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 [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

    [전쟁과 분단의 기억·(6)] 폐허 위 쌓아올린 신앙 '오산감리교회·이천 양정교회' 지면기사

    오산감리교회가 들어선 건 1904년 일이다. 미국 선교사 노블 밀러 목사가 수원지역을 순회하며 당시 오산리 442-2번 일대에 1904년부터 1905년에 걸쳐 교회를 개척했다고 전해진다.한국감리교회 초기 역사에 노블 밀러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선교사는 없다고 한다. 노블·밀러 선교사를 묶어 지칭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윌리엄 아더 노블과 룰라 아델리아 밀러는 19세기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했다. 노블 목사의 부인인 매티 윌콕스 노블 여사는 배재학당에서 서양음악을 가르친 최초 여교사라고 한다. 노블 목사는 현재 오산·화성·수원을 엮은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던 수원지역에서 활동하며 선교와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노블 부부는 조선에서 두 아들을 이질로 잃었다.룰라 밀러 선교사는 1907년 수원삼일여학교 교장을 지냈다. 삼일여학교는 현재의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구 매향여상)다. 수원시 매향동에 지어진 삼일여학교는 1902년 기독교 이념으로 건립됐다.1904년 초가로 지어진 '오산감리교회'일제시대 적벽돌로… 한국전쟁때 폭격1·4후퇴뒤 인민군 본부로 '기구한 운명'원조로 복구…현재도 오색시장 중심에노블·밀러 선교사에 의해 개척된 오산 최고(最古) 교회인 오산감리교회는 초기엔 초가(草家)로 지어졌다. 1907년 5월 3일의 일이다. 벽돌건물로 교회가 다시 건립된 건 1934년이다. 99㎡(30평) 가량 규모에 적벽돌로 지어진 교회는 한국전쟁 때까지 살아남았다. 1951년 1·4 후퇴 이후 인민군이 일대를 점령한 뒤론 인민군 본부로 쓰였다.교회에서 인민군 본부로 변한 기구한 운명에 적벽돌 건물은 폭격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후 1954년 7월 22일 오산리 844-7번지 일대에 198㎡(60평) 규모 현재의 돌예배당을 지었다. 조영행·조광현·이주찬·황달용이 대지를 기부했고 미군 물자와 복구비로 건립됐다고 전해진다.오산감리교회 돌예배당은 오산오색시장 한복판에 있다. 오색시장이라고 쓰인 정면 간판을 지나 20m 남짓 시장으로 이동하면 왼편에 예배당이 나타난다. 시장길은 아케이드 지붕으로 덮여 있고 교회 쪽은 지붕이

  • [전쟁과 분단의 기억·(5)] 피난민 안식처 '파주 장곡리 움집'

    [전쟁과 분단의 기억·(5)] 피난민 안식처 '파주 장곡리 움집' 지면기사

    제조공장이 늘어선 2차선 도로에서 고작 몇 십m 들어갔을까. 경차 한 대 지나가기 버거운 흙길 비탈에 위태롭게 집 한 채가 서 있다. 석회를 바른 벽 사이가 터져 나무와 흙으로 만든 내용물이 노출된 집. 슬레이트 지붕에 나무 기둥, 흙벽으로 구성된 오래된 목조 주택이었다. 70년을 살아남은 이 집은 '장곡리 움집'으로 불린다. '가옥'이 아닌 '움집'이라 명명한 데는 이유가 있다.얼핏 봐선 60년대 이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슬레이트 지붕 가옥 같지만 가까이서 본 실상은 말 그대로 '움집'이었다. 선사시대 얼기설기 엮어 겨우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만 지어진 움집처럼 한국전쟁 피난민들은 수수깡, 아카시아 나무 등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겨우 지붕을 삼았다.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건 수십 년이 지난 뒤다.한때 140채 가량 존재했지만… 현재 6채만 남아 방치최근까지도 거주 흔적… 형체 알기 힘들정도로 훼손미군,이북서 내려온 사람들 파주 일대에 수용소 조성남쪽으로 가지 못한 피난민들 원조물품 활용해 지어마을 70년전 참상 간직… 인근에는 현대식 건물 즐비피난을 위한 움집이었지만 원형이나 장방형으로 구들까지 깔아 제법 가옥의 모습도 갖췄고, 뒤뜰엔 좁지만 마당까지 있다. 움집에 거주했던 이들은 대부분 인근 파주 장단면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라고 전해진다.북녘과 가까운 파주시 조리읍 장곡리에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이 직접 만들어 사용한 집이 아직까지 보존돼 있다는 건 신기한 사실이다. 실은 보존이 아닌 방치지만 말이다.140채 가량 존재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 6채뿐.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고작 1채에 불과하고 나머지 움집은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 모습을 유지한 움집에는 LPG 가스통이 설치돼 있어 근래까지 누군가 거주한 흔적이 보였다. 물론 지금은 허물어진 벽 파편과 비가 와 쓸려왔을 흙이며 나무가 쌓여 사람이 살기 적합해 보이진 않았다.장단면보다 남쪽지역인 장곡리로 피신한 피난민들은 미군이 원조한 나무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 [전쟁과 분단의 기억·(4)] 전쟁 속 피어난 희망, 가평고·남양고·고양고

