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8주년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

 

1945년 10월 7일 창간 대중일보가 걸어온 길

인천서 태동한 대중일보, 경인일보로 70년 명맥 이어져직할시되기 전까지 경기도 속해 '경기도민 대변지' 역할도청사 수원이전·신문 강제 통합 언론지형 대지각 변동1973년 통합 '경기신문' 출발… 기사 70%가량 인천권등 지방소식 채워져1982년 경인일보로 제호변경 언론자유화 이후 창간신문사서 주요 역할미디어시장 다변화 신문산업 침체 '언론 본연' 잊지않아야 해법찾기 가능인천, 경기 언론의 뿌리는 1945년 10월 인천에서 창간한 일간 신문 대중일보다. 해방 이후 우후죽순 생겨난 신문, 통신 등 여러 언론 기관과 달리 대중일보의 물적, 인적 기반은 탄탄했다. 일제강점기 개항장 인천의 신문 제작·보급 인프라가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개항장 지식인'들이 대중일보의 성장 기반을 탄탄하게 닦았다. 신문의 최종 소비자인 독자를 생각한 '대중(大衆)'이라는 제호를 선택한 것은 당시로선 눈에 띄는 일이었다. 배포 지역이나 지향성을 반영해 제호를 정했던 일반적인 흐름과 달랐기 때문이다. 대중일보는 신문 제작의 목표가 독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제호였다.대중일보는 인천에서 태동해 현재 경인일보로 70년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 시간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국전쟁과 함께 피난 시절을 보냈고, 만성적 경영난은 늘 경영진의 목줄을 죄던 문제였다. 권력은 언론을 제 손아귀에 묶어 두기 위해 언론 검열과 탄압을 일상적으로 자행했다. 언론이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억눌려있던 시기였다. 유신 독재가 가속화되던 1973년에는 신문사 강제 통합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이같은 굴욕의 사건들이 대중일보~경인일보 70년에 새겨져 있다.인천, 경기 언론의 역사를 볼 때 염두에 둬야 할 사실 두 가지가 있다. 해방 후 약 20여년 간 경인지역 언론의 중심지는 인천이었다. 인천의 신문사가 수원으로 본사를 옮기기 전까지 경기도의 어느 도시에도 변변한 신문사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인천이 1981년 직할시가 되기 전까지 경기도에 속한 대도시였다는 점이다. 1970년대까지 인천 언론, 경기 언론이란 분류는 큰 의미를 갖지 못했고, 대부분 '경기도민 대변지'를 표방했다.# 대중일보에서 시작된 인천·경기 언론사(史)대중일보 창간 멤버의 면면을 살피면 그 이력이 굵직굵직했다. 이러한 인적 구성은 해방 이후 창간된 다른 신문들과 달리 '준비된 신문'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였다.대중일보는 1945년 10월 7일 인천에서 고주철이 창간했다. 고주철은 인천 애관극장 부근 고주철 의원의 의사였다. 또 고주철은 우리나라 최초 미술사학자인 고유섭의 숙부였다. 개항기 인천의 의사 중에는 본업뿐 아니라 언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활동에 참여한 이들이 적지 않았고, 이같은 부류에 고주철도 포함됐다. 창간 이사장 송수안은 일제강점기 일본어로 된 신문인 조선시보, 매일신보의 인천지사장을 맡았다. 신문 보급의 중요성, 신문의 역할과 가능성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공무국장은 인쇄업의 선구자로 불렸던 이종윤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인쇄를 공부하고 마이니치 신문에서 실무를 익혔다.편집국 구성원 역시 화려했다. 편집국장 엄흥섭은 소설가였다. 그는 소설 '새벽바다'에서 개항장의 화려한 모습 뒤에 가려진 부두 빈민굴을 그렸다. 엄흥섭은 어떤 기자상을 지향했을까. 그가 1937년에 발표한 '통속작가에게 일언'이란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엄흥섭은 "작가란 언제든지 그 시대의, 그 환경의, 그 민중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작품은 그 시대, 그 환경, 그 민중의 좋은 거울인 동시에 등대여야 한다"고 했다. 작가를 기자로, 작품을 기사로 바꿔 읽어도 크게 뜻이 달라지지 않는다.문화부장을 맡았던 기자 김도인은 인천에서 문예지 '월미'를 창간한 문인이다. 또 그는 연극 모임에 몸담고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 연극인이면서 불우한 아이들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했다. 진종혁은 1927년 문학 동인지 '습작시대'의 발행·편집인이었다.대중일보는 이후 인천신보(1950년 9월), 기호일보(1957년 7월), 경기매일신문(1960년 7월)으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꿨다. 해방 이후 1950년대 까지 중부지방의 신문으로 대중일보 외에도 인천일보와 경기신문 2개사가 운영됐다. 1952년 창간한 인천일보는 1955년 경인일보로 개제하고 1962년 폐간됐다. 지금의 인천일보, 경인일보와 다른 신문이다. 경기신문은 수원시 팔달구에 자리잡은 자유당 경기도당부의 기관지였다.# 3대 신문 경쟁 체제 구축1960년대 경인지역 언론사에서 기억해야 할 신문은 3곳이다. 대중일보를 잇는 경기매일신문을 비롯해 인천신문(1960년 창간), 경기일보(1966년)가 3강 체제를 유지했다.이들 3대 신문사는 초기에 모두 본사를 인천에 뒀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경기도에서 본사를 둔 일간지는 없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당시 경기도의 중심도시였던 인천뿐 아니라 도내 전역으로 신문망을 확대하려고 노력했다는 데 있다.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도에 취재망을 확산했다. 3대지 중 가장 역사가 긴 경기매일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신보라는 제호를 1959년 기호일보로 바꾼 이유에 대해 한국 언론 연구원이 펴낸 '한국 신문 백년사'(1983년)는 "인천이란 국한된 지역적인 성격을 벗어나 도내 전역을 대상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천에 본사 인력을 배치하고 경기도 주요 도시에 지사망을 갖춘 시스템으로 신문사를 운영했다.1960년대 3대지의 지면 내용과 편집 방향을 분석한 연구는 없다. 단편적인 자료와 증언 등에 따르면 경기매일신문의 사풍은 '만년 야당지로서의 지조와 기개'를 중요시했다. 인천신문은 지역 문화 창달의 역할에 치중한 게 차별화된다. 경기일보는 창간사에서 '의견 형성력'을 강조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의제 설정 능력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인천신문은 3대지 중 처음으로 1963년에 문화면을 신설했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또 전국 4개 도시 고교 초청 야구대회, 전국 초·중·고 음악 콩쿠르, 경기도 초·중·고 미술실기대회 등 대규모 체육·문화 행사를 개최하는 역량을 갖췄다. 1960년대 후반 인천신문의 변화가 이뤄졌다. 1968년 창간 8주년을 맞아 제호를 경기연합일보로 바꿨다. 이어 1969년 4월 사옥을 인천에서 수원 교동으로 이전했다. 인천에 둥지를 튼 신문사가 수원으로 옮긴 첫 사례였다. 그 이듬해인 1970년 10월에는 신문 이름을 연합신문으로 개제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신문을 창간한 허합 사장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허합 사장은 수재의연금 횡령 사건으로 경영권을 당시 정권의 실세에 빼았겼는데,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났다.'후발주자' 경기일보의 최대 주주는 국제실업이었지만, 이 신문의 '실질적 사주'는 육사8기, 대통령 비서관 출신의 유승원 국회의원이었다. 경기일보는 월간 경기 제작 등 월간지 출판 사업에 공을 들였고, 윤전기 도입 등 사세 확장에 주력했다.# 경기도청사 수원 이전과 3대 신문 강제 통합수원에 있는 경기도청사는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광화문 부근에 있었다. 인천과 수원의 경기도청사 유치 경쟁은 치열했다. 도청 소재지가 수원으로 결정되고, 인천에 본거지를 둔 신문사의 수원이전이 시작됐다.경기도청사는 왜 서울에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서울은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였다. 해방 뒤 서울은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에서 분리됐지만, 청사는 서울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도청 이전 계획은 잠정 중단됐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과 함께 서울 주변의 도시를 개발하는 중장기 계획을 추진했다. 1963년 말 경기도청사의 수원 이전이 확정됐고, 1967년 청사가 완공됐다.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은 경인지역 언론 지형에 지각변동을 이끌었다. 경기연합일보로 제호를 바꾼 인천신문이 1969년 수원 교동으로 본사를 옮기고 이후 제호를 연합신문으로 바꿨다. 발행인쇄인으로 재일교포 이현수가 취임한다. 인천신문을 창간한 허합은 신문사를 빼앗기다시피하고 미국으로 떠났다.인천신문의 수원 이전 과정에 수원 출신 7선 국회의원 이병희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병희는 경기도청사의 소재지가 수원으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1973년 9월1일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연합신문 3대지는 통합해 경기신문으로 출발한다. 군사 정권의 강압적인 언론 통합 조치였다. 당시 인천을 비롯해 전국에서 11개 신문이 사라졌다. 경기신문은 수원에 본사를 둔 연합신문 주도로 통합됐고, 본사 소재지도 수원으로 결정됐다. 3대 신문사의 통합 성명서는 1973년 7월 31일 인천에서 발표됐다. 경기매일신문 발행인 송수안은 통합에 끝까지 반대했지만, 군사 정권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신문 3사의 통합에 대한 언론계 원로의 시각은 어땠을까. 연합신문은 1973년 8월 15일자 주간인천 주필을 지낸 고일(高逸),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 출신의 박민규(朴旼奎) 두 원로의 대담을 '경기 언론의 전기(轉機)'에 실었다. 고일은 "경기언론이란 관점에서 경기도 전역을 개관할 때 언론 활동은 인천 등지로 편재해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사실"이라며 "(그토록 많은 신문이 성쇠를 거듭했지만) 원칙적인 의미에서 확고한 경기언론이라는 이미지를 심지못한 사실"을 강조했다. 박민규는 "경기언론은 해방전후를 통해 사실상 지역사회계발이란 사명감에서 많은 기여를 했다"면서도 "과연 뚜렷이 내세울 기록적인 현상이었는가 하는데 대해선 크게 의문시 됩니다"고 말했다.# 경기신문 그리고 1980년대경기신문 편집국 기자들은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연합신문 출신들로 채워졌다. 편집국장은 경기일보에서 맡았고, 인천분사 편집 책임자는 경기매일신문 출신이 담당했다.통합 초기 인천에서 근무하는 기자가 15명으로 수원 본사(12명)보다 많았다. 인천분사 기자 구성은 연합신문(6명), 경기일보(5명), 경기매일신문(4명)이 고르게 분포된 편이었다.통합 이후 인천 언론이 암흑기를 맞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왜곡된 것이다. 경기신문 기사의 70%가량을 지방 소식으로 채웠고, 지방소식은 '인천권', '한수이남권', '한수이북권'으로 나눠 보도했다. 통합 이후 1979년 12월 31일까지 6년 여동안 경기신문에 나온 인천 기사는 2만3천건이나 된다.1980년 집권한 신군부는 유신 정권의 언론 정책을 이어 1도1사 정책을 편다. 군인들 주도 아래 경기신문 주주가 재편되면서 인천에서는 항만 하역사가, 경기에서는 버스회사가 경기신문 주주로 참여했다. 경기신문은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고 1982년 3월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1987년 언론기본법이 폐기됐고 수원과 인천에서 경기일보, 인천신문(현 인천일보), 기호신문(현 기호일보)이 창간됐다. 대중일보 출신이 1960년대 신문사 편집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1987년 언론자유화 이후 창간된 신문사의 창립 멤버에도 경인일보 기자 다수가 이름을 올렸다.# 신문의 위기와 대중일보'신문의 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미디어 플랫폼 다변화 등의 이유로 침체 국면에 접어든 신문 산업이 활로를 뚫기 힘든 시대라는 뜻이다. 서울보다 지역 신문이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 것이다. 이런 때 70년 전 시작된 경인일보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1945년 10월 7일 대중일보 창간사를 보자. "모든 부면을 향해 적극적으로 진언(盡言)하고 정력적으로 보도하지 아니하면 안될 절대의 사명이 있는 것." 일제의 강압 통치에서 벗어나 '우리 언론'을 만든 것에 대한 기대감이 창간사에 묻어난다. 유신 독재에 침묵했던 경기신문의 1975년 4월 7일자 사설의 제목은 '신문의 날'이었다. 경기신문은 사설에서 "흔히들 신문을 사회의 공기라고들 한다. 때로는 가슴에 훗훗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또는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릴 수조차 없는 때도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의 현실이 과연 사회의 공기로서 그 사명을 다했는가 하는 것과 또 신문인 스스로도 제구실을 다하려 얼마만큼이나 노력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썼다.신문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이를 지키지 못하는 부끄러움, 어떤 상황에서도 언론의 본연을 잊지 말자는 교훈이 경인일보 70년사에 담겨 있다. 이는 곧 신문의 위기를 극복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김명래기자

