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늦깎이로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91년 4월 제25회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했는데 응시 제한 나이(만 32세)를 몇 개월 앞둔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해 합격자 중 나이 순으로 위에서 3번째, 최연소 합격자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외무부(현 외교부)에 입부했다. 그렇게 된 사연이 있다.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인 1981년 외무고시 1차에 합격했다. 고교 시절부터 품어 온 외교관 꿈의 실현이 눈앞에 한발 다가왔지만, 불현듯 찾아온 회의감이 머릿속을 휘젓다시피 했다. 세상사 무심한 듯 영어 공부와 고시에 몰입해 온 청년에게도 눈과 귀가 있었다. '모두 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고, 붙잡혀 감옥에 가는데, 나만 개인의 영달을 추구해도 되는가'라는 물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싸움에 나설 용기는 없었다. 소극적 저항이랄까. 고시를 포기했다. 집에 알리지는 못하고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부유했다. 나만 개인의 영달을 추구해도 되는가독재정권 당시 괴로움에 고시 접어6·29 선언 후에야 부채의식 덜었다만 32세, 늦깎이 외교관의 길 시작남들보다 네다섯 살 늦은 나이에 사병으로 입대해 최전방 GP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중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 한 6·29 선언이 나왔다. 6·29 선언 이후 국내 정세에 대한 판단은 각자 다르겠지만, 외교관을 꿈꿔 온 청년의 부채의식을 덜어내기엔 충분했다. 제대하고 1988년부터 외무고시에 다시 도전했다. 1991년 꿈에 그리던 외교관이 돼 약 28년간 외교부에서 그리고 세계 7개국(스리랑카, 미국, 폴란드, 이스라엘, 이집트, 러시아, 가봉)에서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박정남(63) 전 주가봉 한국대사 얘기다.박정남 전 대사의 선대인(박제근)은 평안북도 박천 출신으로 해방 이듬해 형제들과 함께 황해도 해주를 거쳐 인천 문학동에 정착했다. 한국전쟁 기간 1·4 후퇴 때 열여섯 나이에 이등병으로 입대해 1976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박 전 대사는 1959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한 산골 마을에서 1959년 태어났다. 2남 4녀 중 장남이었다.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충남 연무대초등학교(현 연무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부친의 월남 파병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외가가 있는 인천 송현동 수도국산 똥고개 꼭대기 집으로 이사하면서 인천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외할머니, 큰삼촌 내외와 외사촌 둘, 누나와 남동생 등 여덟 명이 초가집에서 살았다.평안북도 박천에서 황해도 해주 거쳐아버지 따라 인천 문학동에 정착초3때 송현동 똥고개 꼭대기집에 이사큰삼촌 내외까지 여덟명 초가집 살이참 가난하게 컸습니다.외항선이 인천항에 들어오면 똥고개가 먼저 보여요.황해는 누렇잖아요. 온 세상 바다가 이런 줄 알았습니다."연무대 있다가 인천에 오니까 사람들 정말 많더라고요. 서흥초등학교가 있는 송현동에서 저도 가난했고 친구들도 가난하게 컸습니다. 외항선이 인천항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이 똥고개였어요. 겨울에 연탄을 때야 하는데, 똥고개 밑 연탄가게에서 연탄 두 장을 새끼줄에 꾀 꼭대기까지 땀 흘리며 날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는 전교생이 연탄재를 들고 등교해 질퍽해진 학교 운동장에 던지던 일도 생각납니다. 태어나 인천에서 바다를 처음 봤거든요. 황해는 누렇잖아요. 중학교 때 아버님이 근무한 속초를 찾아가 '파란 바다'를 보기 전까지 온 세상의 바다가 인천 앞바다와 같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서흥초등학교 뒷길로 수도국산에 오르는 언덕이 똥고개다. 1950~60년대에는 비탈의 텃밭 거름으로 인분을 써 골목골목에 냄새가 풍긴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진다. 1976년에는 똥고개 인근 현 송림체육관 부지에 송림위생처리장이 건립돼 인천시 분뇨의 절반가량을 처리했다. 분뇨 수거 차량이 인근 주택가를 수도 없이 지나다녔다. 2009년 폐쇄될 때까지 '악취 민원'이 빗발쳤다. 똥고개는 사실주의 극작가 윤조병(1939~2017)의 작품으로 제8회 전국연극제 대통령상(최우수상)을 받은 '아버지의 침묵'(1990년)의 배경이기도 했다. 극단 미추홀은 이 작품을 창립 40주년 기념 공연(2021년)으로 올렸다. 똥 냄새가 봄 냄새로 치환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2009년 폐쇄까지 '악취민원' 빗발쳐극단 미추홀 선보인 '아버지의 침묵' 배경도"봄 냄새? 허, 연탄까스 냄새, 화장실 똥냄새, 막혀버린 수채 냄새, 쓰레기 냄새, 퀴퀴한 방 안 냄새와 사람 냄새가 봄 냄새라구? 당신 코가 기능을 상실한 것 아니오? / 봄 냄새가 도시의 빌딩에서 난다고 생각하는 거요? 천만에. 숲에서 나는 거요. 흙에서 나는 거요. 숨 쉬는 저 숲, 숨 쉬는 골목길의 검은 흙에서 봄 냄새가 나는 거요." 똥고개는 송림 1·2구역 재개발사업으로 곧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박 전 대사는 인천남중을 거쳐 1975년 인천대건고에 입학했다. 대건고가 현 위치인 연수구 동춘동이 아닌 동구 화수동에 있던 시절이다. 대건고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접한 'Treasure Island'(보물섬) 영어 다이제스트판이 소년 박정남을 '영어 소설'의 세계로 이끌었다. 주말이면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해적판을 찾아다녔다. 펄벅의 '대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조지오웰의 '1984' 그리고 '동물농장',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등을 영어 원서로 섭렵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의 경우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고 그걸 다시 영어로 옮겼다. 1·2학년 내내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영어 소설만 읽고 다른 과목에는 손을 놓아버렸다.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교내 시험 날 시험지에 이름만 적고 덮어둔 뒤 영어 소설을 꺼내 읽은 적도 있었다.대건고 도서관서 '보물섬' 읽고 영어 빠져시험날 시험지에 이름만 적고 소설 읽어고3 돼서야 선배 말 듣고 미친척 공부3월부터 6월까지 고교 수학 끝내200등 아래던 성적이 12등까지 올랐다"영어 단어와 문장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시절이었어요. 단어를 보면 그 단어가 나오는 소설이 통째로 생각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에요. 고3이 돼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미친 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인수분해부터 시작해 3월부터 6월까지 고교 수학을 끝냈고 그다음에 암기 과목을 공부했어요. 취업반을 제외한 300명 중 200등 아래였던 성적이 나중에 12등까지 올랐습니다. 친구들도 놀라고, 선생님들도 놀라고, 저도 놀랐습니다."박 전 대사는 1978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이후에도 영어에 몰두했다. 주한 미군 라디오 방송 AFKN(현 AFN Korea) 청취 동아리인 ALC(AFKN Listeners' Club)에 가입해 활동했다. AFKN에서 평일 매시간 나오는 5분짜리 뉴스, 일요일 아침 9시 뉴스를 녹음해 영어 리스닝 교재로 삼았다. AFKN 뉴스 외에도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라디오 드라마를 받아 써 스크립트를 만들었다. 음성으로 모든 장면을 들려주는 라디오 드라마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이때 쌓아 둔 스크립트 노트는 훗날 그가 학비와 생활비를 벌 목적으로 1년 정도 나간 동인천외국어학원에서 'AFKN 리스닝' 강사로 일할 때 교재로 쓰였다. 인천 최대 규모의 외국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며 연세대와 고려대 영문과 재학생이 와서 들을 정도의 명성을 얻었으니, 만약 그가 외교관이 안 됐다면 '일타 강사'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다.박 전 대사는 1991년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그해 12월27일 정주연씨와 결혼했다. 신흥초, 박문여중, 인성여고를 나온 인천 토박이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조선호텔에 근무 중 인성여고 친구의 소개로 인연이 닿았다. 현 동인천길병원 부근에 있던 인하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는데, 박정남·정주연 부부의 예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신혼집은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과 제물포고등학교를 잇는 자유공원로 주변의 내동빌라였다. 박 전 대사 부부는 미국 유학 기간(1993~1995년)을 제외하고 1997년 주스리랑카 대사관에 가기 전까지 내동빌라에 살며 두 아들을 얻었다.연세대 입학 후에도 영어공부 몰두1991년 외무고시 합격하고 그해 결혼'새 여권' 제작 처음 맡은 직무영문이름 표기법 국가 일방적 지정에 '반대'국가정보 기재 재량권 거쳐 현위치에 표기"공무원 판단, 국민생활 영향력 깨달은 계기"박 전 대사가 외교부에서 맡은 첫 직책은 여권과 법규계장(1992~1993년)으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 표준에 맞는 '새 여권'을 제작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로 여권 발급 연령 제한이 사라지고 그 이후 해외여행객은 매년 급증했다. 