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이 성장한 고향 인천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도시였다. 외국 사람과 새로운 문물이 들어온 흔적이 가득한 도시에서 성장하며 이 소장은 자연스럽게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를 배웠다. 고교 시절에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과학 법칙에도 예외가 있음을 인정하는 과학적 태도를 익혔다. 세상을 이끌어갈 성실하고 진취적인 여성을 길러내려 애쓴 인일여자고등학교의 교육 지향점은 그를 자연스럽게 이화여대 진학으로 이끌었고 그 역시 여성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게 만들었다.이 소장은 1948년 강원도 원성군(현 원주시)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 부모님을 따라 인천에 정착했기 때문에 강원도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유년 시절 기억은 옛 인천시청(현 인천 중구청) 맞은편 중앙동 한 주택가에서 시작된다. 지난달 29일 중구청 앞에서 그를 만났다.강원도 원성군에서 태어났지만세 살 무렵 부모님과 인천 정착나와 다름 인정하는 태도 배웠다이 소장은 중구청 담장 건너편 길에 있는 건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지금은 집이 남아 있지 않지만, 살던 곳이 이곳 근처였다"며 "그래도 옛 모습이 남아 있어 반갑다. 가끔 와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집 앞에서 자주 마주치던 화교(華僑) 학생들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이 소장이 살던 곳은 개항장 일대로 불리는 곳이다.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그의 집으로부터 100여m 걸어가면 중국인 거리가 나오고 인근에는 화교학교가 있었다. 화교학교는 현재도 남아 있다.한국 화교는 임오군란 시기 청나라 군역 상인 40여 명이 유입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역사가 141년 전인 1882년이다. 그들이 한반도에 지금과 같은 사회를 이루고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인 것은 1882년 10월 조선과 청나라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이후다.인천에 있는 차이나타운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생긴 중국인 마을이다. 화교 인구가 많을 때는 5천 명을 넘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약 3천 명의 화교가 인천에 살고 있다. 현재 남한 전체에는 1만6천여 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오정희 소설 '중국인 거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어른들은 무관심하게 그러나 경멸하는 어조로'뙤놈들'이라고 말했다우리는 그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음에도언덕 위의 이층집,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한없이 상상과 호기심의 효모였다 이 소장은 중국인 언니·오빠를 약 올려 크게 혼난 일을 기억해냈다."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린아이였죠. 도대체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집 앞에 혼자 앉아있다가 무리를 지어 수다를 떨며 지나가던 화교 언니·오빠들을 놀렸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동네 아이들에게서 배운 무슨 노래를 불렀던 것 같은데…. 무리 중 큰 학생이 저를 야단치고, 어머니가 학생에게 사과하시고, 저는 무척 혼나고 그런 기억이 있네요."이 소장이 지금 돌이켜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인데, 그 일이 있었던 후로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놀리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여성스럽게 길러진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긴 머리카락 때문에 시간 뺏기는게 귀찮아 부모 허락 받지 않고 잘라냈던 당찬 아이 과학계서 여성의 역할 알기라도 한 것일까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서 자신이 여성으로서 짊어져야 할 앞으로의 역할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이 소장은 '여자답게' 보이는 예쁜 긴 머리를 부모 허락도 없이 잘라낼 만큼 스스로 결정을 내릴 줄 아는 당찬 아이였다.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혜숙의 머리는 굉장히 길었고, 사랑스럽고 예쁜 여자아이 모습이었다. 그런 이 소장의 어머니에게 매일 아침 딸의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따 주는 것은 등교 전 중요한 아침 일과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이 소장은 학교 안 이발소를 무작정 찾아가 머리카락을 단발로 잘랐다. 이 소장은 긴 머리카락 때문에 시간을 뺏기는 게 귀찮았다고 한다. 머리를 자르고 더는 긴 머리와 씨름하지 않아도 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던 것으로 이 소장은 기억했다. 하지만 어머님은 상의도 없이 묻지도 않고 머리를 잘랐느냐며 그를 호되게 꾸중했다."돌이켜보면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머리를 곱게 땋아주는 시간이 행복했던 것 같아요. 아이를 여성스럽게 키우고 싶으셨겠지만, 제가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네요. 하지만 이해했어도 머리를 잘랐을 것 같아요. 그런데 단발머리가 관리하기 더 어렵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돌이켜보면 (예쁘게 보여야 하는) 그런 과정을 어딘가 불편하게 느낀 것 같아요. 여성스럽게 길러진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같아요."이 소장은 그날 이후로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때보다 지금 머리카락 길이가 더 짧다. 이 소장은 "길면, 머리에 시간을 많이 들이게 되거든요. 좀 귀찮기도 하고요. 지금도 머리를 잘 만질지 모른다"고 했다. 이 소장에게 각인된 잊지 못할 어린 시절 기억 가운데에는 '개 건너'에 송충이를 잡으러 다닌 장면도 있다. '개 건너'는 갯벌을 건너야 갈 수 있다고 해서 부르던 지명으로, 지금의 인천 서구 일대다. 당시 명칭은 북구였다."요즘 부모들이나 학생이 들으면 기겁할 이야기일 텐데요. 인천여자중학교 재학 시절 깡통에 긴 젓가락 하나 들고 '개 건너'로 송충이를 잡으러 간 기억이 남아 있네요. 해충약이 귀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들이 송충이 박멸에 동원된 것 같아요. 송충이 잡는 일을 징그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놀이하듯, 경쟁하듯 깡통을 서로 가득 채우려고 했어요. 그러다 멀리서 물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빠져나오던 기억이 있습니다."이 소장은 어머니에 대해 "여자아이인 나를 독립적으로 키우시려 했다"고 기억했다. 어머님은 "학교는 꼭 가야 하고, 학교에서 시키는 것은 꼭 해야 하며, 여자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학교 숙제를 다 마쳐야 나가서 놀 수 있었다고 한다. 맏딸인 이 소장에게는 3명의 동생이 있는데, 이 소장을 포함한 4명 모두 초등·중등학교 개근상을 받았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 하루는 이 소장이 친구들의 장난으로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급하게 병원에서 상처를 꿰맸는데, 어머니는 이 소장을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 남은 수업을 받게 했다.