, 고엽제전우회 경기지부 이천시지회와 월남전 참전자회 이천시지회는 2층을 사용한다. 1945년 광복(광복회), 1950년 한국전쟁(6·25 참전 국가유공자회), 1964~1973년 베트남전(고엽제전우회 경기지부 이천시지회·월남전참전자회 이천시지회)까지 1940~1960년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과 얽힌 사람들이 이천시 창전동 보훈회관에 모여든다.1950년대 건축·1970년대 2층 증축 추정여러차례 수선 거쳐 사용… 역사적 가치중앙로 시내 위치… 전역자들 찾기 쉬워참전유공자, 고령화로 빠르게 감소 추세3명중 1명 장애… 공적연금 미가입 39.9%유튜브 빠진 '극우 이미지' 사회와 유리삶 만족도 평가 '5.5'… 삶의 가치는 '5.8'사회 참여 감소… 그들 이야기 들어줘야 창전동 보훈회관은 과거 문화원·여성회관으로 쓰인 이력이 있다. 대지면적 347㎡에 건물면적 392㎡의 지상 2층 건물이다. 사무실과 회의실로 쓰이는 방이 있고 단체별 사무실 면적은 20㎡로 협소한 편이다.1950년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지만 1973년 건축됐다는 기록도 있다. 건물 현관 입구에 경비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1950년~60년대 사이 지어진 건축물에서 관찰되는 특징이다. 1층 본건물 서측에 계단실을 만들어 2층을 증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일부 기록에 1973년 건축이라고 표기됐을 가능성이 있다.2층을 올리며 계단면 입사면 파사드와 본건물 파사드 사이에 단차가 발생했다. 이 밖에도 활용을 위해 여러 차례 수선한 건물이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활용돼 왔다는 점에서 건물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보훈회관 기준으로 남측 200m 거리에 이천 중앙로 문화의 거리가 위치한다. 창전동 행정복지센터와 근접지며 시내와 가까워 전역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보인다. 다만, 지난 20일 오전 찾은 창전동 보훈회관에선 건물에서 활동하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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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2)] 경원선 끝자락, 연천 신망리·대광리·신탄리역 지면기사
피난민 정착지 'New Hope Town''신망리역' 명칭 기원… 1956년부터 운영마을내 '구호주택' 2018년까지 존재1912년 문 연 '대광리역' 과거모습 간직일대 한때 연천 이북 역중 가장 번화콘크리트 건물의 역사, 건설 연도 미상백마고지역 이전 철도종단점 '신탄리역''철마는 달리고 싶다' 명소로 각광도남북관계 경색… 경원선 복원 기약 없어■ 상리 131-1 '신망리역'수원시 효원로 299 경인일보 본사에서 120㎞를 달려 연천군 경원선 신망리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고작 20㎞를 더 북쪽으로 가면 북한이다. 달려온 길의 6분의 1만 가면 도달할 수 있는 고지를 목전에 두고 경원선 열차는 백마고지역에서 멈춘다.경기도를 지나는 경원선 열차의 최북단인 연천 신망리역·대광리역·신탄리역을 차례로 훑었다. 1910년대 완공된 경원선은 서울에서 연천·철원을 지나 원산까지 닿았다. 2000년대 들어 남북한이 평화 대화에 나서며 복원이 논의됐으나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됐다.역 이름으로 붙은 신망리(新望里)라는 명칭이 재밌다. 신망리는 마을 자체가 미군이 만든 정착지다. 1954년 5월 미군 제7사단이 피난민을 위해 조성했는데 새로운 희망을 품으라는 의미, 즉 'New Hope Town'이라는 뜻에서 신망리가 됐다.처음엔 100호 정도 선착순으로 피난민이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신망리란 이름이 붙기 전 '웃골'이라고 불렸고 일제강점기엔 이를 한자어로 읽어 '상리'라고 불렀다. 웃골, 상리, 신망리에는 지금 중국음식점과 부동산과 같은 몇 개의 상점만 존재한다. 1956년 8월 21일 역무역을 두지 않는 무인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는데, 1면 1선로로 승강장과 역사가 좁다는 특징을 보인다. 간이역이기에 정식역인 대광리·신탄리역에 비해 좁은 것이다.뉴 호프 타운 신망리의 역사는 신망리역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신망리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과거 처음 지붕을 지었던 자재가 전시돼 있다. 