이름과 여권 번호, 유효 기간 등의 정보를 자동으로 인식하는 '기계 판독 여권'을 만들어야 했는데, 우리 국민의 한글 이름의 영문 표기 방식이 제각각인 게 골칫거리였다. 예를 들면 'CHUNG NAM'을 기계로 판독해도 한글 이름이 '정남'으로도, '청남'으로도, '충남'으로도 읽힐 수 있었다. 법무부는 중국 사례를 들어 영문 이름 표기법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박 전 대사는 '국민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는 ICAO가 여권 발급 국가의 정보 기재 재량권을 부여한 위치(현 여권 소지인 서명란)에 한글 이름을 표기하고 이를 기계로 판독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했다. 여행문서 발급 100년 만에 첫 국제 표준 여권 발행이었다. 그는 "공무원의 판단과 선택이 국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고 했다. 이 경험으로 그는 남은 공직 생활에서 삼가는 태도를 갖게 됐다.첫 해외근무지 스리랑카서 축구회 결성여가시간 즐길거리 없던 직원들 접점 생겨"스리랑카 한인 축구회 아직도 있다더라"박정남 전 대사는 축구광이다. 서흥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보는 것도 그리고 직접 하는 것도 즐긴다. 인천에서 축현초등학교가 '인천 축구 톱(TOP)'으로 인정받던 시절, 서흥초등학교와 벌인 경기를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축구사랑나눔재단 이사장인 조병득 전 국가대표 골키퍼의 축현초 시절 활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축구만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경기 몰입도가 높고 실력도 출중했다. 그는 첫 해외 근무지인 주스리랑카 대사관 영사로 간 1997년, 콜롬보 한인 식당 사장의 권유로 한인 축구회를 결성했다. 스리랑카에 한국 봉제공장 150개 정도가 진출했는데 그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영사가 축구를 제대로 하긴 하겠어?'라는 반문은 곧 감탄사로 변했다. 처음에 7명이 나오던 축구회 회원은 50명까지 늘었다. 박 전 대사는 축구회 회원 20~30명을 집에 초대해 불고기 파티를 열어주는 등 열성적으로 축구회를 이끌었다. 그런데 왜 영사가 축구회를 결성했을까."한인 식당에 딸린 노래방이 있었어요. 칸막이가 없는 커다란 홀에서 여러 개 테이블을 두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종이에 써 디스크자키에게 주면 틀어주는 노래방이었어요. 식당 사장님 말을 들어보니 노래 순서를 두고 패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고 해요. 대사님께 보고했어요. '젊은 친구들이 여가 시간에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카지노에 가거나 노래방에서 싸움을 한다고 하니 제가 축구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축구회가 시작됐어요. 축구회라는 접점이 생기면서 노래방에서 싸움이 사라졌어요. 스리랑카 한인 축구회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외교부 직원 중에 해외에서 축구회를 만들고 운영해 본 사람이 저 말도 또 있었는지 모르겠네요."박 전 대사는 관운(官運)이 좋은 편에 속한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 필요 인원을 확보하는 목적으로 1980년대 20명씩 선발하던 외무고시 합격자를 1990년대 들어 확대하기 시작했다. 1980~9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을 뽑은 해가 바로 박 전 대사가 합격한 1991년으로 49명이 선발됐다. 만약 20명을 뽑았다면 본인은 탈락했을 것이라고 박 전 대사는 설명했다. 또 주스리랑카 대사관에 근무 중이던 그가 1999년 모두가 선망하던 주미 대사관으로 발탁된 것은 외교부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된 인사였다.'백이 없어도 워싱턴에 갈 수 있다'입증하고 싶었던 홍순영 장관 '고생하는 친구 찾아보라' 지시에 물망실제 인사명령 불복 의지 갖췄던 홍 장관취임 이후 워싱턴 인사관행 타파 시도"나중에 알았는데 홍순영 장관님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워싱턴에서 한 번도 근무를 못 해 보셨어요. 백(back)이 없어도 험지에서 고생하면 워싱턴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홍 장관님이 김숙 인사국장(인사기획담당관)을 불러 '아프리카에서 고생하는 친구 중 워싱턴에 보낼만한 사람 찾아보라'고 지시해 케냐에서 한 명이 뽑혔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인사철에 인사국장에게 같은 지시를 내렸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었나 봐요. 그래서 아시아까지 범위를 넓혀 찾다가 제가 선발됐다고 들었습니다."실제 홍순영 장관은 1998년 8월 취임 이후 '워싱턴 인사 관행' 타파를 시도했다. 그는 차관 시절부터 외교관의 인사 명령 불복 행위를 엄단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당시 공직 사회에서는 '청비총'이란 말이 있었는데 이는 청와대 비서실, 장·차관 비서관, 총무과 인사들이 '노른자위 자리'를 차지하는 관행을 뜻했다. 박정남 전 대사의 경우 워싱턴 인사 이후 '제물포고 출신'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그건 그가 제물포고 출신 김숙 인사국장의 '백'으로 워싱턴에 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공사 엄격히 구분…공공 재산 사적인 사용 '극도 경계'상급자 청탁 거절했다가 미운털 박혀박정남 전 대사는 공사(公私)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해 힘쓴 공직자였다. 공무원 재직 기간 '이해 충돌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주식 투자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적은 비용이라 할지라도 공공의 재산을 사적으로 쓰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했다. 한 재외공관 근무 시절엔 상급자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미운털이 박혀 장기간 곤혹을 치른 적도 있었다고 했다. 인천 출신이라는 이유로 지연(地緣)에 휘둘리지도 않았지만 본인의 직무 범위 내에 있는 인천 현안은 적극 지원했다. 인천시가 아시안게임 유치에 온 힘을 기울이던 2006년 6월 박 전 대사는 주폴란드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문화외교국 홍보과장으로 부임했다. 국제 체육대회 유치 업무 담당 부서장이었다.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인천은 인도 델리와 경쟁했다. 박 전 대사의 역할은 투표권이 있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회원 국가의 공관에 연락해 '인천 유치'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2007년 4월 쿠웨이트에서 OCA 총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는 인천시 직원이 침낭을 들고 홍보과 사무실에 찾아와 외교부 직원들과 함께 유치 활동을 점검했다. OCA 총회 결과 인천은 32표를 얻어 델리(13표)를 넉넉하게 이겼다. 당시 안상수 인천시장은 박 전 대사의 공로를 인정해 감사패를 수여했다.주가봉 대사 근무 시절엔 '인천 출신 세계여행가' 김찬삼(1926~2003) 교수를 매개로 인천과 가봉의 가교 역할을 했다. 박 전 대사의 고교 동창으로 송도고에서 지리를 가르치는 김재민 교사가 2018년 가봉에 찾아왔다. 김찬삼 교수와 슈바이처 박사가 1963년 11월 찍은 사진의 가봉 슈바이처 박물관 전시를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김재민 교사는 김찬삼 교수의 수제자로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주가봉 대사관의 도움으로 이 사진은 박물관에 전시됐다. 또 송도고와 슈바이처 병원은 2018년 8월 자매결연을 했다. 그 이듬해 송도고는 의료봉사단을 꾸려 가봉 슈바이처 병원에서 봉사 활동을 벌였다. 김재민 전 교사는 "직접 슈바이처 병원을 컨택하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대사관에 문의하니 취지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나서 연결해줬다"며 "의료봉사단이 슈바이처 병원에 갔을 때도 대사관 직원분들이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며 도움을 주셔서 프로그램을 의미 있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인천유나이티드 이기면 기쁘고, 삼미슈퍼스타즈 생각하면 마음 아파요.인천은 제 고향이고 저는 인천사람입니다.박 전 대사는 2019년 12월 외교부를 정년퇴직하고 용인에서 아내, 아들과 거주하고 있다. 그에게 고향 인천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물었다."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태어났지만 인천에서 컸습니다. 인천은 제 고향입니다. 인천유나이티드가 이기면 기쁘고, 삼미슈퍼스타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 저는 인천사람입니다. 인천이 국제적 도시로 발전하길 희망하고요. 재외동포청을 유치한 인천시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또 반대로 재외동포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박정남 전 주가봉 한국대사.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박정남 전 대사(왼쪽)의 군복무 시절. /박정남 전 대사 제공박정남 전 대사는 1968년 인천 송현동 외할머니댁에 오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사진은 1972년 2월 서흥초등학교 졸업식.인천 송현동 똥고개는 극작가 윤조병이 쓴 '아버지의 침묵'의 배경이 됐다. 극단 미추홀은 '아버지의 침묵'(윤조병 연출)으로 1990년 제8회 전국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극단 미추홀 제공송림·송현동 고개.화수동 시절 인천대건중고등학교 전경으로 1982년 촬영됐다. 대건중학교는 1985년 폐지되고, 대건고는 1998년 7월 연수구 동춘동 신축 교사로 이전한다. /인천대건고 제공박정남 전 대사는 연세대에 입학해서도 ACL 동아리 활동을 하며 영어 공부메 몰입했다. 사진은 연세대 교정에서 교우들과 함께 찍은 것으로 맨 오른쪽이 박정남 전 대사이다.박정남 전 대사(사진 맨 왼쪽)는 1980년대 동인천외국어학원 AFKN 리스닝 강사로 유명했다. 수강생들과 함께 작약도에 놀러가기도 했다.박정남 전 대사는 첫 해외 근무지은 스리랑카에서 한인 축구회를 조직했다.1999년 주스리랑카 대사관에 있던 박정남 전 대사는 주미 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겨 약 5년간 근무했다.박정남 전 주가봉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의 노력으로 인천송도고등학교와 가봉 슈바이처병원이 결연을 맺고 상호 교류할 수 있었다.박정남 전 대사는 2016년 11월 주가봉 대사로 부임해 외교 사절로 다양할 활동을 펼쳤다.