배움의 즐거움을 일깨워준 선생님 이 소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시 공부를 잘해야 진학할 수 있는 명문인 인천여중·인일여고에 다녔다. 중학교에 진학한 이 소장은 교복을 입고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나서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배움의 즐거움을 알려준 스승을 만난 일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과학 시간일 텐데요. 물리·화학·생물을 다 합한 그런 물상 과목을 중학교에 들어와서 참 재미있게 배우게 됐어요. 여성으로서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신 강순옥 선생님이 가르치는 물상을 만났는데,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어요. 다음에는 또 무엇을 배우게 될까 하는 기대감을 주는 수업이었어요."이 소장이 과학 행정가이면서 수학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은 강순옥 교사에게 배운 가르침이 절대 적지 않다. 이 소장은 "배움의 즐거움을 일깨워준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강순옥 선생님은 이후 인일여고에서 근무하게 된다.머리에 쏙쏙 들어온 강순옥 선생님 수업 과학 행정가·수학자의 삶으로 인도해 학교 실험실에서 보낸 시간은 행복했다 '21세기를 주도할 성실하고 진취적인 여성의 육성'을 목표로 삼는 인일여고는 1961년 인천여자중학교 병설학교로 인가를 받아 설립됐다. 같은 해 4월 첫 입학생을 받았다. 1971년 인일여고는 인천여자중학교에서 분리됐다. 1971년 21학급, 1974년 30학급을 인가받고 1975년 정부 시책에 따라 평준화 학교가 됐다. 현재 인일여고 교사상은 '연구하고 실천하며 사랑으로 가르치는 교사'이며, 학생상은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이다.이 소장은 고교 시절 학교 실험실에서 보낸 시간이 행복했다고 기억했다. 인일여고 과학 실험실은 당시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소장이 고교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실험실에 처음 갔을 때 '대학 실험실이 고등학교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인일여고 실험실이 수준급이던 이유는 강순옥 교사의 열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소장은 "선생님이 실험실 예산을 확보하려고 다른 선생님들과 경쟁도 많이 하시고 외부에서 예산을 많이 받아오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남성'이었다면, 중·고등학교 교사로 오실 일은 없었을 거예요 고교 시절 이 소장이 실험실에서 배운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장은 "예를 들어 ○○법칙에 대한 실험을 하고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고 나면 항상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로 마무리하셨어요. 항상 예외가 있다는 것이죠. 그 '룰'에 맞지 않는 결과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설명하셨어요. 과학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태도'가 예외를 인정하는 것인데, 그걸 가르쳐주신 거죠."이 소장은 고교 시절 선생님을 통해 한국에서 여성 과학인이 앞으로 싸우며 헤쳐나가야 할 현실을 미리 엿봤다."그 시절, 만약 선생님께서 서울공대 화공과를 졸업한 '남성'이었다면, 중·고등학교 교사로 오실 일은 없었을 거예요. 갈 곳이 굉장히 많고, 소위 빛나는 자리도 있었을 텐데…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회가 선생님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거죠."이 소장은 이화여대 수학과 출신이다. 고교 시절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서울대 화학과로 진학하려고 마음먹고 원서까지 썼다. 하지만 강 교사의 만류로 이화여대 수학과로 진로를 바꿨다."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들려주시더군요. 서울대 화학과에 가면 '나 같은 사람'이 되겠지만 이화여대는 (너를) 잘 키워줄 거라고요."언제나 의연하던 스승, 서울대 진학하려자 만류 자신의 뜻을 못 펼친 것에 대한 억울함 알게 돼 '여성 리더 육성' 이화여대 수학과로 진로 바꿔제자 앞에서는 여성으로 겪은 억울함을 보여주는 일 없이 언제나 의연하던 스승이었다. '잘 나가는' 남성 동기 동창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부러운 내색을 하시지 않던 분이었지만, 제자가 서울대에 진학하려는 순간 만류하셨다."그제야 알게 됐죠. 선생님께서도 자신의 뜻을 못 펼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으셨구나, 꼭꼭 숨기고 제자 앞에서는 의연하게 버티셨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그래서인지 강 교사가 근무했던 인일여고에는 유명한 여성 과학인이 많다. 이혜숙 소장뿐 아니다. 의학박사 출신인 안명옥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화학공학자인 최순자 전 인하대 총장, 생물학자인 유순애 배재대 명예교수, 해양생물학자인 안인영 전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 등이다.이 소장은 "농담으로 말씀드리곤 해요. 교사로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셨으니까 더 잘되신 거라고요. 그렇게 우리가 선생님을 위로하기도 했어요"라고 했다.이화여대 수학과에서 공부하던 시절은 행복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이화여대는 여성 리더를 육성하는 학교 비전이 확실하게 서 있었다. 재학 시절 여성으로 억울함을 느낄 일이 없었다. 여자 대학에서 여성 리더를 길러내야 한다는 소임이 몸에 밴 교수가 많았다.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한 것은 1980년이다. 그가 공부할 때와 비교하면 이공계 학문을 공부하 는 학생이 늘었고, 유학을 다녀오는 학생도 많던 시기였다. 하지만 여성 인력이 진출하기에는 여전히 과학계 문이 좁았다. 여성 과학 인력을 대하는 과학계 태도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다른 교수에게 제자를 소개해야 할 때가 있어요. 제가 이러 이러한 경력을 갖춘 학생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면 관심을 보이다가도 여성이라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는 단박에 '우리는 여성 안 뽑습니다'는 대답을 노골적으로 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저는 정색을 하고 '고소당하고 싶으냐'며 따졌죠.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다 유학을 다녀온 남성 교수들이에요. 만약 그 시절에 미국에서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소송을 겪을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대답한 것이죠. 어렵게 공부했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불공평한 일이죠."그때부터 과학계의 성별 불균형을 바꾸려 애썼다."직업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죠. 저는 교수라는 확실한 직업이 있으니, 직업이 없는 제자와 여성 과학 인력을 대신해 싸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현실을 바꾸려면 더 많은 여성이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제안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이 WISE(Women Into Science & Engineering)다. 