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 [전쟁과 분단의 기억·(12)] 경원선 끝자락, 연천 신망리·대광리·신탄리역

    [전쟁과 분단의 기억·(12)] 경원선 끝자락, 연천 신망리·대광리·신탄리역 지면기사

    피난민 정착지 'New Hope Town''신망리역' 명칭 기원… 1956년부터 운영마을내 '구호주택' 2018년까지 존재1912년 문 연 '대광리역' 과거모습 간직일대 한때 연천 이북 역중 가장 번화콘크리트 건물의 역사, 건설 연도 미상백마고지역 이전 철도종단점 '신탄리역''철마는 달리고 싶다' 명소로 각광도남북관계 경색… 경원선 복원 기약 없어■ 상리 131-1 '신망리역'수원시 효원로 299 경인일보 본사에서 120㎞를 달려 연천군 경원선 신망리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고작 20㎞를 더 북쪽으로 가면 북한이다. 달려온 길의 6분의 1만 가면 도달할 수 있는 고지를 목전에 두고 경원선 열차는 백마고지역에서 멈춘다.경기도를 지나는 경원선 열차의 최북단인 연천 신망리역·대광리역·신탄리역을 차례로 훑었다. 1910년대 완공된 경원선은 서울에서 연천·철원을 지나 원산까지 닿았다. 2000년대 들어 남북한이 평화 대화에 나서며 복원이 논의됐으나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됐다.역 이름으로 붙은 신망리(新望里)라는 명칭이 재밌다. 신망리는 마을 자체가 미군이 만든 정착지다. 1954년 5월 미군 제7사단이 피난민을 위해 조성했는데 새로운 희망을 품으라는 의미, 즉 'New Hope Town'이라는 뜻에서 신망리가 됐다.처음엔 100호 정도 선착순으로 피난민이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신망리란 이름이 붙기 전 '웃골'이라고 불렸고 일제강점기엔 이를 한자어로 읽어 '상리'라고 불렀다. 웃골, 상리, 신망리에는 지금 중국음식점과 부동산과 같은 몇 개의 상점만 존재한다. 1956년 8월 21일 역무역을 두지 않는 무인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는데, 1면 1선로로 승강장과 역사가 좁다는 특징을 보인다. 간이역이기에 정식역인 대광리·신탄리역에 비해 좁은 것이다.뉴 호프 타운 신망리의 역사는 신망리역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신망리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과거 처음 지붕을 지었던 자재가 전시돼 있다. 전시된 나무 널빤지엔 영어와 숫자가 어지럽게 적혀 있다. 신망리역은 주민들이 손

  • [전쟁과 분단의 기억·(11)] 포성 잦아든 화성 매향리 '쿠니사격장·매향교회'

    [전쟁과 분단의 기억·(11)] 포성 잦아든 화성 매향리 '쿠니사격장·매향교회' 지면기사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앞바다 농섬에 고장을 일으킨 미공군 전폭기가 예정에 없던 포탄 6발을 일시에 투하, 인근 가옥 160여채에 금이 가고 주민 7명이 부상을 당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지난 8일 오전 8시30분께 비행중인 미 공군소속 A-10전폭기 3대중 한대가 엔진고장을 일으키면서 탑재 중이던 500파운드짜리 포탄 6발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앞바다 농섬(일명 쿠니 사격장)에 일제히 투하했다.이날 6발의 포탄이 떨어지면서 발생한 진동과 폭발음으로 우정면 매향1~5리 등 5개 부락 162채 가옥의 벽과 지붕 등에 금이 가고 유리창이 부서졌으며 이에놀라 대피하던 오일선씨(여·76·매향1리)와 최계월씨(여·55·매향1리) 등 7명이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해 우정면 조암리 소재 성모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사고는 3대로 편성된 미 공군 A-10전폭기 1개편대가 각각 포탄 6발씩(500파운드 짜리)을 싣고 군산 앞바다에 있는 모 사격장으로 비행하던 중 3번기가 갑자기 엔진고장을 일으키자 포탄을 쿠니사격장에 투하하라는 미공군 작전처의 긴급조치로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미군, 1951년 농섬에 포격장 조성굉음·난청·가축 유산 등 수십년 피해1956년 불발탄에 어린이 사망 기록도2000년엔 오폭 사고로 주민들 부상2002년 '국가 배상' 판결 대법 확정2005년 8월 폐쇄… 道 건축자산 등록일부 보존… 평화생태공원 탈바꿈2000년 5월 11일 경인일보에는 화성 매향리 오폭 사건이 실렸다. 쿠니사격장에 투하됐어야 할 포탄이 전투기 기재고장으로 인해 마을 주변에 떨어진 것이다. 오랜 기간 포탄 투하 공포를 겪어온 매향리의 실체가 드러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매향리 쿠니사격장은 1951년 미군이 매향리 해상의 농섬을 포격장으로 만들고 사격 연습을 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1955년 2월 미군 공식 사격장으로 지정됐다. 1968년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 및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은 농섬을 포함해 2천277만㎡를 해상 사격장으로, 육지사격장 면적은 125만㎡로 정했다. 이에 따라 총면적 2천400만㎡