오피니언 리더들을 위한 최고의 글로벌 리더십 아카데미 과정인 '미래사회포럼' 제11기 수료식이 29일 수원 파티움하우스 4층 연회장에서 열렸다.경인일보와 (사)미래사회발전연구원이 마련한 이번 미래사회포럼 11기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여했다. 강연 역시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나서 호평을 받았다.이날 수료식에는 배상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과 이상창 경기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공철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김기정 수원특례시의회 의장, 허원 미래사회포럼 총동문회장 등이 참석했다."또하나의 가족… 계속 연대할 것"포럼이사장상·공로상 등 시상도 미래사회포럼이사장상은 안태용 (주)엘림개발 회장이, 총동문회장상은 구본철 (주)도시창조디엔씨 대표가 각각 수상했다.경기신용보증재단이사장상은 서진석 (주)솔루더스 상무이사, 경기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상은 오태석 (주)진성기업 대표이사, 한국은행 경기본부장상은 양근철 가온종합건설(주) 대표이사가 각각 받았다.공로상은 김순곤 한림제약(주) 전무이사, 김한석 위트 프로덕션 대표, 노하나 세무회계온 대표에게 돌아갔고, 우정상은 신동임 미래에셋증권 수석매니저, 안희중 정혜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양재황 (주)제이에이치홀딩스 대표, 이현혜 타이틀리스트 어패럴 대표, 최성욱 (주)나이스피플 대표가 각각 받았다.이와 함께 경인일보 편집자문위원에는 박종호 효성중공업(주) 상무, 박창주 안전보건공단 경기동부지사 차장, 송창준 재단법인 성정문화재단 상임이사, 양선일 에스지에스한국주식회사 대표이사, 정원영 (주)정성프라임 대표이사, 차경국 (주)사계절파크골프 대표이사가 위촉됐다.배상록 대표이사 사장은 "경인일보에 있어 미래사회포럼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며 "짧은 인연으로 끝나지 않고 원우들이 서로서로 연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경인일보의 역할이다. 오늘 수료한 원우들이 계속 연대할 수 있도록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sh2018@kyeongin.com29일 오후 수원 파티움하우스 연회장에서 열린 '미래사회포럼 제11기 수료식'에서 이상창 경기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공철 한국은행 경기본부장, 허원 미래사회포럼 총동문회장, 배상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 등 내빈과 수료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3.6.29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킬러 문항은 아이들 갖고 장난치는 불공정"이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 온 나라가 들썩인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5개월 여 앞둔 시점도 문제지만, '킬러문항'이 현 대한민국 교육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며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킬러문항을 직접 풀어야 하는 학생들은 킬러문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경기도 내 학원가를 찾아 학생들을 만났다.변별력 기능은 있어… "준킬러 어려울라"수능 150일 앞두고 혼란스럽다는 표정들"이참에 올려보자" 일부 기대감 있지만대부분은 핵심은 그게 아니라는 의견입시체제 문제 중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새로운 편법 생겨 오히려 사교육 부추길 우려21일 찾은 수원 영통의 학원가는 입시학원들이 밀집해 있어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이 곳에서 만난 학생들은 최근 불거진 킬러문항 논란을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수원 청명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수험생 A씨는 "사실 수능이나 모의평가에 있어서 변별력을 두기 위해선 킬러문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킬러문제를 풀 때) 열심히 준비한 만큼 보이겠구나 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준킬러 문제들이 더 어려워질까" 걱정도 했다. 논란 이후 전체적인 분위기에 대해 묻자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큰일이 난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혹은 열심히 준비하면 괜찮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선생님들도 혼란스러운 거 같다"며 "학생들도 의견이 많이 나뉜다. 사실 수능이 150일 남은 시점이라 나 역시 매우 혼란스럽다"고 속내를 전했다.영덕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B씨는 킬러문항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기대감도 내비쳤다. B씨는 "수학 3등급 정도 나오는데, 킬러 문제를 풀다가 아는 공식이 나오면 풀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문제가 나오면 (포기하고) 잠을 잔다"며 "(킬러 문제가 배제되면)준킬러 문항들이 더 등장할 거라, 저와 비슷한 애들 중엔 오히려 좋아하면서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도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학생들 대부분은 킬러문항이 사교육 문제의 원인이라는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에 공감하지 않았다. 킬러문항이 아니더라도 현행 입시제도 하에선 사교육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의견이었다. A씨는 "(학원에서 제공하는)자료의 질이 (학교와) 다르고, 혼자 공부할 때 파악하기 어려운 미출제요소들도 알려준다. 반드시 (사교육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학원을 통해 이득을 보는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날 만난 또 다른 학생은 "현장 강의가 아니더라도 인터넷 강의는 꽤 필요하다고 느낀다"며 학교 수업만으로 현행 입시를 준비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학교와 학원 등 교육계에선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는 수능 난이도 조절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고 한목소리로 꼬집었다. 킬러문항은 현행 입시 체제가 갖는 구조적 문제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소리다.수원 영통의 한 학원 강사는 인터뷰를 통해 "킬러문항이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논리가 공교육을 무너뜨리거나 혼란을 조장한다는 의견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변별력은 있어야 하니, 결국 다른 편법이 생겨날 것"이라고 부작용도 우려했다.고진석 수원시학원연합회 회장도 비슷한 우려를 표했다. 고 회장은 "(킬러문항이 교과범위를 넘는다는 데에 대해)전혀 동의하지 않고 그 기준을 모르겠다. 교육 일선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시험에서) 변별력이 사라지면 수시나 특별전형 같이 새로운 입시가 생겨나 오히려 사교육을 유발하게 된다"고 말했다.전반적인 입시제도부터 대대적 변화 있어야.교사들은 킬러문항이 문제가 있음을 꼬집으면서도 킬러문항이 현 입시제도의 근본원인이라는 데는 선을 그었다. 시흥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킬러문항이 교과 범위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출제되는 건 아니지만, 학습 성취 기준에 적합한지는 모르겠다. 곤란하게 문제를 꼬아놓은 형태라, 일선 교사들 입장에선 문제가 많다고 느끼는 건 맞다"면서도 "현 입시체계에선 바뀌기 쉽지 않다. 상대평가로 등급을 정하는데,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교육을 줄인다는 (대통령의 취지는) 공교육 입장에선 찬성이다. 하지만 수능 문제 난이도 조절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전반적인 입시제도부터 대입체제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설명했다.끝으로 근본적인 교육시스템과 대입체계의 변화가 있지 않는 한 "결국 이 피해는 계속해서 애꿎은 학생들만 당한다"고 강조했다. /김대훈기자 kdh2310@kyeongin.com고진석 수원시학원연합회 회장. /김대훈기자 kdh2310@kyeongin.com