요약하면 이공계 공부에 재능이 있는 여학생과 이들의 모델이 될만한 여성 과학자를 일대일로 맺어주는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학생과 교육 현장의 동료 교수들이 힘을 모아 알음알음 시작하던 것이 나중에 정부의 지원을 받는 정식 프로그램으로 확대되며 전국에서 사업이 진행됐다. 2002년에는 '여성 과학 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나중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기타 공공기관으로 '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가 따로 세워졌고, 그가 초대 소장을 맡았다. "이 운동을 하면서 '도대체 왜 여성 과학자가 많아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싫어서 배우지 않는 건데 억지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의 질문이었죠. 그럴 때마다 이렇게 답변하곤 했습니다. 과학을 하는 데 관점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성의 관점과 남성의 그것이 다를 수 있다. 여성의 관점이 들어갈 때 비로소 과학이 조금 더 온전해질 수 있다고요."여성 과학 인력이 과학계에 제대로 자리를 잡게 하기 위해 힘쓰던 이 소장은 어느 날 과학계의 또 다른 불균형과 마주한다.2013년 미국에서는 1997~2000년 사이 제조·판매된 10개의 약이 심각한 부작용으로 시장에서 퇴출됐다. 10개 중 8개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위험이 컸다. 미국 의회 입법 보조기관인 회계감사원(GAO)이 조사해 보니 신약 개발 과정에서 주로 수컷 동물이 사용됐고, 임상 실험도 주로 남성 위주로 진행됐다."차량 충돌 사고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실험 결과가 있기도 해요. 왜냐하면 차량 충돌 실험에 쓰는 인체 모형이 백인 남성 평균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거죠. 이러한 사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이 소장은 과학기술 성과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이롭게 하기 위해 성별의 다름을 반영하고 연구하는 '젠더 혁신'에 힘쓰고 있다. 이 소장의 설명을 들으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젠더 편향 사례'는 차고 넘친다. 젠더 편향을 극복하려면 공공의 역할뿐 아니라 개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했다."미국에서는 우리보다 조금 먼저 이런 운동을 시작했어요. 의사에게 '당신이 나를 진료할 때 남녀가 다름을 반영하느냐'고 묻는 운동인 거죠. 사실 이 문제는 연구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구 정책 기관이나 전문가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인 거죠."마음을 활짝 열고 자기한테 맞는 것을 하라 이 소장은 고향 인천의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 두 가지를 건넸다."제가 수학을 했다고 하면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겨운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는 사람들도 있고요. 사실 수학은 언어이고 규칙이거든요. 수학을 쉽게 대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나의 교양으로 수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꼭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과는 굉장히 다른 세상이잖아요. 마음을 활짝 열고 자기한테 맞는 것을 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이과·문과·예술이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요."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일여자고등학교모교인 인일여고 과학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혜숙 소장교수 시절 수학 강연을 하고 있는 이혜숙 소장. /이혜숙 소장 제공이혜숙 소장이 교내에 전시된 옛 인일여고 교정을 재현한 미니어처를 살펴보고 있다.2003년 올해의 여성과학자상 수상. /이혜숙 소장 제공모교 인일여고 과학실에 앉아있는 이혜숙 소장1996년 이화여대 자연대학 초청 강연에서 만난 1977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이혜숙 소장. /이혜숙 소장 제공2011년 WISET여성과학기술인 멘토링의 밤 개막식이화여대 대학원장 재임 시절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 명예 철학박사 학위 수여식. 사진 맨 오른쪽이 이혜숙 소장이다. /이혜숙 소장 제공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이혜숙 소장
인천 용유·무의 개발사업을 비롯해, 한상드림아일랜드, 인스파이어리조트 등 영종국제도시에서 추진되고 있는 대규모 관광 인프라 건립 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수년 안에 영종도 곳곳에 들어설 이들 관광 인프라를 연계해 인천국제공항 환승관광 활성화 등 인천 관광산업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동북아시아 최대 카지노 복합리조트로 인천 영종국제도시에 조성되고 있는 '모히건 인스파이어 엔터테인먼트 리조트'(이하 인스파이어 리조트)가 올해 말 개장한다.5성급 호텔·공연장·외국인 카지노'인스파이어 리조트' 연말 개장한상드림아일랜드 기반 마무리 인스파이어 리조트는 1천275개 객실을 갖춘 5성급 호텔, 국내 최대인 1만5천석 규모의 다목적 공연장(아레나), 4계절 이용할 수 있는 실내 워터파크, 외국인 전용 카지노 등으로 구성돼 있다. 미디어 아트 전시관, 첨단 IT기술과 쇼핑, 라이브 공연 등이 연계된 '디지털 스트리트' 등도 조성된다. 인스파이어 리조트는 올해 4분기(10~12월) 개장할 예정이며, 현재 공정률은 63%다. 한상드림아일랜드 조성 사업을 위한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의 기반 공사는 이달 중 완료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인천항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바다에서 퍼낸 준설토를 매립한 부지에 해양 레저·관광 인프라, 체육시설, 교육·연구 시설, 수변공원 등을 포함하는 해양레저관광단지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영종대교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부지 규모는 332만㎡다. 사업은 1-1단계와 1-2단계로 구분돼 있으며, 1-1단계는 2021년 7월에 준공했다. 사업 시설 가운데 우선 2025년 36홀 규모의 대중제 골프장이 문을 열 예정이다.용의·무의개발사업 산업부 승인인천공항 환승투어 증가 기대경제청, 시설시너지 연계 모색환경문제 등으로 10년 가까이 지연됐던 인천 영종국제도시 용유·무의 개발사업도 본격화 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용유 오션뷰' '무의 LK' 개발사업을 위한 개발계획 변경안이 최근 각각 산업통상자원부 승인을 받았다. 산업부 승인에 따라 이들 사업은 내년 실시계획 수립을 거쳐 2025년 일제히 착공할 수 있게 됐다.용유 오션뷰 개발사업은 중구 을왕동 일원 12만4천530㎡에 2천648억원을 투입해 펜션과 콘도 등 '프라이빗 힐링리조트'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다. 무의 LK는 중구 무의동 일원 124만6천106㎡에 1천900억원을 들여 단독·공동주택과 상업·관광위락시설 등을 짓는 사업이다.