  • [전쟁과 분단의 기억·(10)] 새 운명 기다리는 파주 미군반환공여지

    [전쟁과 분단의 기억·(10)] 새 운명 기다리는 파주 미군반환공여지 지면기사

    접경지 경기도, 휴전후 곳곳에 기지50여년 지나 캠프 통폐합, 철수 시작핵심 주둔지 평택행, 용산은 공원화2006년 '공여구역 특별법' 제정에도적은 국비 보조… 도내 활용안 부진일제시대 농장 자리에 '캠프 하우즈'20여개 건물 역사적 가치 판단 필요다른 캠프서 볼수 없는 건축 양식도민통선 반환 공여지 '캠프 그리브스'퀸셋막사 일부, 아카이브 공간 활용'전쟁문화유산 보전' 우수사례 평가타 캠프도 보존·개발 '투트랙' 필요 ■ 미군반환공여지들 엇갈린 운명한국전쟁을 기점으로 경기도는 미군의 주요 거점이 됐다. 북한과 맞닿은 북방 경계였기에 휴전에 돌입하며 당연한 수순처럼 미군 캠프가 설치됐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미군 2사단이 동두천에 주둔하며 미군 캠프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경기도 미군 캠프는 1954년 집중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다.미군 캠프가 철수된 건 반세기가 지나서다. 주한 미군 캠프를 통폐합하고 재편성하는 연합토지관리계획(2002년·LPP)과 이어진 용산기지이전협정(2004년·YRP)이 계기가 됐다. 미군이 떠나며 돌려받은 주한미군 공여구역의 전국 면적은 242.07㎢ 인데 그 중 경기도에 210.61㎢가 있다. 한때 도시 전체 면적의 40% 이상을 미군 캠프로 내줬던 동두천이 대표적인 예다.협정에 따라 미군 핵심 주둔지가 평택으로 이전했고, 한국 미군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용산기지도 공원으로 탈바꿈을 앞두고 있다. 미군 캠프가 떠나고 남은 경기도 미군반환공여지의 운명은 지역별로 엇갈렸다.미군 캠프 철수 사업은 핵심 주둔지인 용산, 이전 대상지인 평택, 이전 대상인 경기도 미군캠프의 3개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우선 이전 대상지인 평택은 2004년 제정된 '평택지원 특별법'에 따라 발전계획의 80%·기반시설의 100%를 국비로 보조해 새로운 미군 캠프 조성을 뒷받침했다. 용산을 대상으론 2007년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제정됐다. 공원조성비의 100%를 국비로 지원해 국가 책임 아래 공원을 조성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이전 대상인 경기도

  • [전쟁과 분단의 기억·(9)] 갈등과 평화 사이 '공동경비구역 JSA'