경인일보와 국가보훈부가 공동 주최한 '제51회 경인보훈대상' 시상식이 22일 경인일보 3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경인보훈대상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국가유공자와 유가족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경기도민의 애국·보훈의식을 높이기 위해 지난 1973년 처음 시작됐다.이번 시상식에서는 유족 부문 노병민(76·고양시)씨, 상이군경 부문 윤대중(76·화성시)씨, 미망인 부문 이병숙(69·수원시)씨, 장한 아내 부문 정옥례(72·안양시)씨, 유자녀 부문 이일봉(77·양주시)씨, 특별보훈 부문 이태형(74·광명시)·권혁송(51·양평군)·박정균(71·수원시)씨가 선정돼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배상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은 인사말에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께 크나큰 신세를 진 만큼 그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경인일보가 시민들을 대신해 경인보훈대상 수상자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고 여겨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국성 경기남부보훈지청장은 격려사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국가유공자분들의 위대한 정신을 영원히 가슴에 기억하고 기리겠다"며 "국가보훈부가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일류 보훈 문화를 실현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원본사진 다운로드 /김산기자 mountain@kyeongin.com22일 오후 경인일보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51회 경인보훈대상 시상식에서 한국성 경기남부보훈지청장, 배상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을 비롯한 내·외빈과 각 부문별 수상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특별보훈 부문 권혁송씨(대리수상 안재동), 특별보훈 부문 박정균씨, 미망인 부문 이병숙씨, 특별보훈 부문 이태형씨, 상이군경 부문 윤대중씨, 장한아내 부문 정옥례씨, 유족 부문 노병민씨(대리수상 이상기), 유자녀 부문 이일봉씨. 2023.6.22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전 세계 기술인들은 2년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무대로 모여 기술력을 겨룬다. 한국은 1967년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기능올림픽에 처음 출전해 2019년 러시아 카잔 올림픽까지 30차례 열린 대회에서 19차례 종합 우승을 차지한 압도적 기술 강국이다. 원현우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 융합산업설비과 교수는 201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제42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철골구조물' 직종 금메달리스트다. 독일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열린 모든 직종 경기를 통틀어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원현우 교수는 최우수 선수상(알버트비달상)까지 거머쥐었다.송림동서 태어나… 분해·조립 유년 일상손재주 지켜본 아버지, 모교 실습실로'선배들 강한 인상' 인천기계공고 입학日 강점기 설립 인천직업학교 학생 몰려산업화 시대 전국 4번째 기계공고 전환국가대표 좌절… 졸업전 HD현대 특채직종 바꿔 재도전, 금메달·최우수선수폴리텍대서 후배 양성 "기회는 꼭 있어"■ 손재주 좋은 소년, 인천기계공고로원현우 교수는 1992년 12월 인천 동구 송림동에서 태어나 중구 연안부두, 연수구 청학동과 옥련동, 옹진군 영흥도로 여러 번 집을 옮겼다. 원현우 교수는 어린 시절 사고뭉치였다. 집 안에 있는 가전제품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이것저것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봐야 직성이 풀렸다. 모두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손재주가 있음을 이때부터 알아봤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겨울, 원 교수의 아버지는 자신의 모교인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실습실로 아들을 데려갔다."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인천기계공고 자동화기계과 선배들이 기능경기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우수 기능반'이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어요. 집 안 물건을 분해하고 조립만 하다가, 철판으로 형상을 창조해내는 판금 작업을 선배들처럼 직접 해보고 싶어 인천기계공고를 택했습니다."인천기계공고는 인천 산업사(史)와 궤적을 같이 한다. 인천기계공고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 5월 경기도교육청이 설립한 3년제 인천공립직업학교로 출발했다. '인천기계공고 80년사'를 보면 1940년 기계과 2개 학급, 야금과 1개 학급이 개설됐으며 그해 252명이 지원하고 128명이 합격해 입학했다. 지원자 252명 중 인천 출신이 51%로 절반을 조금 넘었고 서울·경기도 20%, 충청도 12%, 영남·호남 6%, 기타 지역 11%였다. 일본인은 9명이었고 만주 출신도 1명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9월 '조선시가지계획령'을 개정해 서울 용산, 영등포 일대와 인천을 토지 수용이 가능한 공업지역으로 지정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듬해 11월 인천 학익정(현 미추홀구 학익동), 송현정(현 동구 송현동), 송림정(현 동구 송림동) 일대 529만6천500㎡를 '공업용지 조성지구'로 지정해 조선기계제작소(현 동구 HD현대인프라코어 자리) 등 대규모 공장들을 세웠다. 인천 최초의 도시계획상 공업지대다.이 같은 배경에서 인천공립직업학교가 설립됐다. 해방 후 1946년 6년제 인천공립공업중학교로 개편했고, 1951년 3년제 인천공업고등학교로 전환했다가 1976년 정부가 특수목적고교로 지정해 인천기계공고로 교명을 바꿨다. 당시 '기계공고'로 전환한 공업고등학교는 부산기계공고, 성동기계공고, 충남기계공고에 이어 인천기계공고가 4번째다.■ 국가대표 향해 '훈련 또 훈련'원현우 교수는 고교 1학년부터 판금 직종 우수 기능반에서 활동했다. 판금은 1.2㎜의 얇은 철판으로 환기구 같은 형상을 주어진 도면대로 만드는 직종이다. 철판을 치수에 맞게 판금 가위로 잘라 원통 모양으로 말거나 구부려 부품을 만들고, 각 부품을 용접하거나 볼트로 이어붙여 작품으로 완성한다. 1㎜ 오차로도 형상이 틀어진다. 정밀함이 중요한 복합 기술이다.당시 특성화 고등학교들은 기능경기대회 출전을 목표로 직종별 선수를 육성하는 우수 기능반을 운영했다. 원현우 교수는 기능반 입구에 붙은 역대 인천시·전국기능경기대회와 국제기능올림픽 수상자 명단을 보고 "처음으로 꿈이란 걸 갖게 됐다"고 했다.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이란 최종 목표를 정하고 나서 중간중간의 목표를 세웠어요.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하려면 국가대표가 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1위를 해야 하죠. 평가전은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1·2위를 해야 나갈 수 있고, 전국 대회 출전 자격은 지역 기능경기대회에서 입상해야 합니다. 하나하나 목표를 이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원 교수의 고교 시절은 '훈련 또 훈련'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매일 수업을 마치자마자 기능반에 가서 철판을 자르고 꺾고 붙였다. 학교 선생님이 시킨 것도 아닌데 대회가 가까워지면 주말도 명절도 없이 훈련에 매진했다.2학년 때 출전한 인천시 기능경기대회에서 판금 직종 2위를 차지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 인천시 기능경기대회에서 우승해 전국기능경기대회 출전권을 따냈다. 2010년 9월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평가전에 나섰지만,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탈락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룬 올림픽 금메달의 꿈원현우 교수는 전국기능경기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2010년 11월 HD현대중공업에 특별 채용됐다. 국제기능올림픽의 꿈이 좌절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울산에 있는 HD현대중공업 조선소 현장으로 투입됐다. 원현우 교수는 대형 선박의 엔진룸에서 엔진과 주요 기계장치를 연결하는 파이프를 설치하고 검사하는 일을 맡았다. 기능경기대회 훈련과 산업 현장은 많이 달랐다. "학교 기능반에서 훈련할 때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까 반듯하고 편한 자세에서 용접했는데, 현장에선 천장에 매달리거나 좁은 연료탱크 안에서 거울을 보면서 용접해야 했습니다. 좋지 않은 자세로 고품질을 내야 하는 현장은 기량과 노하우가 모두 중요했습니다."2012년 국제기능올림픽 출전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회사 기술교육원에서 철골구조물 국가대표 평가전에 출전을 권유했다. HD현대중공업은 국제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 기술인을 가장 많이 보유한 기업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 바이어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인들을 확보하고 있다'라는 강점을 부각한다는 차원이다.철골구조물은 판금보다 훨씬 두꺼운 6㎜, 9㎜ 두께의 철판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직종이다. 가스 용접기로 철판을 녹여 절단하고 모양에 맞게 구부려 도면으로 제시된 건축물이나 중장비 모형을 만드는 작업이다. 철판은 용접할 때 열을 받아 늘어났다가 식으면 줄어드는 특성이 있는데, 이러한 오차까지 계산해야 해 무척 까다롭다. "논문 한 편 쓸 정도로 쌓은 (훈련) 데이터"와 1년 동안의 현장 경험은 원현우 교수에게 큰 도움이 됐다. 