    [전쟁과 분단의 기억·(4)] 전쟁 속 피어난 희망, 가평고·남양고·고양고 지면기사

    포격이 쏟아지는 한국전쟁, 그들은 내일을 준비했다. 학교가 문을 닫고 건물이 무너졌어도 천막 안에 옹기종기 모여 글을 배우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이를 본 주민들이, 군인들이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탰고 그곳에서 희망이 시작됐다.美 40사단 장병 2불씩 모아 '가평 가이사 중·고'가평고로 이름 바꿔 현재까지… '역사관' 조성지금도 졸업식 참석·장학금 전달 등 교류 지속마을 사람들 흙·벽돌 날라 세운 '화성 남양고'옛 건물 행정동으로 사용… 곳곳에 과거 흔적보존은 잘 됐지만 설명 표지판 등 부재 아쉬움학생들 돌 나르고 美 공병대가 토대 '고양고'세월 지나 대강당만 남아… 市상징물로 지정"한국전 이후 교육시설 상황 확인 가치 높아" ■ '2달러의 기적', 가평고박상예 가평고 교장은 1980년대 가평중, 가평고를 졸업했다. 지난해 자신이 졸업한 모교의 교장으로 부임했는데, 신입생이 들어오면 꼭 '역사관'을 데려간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 박 교장의 철학이기 때문이다.한반도 정중앙에 위치해 한국전쟁 당시 가평군은 전략적 요충지로 꼽혔다. 그런 곳에 있던 가평중학원은 전쟁이 발발하자 무기한 휴교를 택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르고 가평중학원은 피난 천막 4개를 빌려 다시 문을 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학생들은 공부를 놓지 않았고 이를 본 미 40사단 조셉 프링글 크릴랜드는 학교를 세우겠다고 결정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40사단 군인들이 2달러씩 모았고 그렇게 '가평 가이사 중학교, 고등학교'가 세워졌다. 건립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 40사단 장병 중 최초 전사자였던 케네스 카이사 주니어의 이름을 딴 것이다.지금은 이름 또한 가평고로 바뀌고 당시 세워졌던 건물 대신 다른 건물이 세워졌지만, 이 같은 역사를 가평고 '역사관'은 담고 있다. 가평고 설립 당시 사진부터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는 미 40사단과의 인연이 쌓여 있으며 한 졸업생은 최초 전사자였던 케네스 카이사 주니어 사진에 '당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영원히 사랑합니

  • [전쟁과 분단의 기억·(3)] 노르웨이 야전병원 '노르매시'