    [전쟁과 분단의 기억·(9)] 갈등과 평화 사이 '공동경비구역 JSA' 지면기사

    '전쟁과 분단의 기억'은 존재하나 잊힌 유산을 다뤘다. 용치, 폐철교, 노르매시 야전병원, 가평·남양·고양고, 파주 장곡리 움집, 오산감리교회·이천양정교회, 동두천 샬롬하우스, 의정부 뺏벌마을은 기억해야 할 유산이다.아홉 번째로 찾은 유산은 너무나도 유명해 기억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기억의 장소다. 바로 공동경비구역 JSA다. 1980년대생인 기자에게 공동경비구역 JSA의 기억은 동명 영화로 각인됐다. 2000년 개봉한 영화감독 박찬욱의 출세작이자 이병헌, 송강호, 이영애, 신하균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열연으로도 주목을 모은 작품이다.1963년생인 박 감독에겐 1976년 일어난 '판문점 도끼 만행'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것이다. 예술가의 유년기에 깊게 박힌 경험은 30여년 세월 후에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회자될 영화로 탄생했다. 또래가 2000년대에 입대한 우리 세대에게 JSA 근무는 좋은 안줏거리가 됐다.JSA에서 군 생활을 한 동기가 휴가를 나오면 삼삼오오 모여 정말 영화처럼 남북한 군인이 마주 보고 경계 근무를 하는지 이야기도 하고 침도 뱉고 그런 게 정말 가능한지 묻는 게 이야깃거리였다. 1960년대생에게 JSA가 판문점 도끼 만행으로, 1980년대생에겐 동명 영화로 기억된다면 2000년대생에게 JSA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이 아닐까.동서 800m·남북 400m… 1953년 정전협정후 형성남측 지휘통제권 유엔사 보유… 경비 임무는 국군서울 기점 남쪽 목포·북쪽 의주 잇는 '의주로' 선상'역사적 사건' 주무대… 1976년 북한군 '도끼만행'2000년 '박찬욱 영화' 흥행… 2017년 인민군 귀순2018년 남북 정상 만남… 이듬해 트럼프 포함 회동 2018년 4월 27일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JSA, 그러니까 판문점에서 만날 때 기자는 고양 일산 킨텍스 프레스센터에 있었다. 이날 회담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이뤄졌는데 평소엔 전시회가 열리던 거대한 공간을 3천명 가량 취재진이 가득 채웠다.공식 기록으론 내신 176개사 2천1

  • [전쟁과 분단의 기억·(8)] 캠프 스탠리 옛 기지촌 '의정부 뺏벌마을'

    [전쟁과 분단의 기억·(8)] 캠프 스탠리 옛 기지촌 '의정부 뺏벌마을' 지면기사

    뺏벌마을을 이렇게 설명해보면 어떨까. '빼뻘은 주름이다', '빼뻘 마을 산은 도봉산보다 좋다', '빼뻘 마을은 사람과 사이에 풋풋한 정이 있는 곳', '처음처럼 왔다가 빼뻘처럼 가는 거지'.15일 의정부시 고산동 508-75번지 뺏벌마을을 찾았다. 실은 저 문구는 뺏벌마을에 만들어진 예술가와 주민의 공간 '빼뻘보관소' 창문에 적힌 글귀들이다.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해보자.의정부시 고산동 일대 6만7천여㎡에 걸쳐 건물 130여채, 490여명의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 뺏벌마을이다. 미군 캠프 스탠리 후문을 기점으로 형성된 기지촌인데 부대가 산 위에 있어 가파른 언덕배기에 좁다란 길목을 따라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다.한때 이태원 방불… 미군 떠나며 쇠락고산동 일대 130여채·490여명 거주중토지의 대부분 '전주 이씨 문중' 소유주민들 땅값 치를 형편 안돼 세입자로 예술가들과 연대, 마을 기록하고 지켜다양한 삶의 흔적 SNS 'ㅃㅃ보관소'에'처음처럼 왔다가 빼뻘처럼 가는 거지'이들의 노력에도 위태로운 기억·역사1960년대부터 형성됐는데 2006년 평택기지 건설이 결정된 이후 미군 대다수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뺏벌마을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송산로 남쪽에 위치한 마을은 동서방향으로 긴 형태에 마을 서쪽 끝엔 캠프 스탠리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좁은 골목·작은 상점은 서울의 이태원이나 해방촌을 떠올리게 한다. 구릉에 자리 잡은 마을은 수락산 도정봉과도 이어진다. 영어로 표기된 상점의 간판과 메뉴를 보건데 평소 미군 이외에 마을을 찾는 외지인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미군기지 이전 이후 급격한 쇠락기를 겪고 있는 마을은 마을 턱 밑까지 밀고 들어온 고산지구의 고층 아파트와 대비된다. 마을 능선에서 바라본 풍경이 초현실적이다. 60년대 풍경을 간직한 골목 사이로 비친 브랜드 아파트들은 서로 다른 2개의 사진을 합성한 것 같은 착각을 부른다.뺏벌의 유래는 배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설과 한 번 들어오면 발을 못 뺀다는 두 가지 뜻으로 전해지는데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뺏벌마을은 '빼뻘'이