넉넉한 점수로 평가전에서 우승해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태극 마크를 달았다. 원현우 교수는 2013년 7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 철골구조물 경기에 나섰다. 이 직종에 일본,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14개국 선수가 출전했다. 올림픽 경기에선 중장비와 타워브릿지 모형 등이 과제로 제시됐다. 원현우 교수가 머릿속에 축적했던 수많은 데이터 중에서 모든 과제가 다 나왔다. 자신 있게 철판을 잘라 말거나 구부리고, 거침없이 붙여 형상을 만들어 나갔다. 월등하게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경기 결과를 발표한 시상식 당일 대회 전광판에 철골구조물 금메달 수상자로 '코리아(KOREA) 원현우'라는 글자가 마침내 떴다. 경기 점수는 100점 만점에 98.94점으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모든 경기의 시상식이 끝나자 장내가 조용해진 가운데 대회 총책임자는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알버트비달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또다시 '코리아 원현우'가 호명됐다. ■ 고향 인천은 후배들이 있는 곳올림픽을 마치고 돌아온 원현우 교수는 회사 기술교육원에 배치돼 용접과 배관·의장 설치 교육을 맡는다. 기술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원 교수는 2014년부터 회사 야간대학 조선해양과에서 전문학사 학위를, 이후 학점은행으로 기계공학 학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부산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2022년 1월 한국폴리텍대 포항캠퍼스 융합산업설비과 교수로 임용됐다. 만 29세로 한국폴리텍대학 사상 최연소 교수 타이틀이 생겼다. 배관, 플랜트 설비, 접합기술 등을 실습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제자는 90명으로, 30명씩 3개 반을 맡고 있다. 원현우 교수에게 고향 인천은 기술인이 될 후배들이 있는 곳이다. 실제로 원 교수의 모교엔 그를 본보기로 삼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그도 여전히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넘친다.원현우 교수는 "큰 목표를 세우고 중간중간 세분화해서 목표를 설계해 놓으며 살아온 것이 나를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준비하면서 또 다른 길이 생기기도 했다"며 "기술인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한다면 기회는 찾아온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원현우 교수.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원현우 교수는 2013년 7월 독일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최우수선수상인 '알버트비달상'을 수상했다. 원 교수는 알버트비달상 발표 직후 금메달을 목에 건 채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회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원현우 교수 제공1981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제2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인천기계공고 출신 기계제도, 선반 직종 선수들이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며 시민들에게 축하받고 있다. /인천기계공고 제공원현우 교수가 반도체 웨이퍼를 보호·이송하는 특수 용기인 '쿼츠웨어'(석영유리)에 용접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2023.6.21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기사 전문 온라인
전 세계 기술인들은 2년마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무대로 모여 기술력을 겨룬다. 주인공은 단연 한국이다. 한국은 1967년 스페인 마드리드 국제기능올림픽에 처음 출전해 2019년 러시아 카잔 올림픽까지 30차례 열린 대회에서 19차례 종합 우승을 차지한 압도적 기술 강국이다.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주요 종목은 용접, 판금·철골구조물, 금형, 주조 등 이른바 '뿌리기술'이다. 조선, 자동차, 반도체 같은 국가 기간산업의 근간이 되는 기술이어서 뿌리라는 명칭이 붙는다.원현우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 융합산업설비과 교수는 2013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제42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철골구조물' 직종 금메달리스트다. 독일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열린 모든 직종 경기를 통틀어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원현우 교수는 최우수선수상(알버트비달상)까지 거머쥐었다. 기술인 세계의 톱스타다.한국 경제 부흥을 이끈 '산업화'는 이제 낡은 단어쯤으로 여겨지지만, 산업화 시대 피어난 뿌리기술을 계속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원현우 교수는 "그렇게 해야 산업이 굴러가고 사회가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 산업도시 인천 출신 기술인이다. ■손재주 좋은 소년, 인천기계공고로원현우 교수는 1992년 12월 인천 동구 송림동에서 태어나 중구 연안부두, 연수구 청학동과 옥련동, 옹진군 영흥도로 여러 번 집을 옮겼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소년 원현우가 지낸 인천 시가지 풍경은 20~30년 사이 상당히 변했다. 1990년대 연안부두는 어린아이들에게 또래가 많이 사는 아파트촌이면서 어시장처럼 볼거리가 많은 놀이터였다. 원 교수가 살던 연안부두 항운아파트는 소음·분진 피해로 인한 송도국제도시 이주 대책이 지난 1월 확정돼 최근엔 빈집이 늘었고 머지않아 사라지게 된다. 옥련동에서 다닌 능허대중학교는 2019년 송도국제도시로 이전했다. 송림·청학·옥련동… 92년생 소년 본 풍경 어린시절 가전제품 분해·조립하며 놀이 콘센트 구멍에 젓가락 꽂는 아들 본 아버지 손재주 알아보고 인천기계공고 실습실 데려가 원현우 교수는 어린 시절 사고뭉치였다. 집 안에 있는 가전제품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이것저것 분해하고 다시 조립해 봐야 직성이 풀렸다. 가전제품이 원래대로 작동하면 다행이었지만, 망가져 버린 것도 있었다. 돼지코처럼 생긴 콘센트 구멍에 쇠젓가락을 꽂아 보기도 했다. 모두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손재주가 있음을 이때부터 알아봤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겨울, 원 교수의 아버지는 자신의 모교인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실습실로 아들을 데려갔다. 원현우 교수는 학생들이 무언가 열심히 만들고 있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고 한다."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인천기계공고 자동화기계과 선배들이 기능경기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우수 기능반'이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어요. 집 안 물건을 분해하고 조립만 하다가, 철판으로 형상을 창조해내는 판금 작업을 선배들처럼 직접 해보고 싶어 인천기계공고를 택했습니다. 기능반 선배들의 최종 목표가 국제기능올림픽 입상이라는 것도 입학하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인천기계공고는 인천 산업사(史)와 궤적을 같이 한다. 인천기계공고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 5월 경기도교육청이 설립한 3년제 인천공립직업학교로 출발했다. '인천기계공고 80년사'를 보면 1940년 기계과 2개 학급, 야금과 1개 학급이 개설됐으며 그해 252명이 지원하고 128명이 합격해 입학했다. 지원자 252명 중 인천 출신이 51%로 절반을 조금 넘었고 서울·경기도 20%, 충청도 12%, 영남·호남 6%, 기타 지역 11%였다. 일본인은 9명이었고 만주 출신도 1명 있었다. 당시 인천 지역 중등학교로는 인천공립직업학교를 비롯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 인천공립고등여학교(현 인천여상), 인천공립중학교(현 제물포고), 인천상업전수학교(현 동산중), 인천소화고등여학교(현 박문여중)가 있었다.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는 전시 체제로 전환된다. 이 시기 일제는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요충지이자 산업 거점으로 경성(서울)과 인천을 주목했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9월 '조선시가지계획령'을 개정해 서울 용산, 영등포 일대와 인천을 토지 수용이 가능한 공업지역으로 지정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듬해 11월 인천 일지출정(현 미추홀구 용현동), 학익정(현 미추홀구 학익동), 송현정(현 동구 송현동), 송림정(현 동구 송림동) 일대 529만6천500㎡를 '공업용지 조성지구'로 지정해 조선기계제작소(현 동구 HD현대인프라코어 자리) 등 대규모 공장들을 세웠다. 인천 최초의 도시계획상 공업지대다. 이어 경성과 인천 사이인 부평 지역에도 660만㎡ 규모 공업지대를 조성했으며, 이 지역에 한반도 최대 군수공장인 일본육군조병창이 들어선다.'한국 근대 공업사 1876~1945'(2021·푸른역사)를 보면, 조선총독부는 1940년 1월 경성과 인천을 포괄하는 '경인시가지계획'을 공포하며 "경성, 인천 부근은 반도 정치, 경제의 중추부일 뿐만 아니라 황해를 두고 중국 대륙에 근접해 대외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며, 인천축항공사 및 한강수력전기공사의 진척과 더불어 각종 대공장의 건설이 잇달아 일대 공장지로서 발전할 기운이 있다"고 밝혔다.