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 세월호 참사가 가져온 변화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은 세월호가 출발한 곳이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는 인천이라는 도시에도 적잖은 변화를 일으켰다.10년 전인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직후 인천~제주 카페리(여객과 자동차를 실어 운반하는 배) 뱃길은 끊겼다.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7년여 만인 2021년 이 항로에 선사 '하이덱스스토리지'가 카페리를 투입해 운항을 시작했으나, 초기부터 선박 이상 등 차질을 빚었다. 선사는 휴항과 재개를 반복했고 결국 항로 운영을 포기했다.인천은 섬이 많은 해양도시다. 특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승객 안전 등 선박 관리 체계가 대폭 개선됐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리 여객선에 탑승하는 모든 사람은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일 탑승객 명단과 실제로 배에 탄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등 국내 승선 관리의 허점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정부는 구조 활동 초기에 큰 혼선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세월호 참사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 '선박 기울어짐'을 방지하기 위해 화물 고박 점검 등도 더욱 철저해졌다.해양경찰청은 세월호 탑승객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박근혜 정부 당시 해체됐다가 문재인 정부 때 부활했다. 해경은 그동안 수색·구조 등 현장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도 커졌다. 2021년 인천엔 '인천국민안전체험관'이 들어섰다. 인천시가 건립한 이 체험관은 선박과 항공기 사고, 화재 등 각종 재난재해 상황을 체험하고 적절한 대응법을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개관 첫해인 2021년 6천888명이던 방문객은 지난해 11만4천82명으로 많이 늘었다. 누적 방문객은 21만명을 넘어섰다. /정운·백효은기자 jw33@kyeongin.com
박지영 승무원·이광욱 잠수사 등 봉안
중앙엔 세월호 모형·사고전 CCTV 영상제자들과 찾은 교사 "잘 몰랐던 학생들도일반인 희생자 사연 들으며 더 관심 가져""이맘때면 떠난 어머니 더 그리워져…""며칠 있다 온다던 아들…" 유족들 아픔계속된 '사회적 참사' 위로·연대 구심점"추모공간, 안전위협 인지 시각적 의지"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2년 만인 2016년 4월16일 인천 부평구 승화원(인천가족공원)에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 문을 열었다. 정부가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설립한 첫 추모 공간이다.■ 일반인 희생자들을 기리다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에는 세월호 탑승객과 선원 등 43명, 사고 직후 이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민간 잠수사 2명 등 일반인 희생자 45명 중 44명의 봉안함이 안치돼 있다. 일반인 희생자 중에는 여행을 떠난 가족, 환갑을 맞이한 동창생, 출장길에 오른 직장인 등 세월호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 안타까운 사연이 많다. 경기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교사들을 구조하려다 탈출하지 못하고 끝내 숨진 승무원 박지영씨 등 의인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추모관은 세월호 참사 관련 자료와 희생자 유품 등이 전시된 추모실, 일반인 희생자들의 봉안함이 있는 안치실로 나뉘어 있다. 추모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중앙에 있는 세월호 선체 모형이다. 세월호 도면을 토대로 원래 크기의 68분의1로 줄인 모형 내부엔 방문객들이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넣어둔 노란 리본이 가득하다. 벽면에 붙은 16개 CC(폐쇄회로)TV 화면은 세월호가 인천항을 떠날 때부터 침몰 7분 전까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전거 전국 일주 마지막 여행지로 제주도를 정했던 동호회원의 자전거 헬멧, 제주도로 출장을 가던 직장인의 사원증, 가방에 넣고 꺼내 읽던 책 등 일반인 희생자들의 유품도 전시돼 있다.세월호 참사 2주기에 맞춰 2016년 개관한 추모관에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이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개관 이듬해인 2017년 1만7천여