영종국제도시 일대에서 진행되는 이들 관광인프라가 모두 완공되면 인천은 수도권 유일의 해양 관광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특히 인천국제공항과 연계한 환승관광객도 큰 폭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지난달 인천공항 전체 여객은 461만8천918명으로, 이 중 환승객 비율이 11.6%(53만9천192명)로 집계됐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9년 같은 달 9.0% 대비 2.6%p 올라간 수치다. 환승객이 늘어나면서 인천공항공사가 운영하는 환승투어 수요도 증가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홍대나 광장시장, 청와대 등 서울에 있는 관광지로 몰리고 있다. 인천지역의 경우 송도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중구 신포동·개항장 일대가 주요 관광 코스지만 서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찾는 이가 별로 없다고 한다.인천경제청 관계자는 "영종국제도시에 대규모 관광인프라 구축 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며 "관광분야 유관기관과 함께 이들 관광시설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연계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
경인일보와 가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6회 바다그리기대회 시상식이 13일 오후 가천대 메디컬센터 간호대학 대강당에서 개최됐다.바다그리기대회는 인천지역 최대 해양축제이자, 전국 최대 규모의 사생대회다. 1998년 제1회 대회가 열린 이후 매년 5월 인천지역 학생들이 바다를 소재로 미술 실력을 뽐내고 있다. 바다그리기대회는 '바다의 날(5월 31일)'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5월에 개최된다. 올해 행사는 지난 5월 20일 인천 월미도 문화의 거리와 송도국제도시 솔찬공원, 인천항 갑문 등 3곳에서 진행됐다.6200여명 참가… 온라인 1200점국회의장상 문지선 "공부에 도움"대회가 치러진 3곳에서 학생과 학부모 1만5천여 명이 몰렸다. 6천200여 명의 학생들이 현장에서 그림을 그려 작품을 제출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축소해 개최했던 바다그리기대회는 2019년 이후 4년 만에 마스크를 벗고 온전하게 열렸다. 대회 참가자들은 화창한 날씨 속에서 푸른 바다를 보고 느끼며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4월 12일부터 5월 19일까지 진행된 온라인 공모전에도 1천200여 점이 출품됐다. 이날 시상식엔 대상·최우수상 등 수상자 46명과 가족들이 참석했다.국회의장상(대상)을 받은 문지선(인천 동방중2) 양은 "그림을 완성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집에 돌아가 속상한 마음이 있었는데, 큰 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기도 했고 기뻤다"며 "이번 수상이 앞으로 미술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해양수산부장관상(대상) 수상자인 강승아(인천 용학초6) 양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매년 바다그리기대회에 참가해 올해 대상을 받았다. 강승아 양은 해양 환경에 악영향을 주는 페트병이 고래 몸 속에 들어있는 그림을 그렸다.강승아 양은 "바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래를 그렸고, 바다가 더욱 깨끗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림을 그렸다"며 "큰 상을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강승아 양의 어머니인 김미영 씨는 "매년 참가했지만 입선을 받은 것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대상이라는 소식을 듣고 딸아이가 무척 좋아했다"며 "이번 대회 수상으로 미술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커질 것 같아 부모로서도 기쁜 마음"이라고 말했다. 윤예진(인천부원초6) 양은 대상인 인천광역시장상을 받았다. 윤양은 "현장에서 너무 기분 좋게 그림을 그렸는데, 수상까지 하게 돼 기쁘다"며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시장상 윤예진 "기분 좋게 그려"아이 자신감 커져 '학부모도 미소'이날 행사에는 유정복 인천시장, 류석형 인천시교육청 정책기획조정관, 이희정 인천국제공항공사 부사장, 김웅희 인하대학교 대외부총장, 임재길 가천대학교 보건과학대학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이 참석해 수상자들을 축하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어린 학생들의 꿈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바다그리기대회가 가진 의미가 크다"며 "여기 있는 모두는 미래의 소중한 자산이자,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도전정신과 꿈을 키워나가는 마음, 희망을 잃지 말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린다"고 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유정복 인천시장이 13일 오후 인천 연수구 가천대학교 메디컬캠퍼스 간호대학 1층 대강당에서 열린 '제26회 바다그리기대회 시상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2023.7.1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인천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바다를 향해 열린 도시였고 신문물을 들여오는 창구와도 같았다. 밀물과 썰물처럼 부딪히면서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공간이었다. 박정남(63·사진) 전 주가봉 한국대사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그런 인천의 개방성을 떠올렸다. 그의 고지식하면서도 유연하고, 단호함 속에 신중함을 담고 있는 모습이 고향 인천과 닮아 보였다.박정남 전 대사는 직업 군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충남 논산 연무대초등학교(현 연무초등학교)에 입학해 3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인천서흥초로 전학하면서 인천에 정착했다. 인천남중, 인천대건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거쳐 1991년 외무고시 25회로 외교부에 입부했다. 스리랑카, 미국, 폴란드, 이스라엘, 이집트, 러시아, 가봉 등 7개국에서 근무했다. 직업군인 부친 따라 서흥초 전학내성적 성격 나라별 조크로 극복"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해야"외교관 생활에는 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상대방이 존재한다. 새로운 만남의 연속이다. 한국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내거나, 문제 해결을 요청하고 요구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그는 내성적 성격을 조크로 극복했다. "거의 모든 상황에 쓸 수 있는 조크"를 영어, 불어, 러시아어, 아랍어로 익혔다. 또한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내린 결론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명한 사실이었다.인천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주한 미국 공사관의 외교관으로 조선과 미국을 연결한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1858~1932)의 별장이 있었다. 1901년 완공돼 인천 거주 외국인의 사교장으로 쓰인 제물포구락부는 서울 정동구락부보다 3년 앞선다. 