이 같은 배경에서 인천공립직업학교는 인천 공장지대로 인력을 공급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1944년 인천공립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됐고 당시 신입생은 기계과 97명, 야금과 51명, 조선과 47명이 입학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자 학생들은 학교가 아닌 부평 조병창 등에서 군수물자 생산에 강제로 동원됐다. 해방 후 1946년 6년제 인천공립공업중학교로 개편했고, 1951년 3년제 인천공업고등학교로 전환했다가 1976년 정부가 특수목적고교로 지정해 인천기계공고로 교명을 바꿨다. 당시 '기계공고'로 전환한 공업고등학교는 부산기계공고, 성동기계공고, 충남기계공고에 이어 인천기계공고가 4번째다.■국가대표 향해 '훈련 또 훈련'원현우 교수는 고교 1학년부터 판금 직종 우수 기능반에서 활동했다. 판금은 1.2㎜의 얇은 철판으로 환기구 같은 형상을 주어진 도면대로 만드는 직종이다. 철판을 치수에 맞게 판금 가위로 잘라 원통 모양으로 말거나 구부려 부품을 만들고, 각 부품을 용접하거나 볼트로 이어붙여 작품으로 완성한다. 평면의 철판을 입체 형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1㎜ 오차로도 형상이 틀어진다. 정밀함이 중요한 복합 기술이다.당시 특성화 고등학교들은 기능경기대회 출전을 목표로 직종별 선수를 육성하는 우수 기능반을 운영했다. 원현우 교수는 기능반 입구에 붙은 역대 인천시·전국기능경기대회와 국제기능올림픽 수상자 명단을 보고 "처음으로 꿈이란 걸 갖게 됐다"고 했다. 그 꿈은 곧바로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로 향한다.고교 1학년때부터 판금 우수 기능반처음 생긴 꿈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눈오나 비오나 학교 남아 연습 열중전국기능경기대회 판금 우승 차지"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이란 최종 목표를 정하고 나서 중간중간의 목표를 세웠어요.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하려면 국가대표가 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1위를 해야 하죠. 평가전은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1·2위를 해야 나갈 수 있고, 전국 대회 출전 자격은 지역 기능경기대회에서 입상해야 합니다. 하나하나 목표를 이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원 교수의 고교 시절은 '훈련 또 훈련'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매일 수업을 마치자마자 기능반에 가서 철판을 자르고 꺾고 붙였다. 학교 선생님이 시킨 것도 아닌데 대회가 가까워지면 주말도 명절도 없이 훈련에 매진했다. 학창시절 내내 놀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겨울에 기능반 언덕에서 눈썰매를 탄 게 훈련을 빼고 남은 기억이다. 너무 힘든 나머지 기능반 활동을 포기하는 친구도 속속 나왔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결과로 원 교수는 2학년 때 출전한 인천시 기능경기대회에서 판금 직종 2위를 차지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이듬해 4월 인천시 기능경기대회에서 우승해 전국기능경기대회 출전권을 따냈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가 인천을 덮쳐 문학경기장 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친 날에도 혼자 학교에 남아 판금을 연습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기능반 창문이 깨질 것 같이 흔들렸는데 연습에 집중하느라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고 말했다. 곤파스가 지나가고 2주 뒤 원현우 교수는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해 판금 직종에서 우승을 차지했다.판금 국가대표 평가전은 전년도 전국 대회 입상자들과 치렀다. 전년 대회 우승자는 인천기계공고를 졸업한 선배였다. 3차례 평가전 중 1차 평가전은 원현우 교수가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고, 2차 평가전은 전년 우승자인 선배가 승기를 잡았다. 마지막 3차 평가전에서 원 교수의 점수가 갑자기 확 떨어졌다. 그렇게 원 교수는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탈락했다."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해버렸어요. 평소와 다르게 작업이 술술 잘 풀리는 느낌이었는데, 작품을 완성할 때쯤 하나의 포인트를 확인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됐어요. 그 포인트 하나가 잘못돼 형상이 다 틀어져 버렸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어머니가 전화해 '아들 잘했어?'라고 먼저 물었는데, '아니 잘 안 됐어'라고 말하곤 펑펑 울었어요. 어머니는 '괜찮아, 고생했어'라고 위로해주셨어요."국가대표 평가전 어이없는 실수로 탈락한 가지 포인트 어긋나 형상 틀어져어머니 전화드리며 펑펑 울었던 기억지역기능경기대회, 전국기능경기대회, 국제기능올림픽으로 이어지는 기술인 경기대회는 하계·동계올림픽 스포츠대회 운영 구조와 흡사하다.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하계·동계올림픽과 마찬가지로 병역 특례 혜택을 준다. 기능경기대회 우승자는 주요 기업에 특별 채용되기도 한다. 기술인을 육성하려는 정책적 노력이다. 다만 교육부는 학교 현장에서 기능경기대회 입상을 위한 과도한 경쟁을 막고자 2020년부터 각 학교 우수 기능반을 동아리 활동으로 바꾸도록 하고 대회 운영 방식을 개편했다.기능경기대회는 특성화고 학생들에게도 점점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 인천시 기능경기대회는 2013년 42개 직종 534명이 출전했는데, 해마다 출전자 수가 줄더니 올해 대회는 36개 직종 251명 출전에 그쳤다. 10년 사이 대회 참여자가 절반 넘게 감소했다. 기능경기대회 입상자가 예전처럼 대기업 특별 채용을 보장받지 못하는 데다 특성화고 진학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 원 교수는 "1980년대만 해도 전국기능경기대회 수상자들이 인천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로 대회 위상이 높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회적 관심이 많지 않고 지원도 부족하다"며 "우선 기능경기대회에 대한 많은 홍보와 관심이 필요하고, 기술인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정부가 공업고등학교 지원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펼친 때는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다. 1977년 2월25일자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5개년 계획을 세워 전국 79개 공업고등학교의 시설을 우수 학교 수준으로 끌어올리라고 관련 부처에 지시한 후 "앞으로 각료, 고급 공무원, 기업인들은 지방에 가는 기회에 인근 공고를 들러 보고 관심을 많이 가져주길 바란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전국의 기계공고를 순회하기도 했다.인천기계공고 교장실에는 1970년대 말에 설치한 화장실이 있는데, 교장을 위한 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방문에 대비해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인천기계공고를 찾진 않았고 1979년 10·26사태가 났다. 이 시기 인천기계공고는 4천770㎡ 규모의 종합실습실을 신축하는 등 교육 환경을 대폭 개선했다. 인천기계공고는 1978년 인천 대기업인 대우중공업(현 HD현대인프라코어 전신)과 자매결연을 맺고 다양한 지원을 받았다. 1980년 인천기계공고 총 재학생은 개교 이래 처음으로 3천명을 넘어섰다.당시 정부는 선반 등을 이용해 기계부품을 정밀하게 다듬는 작업을 하는 '정밀가공기능사' 자격증을 신설했다. 정부는 정밀가공기능사 자격증을 딴 학생에게 병역 특례와 장학금 등을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인천기계공고 강선구 교장은 1980년 인천기계공고 졸업생이기도 하다. 강선구 교장도 고교 3학년이던 1979년 정밀가공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장학금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이사장을 맡았던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이 지급했다. 강선구 교장은 "당시 대우중공업이 매일 실습실에 빵을 넣어주기도 했고, 실기 지도 교사들에게 별도의 수당도 지원했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기계공고 교장들을 면담할 때 정밀가공기능사 취득자가 많은 순서로 자리를 배치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공업고등학교 육성만큼은 관심이 컸다"고 말했다.■마침내 이룬 올림픽 금메달의 꿈'야스리?' 선배 말을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이제는 울산 사투리 섞어쓰지만요.원현우 교수는 전국기능경기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2010년 11월 HD현대중공업에 특별 채용됐다. 국제기능올림픽의 꿈이 좌절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울산에 있는 HD현대중공업 조선소 현장으로 투입됐다. 원현우 교수는 대형 선박의 엔진룸에서 엔진과 주요 기계장치를 연결하는 파이프를 설치하고 검사하는 일을 맡았다. 기능경기대회 훈련과 산업 현장은 많이 달랐다. 일단 말부터 막혔다. '야스리'(쇠줄) 같은 현장 용어는 물론이고 인천사람이 울산 사투리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현장 사수 선배가 쓰는 말이 내가 아는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못 알아듣겠는 거예요. 처음엔 당혹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익숙해졌고요. 지금 제가 쓰는 말에도 사투리가 섞이게 됐습니다. 학교 기능반에서 훈련할 때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하니까 반듯하고 편한 자세에서 용접했는데, 현장에선 천장에 매달리거나 좁은 연료탱크 안에서 거울을 보면서 용접해야 했습니다. 