2015-01-01 김명래

[다시 대중일보를 생각하다]50년 선배에 듣는 그때 그시절 언론

역사적으로 언론의 역할이 한시도 중요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자에게 '기레기'(기자+쓰레기 합성어)라는 말이 서슴없이 붙고, 심지어 신문은 '찌라시'라는 소리를 듣기도 할 만큼 그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신문이 이렇게 인식되는 걸 보면 올해부터 경인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한 초년 기자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역사를 잊으면 미래도 없다고 했다. 언론의 역사를 모르고는 언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경인일보 막내인 윤설아 기자가 언론계의 50년 선배인 신원철(74) 인천 연수원로모임 회장을 지난 8월 14일 만났다. 신 회장은 1964년 인천에 있던 '동양통신 경기지사'에서 처음 기자생활을 했다. 신원철 회장은 경인지역 언론의 태동지역인 인천에서, 중앙지 기자로 있으면서 1960~70년대를 산 몇 안 남은 외근 기자 대선배다. 신원철 회장과 함께 그 시절 속으로 들어가 보자.# 까까머리 청년, 기자가 되다1964년 여름 군대에서 막 제대한 까까머리 청년이 인천 숭의동, 그러니까 지금의 인천시 남구청 인근의 한 기와집 앞을 서성였다. 인천지역에서도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 드나든다는 김은하 국회의원의 집이었다. 이 청년은 제대 후 '뭐하고 사나' 고민하다가 인천기계공고 육상부 선수로 전국을 제패할 당시 인천육상연맹 회장으로 알게 된 김은하 국회의원을 무작정 찾았다.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동양통신'에 발을 들였다. 김은하는 서울 수복 이후 인천에 동양통신 경기지사를 차린 지역의 유지였다.동양통신은 인천지역 기자의 산실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벽, 장세광, 최경조 등 당대 내로라하는 언론인들이 동양통신 출신이다. 막내기자 신원철이 동양통신에서 처음 만난 선배가 이벽(1926~2000)이었다. 그리고 처음 하게 된 일은 인쇄된 기사를 언론사, 공공기관, 기업체에 전달해 주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노트북으로 기사를 써서 전산프로그램에 전송하면 그만이지만, 당시엔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신문을 만들었다. 기자가 기사를 써서 넘기면 필경사가 그걸 베껴서 신문을 만들었다."일단 출근은 했는데, 뭘 가르쳐 주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고 맨날 심부름이나 보냈어요. 주로 하는 일이 '가리방'(철필) 긁는 일이었지요. 먹지 같은 종이에 철필로 기사를 쓰고 그 종이를 등사판에 올려 놓은 다음 검정색 잉크를 롤러로 밀어 인쇄를 하는 등사판 방식이었습니다."1964년 동양통신의 '고객'이었던 인천지역 언론사는 경기매일신문과 인천신문 2개뿐이었다. 경기매일신문은 1945년 10월 7일 해방 이후 경인지역에서 첫 창간된 지역신문 '대중일보'의 후신이다. 송수안이 중심이 돼 만든 대중일보는 전쟁을 겪으면서 인천신보(1950년 9월), 기호일보(1957년 7월)를 거쳐 경기매일신문(1960년 7월)으로 이름을 바꿨다. 인천신문은 허합이 주간인천을 인수해 1960년 8월 창간한 신문이었다. 경기일보는 이보다 늦은 1966년 2월 인천에서 출발했다. 동양통신 기사는 신문사 이외에도 시청, 세관, 경찰 등 관공서와 선박, 유통업체 등이 받아 봤다고 한다.당시 인천지역 언론인의 주머니 사정은 어땠을까. 동양통신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은 필경사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기자들은 어떻게 생활을 했던 걸까. 신원철 회장은 자신이 매일 배달하던 '봉투'에 그 답이 있다고 했다. "당시 지사장, 선임기자 2명, 초임기자 2명, 필경사 1명이 있었는데, 필경사 빼고는 월급이 없어요. 선배들이 자꾸 어디 가서 봉투를 가져오라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촌지'였습니다. 그걸로 생활을 하는 거였더라고요. 결국 무보수로 일하면서 햇수로 2년간 동양통신을 다녔던 겁니다."신 회장은 동양통신 경력을 바탕으로 1966년 3월 24일 매일경제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언론통제와 프레스카드1961년 5·16 군사정변 전후 정권의 부패와 맞물려 기자들도 덩달아 부패했다. 기자 명함을 무기로 지니고 다니는 소위 '사이비 기자'가 판을 쳤다. 밀주를 만드는 사람을 찾아가 돈을 뜯어내거나 불법 과외교습을 하는 교사를 조사해 뒷돈을 받는 기자들이 더러 있었다는 것이 신 회장의 설명이다. 지금 들으면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당시에는 기자증이 있으면 군대도 안 갔다고 한다.1971년 12월 21일 박정희 정권은 '언론자율 정화에 관한 결정사항'을 각 신문, 방송, 통신사에 공표하고, 이듬해 2월 1일자로 문화공보부 장관 명의의 프레스카드를 기자들에게 발급했다. 프레스카드가 없는 기자는 취재에 응하지 말라는 공문을 각 관공서에 보내기도 했다. 이 프레스카드는 일종의 관공서 '출입증' 기능도 겸했다. 겉으로는 사이비기자를 없애자는 취지였지만, 속내는 기자들을 관리하고, 정부비판 기사를 사전에 검열하겠다는 의도였다. 신 회장은 그동안 각 출입처에서 받은 프레스카드를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다.인천언론인클럽이 2008년에 낸 '인천언론사'를 보면 당시 프레스카드 제도로 인해 18개 중앙 일간신문사, 통신사에서 각 사별 4~6명까지 주재하던 기자들이 1~2명으로 줄었고, 전체적으로는 200여 명에서 50여 명으로 급감했다. 일부 중앙 일간신문, 방송이 통폐합됐고, 통신사의 경우 합동, 시사, 동화, 동양, 경제통신이 통폐합돼 '연합통신'(현재 연합뉴스) 단 한곳만 남게 됐다. 프레스카드 제도는 1988년 1월 막을 내렸다."정부기관에서 신문사에 상주하면서 편집에 관여를 하고, 맘에 안 드는 기사가 있으면 삭제하던 때가 있었어요. 결재 받아서 편집하고, 언론인을 구타하고, 구속하고 신체적 모욕감을 주기도 한 암울한 시기였어요."기자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제작거부로 맞섰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해직이었다. 이른바 동아·조선 해직기자 사건이다. 경인지역 언론도 군부독재의 언론탄압에 펜을 꺾지 않으려 애썼다. 계엄철폐 시위가 한창이었던 1980년 5월 15일 경기신문은 "부당한 압력 속에서도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 공정보도를 하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다음날 이를 신문에 게재했다.신원철 회장은 기자들의 잇따른 해직으로 경력기자를 뽑던 조선일보에 1979년 3월 2일 입사했다.# 경인언론 3사 통합군사정권의 언론탄압은 중앙·지역 가릴 것 없이 단행됐다. 1973년 9월 1일 경기·인천지역 신문사 3곳은 정부의 1도(道) 1사(社) 정책에 따라 통폐합되는 아픔을 겪었다. 앞서 소개한 '경기매일신문'과 1960년 창간했다가 1969년 수원으로 본사를 옮긴 인천신문의 후신 '연합신문', 1966년 2월 인천에서 창간된 '경기일보'가 하나로 합쳐져 '경기신문'이 되었다. 통폐합 과정에서 주도권은 연합신문이 쥐었다.신원철 회장은 이에 대해 "힘의 논리에서 인천이 수원에 졌다"고 해석했다. 당시 통합 신문사 본사는 경기도청이 있는 수원에 둬야한다는 것이 명목상 이유였지만, 앞서 1967년 서울에 있던 도청을 수원에 넘겨준 것부터가 힘에서 밀린 것이라고 신 회장은 설명한다. 신 회장은 당시 수원 국회의원이었던 이병희의 '로비'가 크게 작용했다고 기억한다."힘의 논리, 로비 부족으로 수원에 본사를 두게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수원 국회의원 이병희 씨와 관계가 많지요. 서울에 있던 교육위원회, 도청, 병무청까지 뺏긴 것이 다 힘의 논리에서 밀린 것이죠. 인천이 인구도 많고 문화 등이 다 집중돼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인천엔 유승원이라는 국회의원이 있었는데 그가 아무리 대령 출신 '혁명주체'였어도, 이병희 조직, 체계에 대응하기엔 부족했던 것 같아요."# 신문기자와 고스톱화투나 포커가 기자들의 일상이다시피한 적도 있었다. 물론 판돈은 기자를 '관리'하던 공무원 주머니에서 나왔다. 신원철 회장은 당시 고스톱 판의 생생한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풍문으로만 듣던 그때 그 시절 얘기다.언론통제로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어느날 대통령 앞으로 인천시청 총무과장 명의의 투서 한 장이 전달됐다. "인천시청 출입기자 5명이 매일같이 기자실에서 포커와 고스톱을 치고 중국집에서 요리와 고량주를 시켜 먹고 각 국장에게 돈 달라고 손 벌린다. 게다가 고스톱 자리에선 정부정책을 비판하기도 하니 엄중히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대통령 비서실장이 각 사 편집국장에게 진위여부를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군사정권 대통령 비서실장에게서 내려왔으니 살아날 길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기자실에서 고스톱 판을 벌이는 게 어디 인천시청 기자실만의 일이었겠는가. 결국 기자들은 "죽어도 안 했다"고 버텼고, 각 사 편집국장들도 모르는 척 눈감았다.함께 포커치고 놀던 기자의 부인이 남편이 매일같이 술 먹고 노름을 하느라 집에 안 들어오니까 홧김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이른 아침 기자실에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 기자,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치열함'언론탄압의 시절이나 자유로운 취재활동이 보장되는 요즘에나 기자는 늘 '치열한 취재경쟁' 속에 놓여 있다. 신 회장도 당시 전쟁과도 같았던 취재경쟁 상황을 들려줬다."일단 조간이나 석간이나 서로 특종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경찰 상황실장을 매수하기도 하고, '사스마와리'라고 경찰서를 뺑뺑이 도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일이 아니겠어요. 그땐 경찰서 유치장 수감자들도 취재했으니까요. 옛날엔 지금과 같이 통신기기가 발달한 시기가 아니라서 잡음이 심한 파출소 무전기로 상황을 전해 듣고 데스크에 보고했던 기억이 나네요."신원철 회장은 80년대 초까지 기자생활을 하고, 교육출판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인천시교육위원을 거쳐 1995년 초대 민선 연수구청장에 당선돼 내리 2선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비판,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기자 시절이 가장 뜻 깊은 시기였다고 회상했다.그는 오늘날 언론을 "자유가 보장된 만큼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취재대상에 제한이 없어져 가능한 모든 것을 소재로 기사를 쓸 수 있지만,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졌다는 것이다.막내둥이 윤설아 기자는 50년 뒤 신출내기 기자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글/김민재기자 사진/조재현기자▲ 인천지역 언론계의 대선배인 신원철 연수원로모임 회장이 1960~70년대 당시 경인지역 언론의 태동과 통폐합의 아픔, 그당시 치열했던 취재이야기와 그 뒷이야기들을 그동안 직접 모아온 자료들을 보여주며 경인일보 막내기자인 윤설아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2014-08-31 김민재