전시된 나무 널빤지엔 영어와 숫자가 어지럽게 적혀 있다. 신망리역은 주민들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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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1)] 포성 잦아든 화성 매향리 '쿠니사격장·매향교회' 지면기사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앞바다 농섬에 고장을 일으킨 미공군 전폭기가 예정에 없던 포탄 6발을 일시에 투하, 인근 가옥 160여채에 금이 가고 주민 7명이 부상을 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지난 8일 오전 8시30분께 비행중인 미 공군소속 A-10전폭기 3대중 한대가 엔진고장을 일으키면서 탑재 중이던 500파운드짜리 포탄 6발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앞바다 농섬(일명 쿠니 사격장)에 일제히 투하했다.이날 6발의 포탄이 떨어지면서 발생한 진동과 폭발음으로 우정면 매향1~5리 등 5개 부락 162채 가옥의 벽과 지붕 등에 금이 가고 유리창이 부서졌으며 이에놀라 대피하던 오일선씨(여·76·매향1리)와 최계월씨(여·55·매향1리) 등 7명이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해 우정면 조암리 소재 성모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사고는 3대로 편성된 미 공군 A-10전폭기 1개편대가 각각 포탄 6발씩(500파운드 짜리)을 싣고 군산 앞바다에 있는 모 사격장으로 비행하던 중 3번기가 갑자기 엔진고장을 일으키자 포탄을 쿠니사격장에 투하하라는 미공군 작전처의 긴급조치로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미군, 1951년 농섬에 포격장 조성굉음·난청·가축 유산 등 수십년 피해1956년 불발탄에 어린이 사망 기록도2000년엔 오폭 사고로 주민들 부상2002년 '국가 배상' 판결 대법 확정2005년 8월 폐쇄… 道 건축자산 등록일부 보존… 평화생태공원 탈바꿈2000년 5월 11일 경인일보에는 화성 매향리 오폭 사건이 실렸다. 쿠니사격장에 투하됐어야 할 포탄이 전투기 기재고장으로 인해 마을 주변에 떨어진 것이다. 오랜 기간 포탄 투하 공포를 겪어온 매향리의 실체가 드러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매향리 쿠니사격장은 1951년 미군이 매향리 해상의 농섬을 포격장으로 만들고 사격 연습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1955년 2월 미군 공식 사격장으로 지정됐다. 1968년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은 농섬을 포함해 2천277만㎡를 해상 사격장으로, 육지사격장 면적은 125만㎡로 정했다. 이에 따라 총면적 2천40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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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0)] 새 운명 기다리는 파주 미군반환공여지 지면기사
접경지 경기도, 휴전후 곳곳에 기지50여년 지나 캠프 통폐합, 철수 시작핵심 주둔지 평택행, 용산은 공원화2006년 '공여구역 특별법' 제정에도적은 국비 보조… 도내 활용안 부진일제시대 농장 자리에 '캠프 하우즈'20여개 건물 역사적 가치 판단 필요다른 캠프서 볼수 없는 건축 양식도민통선 반환 공여지 '캠프 그리브스'퀸셋막사 일부, 아카이브 공간 활용'전쟁문화유산 보전' 우수사례 평가타 캠프도 보존·개발 '투트랙' 필요 ■ 미군반환공여지들 엇갈린 운명한국전쟁을 기점으로 경기도는 미군의 주요 거점이 됐다. 북한과 맞닿은 북방 경계였기에 휴전에 돌입하며 당연한 수순처럼 미군 캠프가 설치됐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미군 2사단이 동두천에 주둔하며 미군 캠프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경기도 미군 캠프는 1954년 집중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다.미군 캠프가 철수된 건 반세기가 지나서다. 주한 미군 캠프를 통폐합하고 재편성하는 연합토지관리계획(2002년·LPP)과 이어진 용산기지이전협정(2004년·YRP)이 계기가 됐다. 