차이나타운을 비롯해 인천 전역에 여러 국가 외국인 거류지가 형성돼 있으며, 한국 첫 공식 이민이 시작된 인천에 최근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청이 들어섰다. 이역만리 타국 생활 이민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는 과제가 인천시민 앞에 놓여 있다. 고향 인천에 재외동포청이 들어섰다는 것은 외교부 출신으로 다양한 나라에서 재외동포들을 만난 박정남 전 대사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박 전 대사는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여러 여건이 다르다고 해도 '베이직 휴먼 네이처'(인간의 본성)는 모두 똑같다. '나와 똑같은 인간이다'는 입장에서 접근하면 된다"고 말했다. 인천 출신으로 세계를 경험한 외교관이 제언한 공존의 조건이다. → 관련기사 5면([I'm from 인천·(5)] 고집 있던 소년, 7개국 휘젓는 공직자 길을 걷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인천 연수구 동춘동 성당 옆에 위치한 인천대건고는 본래 동구 화수동 성당 부근에 있던 중·고 통합 학교였다. 1998년 7월 학교를 옮기기 전까지 화수동 영풍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대건중·고등학교 교명은 천주교가 인수(1962년)한 이후인 1963년 2월 얻었다. '대건'은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이름에서 본떴다. 이 학교의 전신은 1946년 미군정기 설립 인가를 받은 인천영화중학교다.인천대건고가 천주교의 품에 들어온 이후 1970년대까지 인천대건고의 학풍은 '실력'과 '자율' 요약되는데 제 5대 교장(1966~1971년) 노봉 요셉(Joseph Gibbons·사진) 신부가 이런 기풍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빡빡머리·운동화 규율 밀어두고 자율 허용젠틀하면서도 일률적이지 않은 면학 분위기인천대건고 독특한 기풍 이어진 시작점노봉 신부는 교장 부임 첫해 제물포고 출신 교사를 여러 명 영입했는데, 이중 오춘근 선생이 교감으로 부임해 주도적으로 '학력 신장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대건고는 교육 당국 허가를 받아 '입학시험 커트라인제'를 1966년도 중·고교 입학 전형부터 도입했다. 학교가 정한 성적에 못 미치면 정원이 미달할지라도 선발하지 않았다. 1966년 입학생(14회)의 졸업 인원은 24명, 1967년은 22명에 불과했다. 등록금 수입이 크게 떨어졌지만, 인천 가톨릭 교육재단과 노봉 신부가 속한 메리놀외방전교회가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름방학 때 덕적도에서 영어회화 합숙 훈련을, 겨울방학엔 강당에서 특별 합숙 교육을 무료로 벌였다. 동급생보다 학업 성적이 크게 떨어지는 학생은 스스로 유급하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을 선택하는 문화가 존재했다. 빡빡 머리에 운동화만 신게 하던 당시 대부분 학교의 규율과 달리 대건고는 두발, 신발에 큰 제한을 두지 않았다.1971년 선종한 노봉 신부 후임으로 오춘근 교감이 6대 교장(1972~1977년)에 오르면서 인천대건고의 독특한 기풍이 이어질 수 있었다.1978년 대건고를 졸업한 김재민 전 송도고 교사는 "노봉 신부님은 학생들 되게 열심히 가르치신 분으로 들었고, 그 신부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학풍이 1975년 평준화 이후에도 이어져 왔다"라며 "젠틀하면서 일률적으로 강제하지 않는 면학 분위기 속에서 학창 생활을 보냈다"라고 전했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인천대건고 5대 교장인 노봉 요셉 신부.
그는 늦깎이로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91년 4월 제25회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했는데 응시 제한 나이(만 32세)를 몇 개월 앞둔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해 합격자 중 나이 순으로 위에서 3번째, 최연소 합격자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외무부(현 외교부)에 입부했다. 그렇게 된 사연이 있다.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인 1981년 외무고시 1차에 합격했다. 고교 시절부터 품어 온 외교관 꿈의 실현이 눈앞에 한발 다가왔지만, 불현듯 찾아온 회의감이 머릿속을 휘젓다시피 했다. 세상사 무심한 듯 영어 공부와 고시에 몰입해 온 청년에게도 눈과 귀가 있었다. '모두 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고, 붙잡혀 감옥에 가는데, 나만 개인의 영달을 추구해도 되는가'라는 물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싸움에 나설 용기는 없었다. 소극적 저항이랄까. 고시를 포기했다. 집에 알리지는 못하고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부유했다. 나만 개인의 영달을 추구해도 되는가독재정권 당시 괴로움에 고시 접어6·29 선언 후에야 부채의식 덜었다만 32세, 늦깎이 외교관의 길 시작남들보다 네다섯 살 늦은 나이에 사병으로 입대해 최전방 GP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중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 한 6·29 선언이 나왔다. 6·29 선언 이후 국내 정세에 대한 판단은 각자 다르겠지만, 외교관을 꿈꿔 온 청년의 부채의식을 덜어내기엔 충분했다. 제대하고 1988년부터 외무고시에 다시 도전했다. 1991년 꿈에 그리던 외교관이 돼 약 28년간 외교부에서 그리고 세계 7개국(스리랑카, 미국, 폴란드, 이스라엘, 이집트, 러시아, 가봉)에서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박정남(63) 전 주가봉 한국대사 얘기다.박정남 전 대사의 선대인(박제근)은 평안북도 박천 출신으로 해방 이듬해 형제들과 함께 황해도 해주를 거쳐 인천 문학동에 정착했다. 한국전쟁 기간 1·4 후퇴 때 열여섯 나이에 이등병으로 입대해 1976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박 전 대사는 1959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한 산골 마을에서 1959년 태어났다. 2남 4녀 중 장남이었다.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충남 연무대초등학교(현 연무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부친의 월남 파병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외가가 있는 인천 송현동 수도국산 똥고개 꼭대기 집으로 이사하면서 인천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외할머니, 큰삼촌 내외와 외사촌 둘, 누나와 남동생 등 여덟 명이 초가집에서 살았다.평안북도 박천에서 황해도 해주 거쳐아버지 따라 인천 문학동에 정착초3때 송현동 똥고개 꼭대기집에 이사큰삼촌 내외까지 여덟명 초가집 살이참 가난하게 컸습니다.외항선이 인천항에 들어오면 똥고개가 먼저 보여요.황해는 누렇잖아요. 온 세상 바다가 이런 줄 알았습니다."연무대 있다가 인천에 오니까 사람들 정말 많더라고요. 서흥초등학교가 있는 송현동에서 저도 가난했고 친구들도 가난하게 컸습니다. 외항선이 인천항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이 똥고개였어요. 겨울에 연탄을 때야 하는데, 똥고개 밑 연탄가게에서 연탄 두 장을 새끼줄에 꾀 꼭대기까지 땀 흘리며 날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는 전교생이 연탄재를 들고 등교해 질퍽해진 학교 운동장에 던지던 일도 생각납니다. 태어나 인천에서 바다를 처음 봤거든요. 황해는 누렇잖아요. 중학교 때 아버님이 근무한 속초를 찾아가 '파란 바다'를 보기 전까지 온 세상의 바다가 인천 앞바다와 같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서흥초등학교 뒷길로 수도국산에 오르는 언덕이 똥고개다. 1950~60년대에는 비탈의 텃밭 거름으로 인분을 써 골목골목에 냄새가 풍긴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진다. 1976년에는 똥고개 인근 현 송림체육관 부지에 송림위생처리장이 건립돼 인천시 분뇨의 절반가량을 처리했다. 