  • [전쟁과 분단의 기억·(7)] 옛 미군 거리의 쉼터 '동두천 샬롬하우스'

    [전쟁과 분단의 기억·(7)] 옛 미군 거리의 쉼터 '동두천 샬롬하우스' 지면기사

    "DDC&ME, 아직 슬픔에 잠겨있는 거리. DDC&ME 밤마다 뛰쳐나왔던 길거리. 힘들게 자랐어 동두천이 뿌리"(폴로다레드·DDC&ME/Going Up)래퍼 폴로다레드는 동두천 출신이다. 그래서 랩에 동두천을 주제로 한 가사가 많다. DDC로 약칭한 동두천은 생활에 쪼들렸던 어린 시절을 상징하면서 래퍼로 성공가도를 달려 이제는 벗어난 고향, 높은 곳으로 향하는(Going Up) 출발점이다. 높은 곳과 반대인 낮은 지점, 밑바닥으로 DDC가 등장하면 묘한 설득력을 지닌다. 왜일까. 동두천 형성과 역사에 미군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군 주둔 시점은 현대 한국사에 가장 초라한 장면이다. 고향 마을에 밀려 들어온 이방인,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지촌, 음식과 복식으로 낯선 외래문화가 퍼져가는 현상. 뉴욕에 브롱스가 있다면 서울엔 이태원과 해방촌, 경기도엔 동두천이 있는 것이다. 이들 지역은 유사한 문화 상징 자본을 공유한다.정한아 소설 '리틀 시카고' 배경 장소한국전후 미군 주둔… 1969년 지어져선교·영어교육… 2019년 화재로 폐허미군이 평택으로 떠나며 일대 '유령화'인적 끊기고 기지 환경정화 문제 남아50년간 이곳 아이들 아픈 꿈 꾸었을 것 문학에서도 동두천은 같은 상징으로 쓰인다. 정한아의 소설 '리틀 시카고'(문학동네·2012년)는 미군이 드나드는 동두천 골목의 레스토랑·클럽·세탁소·교회·양복점·슈퍼 그리고 '샬롬하우스'를 다룬다. 그렇다. 샬롬하우스는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배경이 아니라 실재했던 장소다.샬롬하우스는 동두천시 생연동 510-2번지에 1969년 4월 10일 지어졌다. 동두천에는 한국전쟁 휴전 무렵부터 미군이 주둔했다. 그들이 평택으로 대량 이주하기 전까지 동두천은 말 그대로 미군도시였다. 실존하는 건물 샬롬하우스와 소설 '리틀 시카고'는 모두 미군이 만든 동두천과 미군이 떠난 동두천을 보여준다.샬롬하우스는 선교와 영어교육을 하는 기관으로 쓰였다. 붉은 벽돌 조적조로 4층짜리 건물인데 증·개축이 이어지며 2층과 4층 건물이 이어진 구조로 바

  • [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

    [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 지면기사

    오산감리교회가 들어선 건 1904년 일이다. 미국 선교사 노블 밀러 목사가 수원지역을 순회하며 당시 오산리 442-2번 일대에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교회를 개척했다고 전해진다.한국감리교회 초기 역사에 노블 밀러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선교사는 없다고 한다. 노블·밀러 선교사를 묶어 지칭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윌리엄 아더 노블과 룰라 아델리아 밀러는 19세기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했다. 노블 목사의 부인인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는 배재학당에서 서양음악을 가르친 최초 여교사라고 한다. 노블 목사는 현재 오산·화성·수원을 엮은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던 수원지역에서 활동하며 선교와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노블 부부는 조선에서 두 아들을 이질로 잃었다.룰라 밀러 선교사는 1907년 수원삼일여학교 교장을 지냈다. 삼일여학교는 현재의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구 매향여상)다. 수원시 매향동에 지어진 삼일여학교는 1902년 기독교 이념으로 건립됐다.1904년 초가로 지어진 '오산감리교회'일제시대 적벽돌로… 한국전쟁때 폭격1·4후퇴뒤 인민군 본부로 '기구한 운명'원조로 복구…현재도 오색시장 중심에노블·밀러 선교사에 의해 개척된 오산 최고(最古) 교회인 오산감리교회는 초기엔 초가(草家)로 지어졌다. 1907년 5월 3일의 일이다. 벽돌건물로 교회가 다시 건립된 건 1934년이다. 99㎡(30평) 가량 규모에 적벽돌로 지어진 교회는 한국전쟁 때까지 살아남았다. 1951년 1·4 후퇴 이후 인민군이 일대를 점령한 뒤론 인민군 본부로 쓰였다.교회에서 인민군 본부로 변한 기구한 운명에 적벽돌 건물은 폭격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후 1954년 7월 22일 오산리 844-7번지 일대에 198㎡(60평) 규모 현재의 돌예배당을 지었다. 조영행·조광현·이주찬·황달용이 대지를 기부했고 미군 물자와 복구비로 건립됐다고 전해진다.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은 오산오색시장 한복판에 있다. 오색시장이라고 쓰인 정면 간판을 지나 20m 남짓 시장으로 이동하면 왼편에 예배당이 나타난다. 시장길은 아케이드 지붕으로 덮여 있고 교회 쪽은 지붕이