추억의 화랑유원지… 추모의 화랑유원지…
시민과 함께 쉴 곳은 어디… 세월은 기억의 바다를 건너는중
상이군경이 일군 땅, 도심내 휴식처로1998년부터 공원화, 각종 시설 들어서오토캠핑·바비큐 파티 등 저마다 추억세월호 비극후… 정부합동분향소 설치4년간 73만여명 조문… 공간 성격 변화일부 시민 "유원지 뺏겼다" 불편 호소'생명안전공원' 조성 결정에 갈등 고조"일상속에서 안전한 세상 함께 꿈꾸길"설치 반대 이웃 설득 이어가는 유가족"우리 장례문화 달라지는 계기 될수도"60대 중반의 형철(가명)씨는 1983년 안산에 정착했다. 막 조성되기 시작한 반월시화국가산업단지에 일자리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군 제대 후 무작정 안산으로 왔다. 공장일은 고됐다. 주 6일 근무는 기본이었고 철야근무도 종종 있었다. 그런 형철씨에게 유일한 낙은 쉬는 날, 화랑유원지에 놀러가는 것이다. 일주일의 피로를 풀 수 있는 공간이었다. 회색빛 공장만 가득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놀거리와 볼거리를 주는 곳. 일주일에 딱 한번 쉬는 그 하루, 가족과 함께 화랑유원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집에서 싸온 음식을 먹거나 화랑호에서 낚시를 하며 휴일을 보냈다. 형철씨의 고된 청춘을 위로하는 시간이었다.■ 안산을 닮은, 시민의 휴식처 화랑유원지도심 한복판에 유원지가 있는 도시는 안산이 유일무이하다. 화랑유원지가 처음부터 유원지는 아니었다. 1956년 6·25 참전 상이군경 20여명이 안산시로 이주해 땅을 조성한 게 시작이었다. 당시엔 '화랑농장', '화랑저수지', '화랑낚시터'로 불렸다. 하지만 1986년 반월국가산단 배후도시 안산이 시로 승격되면서 화랑유원지로 불리게 됐다.지금의 공원 형태로 조성되기 시작한 건 1998년이다. 1980~90년대부터 타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늘어나자 안산시 차원에서도 시민들이 맘껏 쉬고, 체육활동을 하고, 바비큐 파티를 할 규모를 가진 공원이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안산이 대체로 논밭이거나 황무지였고, 고잔신도시는 개발 중인 단계였다.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찾아 휴식을 취
참사후 10년… 갈등의 안산
1년 지나도록 도시 전체가 추모·애도일상 제지·취재 쇄도… 일부 지쳐가
■ 사그라드는 추모참사 이후 1년쯤 지나자 사회는 참사의 슬픔을 잊어갔다. 전국에서 줄을 잇던 조문객도 많이 줄어들었고 점점 잊혀갔다. 안산 시민들만 일상에서 세월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안산은 도시 전체가 여전히 추모와 애도 분위기가 이어졌다. 상가에선 음악도 틀지 못했다. 안산시에서 자중해달라는 요청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죽었는데 노래가 나오냐"는 시선이 두려웠다. 1년 내내 언론의 취재가 이어지면서 단원고 인근 빌라들을 시시때때로 찍어갔다. "안산이 아파트도 없는 동네인 것처럼, 일부러 건물에 금 간 부분만 찍어서 전국에 내보내는게 상처였다"고 토로했다. 동사무소, 문화체육센터 등 공공에서 하던 주민프로그램도 모두 취소됐다. 봄이 되면 더 그랬다. 거의 매일 기자들과 외부 사람들이 오가니 오히려 주민들은 외출을 꺼렸다. 이때를 두고 주민들은 "마을에 웃음이 없고 암울했으며 특히 4월엔 밝은 옷도 입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안하고 마음 아파서 여전히 추모와 애도가 이어졌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갈등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랑유원지 '4·16 생명안전공원' 건립반대하는 지역주민… 서운한 유가족계속된 집회·현수막… 상권 위축시켜피해보상금 관련 유언비언 등 난무서로에게 상처뿐인 일련의 사건·사고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선체 인양, 희생자 유해 수습 등 참사를 둘러싼 무엇하나 속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은 채 정부와 갈등을 겪는 장면들이 길게 이어지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온라인을 통해 동네에 떠돌면서 시민들의 마음도 복잡해졌다. 안산에 산다고 하면 세월호 얘기부터 꺼내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안산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세월호가 서두에 나오는 것에 소외감을 느꼈다. 추모집회가 1년 넘게 이어지면서 일부 시민들의 생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고잔동·호수동·중앙동 일대 상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근심이 쌓여갔다. 참사 당시 생업을 잠