분뇨 수거 차량이 인근 주택가를 수도 없이 지나다녔다. 2009년 폐쇄될 때까지 '악취 민원'이 빗발쳤다. 똥고개는 사실주의 극작가 윤조병(1939~2017)의 작품으로 제8회 전국연극제 대통령상(최우수상)을 받은 '아버지의 침묵'(1990년)의 배경이기도 했다. 극단 미추홀은 이 작품을 창립 40주년 기념 공연(2021년)으로 올렸다. 똥 냄새가 봄 냄새로 치환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2009년 폐쇄까지 '악취민원' 빗발쳐극단 미추홀 선보인 '아버지의 침묵' 배경도"봄 냄새? 허, 연탄까스 냄새, 화장실 똥냄새, 막혀버린 수채 냄새, 쓰레기 냄새, 퀴퀴한 방 안 냄새와 사람 냄새가 봄 냄새라구? 당신 코가 기능을 상실한 것 아니오? / 봄 냄새가 도시의 빌딩에서 난다고 생각하는 거요? 천만에. 숲에서 나는 거요. 흙에서 나는 거요. 숨 쉬는 저 숲, 숨 쉬는 골목길의 검은 흙에서 봄 냄새가 나는 거요." 똥고개는 송림 1·2구역 재개발사업으로 곧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박 전 대사는 인천남중을 거쳐 1975년 인천대건고에 입학했다. 대건고가 현 위치인 연수구 동춘동이 아닌 동구 화수동에 있던 시절이다. 대건고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접한 'Treasure Island'(보물섬) 영어 다이제스트판이 소년 박정남을 '영어 소설'의 세계로 이끌었다. 주말이면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해적판을 찾아다녔다. 펄벅의 '대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조지오웰의 '1984' 그리고 '동물농장',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등을 영어 원서로 섭렵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의 경우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고 그걸 다시 영어로 옮겼다. 1·2학년 내내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영어 소설만 읽고 다른 과목에는 손을 놓아버렸다.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교내 시험 날 시험지에 이름만 적고 덮어둔 뒤 영어 소설을 꺼내 읽은 적도 있었다.대건고 도서관서 '보물섬' 읽고 영어 빠져시험날 시험지에 이름만 적고 소설 읽어고3 돼서야 선배 말 듣고 미친척 공부3월부터 6월까지 고교 수학 끝내200등 아래던 성적이 12등까지 올랐다"영어 단어와 문장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시절이었어요. 단어를 보면 그 단어가 나오는 소설이 통째로 생각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에요. 고3이 돼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미친 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인수분해부터 시작해 3월부터 6월까지 고교 수학을 끝냈고 그다음에 암기 과목을 공부했어요. 취업반을 제외한 300명 중 200등 아래였던 성적이 나중에 12등까지 올랐습니다. 친구들도 놀라고, 선생님들도 놀라고, 저도 놀랐습니다."박 전 대사는 1978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이후에도 영어에 몰두했다. 주한 미군 라디오 방송 AFKN(현 AFN Korea) 청취 동아리인 ALC(AFKN Listeners' Club)에 가입해 활동했다. AFKN에서 평일 매시간 나오는 5분짜리 뉴스, 일요일 아침 9시 뉴스를 녹음해 영어 리스닝 교재로 삼았다. AFKN 뉴스 외에도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라디오 드라마를 받아 써 스크립트를 만들었다. 음성으로 모든 장면을 들려주는 라디오 드라마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이때 쌓아 둔 스크립트 노트는 훗날 그가 학비와 생활비를 벌 목적으로 1년 정도 나간 동인천외국어학원에서 'AFKN 리스닝' 강사로 일할 때 교재로 쓰였다. 인천 최대 규모의 외국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며 연세대와 고려대 영문과 재학생이 와서 들을 정도의 명성을 얻었으니, 만약 그가 외교관이 안 됐다면 '일타 강사'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다.박 전 대사는 1991년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그해 12월27일 정주연씨와 결혼했다. 신흥초, 박문여중, 인성여고를 나온 인천 토박이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조선호텔에 근무 중 인성여고 친구의 소개로 인연이 닿았다. 현 동인천길병원 부근에 있던 인하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는데, 박정남·정주연 부부의 예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신혼집은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과 제물포고등학교를 잇는 자유공원로 주변의 내동빌라였다. 박 전 대사 부부는 미국 유학 기간(1993~1995년)을 제외하고 1997년 주스리랑카 대사관에 가기 전까지 내동빌라에 살며 두 아들을 얻었다.연세대 입학 후에도 영어공부 몰두1991년 외무고시 합격하고 그해 결혼'새 여권' 제작 처음 맡은 직무영문이름 표기법 국가 일방적 지정에 '반대'국가정보 기재 재량권 거쳐 현위치에 표기"공무원 판단, 국민생활 영향력 깨달은 계기"박 전 대사가 외교부에서 맡은 첫 직책은 여권과 법규계장(1992~1993년)으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 표준에 맞는 '새 여권'을 제작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로 여권 발급 연령 제한이 사라지고 그 이후 해외여행객은 매년 급증했다. 이름과 여권 번호, 유효 기간 등의 정보를 자동으로 인식하는 '기계 판독 여권'을 만들어야 했는데, 우리 국민의 한글 이름의 영문 표기 방식이 제각각인 게 골칫거리였다. 예를 들면 'CHUNG NAM'을 기계로 판독해도 한글 이름이 '정남'으로도, '청남'으로도, '충남'으로도 읽힐 수 있었다. 법무부는 중국 사례를 들어 영문 이름 표기법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박 전 대사는 '국민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는 ICAO가 여권 발급 국가의 정보 기재 재량권을 부여한 위치(현 여권 소지인 서명란)에 한글 이름을 표기하고 이를 기계로 판독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했다. 여행문서 발급 100년 만에 첫 국제 표준 여권 발행이었다. 그는 "공무원의 판단과 선택이 국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고 했다. 이 경험으로 그는 남은 공직 생활에서 삼가는 태도를 갖게 됐다.첫 해외근무지 스리랑카서 축구회 결성여가시간 즐길거리 없던 직원들 접점 생겨"스리랑카 한인 축구회 아직도 있다더라"박정남 전 대사는 축구광이다. 서흥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보는 것도 그리고 직접 하는 것도 즐긴다. 인천에서 축현초등학교가 '인천 축구 톱(TOP)'으로 인정받던 시절, 서흥초등학교와 벌인 경기를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축구사랑나눔재단 이사장인 조병득 전 국가대표 골키퍼의 축현초 시절 활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축구만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경기 몰입도가 높고 실력도 출중했다. 그는 첫 해외 근무지인 주스리랑카 대사관 영사로 간 1997년, 콜롬보 한인 식당 사장의 권유로 한인 축구회를 결성했다. 스리랑카에 한국 봉제공장 150개 정도가 진출했는데 그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영사가 축구를 제대로 하긴 하겠어?'