  • [전쟁과 분단의 기억·(5)] 피난민 안식처 '파주 장곡리 움집'

    [전쟁과 분단의 기억·(5)] 피난민 안식처 '파주 장곡리 움집' 지면기사

    제조공장이 늘어선 2차선 도로에서 고작 몇 십m 들어갔을까. 경차 한 대 지나가기 버거운 흙길 비탈에 위태롭게 집 한 채가 서 있다. 석회를 바른 벽 사이가 터져 나무와 흙으로 만든 내용물이 노출된 집. 슬레이트 지붕에 나무 기둥, 흙벽으로 구성된 오래된 목조 주택이었다. 70년을 살아남은 이 집은 '장곡리 움집'으로 불린다. '가옥'이 아닌 '움집'이라 명명한 데는 이유가 있다.얼핏 봐선 60년대 이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슬레이트 지붕 가옥 같지만 가까이서 본 실상은 말 그대로 '움집'이었다. 선사시대 얼기설기 엮어 겨우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만 지어진 움집처럼 한국전쟁 피난민들은 수수깡, 아카시아 나무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겨우 지붕을 삼았다.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건 수십 년이 지난 뒤다.한때 140채 가량 존재했지만… 현재 6채만 남아 방치최근까지도 거주 흔적… 형체 알기 힘들정도로 훼손미군,이북서 내려온 사람들 파주 일대에 수용소 조성남쪽으로 가지 못한 피난민들 원조물품 활용해 지어마을 70년전 참상 간직… 인근에는 현대식 건물 즐비피난을 위한 움집이었지만 원형이나 장방형으로 구들까지 깔아 제법 가옥의 모습도 갖췄고, 뒤뜰엔 좁지만 마당까지 있다. 움집에 거주했던 이들은 대부분 인근 파주 장단면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라고 전해진다.북녘과 가까운 파주시 조리읍 장곡리에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직접 만들어 사용한 집이 아직까지 보존돼 있다는 건 신기한 사실이다. 실은 보존이 아닌 방치지만 말이다.140채 가량 존재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 6채뿐.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고작 1채에 불과하고 나머지 움집은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 모습을 유지한 움집에는 LPG 가스통이 설치돼 있어 근래까지 누군가 거주한 흔적이 보였다. 물론 지금은 허물어진 벽 파편과 비가 와 쓸려왔을 흙이며 나무가 쌓여 사람이 살기 적합해 보이진 않았다.장단면보다 남쪽지역인 장곡리로 피신한 피난민들은 미군이 원조한 나무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 [전쟁과 분단의 기억·(4)] 전쟁 속 피어난 희망, 가평고·남양고·고양고