미군이 떠나며 돌려받은 주한미군 공여구역의 전국 면적은 242.07㎢ 인데 그 중 경기도에 210.61㎢가 있다. 한때 도시 전체 면적의 40% 이상을 미군 캠프로 내줬던 동두천이 대표적인 예다.협정에 따라 미군 핵심 주둔지가 평택으로 이전했고, 한국 미군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용산기지도 공원으로 탈바꿈을 앞두고 있다. 미군 캠프가 떠나고 남은 경기도 미군반환공여지의 운명은 지역별로 엇갈렸다.미군 캠프 철수 사업은 핵심 주둔지인 용산, 이전 대상지인 평택, 이전 대상인 경기도 미군캠프의 3개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우선 이전 대상지인 평택은 2004년 제정된 '평택지원 특별법'에 따라 발전계획의 80%·기반시설의 100%를 국비로 보조해 새로운 미군 캠프 조성을 뒷받침했다. 용산을 대상으론 2007년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제정됐다. 공원조성비의 100%를 국비로 지원해 국가 책임 아래 공원을 조성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이전 대상인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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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9)] 갈등과 평화 사이 '공동경비구역 JSA' 지면기사
'전쟁과 분단의 기억'은 존재하나 잊힌 유산을 다뤘다. 용치, 폐철교, 노르매시 야전병원, 가평·남양·고양고, 파주 장곡리 움집, 오산감리교회·이천양정교회, 동두천 샬롬하우스, 의정부 뺏벌마을은 기억해야 할 유산이다.아홉 번째로 찾은 유산은 너무나도 유명해 기억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기억의 장소다. 바로 공동경비구역 JSA다. 1980년대생인 기자에게 공동경비구역 JSA의 기억은 동명 영화로 각인됐다. 2000년 개봉한 영화감독 박찬욱의 출세작이자 이병헌, 송강호, 이영애, 신하균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열연으로도 주목을 모은 작품이다.1963년생인 박 감독에겐 1976년 일어난 '판문점 도끼 만행'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것이다. 예술가의 유년기에 깊게 박힌 경험은 30여년 세월 후에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회자될 영화로 탄생했다. 또래가 2000년대에 입대한 우리 세대에게 JSA 근무는 좋은 안줏거리가 됐다.JSA에서 군 생활을 한 동기가 휴가를 나오면 삼삼오오 모여 정말 영화처럼 남북한 군인이 마주 보고 경계 근무를 하는지 이야기도 하고 침도 뱉고 그런 게 정말 가능한지 묻는 게 이야깃거리였다. 1960년대생에게 JSA가 판문점 도끼 만행으로, 1980년대생에겐 동명 영화로 기억된다면 2000년대생에게 JSA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이 아닐까.동서 800m·남북 400m… 1953년 정전협정후 형성남측 지휘통제권 유엔사 보유… 경비 임무는 국군서울 기점 남쪽 목포·북쪽 의주 잇는 '의주로' 선상'역사적 사건' 주무대… 1976년 북한군 '도끼만행'2000년 '박찬욱 영화' 흥행… 2017년 인민군 귀순2018년 남북 정상 만남… 이듬해 트럼프 포함 회동 2018년 4월 27일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JSA, 그러니까 판문점에서 만날 때 기자는 고양 일산 킨텍스 프레스센터에 있었다. 이날 회담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이뤄졌는데 평소엔 전시회가 열리던 거대한 공간을 3천명 가량 취재진이 가득 채웠다.공식 기록으론 내신 176개사 2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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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8)] 캠프 스탠리 옛 기지촌 '의정부 뺏벌마을' 지면기사