라는 반문은 곧 감탄사로 변했다. 처음에 7명이 나오던 축구회 회원은 50명까지 늘었다. 박 전 대사는 축구회 회원 20~30명을 집에 초대해 불고기 파티를 열어주는 등 열성적으로 축구회를 이끌었다. 그런데 왜 영사가 축구회를 결성했을까."한인 식당에 딸린 노래방이 있었어요. 칸막이가 없는 커다란 홀에서 여러 개 테이블을 두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종이에 써 디스크자키에게 주면 틀어주는 노래방이었어요. 식당 사장님 말을 들어보니 노래 순서를 두고 패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고 해요. 대사님께 보고했어요. '젊은 친구들이 여가 시간에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카지노에 가거나 노래방에서 싸움을 한다고 하니 제가 축구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축구회가 시작됐어요. 축구회라는 접점이 생기면서 노래방에서 싸움이 사라졌어요. 스리랑카 한인 축구회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외교부 직원 중에 해외에서 축구회를 만들고 운영해 본 사람이 저 말도 또 있었는지 모르겠네요."박 전 대사는 관운(官運)이 좋은 편에 속한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 필요 인원을 확보하는 목적으로 1980년대 20명씩 선발하던 외무고시 합격자를 1990년대 들어 확대하기 시작했다. 1980~9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을 뽑은 해가 바로 박 전 대사가 합격한 1991년으로 49명이 선발됐다. 만약 20명을 뽑았다면 본인은 탈락했을 것이라고 박 전 대사는 설명했다. 또 주스리랑카 대사관에 근무 중이던 그가 1999년 모두가 선망하던 주미 대사관으로 발탁된 것은 외교부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된 인사였다.'백이 없어도 워싱턴에 갈 수 있다'입증하고 싶었던 홍순영 장관 '고생하는 친구 찾아보라' 지시에 물망실제 인사명령 불복 의지 갖췄던 홍 장관취임 이후 워싱턴 인사관행 타파 시도"나중에 알았는데 홍순영 장관님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워싱턴에서 한 번도 근무를 못 해 보셨어요. 백(back)이 없어도 험지에서 고생하면 워싱턴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홍 장관님이 김숙 인사국장(인사기획담당관)을 불러 '아프리카에서 고생하는 친구 중 워싱턴에 보낼만한 사람 찾아보라'고 지시해 케냐에서 한 명이 뽑혔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인사철에 인사국장에게 같은 지시를 내렸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었나 봐요. 그래서 아시아까지 범위를 넓혀 찾다가 제가 선발됐다고 들었습니다."실제 홍순영 장관은 1998년 8월 취임 이후 '워싱턴 인사 관행' 타파를 시도했다. 그는 차관 시절부터 외교관의 인사 명령 불복 행위를 엄단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당시 공직 사회에서는 '청비총'이란 말이 있었는데 이는 청와대 비서실, 장·차관 비서관, 총무과 인사들이 '노른자위 자리'를 차지하는 관행을 뜻했다. 박정남 전 대사의 경우 워싱턴 인사 이후 '제물포고 출신'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그건 그가 제물포고 출신 김숙 인사국장의 '백'으로 워싱턴에 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공사 엄격히 구분…공공 재산 사적인 사용 '극도 경계'상급자 청탁 거절했다가 미운털 박혀박정남 전 대사는 공사(公私)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해 힘쓴 공직자였다. 공무원 재직 기간 '이해 충돌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주식 투자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적은 비용이라 할지라도 공공의 재산을 사적으로 쓰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했다. 한 재외공관 근무 시절엔 상급자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미운털이 박혀 장기간 곤혹을 치른 적도 있었다고 했다. 인천 출신이라는 이유로 지연(地緣)에 휘둘리지도 않았지만 본인의 직무 범위 내에 있는 인천 현안은 적극 지원했다. 인천시가 아시안게임 유치에 온 힘을 기울이던 2006년 6월 박 전 대사는 주폴란드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문화외교국 홍보과장으로 부임했다. 국제 체육대회 유치 업무 담당 부서장이었다.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인천은 인도 델리와 경쟁했다. 박 전 대사의 역할은 투표권이 있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회원 국가의 공관에 연락해 '인천 유치'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2007년 4월 쿠웨이트에서 OCA 총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는 인천시 직원이 침낭을 들고 홍보과 사무실에 찾아와 외교부 직원들과 함께 유치 활동을 점검했다. OCA 총회 결과 인천은 32표를 얻어 델리(13표)를 넉넉하게 이겼다. 당시 안상수 인천시장은 박 전 대사의 공로를 인정해 감사패를 수여했다.주가봉 대사 근무 시절엔 '인천 출신 세계여행가' 김찬삼(1926~2003) 교수를 매개로 인천과 가봉의 가교 역할을 했다. 박 전 대사의 고교 동창으로 송도고에서 지리를 가르치는 김재민 교사가 2018년 가봉에 찾아왔다. 김찬삼 교수와 슈바이처 박사가 1963년 11월 찍은 사진의 가봉 슈바이처 박물관 전시를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김재민 교사는 김찬삼 교수의 수제자로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주가봉 대사관의 도움으로 이 사진은 박물관에 전시됐다. 또 송도고와 슈바이처 병원은 2018년 8월 자매결연을 했다. 그 이듬해 송도고는 의료봉사단을 꾸려 가봉 슈바이처 병원에서 봉사 활동을 벌였다. 김재민 전 교사는 "직접 슈바이처 병원을 컨택하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대사관에 문의하니 취지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나서 연결해줬다"며 "의료봉사단이 슈바이처 병원에 갔을 때도 대사관 직원분들이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며 도움을 주셔서 프로그램을 의미 있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인천유나이티드 이기면 기쁘고, 삼미슈퍼스타즈 생각하면 마음 아파요.인천은 제 고향이고 저는 인천사람입니다.박 전 대사는 2019년 12월 외교부를 정년퇴직하고 용인에서 아내, 아들과 거주하고 있다. 그에게 고향 인천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물었다."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태어났지만 인천에서 컸습니다. 인천은 제 고향입니다. 인천유나이티드가 이기면 기쁘고, 삼미슈퍼스타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 저는 인천사람입니다. 인천이 국제적 도시로 발전하길 희망하고요. 재외동포청을 유치한 인천시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또 반대로 재외동포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박정남 전 주가봉 한국대사.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박정남 전 대사(왼쪽)의 군복무 시절. /박정남 전 대사 제공박정남 전 대사는 1968년 인천 송현동 외할머니댁에 오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사진은 1972년 2월 서흥초등학교 졸업식.인천 송현동 똥고개는 극작가 윤조병이 쓴 '아버지의 침묵'의 배경이 됐다. 극단 미추홀은 '아버지의 침묵'(윤조병 연출)으로 1990년 제8회 전국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극단 미추홀 제공송림·송현동 고개.화수동 시절 인천대건중고등학교 전경으로 1982년 촬영됐다. 대건중학교는 1985년 폐지되고, 대건고는 1998년 7월 연수구 동춘동 신축 교사로 이전한다. /인천대건고 제공박정남 전 대사는 연세대에 입학해서도 ACL 동아리 활동을 하며 영어 공부메 몰입했다. 사진은 연세대 교정에서 교우들과 함께 찍은 것으로 맨 오른쪽이 박정남 전 대사이다.박정남 전 대사(사진 맨 왼쪽)는 1980년대 동인천외국어학원 AFKN 리스닝 강사로 유명했다. 수강생들과 함께 작약도에 놀러가기도 했다.박정남 전 대사는 첫 해외 근무지은 스리랑카에서 한인 축구회를 조직했다.1999년 주스리랑카 대사관에 있던 박정남 전 대사는 주미 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겨 약 5년간 근무했다.박정남 전 주가봉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의 노력으로 인천송도고등학교와 가봉 슈바이처병원이 결연을 맺고 상호 교류할 수 있었다.박정남 전 대사는 2016년 11월 주가봉 대사로 부임해 외교 사절로 다양할 활동을 펼쳤다.