참사후 10년… 아픔의 안산
안산에서 400㎞ 떨어진 먼 바다은사님·선배 하루아침 잃은 참담함4월 벚꽃 보는 일조차 죄책감 느껴안산 단원고등학교에서 자동차로 '400㎞'를 달려야 갈 수 있는 바다. 그 먼 바다에서 안산의 아이들이 죽었다. 생때같은 안산의 아이들이 침몰하는 배 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안산 시민들은 뜬 눈으로 지켜만 봐야 했다. 가슴이 타들어가도록 아파서 눈물만 났다. 참사는 모두의 아픔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원고 희생학생들은, 지난 10년 안산 시민들의 제일 아픈 손가락이었다.■ 애도의 시간"세월호 침몰" 대학교에서 한창 수업을 받던 지원(30·가명)씨에게 짧은 문자가 왔다.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 지원씨는 그해 초 단원고를 졸업하고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였다. 친구는 지원씨가 단원고 졸업생인 것을 기억했다. 지원씨는 서둘러 뉴스를 검색했다. '전원구조'라는 뉴스를 보고 안심했다. 큰일은 없겠지 싶었다. 점심시간 즈음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전원구조가 '오보'라는 소식이 들리면서다. 친구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남윤철 선생님이 세월호에 탑승했다는 것이다. 남 선생님은 지원씨가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반장이었던 지원씨를 늘 믿어주며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준 은사다. 곧장 단원고로 달려갔다. 학교 강당에서 밤을 새며 구조되기만을 기다렸다. 끝내 선생님은 돌아오지 못했다.
"엄마, 배가 침몰한다는데 단원고 같아" 그 날 정진(57)씨는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다. 아들이 보낸 메시지에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곧장 전날 아들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 아들은 중학생이었다. 전날 저녁을 먹으며 아들은 "엄마 형들이 배타고 수학여행 간대"라고 말했다. 정진씨는 대수롭지 않게 "왜? 비행기 놔두고 배를 타"라고 답했던 기억이다. 제주도가 고향이었던 정진씨는 배가 무서워 비행기를 타고 오갔었다. 큰일은 아니겠지 싶었는데 함께 예배를 드리던 단원고 부모들이 황급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제야 '큰일이 벌어졌구
'제대로 된 공간' 숱한 약속… "외면 말고 반성, 함께 고민을"
분향소 희생자들 사진 빼곡·진한 향 냄새추모객들의 방명록 속 '잊지 않겠다' 새록안산·서울·진도 합동분향소 하나씩 철거팽목기억관만 유가족 30여명 교대로 지켜불법시설 인지에도 미조치 난처한 진도군2019년 전남지사 4·16기록관 발표 긴 기다림작년말 국민해양안전관 오픈 '불통' 확인만해수부 '생명기억관' 내년 9월께 용역 결과
그 바다에 아직 배가 있다. 배는 더이상 바다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아직 그 배를 끌어안고 사는 가족이 그 바다에 있다. 도시에도 아직 배가 있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모두의 마음 속 그 배가 여전히 그 도시를 부유한다.그렇게 10년이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그 장면들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그날 출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구해냈더라면, 그래서 살렸다면, 그간의 4월은 모두에게 흩날리는 벚꽃인양 내내 아름다웠을 것이다.10년 동안 끊임없이 잊으라고 채근했다. 잊지 않는 마음을 오해하고 모독하기도 했다. 잊고 싶지 않아서 잊지 않는 게 아니다. 잊히지 않아서 잊지 못한다. 가족은 더 그렇고, 친구도 그러하고, 동시대를 사는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은 잊지 않는 것이다.기억하면서 추모하고, 추모하면서 일상을 무사히 지내는 것이다. 우리의 기획은 세월호 참사 그리고 '추모'에 대한 지난 10년을 반추하며 추모와 일상이 어우러질 때, 우리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2014년 4월 16일, 깊은 바다에서 끌어올려진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이 수습되던 곳, 비명과 오열이 가득했던 팽목항은 이제 이름도 진도항으로 바뀌었다. 바뀐 이름처럼 진도항을 다시 찾았을 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반짝이는 윤슬과 보글대는 파도소리가 아름다웠다.