[다시 대중일보를 생각하다]경인지역 언론 어떻게 변모했나

해방직후 '수도권 최초' 우리말 신문한국신문 연표, 경인일보 흐름 명시1959년 '경기사전'에 발행부수 공개대중일보 이은 인천신보 8500부 발행정기간행물 폭증 후 군정때 '통·폐합'30여년 흐른 지금은 '1인 미디어시대'독자와 함께 '언론 르네상스' 이뤄야언론계에도 혁신이 필요한 때다. 개인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를 이루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언론계의 최일선에 있는 기자와 눈높이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기자들이 독자로부터 신뢰를 잃는 경우도 잦다. 언론계에도 르네상스가 절실한 상황이 되었다.해방 직후 경인지역 첫 신문, 대중일보로 시작해 지금껏 수도권 언론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경인일보가 창간 69주년 기념호에서 초창기 경인지역 언론의 상황을 다시 들여다보는 기획을 4면과 5면에 걸쳐 마련했다. 4면에서는 대중일보에서 인천신보로 이어지는 시기의 언론 상황을 간략히 살피고, 5면에서는 중앙 언론사의 인천 주재 기자로 일하면서 지역 언론계를 외부인의 눈으로 지켜본 신원철(74) 인천 연수원로모임 회장과 경인일보 새내기인 윤설아 기자와의 50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대담을 준비했다. 1964년 기자생활을 시작한 대선배가 이제 막 기자사회에 발을 디딘 풋내기 기자에게 들려주는 진솔한 얘기는 언론계의 어제와 오늘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69년 전인 1945년 10월 7일 인천에서는 '대중일보'가 세상에 선을 보였다. 수도권에서 가장 먼저 나온 우리말 신문이었다. 그리고 5개월여가 지난 뒤 역시 인천에서 인천신문이 창간되었다. 경기도에서 지역 언론의 양립시대가 이뤄진 것이다.대중일보와 인천신문의 창간 당시 상황을 1973년에 나온 '인천시사'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광복후 인천에서 최초로 발간된 지방지는 대중일보였는데, 개업의(開業醫) 고주철을 사장으로 하여 1945년 10월 7일 창간하였다. 그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에는 김홍식을 사장으로 하고 엄흥섭을 편집국장으로 하는 인천신문이 창간되었다. 그 당시는 좌우익의 투쟁이 치열한 때였는데, 인천신문은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한때 노골적으로 좌경화하여 그와는 반대의 논진을 펴고 있는 대중일보와 대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후발 주자인 인천신문은 좌익을, 선두에 선 대중일보는 우익을 각각 대변했다는 얘기다. 인천은 해방 전후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언론 활동도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행보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인천시사가 말하는 것처럼 대중일보가 우익을 대변한 적도 있지만, 그 이전에는 좌익 일변도였다. 인천신문 창간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엄흥섭이 대중일보 편집국장을 먼저 지냈기 때문이다. 대중일보는 해방공간의 대표적 좌파 시인인 임화의 시를 창간 축시로 받아 실을 정도였다. 대중일보에 누가 근무하느냐에 따라 신문의 논조가 좌와 우를 오갔다.인천에서 해방 직후 수도권 최초의 신문이 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인천에 기사를 작성할 기자와 신문을 만들 인쇄시설이 그만큼 빨리 준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인천을 '작은 일본'으로 건설하려 했던 구상과 맞닿아 있다. 인천 개항 7년 후인 1890년 1월 28일 일본인들은 인천에서 '인천경성격주상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국내 지역신문의 효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당연히 인쇄시설도 인천에 들어섰다. 이후 인천은 기자들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주식거래나 선물거래와 비유할 수 있는 미두(米豆) 전문 기자도 미두장(米豆場)이 있는 인천에 많이 상주했다고 한다.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신문 활동을 주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 일을 부끄럽게 여길 수는 있어도, 숨길 일은 아니다. 지나온 과거를 정확히 바라보고, 거기에서 우리의 새로운 미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언론의 르네상스일 것이다.대중일보는 인천신보,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 경기신문, 경인일보 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어왔다. 이 같은 사실은 1983년의 '한국 신문 100년 연표'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다. '한국 신문 100년 연표'는 경기매일신문을 대중일보와 같은 신문으로 기록하면서 특기사항에 '대중일보→인천신보→기호일보→경기매일신문→경기신문'으로 이어지는 경인일보의 흐름을 명시했다. 경기신문은 1973년 9월 1일, 경기일보·경기매일신문·연합신문이 통합된 것이며 1982년 2월 30일 지금의 경인일보로 제호를 고쳤다는 점도 '한국 신문 100년 연표'는 설명하고 있다.그러면 1950년대 경기도에는 어떠한 신문들이 있었을까. 또 그 신문들의 발행부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신문 발행부수가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동안에는 신문의 발행부수가 기밀사항처럼 취급되었으며, 대개의 신문들은 발행부수를 크게 부풀리고는 했다. 이런 상황을 놓고 볼 때 1950년대 경인지역 신문 발행부수를 살펴본다는 것은 지금에 비춰보면 신기할 정도다.지금까지 기자가 확인한 바로는 경인지역 신문의 발행부수가 공인매체를 통해 공개된 것은 1959년 발간된 '경기사전(京畿事典)'이 처음이다. 물론 일본인들이 인천에서 신문을 처음 만들던 1890년대 '인천경성격주상보'는 500부 정도 찍었던 것으로 1933년 간행된 '인천부사(仁川府史)'는 기록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발행부수의 많고 적음에 의미를 부여할 일이 아니다. 신문이 나오느냐 마느냐가 더욱 큰 일이었기 때문이다.경기사전은 1956년과 1957년 사이의 통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경기사전은 정기간행물을 인천신보(대중일보에서 이름이 바뀐 것)와 경인일보(현 경인일보와는 다른 신문) 등 2개의 일간지와 열흘마다 나오는 순간지(경기민경) 1개, 주간지(인천공보, 주간 경기, 주간 인천) 3개, 월간지(경기화보, 경기도정) 2개를 소개하고 있다. 일간지는 모두 인천이 발행지였으며, 경기민경은 경기도 경찰국에서, 인천공보는 인천시청에서 각각 발행했다. 주간 경기는 수원에서, 주간 인천(연합신문의 전신)은 인천에서 각각 나왔다. 월간지 2개는 모두 경기도청에서 발행했다. 대중일보에서 이어져 온 인천신보는 8천500부의 발행부수를 보였으며, 경인일보는 7천부였다. 경기도 경찰국은 1만2천부의 경기민경을 찍어 열흘마다 배포했다. 나머지 주간지와 월간지는 3천부에서 6천부 사이였다.경기사전에 기록된 당시 경기도 인구수는 총 216만9천303명이었다. 인천이 29만6천313명이었고, 수원이 7만1천918명이었다. 이때의 인천 인구는 강화(10만5천402명)와 옹진(1만5천347명)을 제외한 것이다. 지금 경기도·인천의 인구는 1천300만명을 헤아린다. 경기도청이 서울에 있던 시절, 그리고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가 많던 시절, 경기도 제1의 도시 인천에서 발간되던 일간지의 발행부수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56년 1월에는 인천교육청이 '문맹자 완전 퇴치 운동'을 전개할 정도였다. 당시 인천의 문맹자를 9천명 정도로 당국은 파악했다.전쟁이 끝난 지 5년여밖에 지나지 않은 당시는 폐허를 딛고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르네상스 시대'였다. 최헌길 경기도지사는 경기사전 추천사에서 '정부 수립 후 10년은 실로 건설의 10년이었고, 국가중흥의 10년이었다'고 전제한 뒤 '정치, 경제, 외교, 교육 등 전반에 걸쳐서 눈부신 발전을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문화면에 있어서는 보다 획기적인 성장을 보았다'고 평가했다. 특히 '신문, 잡지 등 문화간행물이 선진국가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고 자평했다.이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1960년 인천시가 집계한 신문 등 정기간행물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때 인천에서만 일간신문 49종, 주간지 49종, 월간지 3종이 발행되었다.그러나 곧바로 5·16 쿠데타 이후 언론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앞에서 얘기한 경인일보가 5·16 후 군정(軍政)이 포고한 시설 기준 미달로 폐간되었다. 또 '인천통신', '동서통신' 등의 통신사도 5·16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군사정권 아래서 1973년과 1980년 두 차례 언론 통폐합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 뒤 30여년이 흐른 지금 언론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1인 미디어 시대'라 일컬을 정도다.언론이 나아갈 바를 고민하는 것은 언론 종사자만의 몫은 아니다. 언론계는 독자와 함께 생각해야 하고, 이를 교류해야 한다. 그 속에 '언론 르네상스'의 답이 있을 것이다. /정진오기자▲ 그래픽/박성현기자▲ 경기사전편찬위원회가 1959년 6월 발간한 '경기사전' 표지. 이 책은 범례에서 '경기사전은 경기도에 관한 행정, 산업, 경제, 교육, 종교, 문화, 고적, 인사 등을 수록한 일명 기관사전(機關事典)'이라고 밝히고 있다. 경기사전의 각종 통계는 1956~1957년 사이의 것을 중심으로 했다.▲ '경기사전'은 '신문 정기간행물 발간상황' 항목에서 당시 발간되던 신문들의 발행부수까지 공개했다.▲ 한국 언론계에서 '영원한 사회부장'으로 추앙받는 오소백(1921~2008) 기자의 대표작 '기자가 되려면'(개정·증보 12판)에 수록된 '한국 신문 100년 연표'의 '경기매일신문'과 '대중일보' 설명란.