바이오 의약품 CDMO(위탁개발생산) 시장에 진출한 롯데바이오로직스가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메가플랜트 건립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관련 업계의 인력 쟁탈전이 가열되고 있다. 롯데바이오로직스의 경우 국내외 CDMO 선두 주자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사업모델을 사실상 '이식'하는 수준으로 프로젝트를 추진, 인재 영입 등을 둘러싼 이들 업체 간 신경전도 심화할 전망이다.삼바, 이직자 가처분 신청·고발에법인 상대 법적 대응 '경고 메시지' 2일 바이오 업계에 따르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최근 법원에 롯데바이오로직스를 상대로 영업비밀침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롯데바이오로직스로 이직한 직원들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선 적은 있지만, 롯데바이오로직스 법인 자체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지난해 삼성바이오는 자사에서 롯데바이오로 이직한 3명을 상대로 영업비밀 침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지난해 7월 인천지법의 일부 인용 결정을 받았다. 또 같은 해 8~9월 삼성바이오는 롯데바이오로 이직한 직원 4명을 형사 고발했다. 인천지검은 지난 3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과 업무상 배임 혐의로 이중 1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인력 영입과 관련한 이 같은 두 회사의 갈등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롯데바이오로직스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선 것도 더 이상의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한 경고성 성격이 짙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공장 입지·생산규모 속성 따라잡기롯바 "선넘은적 없어… 공정 채용"롯데바이오로직스는 지난달 인천시, 인천경제자유구역청 등과 '인천-롯데 투자유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롯데는 2030년까지 30억 달러(약 3조7천억원)를 투입해 총 36만ℓ 규모의 항체 의약품 생산 기지를 송도국제도시에 구축할 계획이다. 오는 8월까지 인천경제청과 토지매매계약을 체결한 뒤 연내 착공한다는 게 롯데의 계획이다.롯데바이오로직스의 메가 플랜트는 12만ℓ 항체 의약품 생산 규모 플랜트 3개로 구성된다. 이 같은 롯데의 생산 규모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송도에 처음 진출해 건립한 1~3공장의 생산 용량과 비슷한 수준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1·2·3공장은 36만4천ℓ 규모다. 지난해 준공한 4공장(24만ℓ)은 최근 완전 가동에 돌입했다.바이오 업계 후발 주자인 롯데의 경우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단기간 공장을 건립, 제품 생산 등에 착수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설비를 빠르게 확장해 매출을 키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전략을 벤치마킹할 것으로 관련 업계는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하우가 축적된 관련 분야 인재 영입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업계 관계자는 "공장 입지부터 생산규모까지 삼성바이오로직스를 따라가다 보니 롯데가 무리하게 인력을 빼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영업비밀을 침해한 적이 없고 공정하게 인력을 채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이번 바다그리기대회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많이 막막하고 부족했는데, 이렇게 큰상을 받게 되어 기쁘기도 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대회 경험이 많지 않아 너무 긴장을 많이 해 실수도 많았습니다. 저는 제 그림에 자연스러움과 채도를 높이는 것이 장점이라고 생각해, 이번 그림의 앞부분에 채도와 밀도, 섬세함을 높여 최대한 저의 장점들이 돋보이도록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번 바다그리기대회 수상으로 제 그림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고, 저의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해주었습니다. 이번을 경험으로 다른 대회에 적극적으로 도전할 용기와 자극을 받은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멋지고 큰 대회에서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5월, 잔디에 앉아 맑은 하늘 아래에서 손 끝에 연필을 잡고 바다를 그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는 이 그림을 그리며 맑게 일렁이는 바다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나누어 준다고 느꼈습니다. 바다에 직업이 있는 사람들, 바다에 소중한 가족을 맡긴 사람들, 바다에서 희망을 얻는 사람들…. 저는 이 대회를 통해 바다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바다를 소중히 지키고 가꾸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항상 더 열심히 그릴 걸 하고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번에는 정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즐겁게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독도함을 그렸기 때문일 거라 생각됩니다. 이 함선은 군인과 물자, 헬리콥터와 전차도 싣고 항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비상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다하면 저는 군함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다를 아름답고 평화롭게 느끼는 것은 바다와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든든한 군함이 있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드넓은 바다를 누비는 든든한 군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