뺏벌마을을 이렇게 설명해보면 어떨까. '빼뻘은 주름이다', '빼뻘 마을 산은 도봉산보다 좋다', '빼뻘 마을은 사람과 사이에 풋풋한 정이 있는 곳', '처음처럼 왔다가 빼뻘처럼 가는 거지'.15일 의정부시 고산동 508-75번지 뺏벌마을을 찾았다. 실은 저 문구는 뺏벌마을에 만들어진 예술가와 주민의 공간 '빼뻘보관소' 창문에 적힌 글귀들이다.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해보자.의정부시 고산동 일대 6만7천여㎡에 걸쳐 건물 130여채, 490여명의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 뺏벌마을이다. 미군 캠프 스탠리 후문을 기점으로 형성된 기지촌인데 부대가 산 위에 있어 가파른 언덕배기에 좁다란 길목을 따라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다.한때 이태원 방불… 미군 떠나며 쇠락고산동 일대 130여채·490여명 거주중토지의 대부분 '전주 이씨 문중' 소유주민들 땅값 치를 형편 안돼 세입자로 예술가들과 연대, 마을 기록하고 지켜다양한 삶의 흔적 SNS 'ㅃㅃ보관소'에'처음처럼 왔다가 빼뻘처럼 가는 거지'이들의 노력에도 위태로운 기억·역사1960년대부터 형성됐는데 2006년 평택기지 건설이 결정된 이후 미군 대다수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뺏벌마을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송산로 남쪽에 위치한 마을은 동서방향으로 긴 형태에 마을 서쪽 끝엔 캠프 스탠리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좁은 골목·작은 상점은 서울의 이태원이나 해방촌을 떠올리게 한다. 구릉에 자리 잡은 마을은 수락산 도정봉과도 이어진다. 영어로 표기된 상점의 간판과 메뉴를 보건데 평소 미군 이외에 마을을 찾는 외지인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미군기지 이전 이후 급격한 쇠락기를 겪고 있는 마을은 마을 턱 밑까지 밀고 들어온 고산지구의 고층 아파트와 대비된다. 마을 능선에서 바라본 풍경이 초현실적이다. 60년대 풍경을 간직한 골목 사이로 비친 브랜드 아파트들은 서로 다른 2개의 사진을 합성한 것 같은 착각을 부른다.뺏벌의 유래는 배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설과 한 번 들어오면 발을 못 뺀다는 두 가지 뜻으로 전해지는데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뺏벌마을은 '빼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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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7)] 옛 미군 거리의 쉼터 '동두천 샬롬하우스' 지면기사
"DDC&ME, 아직 슬픔에 잠겨있는 거리. DDC&ME 밤마다 뛰쳐나왔던 길거리. 힘들게 자랐어 동두천이 뿌리"(폴로다레드·DDC&ME/Going Up)래퍼 폴로다레드는 동두천 출신이다. 그래서 랩에 동두천을 주제로 한 가사가 많다. DDC로 약칭한 동두천은 생활에 쪼들렸던 어린 시절을 상징하면서 래퍼로 성공가도를 달려 이제는 벗어난 고향, 높은 곳으로 향하는(Going Up) 출발점이다. 높은 곳과 반대인 낮은 지점, 밑바닥으로 DDC가 등장하면 묘한 설득력을 지닌다. 왜일까. 동두천 형성과 역사에 미군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군 주둔 시점은 현대 한국사에 가장 초라한 장면이다. 고향 마을에 밀려 들어온 이방인,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지촌, 음식과 복식으로 낯선 외래문화가 퍼져가는 현상. 뉴욕에 브롱스가 있다면 서울엔 이태원과 해방촌, 경기도엔 동두천이 있는 것이다. 이들 지역은 유사한 문화 상징 자본을 공유한다.정한아 소설 '리틀 시카고' 배경 장소한국전후 미군 주둔… 1969년 지어져선교·영어교육… 2019년 화재로 폐허미군이 평택으로 떠나며 일대 '유령화'인적 끊기고 기지 환경정화 문제 남아50년간 이곳 아이들 아픈 꿈 꾸었을 것 문학에서도 동두천은 같은 상징으로 쓰인다. 정한아의 소설 '리틀 시카고'(문학동네·2012년)는 미군이 드나드는 동두천 골목의 레스토랑·클럽·세탁소·교회·양복점·슈퍼 그리고 '샬롬하우스'를 다룬다. 그렇다. 샬롬하우스는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배경이 아니라 실재했던 장소다.샬롬하우스는 동두천시 생연동 510-2번지에 1969년 4월 10일 지어졌다. 동두천에는 한국전쟁 휴전 무렵부터 미군이 주둔했다. 그들이 평택으로 대량 이주하기 전까지 동두천은 말 그대로 미군도시였다. 실존하는 건물 샬롬하우스와 소설 '리틀 시카고'는 모두 미군이 만든 동두천과 미군이 떠난 동두천을 보여준다.샬롬하우스는 선교와 영어교육을 하는 기관으로 쓰였다. 붉은 벽돌 조적조로 4층짜리 건물인데 증·개축이 이어지며 2층과 4층 건물이 이어진 구조로 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