2014-08-31 정진오

대중일보 찾아가기 40년… 수년전 언론사학계 통설 수용 뿌리찾기 나서

경인일보가 대중일보라는 뿌리를 찾기까지 4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긴 시간 동안 1973년의 언론3사 통합 과정을 직시하지 못했다. 경인일보 구성원들은 수년 전부터 대중일보 뿌리찾기에 대한 공론화 작업을 벌여왔다.군사 정권의 외압에 의한 언론사 통합 과정과 독점언론의 폐단 등과 같은 전철은 경인일보가 자기반성을 통해 밝혀야 할 과제다.경인일보는 2011년 9월 토론회를 열어 '대중일보는 경인일보의 뿌리'라는 사실을 처음 공론화했다. 이에 앞서 2010년에는 노보를 통한 내부 공론화를 시작하기도 했다.경인일보가 지난 8월 게재한 '뿌리찾기 기획'은 이같은 공론화의 산물이었다. 언론3사 통합의 아픔을 겪고, 1970~80년대 언론독점체제를 누렸던 경인일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또 언론사학계의 권위자인 서울대 차배근, 경희대 이광재 명예교수로부터 조언을 구했다.수차례의 이메일 인터뷰와 대면 인터뷰 등을 통해 '경인일보의 뿌리는 대중일보'라는 학술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취재 과정에서 얻은 다양한 사료가 이를 증명했고, 그 내용을 기획에 게재했다.경인일보는 이러한 언론사학계의 통설을 그동안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통합 과정의 중심에 있었던 인천신문의 역사만 고집하고, 통합되는 아픔을 안고있는 경기매일과 경기일보의 역사는 외면했기 때문이다.경인일보는 2013년, 그동안의 고집과 외면의 생각을 털어내고 원뿌리를 찾아 창간연도 변경을 선언한 것이다./김명래기자

2013-10-23 김명래

'인천신문'과 '수원신문'?… 3社통합 73년 '인천=경기도' 인천 언론이 곧 경기도 언론

23일 열린 인천언론사(史) 재조명 토론회를 처음 제안하고 이 행사를 주최한 인천시민사회단체연대와 토론회 당일 1면 톱박스 기사에서 '경인일보가 대중일보 후신인지 아니면 궤변으로 역사를 훼손하는지를 가려보자'던 인천일보가 경인일보를 비판할 때 쓴 공통된 논리 중 하나는 '수원 본사 신문'이라는 얘기다.현재 경인일보 본사 소재지는 수원이니, 인천에서 탄생한 대중일보를 이어받을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하지만 1973년 인천·경기 언론3사가 통합할 당시에 인천과 수원 모두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인천시민은 경기도민이기도 했다. 현재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40년 전의 언론 통합 과정을 바라보면 안된다. 또 인천·경기 언론의 뿌리는 인천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경기연합일보(인천신문의 후신)가 인천에서 수원으로 본사를 옮긴 1969년 이전까지만 해도 수원은 언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한 뿌리에서 시작된 나뭇가지가 훗날 생긴 담장을 넘어갔다고 해서 그 뿌리가 달라질 수는 없다.이와 함께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사가 1967년 대도시 인천이 아닌 수원으로 옮기게 된 것도 훗날 '수원 언론' 주도의 통합을 가능케 한 이유 중 하나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도청 소재지 유치 경쟁이 언론 통합의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 모두가 우리가 생생하게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이다./김명래기자

2013-10-23 김명래

대중일보 뿌리둔 언론3社, 통합된 곳이 '경인일보'

대중일보 창간 송수안 경기매일 발행 '명맥'통합 경기신문 편집국엔 3社인력 고루 배치언론史에도 '경기신문' 대중일보 전신 기록경인일보로 이름 바뀌었을 뿐 '뿌리는 하나'1945년 10월 7일에 인천에서 창간한 대중일보는 인천·경기 언론의 출발점이었다. 언론사로서 시설, 장비, 자본, 인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껍데기 언론사'가 횡행하던 시절에 대중일보는 탄탄한 기반을 구축한 신문사였다.대중일보는 인천신보, 기호일보를 거쳐 경기매일신문(1960년 7월)으로 이름을 바꿨다. 비슷한 시기 인천 중구 사동에서 인천신문(1960년 8월)이 출범했다.인천신문은 경기연합일보를 거쳐 연합신문(1970년 10월)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1966년에는 인천 신포동에서 경기일보가 창간했다.이들 신문사의 자산은 대중일보였다. 대중일보 창간 주역의 한 명이었던 송수안은 경기매일신문 발행인으로 올랐다. 대중일보 기자로 시작한 김응태는 인천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경기일보 부사장을 했다.인천신문 초대 주필이었던 고일은 인천 언론계의 어른으로 통했다. 인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한 오광철은 인천신문, 경기일보를 거쳤다.1973년 경기매일, 연합신문, 경기일보는 통합해 9월 1일 경기신문으로 출범했다. 경기신문의 초대 편집국장은 경기일보를 거쳤고, 인천 편집책임자는 경기매일신문 출신이었다.기자들 인원수에서는 연합신문 출신이 다수였지만, 편집국 부서별로 보면 3개 신문사의 인력이 고루 배치됐다.경기신문의 전신이 대중일보라는 건 언론사(史)에 기록돼 있다. 경기신문은 훗날 경인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경인일보에는 경기매일, 연합신문, 경기일보의 뿌리가 포함돼 있다.한 단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중일보가 경인일보의 원뿌리다. 1973~1988년, 일부가 '언론 암흑기'라고 부르던 시절에도 경기신문(경인일보) 기자들은 그 몸체를 이어왔다./김명래기자

2013-10-23 김명래

대중일보는 살아있는 역사일때 진정한 가치

경인일보 창간 68주년 특별기획 '경인일보, 뿌리(대중일보)를 찾다'와 관련, 인천언론사를 재조명하고 지역언론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토론회가 당사자인 경인일보가 빠진 상황에서 23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렸다. ┃관련기사 3면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 일부 주제발표자와 지정토론자는 경인일보가 자신의 뿌리를 대중일보로 선언한 것에 대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또 지역언론 통폐합부터 언론자유화까지 15년간 인천에는 지역언론이 없었다는 의견을 내세웠다.경인일보는 경기도 인천에서 경기도 수원으로 본사를 이전했기 때문에 '인천언론'이 아니라는 것이 이들 주장이다. 특히 이들은 경인일보를 지역언론 통폐합의 가해자로 여기는 듯했다.1973년 유신 정권의 언론 탄압 정책의 책임을 경인일보에 돌리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런 일방적인 주장에는 경인일보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인천지역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이희환 황해문화 편집위원은 주제발표에서 "경인일보가 대중일보 존재를 인식하고 뿌리로 삼으려는 것은 높게 평가한다"고 했다.그러면서도 "대중일보가 경인일보만의 뿌리냐"며 "지역언론 통폐합으로 인천의 2개 신문사는 폐간의 아픔을 겪었다"고 했다.대중일보 역사는 인천이 공유해야 할 공공유산으로, 특정 신문사가 독점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번 토론회를 연 시민사회단체들의 입장이다.대중일보의 '창간 정신'이 공공유산이어야 한다는 입장에 경인일보는 동의한다. 하지만 대중일보 역사는 경인일보의 역사일 수 없다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1973년 지역언론 통폐합이 유신 정권에 의해 강제로 이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또한 지역언론사의 일부분이다.'대중일보는 살아 있는 역사'이어야 한다는 것이 경인일보가 대중일보를 계승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신문의 제호처럼 '민중'을 전면에 내세워 창간한 대중일보를 '인천'이란 지역적 틀 안에만 가두어서는 안 된다. 또한 화석처럼 죽은 역사로 내버려두어서도 안 된다./목동훈기자

2013-10-23 목동훈

시민단체 마련 토론회 불참 이유… '특정언론 주장 편드는 토론회 안돼'

경인일보는 23일 '인천 언론사의 재조명과 지역언론의 현주소'란 주제의 토론회에 불참했다.이 토론회는 지난 9월 '경인일보의 창간 68주년 선언' 이후 인천지역 시민단체들이 마련했다.경인일보가 그동안 공표해 왔던 '1960년 창간'에서 인천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대중일보의 역사를 이어 '1945년 창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선언을 했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일부 목소리가 있었다.그 반대론은 1973년 3사 통합의 주역이었던 인천신문 출신 일부 인사들과 통합의 피해자격인 경기매일신문·경기일보 임직원들의 일부 유족들을 중심으로 나온다.인천신문 출신은 그동안 이어왔던 존재감 상실에서, 경기매일과 경기일보 일부 유족들은 통합 신문에 참여하지 못한 피해의식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이러한 반대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경인일보는 대중일보가 원뿌리임을 천명했다.그것은 경인일보에 일제 강점기를 넘어 해방 직후 첫 경인지역 언론이라는 자랑스런 역사와 군사 정부에 의한 언론 통합의 아픔이 고스란히 서려 있고, 경인일보가 그 역사를 계승할 때 경인언론의 역사가 생동감있게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날 토론회에서는 일부에서 경인일보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피해자' 인식이 강한 유족들의 주장이 일방통행식으로 제기됐다.토론회 준비 과정에서 "자칫하면 인천일보의 주장에 편승할 수 있는 토론회가 된다"면서 이런 우려를 전달했지만 받아들여지지않아 경인일보는 토론회에 참여할 수 없었다.이 우려는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인천일보가 토론회가 열린 23일자 1면에 '경인일보의 창간 68주년 선언'을 정면으로 비난하는 장문의 기사를 실은 것이다.그리고 이날 토론회에서는 이 기사의 내용을 뒷받침하는듯한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따라서 경인일보는 이번 토론회에서 나온 일부 주장에 대한 반론 입장에서 1면과 3면에 특집 기사를 싣는다./목동훈기자