그 곁에 4·16 팽목기억관이 있다. 4·16 팽목기억관이라 적힌 푯말이 가리키는 곳에 컨테이너 4개가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었다. 분향소로 사용되던 팽목기억관, 팽목강당, 가족
강산은 변했는데 세월은 그대로다
치우지 못하고, 치유도 못한 '악몽의 10년'
겨우 뭍으로 건져 올린 선체… 목포신항에 있지만 펜스에 가려져본래 하얗고 파랗던 빛 잃고 잔뜩 녹슬어 성한 곳 하나 없는 모습'잊지 않겠다' '돌아와라'… 은색 철창 마디마디 노란리본 그대로안전 이유로 내부 출입 금지… 추모할 수 있는 공간 부재 아쉬워
그 바다에 아직 배가 있다. 배는 더이상 바다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다. 아직 그 배를 끌어안고 사는 가족이 그 바다에 있다. 도시에도 아직 배가 있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모두의 마음 속 그 배가 여전히 그 도시를 부유한다.그렇게 10년이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 그 장면들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그날 출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구해냈더라면, 그래서 살렸다면, 그간의 4월은 모두에게 흩날리는 벚꽃인양 내내 아름다웠을 것이다.10년 동안 끊임없이 잊으라고 채근했다. 잊지 않는 마음을 오해하고 모독하기도 했다. 잊고 싶지 않아서 잊지 않는 게 아니다. 잊히지 않아서 잊지 못한다. 가족은 더 그렇고, 친구도 그러하고, 동시대를 사는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은 잊지 않는 것이다.기억하면서 추모하고, 추모하면서 일상을 무사히 지내는 것이다. 우리의 기획은 세월호 참사 그리고 '추모'에 대한 지난 10년을 반추하며 추모와 일상이 어우러질 때, 우리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 관련기사 3면(진도항 '팽목기억관' 지키는 유가족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1)])편집자 주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됐다. 3년이 지나고 세월호는 겨우 뭍으로 건져올려졌다. 그리고 지금은 목포신항에 있다.지난 8일 저녁 9시께, 목포신항에서 장희윤(26)씨를 만났다. 희윤씨는 봄이 되면 목포신항을 꼭 찾는다고 했다. 7년째 목포신항에 있는 세월호를 보기 위해서다. 이날 저녁에도 희윤씨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세월호 거치현장을 찾았다. 노란 리본이 둘러진 펜스 틈새로 세월호
“엄마아빠 손 잡고 오던 꼬마가 훌쩍 커서 아이들 손 잡고 찾아오는 때가 많아요. 맛있게 먹고 돌아서면서 '이 맛이 그리워 왔다'고 말할 때 뭉클하죠. 우리 의정부 사람들이 임신했을 때 가장 생각나는 맛이라고, 그래서 왔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된장찌개 같이 누구에게나 '생각나는 맛'이 있습니다. 그리움을 담은 음식들이 그러하죠. 그 맛을 다시 맛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엄마아빠와 함께 먹었던 어린시절의 추억이 그리워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이 지상최대 목표였던 지난 날들 속에 우리 도시들이 옛날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추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반가운 일은 없겠죠.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은 유년의 그리움을 안고 '어른이(어른+어린이)'들이 아이와 함께 다시 찾아오는 추억입니다. 1983년부터 이 골목에서 부대찌개 식당을 운영해온 진미식당 김용만 사장님은 반가운 어른이들을 종종 보곤 합니다. “어렸을때 부모님이랑 와서 부대찌개 먹으면서 우리 가게랑 같이 성장한 손님들이 어린시절 맛을 찾아서 다시들 많이 와요.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가게를 하다보니까 좋은 게 그런거네요." 김용만 사장님의 말씀처럼 이 골목의 풍경은 변한 것이 크게 없습니다. 의정부를 잘 모르는 기자가 경인일보 사진 DB에 남아있는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 사진 하나 들고 도착했을 때, 단박에 “여기다" 하고 찾아낸 이유죠. 바로 아래, DB에 간직했던 사진은 90년대 초 촬영한 의정부 부대찌개골목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 부대찌개 골목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두 사진을 번갈아 보면 흘러간 세월만 느껴질 뿐, 정겨운 그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니, 옛 이름 그대로 운영되고 있는 식당들이 눈에 띕니다. 진미식당, 한양식당, 오뎅식당, 형네식당.. 진미식당 김용만 사장님은 어머니의 식당을 물려받아 3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26살때부터 어머니 도와서 식당을 했으니 오래됐죠. 저희가 시작할 땐 오뎅식당, 주민식당, 형네식당 이렇게 3개