좋지 않은 자세로 고품질을 내야 하는 현장은 기량과 노하우가 모두 중요했습니다."졸업 전 HD현대중공업 특별 채용불편함 많은 현장에선 노하우도 중요철골구조물 직종 바꿔 국가대표 출전2012년 국제기능올림픽 출전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회사 기술교육원에서 원현우 교수에게 철골구조물로 직종을 바꿔 국가대표 평가전에 출전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그가 회사 동기와 함께 입대하려고 휴직을 신청한 직후였는데,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하겠다"고 외치고 입대를 미뤘다. HD현대중공업은 국제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 기술인을 가장 많이 보유한 기업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 바이어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인들을 확보하고 있다'라는 강점을 부각한다는 차원이다.철골구조물은 판금보다 훨씬 두꺼운 6㎜, 9㎜ 두께의 철판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직종이다. 가스 용접기로 철판을 녹여 절단하고 모양에 맞게 구부려 도면으로 제시된 건축물이나 중장비 모형을 만드는 작업이다. 재료 자체가 무거워 힘들면서도 적게는 0.5㎜ 오차까지도 내선 안 되는 정밀함도 요구된다. 철판은 용접할 때 열을 받아 늘어났다가 식으면 줄어드는 특성이 있는데, 이러한 오차까지 계산해야 해 무척 까다롭다.철골구조물은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은 직종이었다.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는 국가대표 평가전 탈락자를 대상으로 다시 평가전을 진행했다. 1년 동안의 현장 경험은 원현우 교수에게 큰 도움이 됐다. 넉넉한 점수로 평가전에서 우승해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 태극 마크를 달았다. 기쁨은 잠시, 원현우 교수는 학창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훈련 또 훈련'에 돌입했다."훈련 과정에서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해 다른 친구들보다 입대가 늦어질 걱정 따위로 좀처럼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어요. 목표를 금메달에서 대회 MVP(최우수선수)로 수정했습니다. 목표를 상향하고 나니 할 일이 많아졌어요. MVP를 위해선 작품 치수의 오차는 당연히 제로(0), 용접도 누가 봐도 완벽할 정도로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부분까지 신경 쓰게 된 거죠. 구멍을 0.1㎜ 더 크게 뚫으면 어떻게 될지, 아니면 위치를 그만큼 옮기면 더 나을지 등을 계산하고 시도하면서 논문 한 편 쓸 정도로 데이터를 쌓았습니다."원현우 교수는 2013년 7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 철골구조물 경기에 나섰다. 철골구조물 직종에 일본,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14개국 선수가 출전했다. 국내 대회와 다르게 각각 선수의 작업을 누구나 볼 수 있게 열린 공간에서 경기를 치렀다. 관람객들이 몰려 원현우 교수의 작업을 지켜봤다. 일본 쪽 코치는 원 교수 앞에 카메라를 설치해 구조물을 만드는 과정을 촬영하기도 했다. 원 교수는 '그래 보여줄게'라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코리아 원현우 98.94점 만점 가까운 점수로 금메달 거머쥐어최우수선수 '알버트비달상' 수상까지올림픽 경기에선 중장비와 타워브릿지 모형 등이 과제로 제시됐다. 원현우 교수가 머릿속에 축적했던 수많은 데이터 중에서 모든 과제가 다 나왔다. 오차를 줄일 방법도 이미 계산됐다. 자신 있게 철판을 잘라 말거나 구부리고, 거침없이 붙여 형상을 만들어 나갔다. 그동안 수도 없이 연습했던 작품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다.경기 결과를 발표한 시상식 당일 대회 전광판에 철골구조물 금메달 수상자로 '코리아(KOREA) 원현우'라는 글자가 마침내 떴다. 경기 점수는 100점 만점에 98.94점으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원현우 교수는 태극기를 들고 오른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모든 경기의 시상식이 끝나자 장내가 조용해진 가운데 대회 총책임자는 최우수선수에게 주는 '알버트비달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또다시 '코리아 원현우'가 호명됐다. 원 교수는 태극기를 다시 들고 시상식장을 가로질러 뛰어다녔다. 그는 "아직도 시상식 영상을 보면 설렌 마음에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고향 인천은 후배들이 있는 곳올림픽을 마치고 돌아온 원현우 교수는 회사 기술교육원에 배치돼 용접과 배관·의장 설치 교육을 맡는다. 기술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기술과 이론을 겸비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원 교수는 2014년부터 회사 야간대학 조선해양과에서 전문학사 학위를, 이후 학점은행으로 기계공학 학사 학위를 각각 받고 부산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을 다녔다.2019년 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때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일주일에 세 번씩 야간에 왕복 180㎞ 거리를 운전하며 울산과 부산을 오갔고 육아도 도와야 했다. 원현우 교수는 석사 학위를 받자마자 입사할 때 일했던 현장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회사에 요청했다. 원 교수는 "현장 기술을 더욱 업그레이드해서 국가 공인 명장에 도전하거나 생산 임원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 교수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됐는데, "이것도 기회일 수 있겠다" 생각해 응모했다.만 29세 한국폴리텍대 교수 '사상 최연소'배관·플랜트 설비·접합 등 실습 중심 강습기술인 양성 시스템 고민 "직무급제 찬성"그는 2022년 1월 한국폴리텍대 포항캠퍼스 융합산업설비과 교수로 임용됐다. 만 29세로 한국폴리텍대학 사상 최연소 교수 타이틀이 생겼다. 배관, 플랜트 설비, 접합기술 등을 실습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다. 제자는 90명으로, 30명씩 3개 반을 맡고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 영어강사로 일하다 입학한 30대 후반 학생, 40~50대 장년 학생까지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다고 한다.현장 기술인에서 교육자로 새로 출발한 원현우 교수는 기술인 양성 시스템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원 교수는 기술인 우대를 전제로 한 직무급제 도입에 찬성한다. 힘들다고 생산직 꺼려… 기술인 우대하는 분위기 만들어야 "산업 현장에서 위험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대부분 생산직을 꺼리고 있어요. 기술을 유지하고 전수해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산업이 뿌리째로 흔들릴 겁니다. 숙련된 기술인은 직무에 따라 수당을 더 많이 책정해야 도전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봅니다. 부모도 자녀가 위험하고 힘든 직종을 택하길 원하지 않으니까 기계공업고등학교 진학을 선호하지 않게 된 거죠. 직무별 수당으로 기술인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해야 합니다. 특성화 고등학교는 가르치는 기술이 무척 다양한데, 학생이 졸업할 때 원하는 직무를 결정해 취업하다 보니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전 다양한 직무를 경험해서 선택하고 고등학교에선 산업 현장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심화하는 과정으로 가면 좋겠어요. 한국폴리텍대학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긴 합니다."원현우 교수에게 고향 인천은 기술인이 될 후배들이 있는 곳이다. 실제로 원 교수의 모교엔 그를 본보기로 삼는 학생이 많다고 한다. 그도 여전히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넘친다.원현우 교수는 "큰 목표를 세우고 중간중간 세분화해서 목표를 설계해 놓으며 살아온 것이 나를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준비하면서 또 다른 길이 생기기도 했다"며 "기술인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한다면 기회는 찾아온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원현우 교수.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1944년께 인천공립공업고등학교 시절 학교 전경. 현 미추홀구 주안동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 자리로 좌측에 수봉산이 보인다. /인천기계공고 제공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2010년 인천기계공고 시절 원현우 교수. 판금 작품의 치수를 재고 있다. /원현우 교수 제공1981년 미국 애틀란타에서 열린 제2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인천기계공고 출신 기계제도, 선반 직종 선수들이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며 시민들에게 축하받고 있다. /인천기계공고 제공원현우 교수가 2013년 독일 국제기능올림픽 철골구조물 직종에 출전해 만든 중장비 모형. /원현우 교수 제공원현우 교수가 2013년 7월 독일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최우수선수상인 '알버트비달상'을 수상했다. 원 교수는 알버트비달상 발표 직후 금메달을 목에 건 채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회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원현우 교수 제공원현우 교수가 지난 15일 오후 한국폴리텍대학 포항캠퍼스 뿌리기술융합센터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보호·이송하는 특수 용기인 '쿼츠웨어'(석영유리)에 용접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수소와 산소로 3000℃에 달하는 열을 가해 퀘츠웨어 부품을 접합하는 특수 용접 기술이다. /김용국 기자 yong@kyeongin.com