2013-10-23 목동훈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9·끝] 1945년 창간, 학계의 통설

1945년 10월 7일 창간한 대중일보가 현재 경인일보의 출발점이라는 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국내 언론사(史) 권위자들은 경인일보의 뿌리 찾기에 학술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입을 모은다.1973년 경기·인천 언론사 3곳이 통합해 생긴 경기신문과 이 신문이 이름을 바꿔 현재까지 이어지는 경인일보의 뿌리가 대중일보라는 점은 연구방법론상 명백하다는 것이다.한국신문연구소(현 한국언론진흥재단)는 1975년 12월 발행한 '한국신문백년 사료집'에서 "대중일보는 경기신문의 전신을 이루고 있다"고 못 박고 있다.한국신문백년 사료집은 신문연구소가 만 3년간의 작업 끝에 낸 책으로, 1883년 한성순보 이후 850여 종의 신문 사료를 총론적으로 집대성한 문헌이다.이 사료집에는 대중일보 경영진이 고주철(대중일보)→조희순(대중일보)→임홍재(대중일보)→송수안(인천신보·기호일보·경기매일신문)→송영호(경기매일신문)→홍대건(경기신문)으로 개체(改替)된 사실을 기록했다.한국신문백년 사료집은 대중일보가 경기신문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경기신문의 출발점을 통합 주도세력이었던 연합신문(1960년 창간한 인천신문이 이름을 바꿈)의 것이 아니라, 역사가 가장 긴 경기매일신문(대중일보가 이름을 바꿈)으로 본 것이다.이 같은 사실은 한국언론연구원(한국신문연구소의 후신)이 1983년 보완해 발간한 '한국신문백년지'에도 나와 있다.그러나 경인일보는 1982년 새해 벽두부터 15년 역사를 자르고 1960년 인천신문을 원류라고 천명했다. 1973년 언론통폐합 때 주도권을 행사한 인천신문에만 매달린 까닭이다. 2013년 경인일보의 뿌리 찾기는 바로 이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차원이다.오랜 시간 언론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경인일보를 '경기·인천 언론의 용광로'로 평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이광재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는 "1973년 타의에 의한 '형식적 자율합의'로 경기신문이 탄생했지만, 결과적으로 (3개 신문이) 용광로 속에 들어가 경기신문이 탄생한 것이고, 이 흐름은 부인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중일보 창간정신을 경인일보가 도모하고 본받으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했다.사사(社史)와 운영방침을 새로 정하고, 창간일자와 지령은 대중일보를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이광재 교수는 "(경인일보 뿌리찾기의) 정당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역사적으로도 비판받을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이광재 교수는 "대중일보는 해방 이후 어려운 신문 경영 여건 속에서 제대로 된 신문 체제를 구축했고, 당시에 제호에 보편적으로 쓰지 않던 '대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내 신문을 읽는 독자가 누구인지'를 고민했는데, 이를 경인일보가 이어받아야 할 정신으로 보인다"고 했다.2개 이상의 신문사가 통합했을 때의 지령은 '가장 오래된 것'을 따르는 게 일반적이다.'미국신문사(史)'의 저자이기도 한 차배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는 "20세기 초중반 미국 신문 흡수통합기가 있었는데, 보통 지령은 서로 논의해 제일 많은 것으로 한다"며 "다만 경기신문의 경우 통합할 때 강제성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이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언론 정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는 "경인일보 창간 기준은 신문사가 정한 기준과 원칙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고 밝혔다.경인일보 외에도 뿌리찾기에 나선 신문은 여럿 있다. 서울신문은 1904년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를 잇고 있다. 지령은 대한매일신보가 일제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발행된 기간을 빼고, 한말 대한매일신보의 것을 합산했다.1980년 5공 언론통폐합으로 제호를 바꾼 광주일보는 2개의 뿌리를 두고 있는데, 전남일보(1952년 창간)와 전남매일신문(1960년 창간)을 모두 계승한다고 밝히면서 창간연도는 앞선 전남일보를 기점으로 삼았다./김명래기자

2013-08-28 김명래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8]경인지역 언론의 뿌리는 하나(관련)

대중일보 이은 경기매일 건물 사무실 변모인천신문 사옥 부지는 스포츠센터로 이용경인일보 인계동 20층 신사옥 '내달 입주'경기매일신문, 인천신문, 경기일보, 경기신문 등의 사옥은 경기·인천 언론의 상징 건물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지난 17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언론계 원로들과 함께 그 현장을 돌아봤다.대중일보의 뒤를 이은 경기매일신문 사옥은 인천시 중구 중앙동 4가 8의 33에 있다. 건축물관리대장을 보면 1971년 3월 24일 신축했고, 건물 구조는 '철근콘크리트조 스라브즙 7층'으로 기록돼 있다.당시 건물 소유자는 송수안 발행인의 아들인 송영호였다. 경기매일신문은 경기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 건물을 신축했다.당시 경기매일 사진기자였던 이강희(76)씨는 "건물을 새로 지을 때 부평 미군기지에 있던 장비가 와서 (기존)건물을 철거해 주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건물을 신축할 당시 경기매일 직원들은 건너편(중구 중앙동4가 2의 7) 건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1층이 인쇄소, 2층이 사무실이었다. 현재는 식당과 노래방, 사무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1960년 8월 창간한 인천신문 사옥터는 현재 스포츠센터 건물이 서 있다. 중구 사동 14였는데, 1969년 12월 사동 16의 1로 지번이 바뀌었다.창간 당시 사옥 서측(부두 쪽)은 공터였고, 동측은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있었다고 한다.당시 인천신문은 2층 건물이었고, 1층은 인쇄실로 2층은 편집국 등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인천신문은 1968년 8월 경기연합일보로 이름을 바꾼 뒤 경영진이 교체됐고, 1969년 4월 경기도 수원으로 본사를 이전했다.경기일보 사옥은 현재 중구 답동사거리 부근 새마을금고 건물이다. 당시 이 건물과 땅의 소유주는 국제실업으로, 이 회사는 1966년 창간된 경기일보의 자본주였다. 5층 건물 중 지하실에 윤전기가 있었다.국제실업 회장실(1층), 국제실업 사무실(2~3층), 경기일보 편집·업무국(4층), 경기일보 사장·임원실(5층)로 사용됐다고 당시 경기일보 기자였던 김창수(75) 인천언론인클럽 부회장은 설명했다.1973년 언론사 통폐합 당시 경기일보는 인천시 남구 인천기계공고 부근에 언론사 맞춤형 사옥을 신축 중이었다고 한다. 김창수 부회장은 "통합되면서 새 건물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고 했다.1945~50년 대중일보 당시 인쇄소로 사용된 건물이 현재 내리교회 입구(인천시 중구 인현동 55)에 남아 있다고 이강희씨가 소개했다. 현재는 노래방이 들어서 있다.이 건물은 1942년 이종윤씨가 신축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일제 때 선영사라는 인쇄소를 경영했던 이종윤은 대중일보 창간 당시 공무국장을 지낸 인물로, 경기매일신문에서 부사장을 역임했다. 이 인쇄소가 대중일보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1970~80년대 경기신문 사옥은 수원시 팔달구 교동 136의 4에 자리잡았다. 경기신문은 2층 건물을 4층으로 증축했고, 인근 주택을 매입해 주차장으로 사용했다.현재 지하 1층~지상 4층의 이 건물에는 미술학원, 음악학원, 한의원, 식당, 카페, 조선일보 수원지국 등이 입주해 있다.다른 건물과 비교할 때 지하실 층고가 높은 편인데, 이는 윤전기 때문이었다. 1989년 인계동으로 사옥을 이전했다. 인계동 사옥은 흥화건설이 지었는데, 교동 사옥과 건축비용을 맞바꿨다고 한다.이 인계동 사옥 자리에는 호텔을 겸한 지하 5층 지상 20층 건물이 새로 들어섰고, 경인일보는 다음달 이 빌딩에 입주한다.1973년 출범한 경기신문 인천분사 사무실은 동양석유주식회사 건물 2층이었다. 현재 중구 선린동에 있는 중국요리집 본토 자리다. 이후 경기신문 인천분사는 동양석유 건물에서 수년간 운영된 뒤 현 인천일보 자리로 이전했다./김명래·민정주기자

2013-08-25 김명래·민정주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8]경인지역 언론의 뿌리는 하나

창간주역 송수안 '뚝심 경영'허합, 지역 문화 창달 선구자김응태, 꼿꼿한 기자로 족적경기·인천지역 언론은 대중일보를 뿌리로 삼아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일보가 창간된 1945년 이후 언론인들의 이동 흐름은 그 자체로 경기·인천지역 언론사의 궤적이다.경기·인천 언론의 토대를 닦은 주요 인사로는 송수안 경기매일신문 발행인, 허합 인천신문 사장, 김응태 경기일보 부사장 등을 꼽을 수 있다.송수안은 1945년 대중일보 창간 주역 중 한 명으로 대중일보의 뒤를 잇는 인천신보, 기호일보, 경기매일신문 사장·발행인을 지냈다.인천신보 시절인 1954년 12월 16일부터 약 5년간 '재정난'으로 신문을 내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고 신문사를 다시 세웠다.1973년 언론통폐합 때 '통합 도장'을 가장 늦게 찍은 인물도 송수안이었다. 충남 서천 출신의 허합은 1959년 당시 숭의동에 있던 개인 땅을 팔아 주간 인천을 인수하고, 이듬해 인천신문을 창간했다.기독교적 청빈 사상이 몸에 밴 인물이었고, 지역의 문화·체육·사회단체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허합은 대중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고일과 친분이 두터웠다.고일은 인천신문 초대 주필을 맡았다. 김응태는 대중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해 주간 인천 편집국장, 인천신문 편집국장, 경기일보 편집인 등을 지냈다.기사 작성·출고에 있어서는 예외 없이 엄격했던 선배였다는 것이 후배 기자들의 그에 대한 공통된 기억이다.이처럼 송수안은 '언론 경영인'으로, 허합은 '지역 문화 창달자'로, 김응태는 '꼿꼿한 기자'로 경기·인천 언론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들과 함께 언론활동을 한 사람들이 훗날 경기·인천 언론의 중요한 자산이 됐다.경기매일에서 편집국장을 지낸 김형희는 옛 경인일보(1962년 폐간) 출신으로 경기신문을 거쳐 현 경인일보에서 편집이사를 지냈다. 경기매일 기자였던 전중열은 훗날 경인일보 편집국장까지 올랐다.1960년대 허합 사장의 인천신문에서 기자를 한 오광철은 1966년 창간한 경기일보, 1973년 경기신문을 거쳐 1988년 창간한 인천신문(현 인천일보)에 합류해 편집국장을 했다.연합신문·경기신문 출신의 이천우는 경인일보 편집부국장을 거쳐 경기일보 논설위원, 인천일보 이사를 지냈고, 역시 연합신문·경기신문 코스를 밟은 이진영은 1980년대 이후 경인일보 편집국장, 경기일보 편집이사, 중부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경기일보 대표이사 사장을 지낸 신창기 역시 연합신문 출신이다. 1960년 인천신문 기자로 입사한 임상규는 경기신문 업무국장 등을 거쳐 1980년대 경기신문·경인일보에서 각각 사장을 했다./김명래기자