    [전쟁과 분단의 기억·(3)] 노르웨이 야전병원 '노르매시' 지면기사

    2010년 동두천의 한 육군 부대로 전입한 한 군 관계자는 관할 훈련지 내에 방치된 한 '목조시설'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분명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시설처럼 보였지만, 무성히 자란 잡초에 둘러싸인 채 어떠한 문패도 없이 관리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발견한 시설이 6·25전쟁 당시 노르웨이 참전용사들과 파견 의료진들이 3년 동안 사용했던 야전병원 '노르매시'(NORMASH)라는 사실을 주민들을 통해 알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지구 반대편 노르웨이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달려온 이방인들의 피와 땀이 뒤섞인 유산이 어찌 이리 수십 년 동안 방치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다. 곧장 그는 동두천시에 시설 관리와 보수, 문화재 지정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시는 당장 투입할 예산과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이대로 노르매시가 지닌 역사·문화적 가치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결국 군인 본분을 이어가면서 틈틈이 직접 보존에 나서기 시작했다. 2010년, 훈련지 내 방치된 건물 발견당시 동두천시 관리 어렵다 답변에 나서홀로 전기공급·주소등록 등 보존 노력'노르매시' 1951년 민간 의료진이 개원전쟁상황서 군·일반인 포함 9만명 진료전후 남아 '국립중앙의료원' 건립 지원2월 노르웨이 국회의장단 등 현장 방문양국 우호 상징… '문패'마저 도둑맞아 "역사 담긴 문화유산 누군가는 지켜야" ■ '문패'도 도둑맞았던 노르매시, 한 군인에 의해 재탄생하다동두천시 하봉암동에 위치한 노르매시를 찾았다. '군사시설'이라 적힌 표지판과 철책선에 둘러싸인 노르매시 앞은 이날도 군 관계자가 지키고 있었다. 노르매시는 군 훈련장 안에 위치해 원래는 민간인의 출입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군사 지역과 분리되도록 제작된 철제 울타리와 노르매시만 왕래 가능한 쪽문을 직접 만들면서 사람들이 보다 손쉽게 시설 견학을 할 수 있게 됐다. 13년 전 노르매시는 국가기관과 지자체에 방치돼 건물만 달랑 있었지만, 시설 청소부터 전기 공급, 주소 등

  • [전쟁과 분단의 기억·(2)] '철거 기로'에 선 접경지 폐철교

    [전쟁과 분단의 기억·(2)] '철거 기로'에 선 접경지 폐철교 지면기사

    대한민국 최전방인 파주와 연천을 가기 위해선 거쳐야 할 '관문'들이 있었다. 갈라진 남·북한을 관통해 흐르는 한탄강과 임진강, 이들을 횡단하기 위해 각 지역에 설치된 '철교'들은 100년 이상을 그 자리에 지키며 인력 수송과 물자 보급에 쓰였다. 철교는 한 세기를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숱한 세월의 파고 속에 일제 수탈의 아픔을 겪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땐 온 몸이 찢기는 생채기가 나기도 했다. 휴전된 이후엔 접경지역 주민들의 통근과 생계를 책임지는 삶의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한반도의 근대사를 온 몸으로 견뎌 낸 철교는 이제 '고물' 취급을 받는다. 경기도에 있는 많은 철교들이 철거 위기에 놓였다. 그 쓰임과 사용 연한이 다했다는 것이다.그런데 생사고락을 함께 견뎌 온 지역 주민들은 격렬히 반대한다. 세상은 낡고 쓸모 없어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철교와 함께해 온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다. 도대체 철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떤 역사를 지녔길래,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보존에 나섰을까.한탄강·임진강 관통하며 100년 이상 남북 물자·인력 수송한 철교일제 수탈·한국전쟁 겪으며 생채기… 역할 다하고 흉물 취급 '해체 위기'2019년 운행 중단 '한탄철교' 주민들이 나서 '문화재적 가치' 보존 주장연천군 "철도공단과 협의" 한발 물러나… 산책로·자전거길 활용 모색중'대광리 철교' 사실상 방치… '임진강 철교' 남북관계 경색에 활용 주춤"원형 훼손 등 직접적 손상 진행… 등록문화재 지정 반드시 필요" ■ 내 아버지뻘, 연천 한탄철교연천 한탄철교를 찾았다. 비교적 최근인 2019년 3월까지 열차가 운행된 바 있다. 동두천에서 연천의 중심인 전곡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3가지 다리를 만나야 한다. 한탄강을 사이에 끼고 한탄대교와 (구)한탄교 그리고 한탄철교다. 앞선 두 다리에는 차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는 것과 달리 철교 인근은 다리 구조물 군데군데가 시뻘겋게 녹이 슬고 철교 인근이 잡초에 뒤덮여있었다.철교 끝에는 본래 '한탄강역'이라는 정거장이 있었지만