이언주 vs 강철호 vs 이기한 - 용인시정 용인시정 지역구는 게리멘더링으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때부터 신설된 선거구입니다. 처음엔 용인시 기흥구와 수지구 일부가 해당됐고 21대 총선에선 수지구 상현2동이 포함되었습니다. 인구 증가에 따라 새롭게 만든 선거구여서 지역 전통의 강자가 없기 때문에 괜찮은 인물이 등장했을 때 호감도가 높고 특히 새인물에 대한 거부감도 적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향 덕에 표창원, 이탄희 등 용인시정 유권자들이 선택한 국회의원 면면을 보면 용인시 정은 정치권 인재발굴의 등용문 같은 역할을 해온 셈입니다. 하지만 2번 선거를 치뤘고 2명의 초선 국회의원을 배출했지만 다음번 국회까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두 의원 모두 스스로 재선을 위한 출마를 포기했죠.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믿고 지지해준 유권자들 입장에선 허탈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 출마한 각 당의 후보들을 바라보는 유권자들은 지난 선거때보다 훨씬 깐깐하게 '우리 지역'을 이해하는지 따져볼 수 밖에 없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언주 후보는 국민경선을 통해 후보가 됐습니다. 이언주 후보는 기업 법무를 관리하는 변호사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고 '전문직' '성공한 여성'의 이미지로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에 인재영입되며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이언주 후보는 상반된 장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철학과 당의 노선이 맞지 않을 때 단호하게 쓴소리를 내뱉고 그러한 배경 아래 당적을 자주 옮겼습니다. 신념대로 행동하는 소신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자칫하면 철새로 오해받을 수도 있죠. 국민의힘 강철호 후보는 정치신인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 한동훈호의 기업인재로 영입됐고 용인시정에 단수공천되면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간 정치신인에게 기회를 줬던 용인시정 선거구에 전략공천된 이유일수도 있습니다. 강철호 후보는 외교관으로 공직을 지낸바 있고 이후엔 현대중공업 중국지주회사대표, 중국사업총괄 등으로 해외기업활동에 전념했고 지난해까지 HD현대로보틱
최재관 vs 김선교 - 여주시양평군 여주시양평군 지역구는 통상 보수 텃밭으로 분류되는 선거구입니다. 신도시가 많고 젊은 유권자 목소리가 강한 경기도 여러 선거구들의 특성을 감안하면 보수 입장에선 보수정통의 맥을 잇는 소중한 지역구죠. 지역민심을 흔들만한 큰 이슈가 많지 않고 인구 유입 등 변화도 적은 지역이라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성향이 강한 것은 그간의 선거에선 당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조금 다릅니다. 지난해 '서울-양평고속도로 특혜의혹' 이슈가 터지면서 평화로웠던 여주시양평군 지역을 뒤흔들었습니다. 연일 양평군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죠. 고속도로 노선이 변경된 과정을 두고 문제제기가 일었고, 대통령 처가와의 연결성까지 불거지며 특혜논란이 일었습니다. 이에 '재검토-백지화-재개' 등 소관부서인 국토교통부가 결정을 여러차례 뒤집고서야 겨우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서울-양평고속도로 이슈는 현재진행형 입니다. 사업은 재개가 됐지만 종점안이 변경된 것을 두고는 여전히 정쟁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죠.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양평군을 찾아 해당 의혹을 강조한 것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주시양평군 선거구는 더불어민주당 최재관 후보와 국민의힘 김선교 후보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최재관 후보는 농촌을 잘 아는 후보입니다. 농민운동, 친환경 무상급식활동, 농어업정책포럼 등 농촌과 관련된 활동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문재인정부에선 청와대 농어업비서관으로 일했죠. 김선교 후보는 양평에 뿌리가 깊습니다. 양평에서 나고 자라 양평군 공무원으로 일했고 3선 양평군수를 지냈습니다. 또 지난 21대 여주시양평군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여주시양평군을 대표했는데, 그야말로 일생을 양평에서 보낸 토박이입니다. 게다가 두 후보는 21대 총선에서도 맞붙은 바 있어 이번 총선은 '리턴매치'의 성격을 띱니다. 보수 강세 지역인데다 양평 토박이인 김선교 후보를 상대로 최재관 후보가 승리하려면 태생적 한계를 이겨내야 합니다. 하지만 김선교 후보도 핸디캡은 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