2013-08-25 김명래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7]아픔을 딛고(하) - 1980년대

공보장교 면 마다 사전검열정권 낙하산 사장까지 득세기자들 합심해 경영권 회복노조결성 편집권 독립 강화1980년대 신군부 언론정책은 70년대와 비교할 때 그 족쇄가 더욱 강화됐다. 비상계엄 때는 도청과 시청에 파견 된 공보장교(대위)에게 기자들이 면별대장을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 '치욕'의 시기였다.'언론 정화'를 명목으로 한 '신문 길들이기'가 시작됐고 경기신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대주주이자 사장이었던 홍대건은 주식을 전액 환수당하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1973년 경기매일신문·연합신문·경기일보 통합을 정권의 힘으로 주도한 이가 7년여 만에 신군부에 의해 언론계에서 강제 퇴장당한 것이다. 새 주주는 합동수사본부 주도 하에 경기·인천 기업인들로 채워졌다.이때 항만 하역 3사를 중심으로 한 '인천주주'들이 대거 경기신문에 참여했고, 1980년 11월 대표이사에 박상복(동양석유주식회사 사장)이 선임됐다.하지만 이로부터 약 7년 뒤인 1987년 3월,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의 비호를 받은 예비역 육군 소령 김장소가 사장직을 차지했다.김장소의 사장 선임은 경인일보에 노동조합을 출범하게 하는 구실이 됐다. 그는 8개월 만에 해임됐는데, 직원 250명의 '농성'이 계기가 됐다.보안사에서 군복을 벗고 제일은행 충무로지점장을 하다 온 '낙하산 사장'을 직원의 힘으로 내보낸 것이다.이듬해인 1988년 3월 경인일보 노조가 탄생했다. 경인일보 노조는 이때부터 '편집권 독립', '임금인상', '경영 개선' 등의 요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경기신문은 1982년 3월,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돼 경기도에서 분리되면서 나온 자연스런 조치였다. 경기·인천 공동의 대변지여야 한다는 차원이었다.1987년 언론기본법이 폐기되면서 1도1지 체제가 무너졌고, 이듬해 인천에서 인천신문(현 인천일보)과 기호신문(현 기호일보)이, 수원에서 경기일보가 창간했다.인천신문 대표이사는 경인일보 4대 주주였던 문병하(한염해운 대표)가, 경기일보 대표는 경인일보에서 전무를 지낸 윤석한이 맡았다. 기호신문은 경기교육신보(1975년 창간한 주간지)의 발행인 서강훈이 창간했다.초대 편집국장은 인천신문 오광철(전 경인일보 인천분실장), 경기일보 오양동(전 서울신문, 매일경제 부장), 기호신문 박민규(전 경기매일신문 주필)가 맡았다./김명래기자

2013-08-22 김명래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7]아픔을 딛고(하)-1980년대(관련)

1980년 '서울의 봄' 시위때 언론 수호 결의문 게재1984년 일본서 '컬러 윤전기' 도입 언론 기반 구축사옥 수원 인계동 신축이전… 면수 16면으로 늘려경기신문 5월 16일자 지면(7면)을 통해 당시 편집국 기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비상계엄에 맞서 인천과 수원 등지에서 시위가 계속된다는 기사가 톱인데, 그 아래에는 '(시위로 인한) 사회 혼란과 경제 침체는 누가 책임지나'는 내용이 보도됐다.하단 단신으로는 '민주화 이루려는 민중의 함성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자체 결의문을 게재했다. 기자들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정작 작은 기사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경기신문사 기자 40여 명은 15일 하오 본사 편집국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언론자유를 스스로 획득하기 위해 부당한 압력과 투쟁할 것을 다짐하고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공정보도에 충실할 것을 결의했다."1980년 5월, 계엄철폐 시위가 한창이던 때 경기신문 기자들은 결의문을 채택했다.기자들은 이를 5월 16일자 신문에 게재했다. 사전검열을 거치며 내용이 일부 삭제되고 단신 기사로 처리됐지만, 경기신문 편집국 기자들이 정권에 맞서려 한 결기를 엿볼 수 있다.암흑 속에서도 경기신문은 언론사로서 기반을 탄탄히 갖춰갔다. 1도1사라는 유리한 경영 환경이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제대로 된 신문'을 만들겠다는 임직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난날의 무력과 방관을 깊이 뉘우친다"경기신문 기자들이 결의문을 채택한 배경에는 기자로서 보고 생각한 대로 쓰지 못한다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계엄철폐를 외치며 당시 수원 교동의 시청 앞에 결집한 시위 군중은 경기신문에 '언론의 사명을 다하라'고 소리쳤다.이에 기자들은 긴급모임을 갖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신문에 나온 결의문은 사점검열로 여기저기 칼질이 됐다.당시 경기신문 기자들은 "민주화를 이루려는 민중의 도도한 함성과 더불어 지난날의 무력과 방관을 깊게 뉘우치고 이 시대, 이 민중이 요구하는 언론의 정도를 되찾기 위해 과감히 투쟁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권이 채운 족쇄를 끊어내지는 못했다.■ 노조 출범1987년 군인 출신 사장을 몰아낸 이듬해 경인일보 직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노조는 취지문에서 "국민 앞에 떳떳한 언론종사자로서 나서기 위해서는 행동과 모습이 어떠해야 하고 어떤 대우를 요구해야 하는지조차 반성하지 않는 게으름 속에 안주해 왔다"며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어야 할 언론사에 후진적인 노사관계가 온존해 왔음은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할 일이다"고 썼다.노조 결성 첫해 임금단체협상에서 경인일보 노사는 '편집권 보장', '임금 37% 인상', '자본금 증자' 등에 합의했다.노사는 이후 편집국장 임기제·임명동의제·중간평가제 도입, 편집규약 제정, 부당한 인사 방지 등에도 합의했다.■ 견실한 언론 기반 구축1980년대 경인일보는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지면을 늘리고, 컬러 시대도 열었다. 1984년 일본에서 '컬러 옵셋 윤전기'를 들여와 인천에 설치했다.당시 윤전기 가격이 약 17억원이었고, 일정기간 분할납부하는 방식으로 일본 스미모토기계공업에서 구입했다.이 윤전기는 1988년 경인일보의 '인천 주주'들이 인천신문(현 인천일보) 설립에 참여하면서 함께 이전됐다.1989년 9월에는 본사 사옥을 수원 교동에서 인계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또 일본에서 윤전기를 들여왔는데, 시간당 6만부를 인쇄할 수 있는 성능이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12면이던 신문 면수를 16면으로 다시 늘렸다.경인일보가 1980년 초 시작한 수습기자 공채는 현재까지 매년 이어지고 있다.경인일보는 경기신문 시절이던 1973년부터 기자 공채를 시작했는데, 1981년부터 수습기자 제도를 도입했다.수습기자는 6개월 동안 부장급 이상 교육, 일선 경찰서 취재 등을 거친 뒤 정직원으로 발령받았다. 현재 32기까지 선발됐다./김명래기자

2013-08-22 김명래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6]아픔을 딛고(상) - 통합 후 1970년대

경기 언론의 인천편재 시대무뎌진 정부비판 '박통 뉴스'사회 어두운 이면 보도 충실1973년 9월 경기신문 출범으로 경기·인천 언론은 그 외연을 확장했다. 경기신문은 인천이라는 중심점에서 부챗살처럼 방사상으로 경기도 전역에 퍼지게 된다.경기언론의 뿌리는 인천이었고, 인천에 본사를 둔 언론사들은 경기도 전역을 취재권역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산업화 이후 확대 일로에 있던 경기도 전역을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이 담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이 1967년 수원으로 이전한 뒤에는 도시 지향의 '이촌향도 현상'과 '서울 교외 도시의 확장'이 더욱 가속화됐지만, 이러한 추세에 부응하는 취재시스템은 갖춰지지 않았다. 당시 인천 언론계의 원로조차 '경기 언론의 인천 편재성'을 지적할 정도였다.┃관련기사 3면'자율 형식으로 포장된 강제 통합'으로 태어난 경기신문의 한계도 분명했지만, 그 한계가 경기신문만의 것은 아니었다.통합 이전과 이후의 편집방향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게 당시 일했던 기자들의 중론이다.1966년 경기일보 창간 당시 공채 1기 기자로 입사했다가, 경기신문으로 옮긴 김창수(75) 인천언론인클럽 부회장은 "통합 이전의 (경기매일·연합신문·경기일보) 1면은 다 비슷비슷했고, (경기신문 통합)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했다.실제 경기매일은 통합을 앞두고 낸 지령 9천호 특집(1973년 8월10일자)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송수안 발행인이 훈장을 받은 사진을 비중있게 싣기도 했다.경기일보는 육사 8기 출신으로 대통령 비서관을 지낸 유승원 의원이 '실질적 사주'여서 정부 비판기사를 내기 힘든 구조였다. 통합 이전 경기 3사의 신문 1면에는 1980년대 '땡전뉴스'와 비슷한 '박통뉴스'가 있었다.경기신문 출범으로 인천에 본사를 둔 언론사는 문을 닫았지만, 인천을 기록하는 경기신문 기자들은 쉬지 않았다.또한, 유신정권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누지 못한 '아픔'이 있었지만, 신문으로서 사회비판기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사회 곳곳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고, 지역 개발 과정을 밀착해 지켜보고, 각 지역의 역사와 인물을 기록하고, 지역 문화 발전에 자양분을 제공한 것도 경기신문의 역할이었다.경기신문 본사는 수원이었지만 인천 소식도 비중있게 다뤘는데, 1973년 9월1일부터 1979년 12월31일까지 경기신문에 소개된 인천 기사는 약 2만3천건이었다./김명래기자