  • 가슴 아픈 기억 '용치'… 유산으로써 재평가 시선

    가슴 아픈 기억 '용치'… 유산으로써 재평가 시선 지면기사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한반도의 소망은 '평화'다. 우리의 전쟁은 아직 정전상태이며 남이든, 북이든 정권이 바뀌거나 국제정세가 요동치면 한반도의 평화는 언제라도 깨지는 유리그릇과도 같은 신세다.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그중에서도 갈라진 한반도의 반쪽, 북한과 가장 많은 경계를 접하고 있는 경기도에 우리가 산다. 그래서 경기도에는 한국전쟁의 상흔과 분단으로 인한 가슴 아픈 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정전 70주년을 맞아 경인일보가 한국전쟁과 분단의 기억을 좇아 일상 속에 잔존하는 전쟁·분단의 근대문화유산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첫 번째로 마주한 문화유산은 '용치'다.용치(龍齒)는 용의 이빨을 닮았다는 데서 이름 붙여졌다. 해외에서도 드래곤 티스(Dragon's Teeth)로 불린다. 주로 전쟁 중 장갑차, 전차가 침입하는 통로를 막는 대전차장애물의 한 종류다. 그래서 주로 하천가를 비롯해 하천과 연결된 육지 등 대전차 등의 예상 침투로에 설치된다.우리나라 용치가 언제 설치됐는지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김신조 사건이라 불리는 1·21사태 이후로 남북 대치가 극심해졌던 70년대 초를 추정할 뿐이다. 경기도 내 조사된 용치들은 하나당 높이가 최소 1.5m 이상이며 최대 2m가 훌쩍 넘는 것도 있다. 주로 북한과 접경하고 있는 북부지역에 분포돼 있고 국방부가 관리하는 군사시설에 속한다.하천에 주로 설치된 용치들이 집중호우 때 물길을 막아 인근 지역을 침수시킨 범람의 원인이라는 지적에 한때 경기도와 용치가 있는 시군에선 군과 협의해 일부를 철거하기도 했다.정전 중인 한반도, 용치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군사시설이라는 국방부와 일상의 불편이라는 주민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용치를 바라보는 시선의 전부였다면, 분단을 상징하는 우리만의 독특한 유산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새로운 시선이 최근의 모습이다. → 관련기획 11면([전쟁과 분단의 기억·(1)] 대전차장애물 '용치') /공지영·신현정기자 jyg@kyeongin.com용의 이빨이란 뜻인 '용치(龍齒)'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대남 도발을 상정해 접경

  • [전쟁과 분단의 기억·(1)] 대전차장애물 '용치'

    [전쟁과 분단의 기억·(1)] 대전차장애물 '용치' 지면기사

    한국전쟁 후 분단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작물을 심는 논밭에, 매일 걷는 산책길에, 가족과 함께 찾았던 캠핑장에 늘 우뚝 서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이름을 불려본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안에서 창밖의 한탄강을 바라보던 한 주민이 강가에 줄지어 선 '그것'들을 발견했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커다란 돌기둥들이 저토록 규칙적인 모양으로 서 있을까. 그는 궁금했다. 혹시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들이라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경기문화재연구원은 그것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용치'가 세상에 그 이름을 불렸다.'경기도 최대규모' 고양 공릉천 지영교인근까지 1km 넘게 이어져 스산한 풍경1970년대 설치 이래 주민들에겐 '일상' 경기도에 있는 용치 중 최대 규모라는 고양 공릉천의 지영교 인근을 찾았다. 지영교에 들어서자마자 성인 남성 어깨 높이의 큰 돌기둥들이 일렬로 늘어선 풍경이 펼쳐졌다. 용치였다. 지영교 아래를 관통해 인근 경작지까지 1km 넘게 이어진 풍경은 처음 보는 이에겐 기괴함 마저 들게 했다. 공릉천 산책로에도 용치가 서 있었는데, 그 사이를 걷으려니 선뜻 발을 내딛기가 어려웠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와 무성하게 자란 갈대들로 스산함을 더한 탓도 있지만, 사람 키만한 돌기둥이 같은 모양새로 선 풍경은 용치가 설치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에겐 기괴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용치(龍齒)'는 용의 이빨(Dragon's Teeth)을 닮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대전차장애물의 한 종류로, 적군의 길목을 막기 위해 설치됐다. 장갑차, 전차 등이 지나갈 예상 침투로에 둔 콘크리트 구조물로 된 걸림돌 역할을 한다.용치가 언제부터 설치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대치국면이 극에 달했던 197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일명 '1·21 사태(김신조 사건)'로 불리는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습격사건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과의 전면전을 대비하기 위해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설치했다는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