    [전쟁과 분단의 기억·(4)] 전쟁 속 피어난 희망, 가평고·남양고·고양고 지면기사

    포격이 쏟아지는 한국전쟁, 그들은 내일을 준비했다. 학교가 문을 닫고 건물이 무너졌어도 천막 안에 옹기종기 모여 글을 배우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이를 본 주민들이, 군인들이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탰고 그곳에서 희망이 시작됐다.美 40사단 장병 2불씩 모아 '가평 가이사 중·고'가평고로 이름 바꿔 현재까지… '역사관' 조성지금도 졸업식 참석·장학금 전달 등 교류 지속마을 사람들 흙·벽돌 날라 세운 '화성 남양고'옛 건물 행정동으로 사용… 곳곳에 과거 흔적보존은 잘 됐지만 설명 표지판 등 부재 아쉬움학생들 돌 나르고 美 공병대가 토대 '고양고'세월 지나 대강당만 남아… 市상징물로 지정"한국전 이후 교육시설 상황 확인 가치 높아" ■ '2달러의 기적', 가평고박상예 가평고 교장은 1980년대 가평중, 가평고를 졸업했다. 지난해 자신이 졸업한 모교의 교장으로 부임했는데, 신입생이 들어오면 꼭 '역사관'을 데려간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 박 교장의 철학이기 때문이다.한반도 정중앙에 위치해 한국전쟁 당시 가평군은 전략적 요충지로 꼽혔다. 그런 곳에 있던 가평중학원은 전쟁이 발발하자 무기한 휴교를 택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르고 가평중학원은 피난 천막 4개를 빌려 다시 문을 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학생들은 공부를 놓지 않았고 이를 본 미 40사단 조셉 프링글 크릴랜드는 학교를 세우겠다고 결정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40사단 군인들이 2달러씩 모았고 그렇게 '가평 가이사 중학교, 고등학교'가 세워졌다. 건립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40사단 장병 중 최초 전사자였던 케네스 카이사 주니어의 이름을 딴 것이다.지금은 이름 또한 가평고로 바뀌고 당시 세워졌던 건물 대신 다른 건물이 세워졌지만, 이 같은 역사를 가평고 '역사관'은 담고 있다. 가평고 설립 당시 사진부터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는 미 40사단과의 인연이 쌓여 있으며 한 졸업생은 최초 전사자였던 케네스 카이사 주니어 사진에 '당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영원히 사랑합니

  • [전쟁과 분단의 기억·(3)] 노르웨이 야전병원 '노르매시'

    [전쟁과 분단의 기억·(3)] 노르웨이 야전병원 '노르매시' 지면기사

    2010년 동두천의 한 육군 부대로 전입한 한 군 관계자는 관할 훈련지 내에 방치된 한 '목조시설'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분명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시설처럼 보였지만, 무성히 자란 잡초에 둘러싸인 채 어떠한 문패도 없이 관리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발견한 시설이 6·25전쟁 당시 노르웨이 참전용사들과 파견 의료진들이 3년 동안 사용했던 야전병원 '노르매시'(NORMASH)라는 사실을 주민들을 통해 알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지구 반대편 노르웨이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달려온 이방인들의 피와 땀이 뒤섞인 유산이 어찌 이리 수십 년 동안 방치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다. 곧장 그는 동두천시에 시설 관리와 보수, 문화재 지정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시는 당장 투입할 예산과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이대로 노르매시가 지닌 역사·문화적 가치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결국 군인 본분을 이어가면서 틈틈이 직접 보존에 나서기 시작했다. 2010년, 훈련지 내 방치된 건물 발견당시 동두천시 관리 어렵다 답변에 나서홀로 전기공급·주소등록 등 보존 노력'노르매시' 1951년 민간 의료진이 개원전쟁상황서 군·일반인 포함 9만명 진료전후 남아 '국립중앙의료원' 건립 지원2월 노르웨이 국회의장단 등 현장 방문양국 우호 상징… '문패'마저 도둑맞아 "역사 담긴 문화유산 누군가는 지켜야" ■ '문패'도 도둑맞았던 노르매시, 한 군인에 의해 재탄생하다동두천시 하봉암동에 위치한 노르매시를 찾았다. '군사시설'이라 적힌 표지판과 철책선에 둘러싸인 노르매시 앞은 이날도 군 관계자가 지키고 있었다. 노르매시는 군 훈련장 안에 위치해 원래는 민간인의 출입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군사 지역과 분리되도록 제작된 철제 울타리와 노르매시만 왕래 가능한 쪽문을 직접 만들면서 사람들이 보다 손쉽게 시설 견학을 할 수 있게 됐다. 13년 전 노르매시는 국가기관과 지자체에 방치돼 건물만 달랑 있었지만, 시설 청소부터 전기 공급, 주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