2013-08-18 김명래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6]아픔을 딛고(상)-통합 후 1970년대(관련)

경기신문 창간사설 "도내 전역 균점적 배려·균형" 천명서울 언론과 경쟁력 제고 '인천' '한수이남-이북권' 나눠지역인물 소개·사회 고발·미담기사등 기획보도 연이어1970년대 군부의 언론정책이 산파한 경기신문이라지만, 신문으로서의 본연을 잊지 않았다는 건 당시 지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경기신문은 서울 거대신문과 경쟁하면서, 지역성을 강화하는 전략으로 생존했다. 독자를 의식하며 행간에 하고싶은 얘기를 써놓은 기사가 적지 않다.■ "인천에 편재돼 있던 경기언론"인천은 경기도에 속한 대도시였다. 도세(道勢)도 강했다. 1973년 말 경기도 인구 367만명 중 인천이 71만명으로 가장 많았고 수원·성남이 각각 19만명이었다.경기도경찰국 등 주요 행정기관 상당수도 인천에 위치해 있었다. 해방 후 경기언론의 역사는 1945년 10월 인천서 창간한 대중일보에서 비롯돼 뿌리가 갈라졌다.1960년대 말 연합신문(당시 경기연합일보)이 수원으로 본사를 이전하기 전까지 발간된 신문연감 등의 자료를 보면 경기도의 일간지(기관지 제외)는 모두 인천에 있었다.1973년 경기신문 출범 전 경기 3사(경기매일신문, 연합신문, 경기일보)의 주요 기반은 인천이었다. 취재 대상에서 나머지 지역은 소외돼 있었다.고일 선생은 1973년 8월의 한 대담 기사에서 "경기언론이란 관점에서 경기도 전역을 개관할 때 언론 활동은 인천 등지로 편재돼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사실"이라며 "확고한 경기언론이라는 이미지를 심지 못한 사실"을 꼬집기도 했다.경기신문은 창간 사설 마지막 부분에서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해나갈 것임을 강조했다."경기신문은 경기도 350만 명의 공동소유임을 깊이 자각하고 도내 전역에 걸쳐 균점적인 배려와 힘을 쏟는 균형있는 신문이 될 것을 분명히 해둔다"고 천명했다.■ 편집 방향은 '지역성 강화'경기신문의 창간 목표는 '지역사회 대화의 광장', '내 고장 정보문화 센터의 기능적인 사명'으로 삼았다. 지역성 강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에 나선 것이었다.당시 경기언론은 서울과의 경쟁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연합신문을 거쳐 경기신문 업무국장을 지낸 임상규(79) 전 경인일보 사장은 "1973년 이전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사 발행부수가 4천 부도 안 됐다.서울의 신문들과 동시에 신문을 찍어도 수도권 각 지역에는 보급망이 좋은 중앙지가 지역지보다 먼저 도착할 정도였다"며 "경기도 신문은 존재하기도 힘든 구조였다"고 전했다.경기신문은 향토지에 걸맞게 편집방향을 바꿨다.지방소식 70%, 전국 20%, 해외 10% 비율로 신문을 짰다. 전국 소식은 정부발 기사로 주로 1면에 실렸다.해외 소식은 해외토픽 형태로 속지에 게재됐지만, 공산권 국가에 대한 비판적 외신기사가 이따금 1면 톱기사로 배정된 것도 특징이다.지방소식은 도정(25%), 시정(20%), 일반사회(20%), 체육·문화(5%) 기사로 채워졌다. 넓은 권역에 있는 독자들을 위한 면배정에도 공을 들였다. 지방소식을 '인천권', '한수이남권', '한수이북권'으로 나눠 소식을 전했다.경기도와 인천 각 지역의 인물과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은 경기신문의 주요 편집방향 중 하나였다. '기호의 본적지', '경기 인맥의 자취를 찾는 시리즈-명인의 고향', '속담의 고장' 등이 기획됐다.■ 인천을 기록한 기사들언론 통폐합으로 기자들의 몸값은 높아졌다. '기자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이들은 도청, 시청, 경찰, 상공회의소, 항만, 사회단체 등을 담당하는 '출입처 중심주의'로 움직였다. 하지만 사회의 밑바닥을 훑는 발로 뛰는 기사도 많았다.경기신문 인천분사 기자들은 1973년 10월부터 '심야의 역군' 시리즈를 시작했다.밤낮없이 병원생활을 하는 간호양, 연중 휴일이 없는 소방관을 비롯해 건널목 간수, 방범원, 어업통신사, 순찰 경찰관 등을 취재해 실었다.사회 비판 기사도 있었다. 1974년 9월에는 에너지 파동 이후 인천에 유류암거래가 성행했는데, 불법으로 주유소에 기름을 공급하다가 불이 나 사람이 숨진 사건을 보도했다.1977년 2월에는 '버스안내양은 고달프다'는 제목의 기사를 사진과 함께 6면 톱에 실었다. 인천 버스안내양 480명 중 3분의1 가량이 '월 25일 격무', '각종질병 발병', '세면·세탁 불가능' 등에 시달린다고 고발했다.미담 기사도 많았다. 1975년 2월에는 인하대에 장학생으로 합격한 김모군이 등록금이 없어 애태운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가 나간 지 이틀 만에 각계 성원이 이어져 등록금을 마련하게 된 사연도 경기신문에 기록돼 있다.통합 이후 정권의 기사 검열은 이전보다 오히려 완화됐다.1972년 비상계엄령 때가 가장 심했는데, 당시에는 중앙정보부 조정관이 각 신문사 편집국장실에서 모든 기사를 검열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사전 검열은 사라졌다.하지만 도청·시청 기자실에 기관원들이 사무실을 두고 상주하면서 기자 동향을 파악하는 행태는 남아 있었다./김명래기자

2013-08-18 김명래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5]떠난자와 남은자들

초기엔 경기매일·경기일보측 기자 스카우트 방식언론계 떠난 인사들 공기업·대학교등 새둥지 틀어업무·광고·윤전부 직원들 대다수 직장잃는 아픔도1973년 출범한 경기신문은 서로 다른 '유전자'를 지닌 신문사의 구성원들이 한데 모여 구성됐다.통합을 주도한 연합신문 출신 기자들의 수가 가장 많았지만,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에서 온 기자들은 각 포지션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이렇게 3사 통합 이후에도 언론계에 남은 이들이 있지만, 떠난 이들도 상당수였다. 1972~1973년 전국언론인방명록을 기준으로 보면, 최소한 100명 이상이 직장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특히 경기매일·경기일보의 업무·광고·출판·보급·윤전부 직원 대다수는 한순간에 실직자 신세가 됐다.초기 편집국 구성은 연합신문쪽에서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측 기자들을 '스카우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경기매일 정치부 차장이었던 우성균(禹聖均)은 정경부 기자로 이동했고, 경기일보 경제부 기자였던 정용준(鄭用準)은 경기신문 편집부 기자로 옮겼다.인천분사는 주재기자 명단에 3개 신문사 출신이 고루 분포됐다. 모두가 인천에서 취재 경력이 있는 기자들로 구성됐다.경기매일에서는 전중열(全仲烈·전 정치부장), 최인재(崔寅載·전 취재부 차장), 장용석(張容碩·전 지방부 기자), 최성양(崔成洋·전 지방부 기자) 등 4명이 채용됐다. 경기일보에서는 정진철(鄭鎭哲·전 정치부장), 김창수(金昌洙·전 사회1부장), 장사인(張師仁·전 사회1부차장), 최용균(崔勇均·전 사회2부차장)이 경기신문에 들어갔다.통합 전 연합신문 인천주재기자 9명 중 손병균(孫炳均), 최만석(崔萬錫), 이용기(李用起), 정명수(鄭明水), 김지선(金知善), 박근원(朴根源) 등 6명이 인천분사 주재로 인사가 났다.직위가 국장·부장·차장에서 부장·기자로 '강등 인사'가 난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전 국장기자', '전 부장기자'라는 호칭이 있었다고 한다.3사 통합으로 직장을 잃은 이들은 큰 혼란을 겪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몸담은 언론계를 떠나 다른 직장을 찾아야했다.인천상공회의소가 열흘에 한 번씩 발행한 순간(旬刊) 인천상의보에 기자들 여럿이 입사했다.경기매일신문에서 편집부국장 오종원(吳鍾元), 기자 조재학(趙載學) 등이 인천상의 홍보팀에 들어갔고, 경기신문에서 일하던 정진철(鄭鎭哲), 김경하(金景夏)가 훗날 합류했다.1975년에 주간지인 경기교육신보가 창간됐는데 경기일보 사회2부장 출신이던 서강훈(徐康勳·현 기호일보 회장)이 주축이 됐다.이밖에도 언론계를 떠난 기자들은 공기업, 대학교, 새마을운동중앙회, 건설회사 등에 새둥지를 틀었다.경기매일과 경기일보 업무쪽 직원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경기신문의 업무국·공무국 직원들 대부분이 연합신문 출신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경기매일·경기일보의 창간 주역들과 주주들 역시 언론계에서 퇴장했다.경기매일 발행인 송수안은 자녀들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경기일보 부사장이었던 김응태는 인하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경기매일과 경기일보의 주주들은 경기신문에 합류하지 않았다고 한다.경기신문 창간 당시 업무국장을 지낸 임상규(79) 전 경인일보 사장은 "3개 신문사의 자본, 부채, 신문부수를 고려해 연합신문이 67%, 나머지 2개사가 33%의 지분으로 참여를 하려 했는데, 경기매일·경기일보 주주들이 투자를 포기해 연합신문쪽이 100% 지분참여를 해 경기신문을 창간했다"고 전했다./김명래기자

2013-08-15 김명래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5]언론 통폐합(하) - 뒤범벅 편집국

3개사 출신 '연합체계' 구축기자들 영전과 좌천 뒤엉켜공화당 출신 논설위원 오점1973년 9월 1일자로 창간호를 낸 경기신문의 초기 편집국은 경기매일신문, 연합신문, 경기일보 출신 기자들이 뒤범벅된 형태였다. 인천은 지사·분실이 아닌 분사(分社)로 운영돼 그 위상이 높았다. ┃관련기사 3면경기신문 초대 편집국장은 조창환(趙昌煥)으로 경기일보 편집부국장(1966~69) 출신이었다. '신문사의 꽃'이라 불리는 편집국장 자리를 경기일보측에서 맡은 것이다.편집부국장 오광철(吳光哲) 역시 경기일보에서 왔다. 경기일보 출신의 편집부국장 이벽(李闢)에 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인천언론사'는 경기신문 창간과 함께 언론계를 떠났다고 했는데, '전국언론인방명록'에는 경기신문으로 이적한 것으로 돼 있다.외근 기자들에게 취재를 지시하는 데스크는 연합신문 출신으로 채워졌다.정경부장 이진영(李鎭榮)은 연합신문 사회부차장이었고, 사회부장 공석으로 데스크 역할을 했을 사회부 차장 김화양(金和洋)은 연합신문 평택주재기자였다.편집국에서 인천은 분사 형태로 운영됐다. 서울지사·의정부지사보다 격이 높았다. 인천분사장은 박채근(朴彩根)으로 1980년대 경인일보 사장을 지낸 박상복 동양석유주식회사 회장의 부친이다.인천분사 편집책임자는 경기매일 편집국장을 지낸 김형희(金亨熙)였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기자 수는 15명으로 수원 본사의 기자(데스크 포함) 12명보다 많았다.출신 신문사별로 경기매일 4명, 연합신문 6명, 경기일보 5명으로 구성됐다.이처럼 경기신문 편집국은 경기매일, 연합신문, 경기일보 3사의 '연합 체제'로 출발했다.경기신문 출범 인사에서 영전한 이도 있지만 좌천된 기자들도 있었다. 각기 다른 3개사가 모여 '연합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혼란도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정권에 의한 통폐합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신문은 언론사로서는 보여선 안 될 모습까지도 나타난다.'신문사의 눈'인 사설을 쓰는 논설위원에 당시 공화당 출신 인사를 앉힌 건 치명적 오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논설위원 김진동(金晋東)은 수원의 7선 국회의원 이병희(李秉禧)의 보좌관을 지낸 인물이었다.이병희는 육사8기,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을 지낸 뒤 정계에 진출한 유력 정치인이었다.이병희는 연합신문의 전신인 경기연합일보가 1969년 새 경영진을 짤 때 배후에서 역할을 했고, 당시 김진동이 '경기연합일보 인수팀'에 속해 실무를 수행했다고 전해진다.또한 편집국 아래 '특집부'라는 직제가 존재했는데, 이 특집부장은 각 군·구의 '보완취재'와 '광고업무'를 병행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김명래기자

2013-08-15 김명래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4]언론 통폐합(상) - 경기신문 창간 전후

부정적 여운 남긴 마지막호경기매일·경기 '역사속으로'통합 첫지면 '3사 결의' 강조독자혼란 줄이려 안내 반복1973년 9월 1일 경기신문 창간을 앞두고 이 신문에 통합된 경인 언론 3사의 표정은 어땠을까. 통합 하루 전날인 8월 31일자 신문을 보면 제각각이었다.경기매일은 '무반응'이었고 연합신문은 '기대감'을, 경기일보는 '신문의 임무'를 얘기했다.경기신문 창간을 주도한 연합신문 쪽은 긍정적이었지만, 경기매일과 경기일보는 의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지면을 통해 부정적 여운을 남긴 것이다.경기매일신문은 통합 소식을 일절 싣지 않았다. 마지막 호를 내면서 기자들이 그동안의 소회를 털어놓거나, 신문사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신문을 냈다.연합신문은 '4천131호의 종장-연합신문은 이제 가노라-'란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종간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앞날'에 대한 희망이 교차하는, 감정적인 문구가 다소 포함된 사설이었다.연합신문은 "과거에 겪었던 모든 체험과 못다한 이상을 오늘의 예지(銳智)로 가다듬어 기어이 소담스런 미래를 잡고야 말 각오에 흠씬 젖는다"고 썼다.경기일보는 1면에 곽인성 사장 명의의 '폐간 인사'를, 2면에는 '폐간사'를 내보냈다.경기일보는 폐간사에서 신문의 2가지 임무로 '진실보도', '지도성(의견형성력)'이 있다고 소개했고 이어 '통합을 위한 밑거름이 되겠다'고 적었다.3개 신문사가 '폐간'한 바로 다음 날 창간한 경기신문의 창간호 사설 제목은 '의식하며 행동하는 신문'이었다.이 사설에서 경기신문은 "350만 도민의 오각기능(五覺機能)을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종합언론기관으로 탄생했다"며 "(이 영광과 기쁨을 가능케 한 절대요인은)경기 3사 발행인의 초연한 처신과 대의를 위해서라면 소아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결단성이다"고 했다.'3사 발행인 자율통합'이란 점을 강조한 게 눈에 띈다. 경기신문은 이후 1면 제호 바로 밑에 '본보는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연합신문 3사가 자율적으로 통합한 신문입니다'란 문구를 한동안 계속해서 내보냈다.갑작스러운 통합으로 인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던 독자들에게 '자율통합'임을 애써 부각한 것이다.1973년을 전후해 이뤄진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11개 지역신문이 사라지고, 경기신문을 비롯한 3개 신문이 창간됐다.1973년 5월에는 충남일보(현 대전일보)가, 6월에는 전북신문(현 전북일보)이 경기신문과 비슷한 '폐간 뒤 새 신문 창간' 형식으로 생겼다.1972년에는 대구일보(1953년·이하 창간연도)와 대구경제일보(1951년)가, 1973년에는 호남매일신문(1945년)이 폐간됐다.군사정권의 언론사 정리작업은 10여 년 전인 5·16 직후에도 있었다. 1961년 실시한 '언론사 정비 정책'에 따라 지방지는 27개가 사라지고, 24개가 남았다.이때 경기·인천 지역에서는 1951년 8월 1일 창간했던 '경인일보'라는 이름의 신문이 경기매일신문과 통합하면서 문을 닫았다. 당시 경인일보의 종간호는 지령 3천880호였다./김명래기자

2013-08-12 김명래

[경인일보 뿌리를 찾다·4]'통폐합' 앞둔 언론 3사 풍경

경기매일 9천호 특집 '애환 얼룩진 금자탑' 사설'지난날' 초점 맞춰 혼란기 중립지 위상정립 자평연합신문 마지막 창간호 '경기신문' 새로움 기대경기일보 '주마등처럼 추억의 장…' 종간호 소회1973년 8월 경기매일신문은 지령 9천호 특집(8월10일자·사진 왼쪽)을, 연합신문은 창간 13주년 특집(8월15일자)을 냈다. 폐간을 한달도 남기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양사는 대대적으로 특집기사를 내보냈다.경기매일은 1970년에 세운 7층 규모의 신사옥과 최신 윤전기 시설을 전면광고로 내보냈다. 연합신문은 1면에 홍대건 사장 명의의 글을 실었다. 홍 사장은 9월 1일 창간한 경기신문의 초대사장이 됐다.1973년 7월 31일 '3사 통합대회'와 9월 1일 '경기신문 창간' 사이 경기매일신문은 지령 9천호(8월 10일자)를, 연합신문은 창간 13주년(8월 15일자) 특집을 게재한다.이 특집들을 통해 각 신문사가 보는 통합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다.경기매일은 '지난날'에 초점을 맞춘 반면, 연합신문은 '앞날'에 중점을 뒀다. 공통점은 특집기사를 8면(평상시 4면)으로 증면한 것과, 3사 통합의 과제로 '유신과업 수행'을 꼽은 데 있다.경기매일은 지령 9천호 특집 1면 사설에서 '애환 얼룩진 금자탑'이란 제목의 글을 싣는다. 1945년 10월 7일 대중일보에서 시작된 경기매일의 역사를 한줄기로 꿰었다.한국전쟁 전후에는 '혼란기 조국의 흥망을 짊어지고 전진'했고, 자유당 시절에는 '신문망국론 속에서도 중립지로서 위상을 정립'했고, 5·16 이후에는 '새마을운동과 유신과업 수행의 기수'였다고 스스로 평가했다.이 사설에서 경기매일은 '오는(8월) 31일로 역사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경기신문으로 발전적인 일대통합을 한다'고 썼다. 같은 날짜 3면에서 3년 전 사진을 비중있게 보도한 것도 특이하게 다가온다.1970년 10월 경기매일 송수안 발행인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민훈장모란장을 받는 사진이었다. 같은 지면에는 '인천지방신문사고찰'이란 제목의 기획 박스기사를 내보냈다.1896년 독립신문이 제물포에 분국을 개설하고 가두판매를 시작할 때부터 1945년 대중일보를 거쳐 1973년 현재까지 언론역사를 소개했다.이 기사 마지막 부분에는 "3사가 통합하여 새로운 경기도 지방지를 창립하기로 합의한 만큼 1973년 9월 1일의 경기신문에 기대를 걸어본다"고 적혀 있다.경기매일은 당대 문필가로 이름난 조수일 논설위원(전 경기매일 편집국장)의 글('9천층의 바벨탑')과 그의 아들 조우성 시인(현 인천일보 주필)의 축시('빛의 활자를…')를 게재했다.이 밖에 '28년 독자 인터뷰', '만화로 본 9천호', '지령 9천호 전면광고' 등을 실었다.이로부터 5일 뒤 연합신문은 창간 13주년 특집을 내보낸다. 1면에서 홍대건 연합신문 사장은 '건실은 부동의 진리'란 제목의 글을 싣는다. 이어 2면의 사설 제목은 '창간 13주년, 폐간 15일전'이었다.이 두 글은 창간을 기념하면서 곧 태어날 경기신문의 당위성과 기대감을 표현하는 내용이었다.사설은 "연합신문의 창간과 폐간은 유감없는 소멸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며 "경기3사의 통합은 발전적 의미와 분산세력의 규합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인 초연한 자율통합"이라고 했다.또 이 사설에서는 연합신문이 과거 본사를 인천에서 수원으로 옮긴 것을 '역사에 오래 기록될 일'이라고 했다.1969년 수원으로 본사를 이전한 것을 "황금기반이라고 공칭하는 인천을 버리고 신문의 불모지인 수원으로 신문사를 옮겨 놓은 결단"으로 표현했다.경기신문 창간을 하루 앞둔 8월 31일. 경기매일은 침묵했지만 연합신문과 경기일보는 폐간에 대한 여러 기록을 지면에 남겼다.신문 1면에 실리는 고정칼럼 필자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방식으로 감상을 남겼다. 연합신문의 '전망차'는 "비가내렸읍니다. 1973년8월31일 새벽부터는 스산한 초가을 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읍니다"고 글을 시작해 "일희(一喜)와 일비(一悲)가 만감하는 순간입니다"며 끝을 맺었다.경기일보 1면의 '만년필'은 "어떻게 하면 좀더 독자의 가려운 곳을 시원스럽게 긁어드릴 수 있을까 이모저모로 만년필을 입에 물고 이궁리, 저궁리해보던 나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추억의 장으로 넘어간다"며 종간호를 찍는 소회를 기록했다./김명래기자

2013-08-12 김명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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