"출근길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라니 믿기지 않네요."'정자교 붕괴 사고'로 2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지 두 달 남짓 지난 시점에 분당선 수내역에서 출근길 에스컬레이터가 역주행해 14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자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분당선 수내역 2번 출구 14명 부상 사고도미노처럼 넘어지며 겹겹이 쌓여 아비규환4월 정자교 붕괴 두달 남짓 '또 사고'에스컬레이터 이용 안 하겠다는 주민도8일 경기도소방재난본부(경기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20분께 수내역 2번 출구에서 작동 중이던 상행 에스컬레이터가 뒤쪽으로 역주행했다.이 사고로 A씨 등 시민 3명이 허리와 다리 등을 다쳐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다른 시민 11명은 비교적 가벼운 상처를 입어 치료를 받은 뒤 현재는 귀가한 것으로 파악됐다.경기소방이 제공한 사고 당시 지하철 폐쇄회로(CC)TV 영상에는 출근 시간대 줄지어 탑승하던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역주행하는 모습이 담겼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려던 시민들은 이를 보고 급하게 뛰어 대피했고, 앞서 탑승해 있던 이용객들은 에스컬레이터가 빠른 속도로 역주행하자 도미노처럼 줄줄이 넘어졌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이용객들이 에스컬레이터 하단부에 겹겹이 쌓이고 나뒹굴어지며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사고 현장 인근에 있던 김모(26)씨는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아래에 깔려 있었다"며 "보는 것조차 당황스러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와서 사람들을 하나둘 실어갔다"고 증언했다.지난 4월 발생해 사망 1명 등 사상자 2명을 낸 정자교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공 교통수단에서 에스컬레이터 사고가 발생하자 시민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인근 주민 황모씨는 "반대편 지하철 출구가 공사 중이어서 늘 이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는데 사람이 늘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사고가 나니 불안하다"며 "앞으로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수내역 운영 주체인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이날 사고가 발생한 에스컬레이터가 지난달 10일 실시된 월 단위 정기 점검에서 '이상 없음'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코레일을 통해 에스컬레이터를 위탁 관리하는 업체는 매달 1회씩 수내역 내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안전 점검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달에도 10일께 점검이 예정돼 있었다.코레일 관계자는 "사고 즉시 승강기 작동을 멈추고, 이동을 차단하는 등 안전 조치를 실시했다"며 "철도특별사법경찰대와 한국승강기안전공단에서 진행하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사고 원인을 파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철도특별사법경찰대 관계자는 "관련 사고가 과거에 발생했는지를 포함해 사고 원인을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분당선 수내역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 현장. 2023.6.8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분당선 수내역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 현장. 2023.6.8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분당선 수내역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 현장. 2023.6.8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분당선 수내역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 현장. 2023.6.8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소설가 구효서를 한 문장으로 소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험적 글쓰기와 대중적 이야기를 오가는 다양성의 작가. 인생 대부분을 서울에서 산 그의 도시적 감수성이 나오다가도, 어떤 작품에선 유년기를 보낸 인천 강화도의 토속적 정서가 나온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중편 '풍경소리'(2017·이상문학상 대상작)에선 도시적 분위기와 토속적 정취를 결합한 듯한 느낌도 든다. 최신작 '통영이에요, 지금'(2023·해냄)은 아기자기하면서 애틋한 로맨스다. 구효서는 이러한 자신의 글쓰기를 "변덕 부리는 것을 멈추지 않기"라고 한다.그가 받은 굵직한 문학상으로 문단에서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제41회 이상문학상', '제45회 동인문학상', '제16회 대산문학상', '제6회 황순원문학상', '제6회 이효석문학상', '제27회 한국일보문학상' 등등.구효서는 다작하는 소설가다. 이제까지 장편 30권에 소설집 10권을 냈고, 산문집도 여러 권이다. 다작의 힘은 매일 오전 9시 작업실로 출근해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쓰고 오후 6시 퇴근하기로 유명한 전업 작가의 성실함과 그의 '변덕 부리기'에서 나온다. 구효서의 '글샘'은 어디서부터 솟는 걸까. 구효서는 그 원천이 고향 강화도라고 말한다. ■점토처럼 쌓여 정서의 토양이 된 강화도구효서는 1957년 9월 18일 오전 10시 6분 45초께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창말에서 2남 4녀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적은 창말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창후리 사태말이다. 구효서가 나고 자란 마을은 하점면 창후리와 이강리, 양사면 인화리에 걸쳐 있는 별립산(해발 399.8m) 끝자락이다. 마을 서쪽으로 창후리 포구를 낀 강화군 본도의 북단이자 접경지역이다.창말은 소금 창고(倉庫)가 있었던 동네라서, 사태말은 아주 오래전 큰 사태(沙汰)가 났던 동네라서 이름이 붙었다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다. 옛 지명이 그렇듯 유래가 정확하진 않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창말, 사태말, 샛말을 아우른 지역의 공식 지명은 창교동(倉橋洞)이었다. 소금 창고와 배를 댈 수 있는 잔교가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화남 고재형(1846~1916)이 1906년 강화도를 여행하며 한시를 짓고, 마을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여 쓴 '심도기행'(2008년 김형우·강신엽 역)에 나온 '창교동'이란 제목의 한시를 보자.'창교동은 서쪽 편 바닷가에 있는데,(倉橋洞在海西濱) / 이씨 구씨 서당엔 봄빛이 가득하다.(李具書樓共是春) / 한가로운 가운데에 소란함이 있다고 말하니,(因說閑中還有攪) / 석공과 소금 장수의 왕래가 빈번하기 때문이라네.(石工鹽賈往來頻)'창교동은 '청해 이씨'와 '능성 구씨'가 많이 살았다. 석공과 소금 장수 왕래가 빈번한 마을이었다. 구효서가 바로 능성 구씨로, 그의 가족뿐 아니라 일가친척이 창교동 일대에 모여 살았다. 구효서는 지금도 해마다 4월 진달래 필 무렵 부모님 묘에 성묘하러, 추석과 설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가끔 혼자 밴댕이를 먹으러 고향에 온다."태어나서 처음 맞은 세계가 강화도였습니다. 저에게 최초로 각인된 세계이자, DNA라고 할 수 있겠죠. 나에게 있어 모든 그리운 것의 기준, 또는 아름답거나 따뜻하거나 하는 것의 기준,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제 고향 강화도죠." 구효서는 장편 '라디오 라디오' (1995·고려원, 2006 개정판·해냄), 단편 '시계가 걸렸던 자리'(2005·창비), 산문집 '소년은 지나간다'(2018·현대문학), 함민복 시인 등 16명이 함께 쓴 산문집 '강화도 지오그래피'(2018·작가정신) 등을 통해 소설과 산문을 넘나들며 여러 차례 강화도에 관한 글을 썼다. 주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썼다. 한국전쟁 이후 접경지역인 강화도 마을 곳곳에 달린 '유선 라디오 스피커'나 마을 무당이 소설 속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강화군 초등학교 대항 체육대회 때 귀가 중 길을 잃었다가 부근리의 거대한 고인돌을 보고 방향을 가늠했던 기억, 흩날리던 삐라를 줍던 기억, 꽃이 만발한 산 고개나 개구리 잡던 기억 등 1950~60년대 강화도 농어촌 마을 풍광이 생생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 보는 거대한 고인돌의 실루엣은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다음 그의 작품에서 몇몇 대목을 소개한다. '샛말 너머 공 첨지댁 사내가 달빛 아래 홀로 게를 잡았던 날도 몇몇 호란의 뼈*가 그의 살갗을 스쳤다. 삼백 수십 년이 흘렀어도 짜디짠 소금 기운 때문에 예리한 뼛조각 끝이 쉬이 무디어지지 않아 게 잡는 사람들의 살갗에 상처를 남기기 일쑤였다.' (산문집 '소년은 지나간다' 中) *병자호란 때 죽은 이의 뼈를 뜻함.'누구네 부엌엘 가든 거기에는 삐라가 가득가득 넘쳐흘렀으니까요. 땔 나무의 반은 삐라였습니다.' (장편 '라디오 라디오' 中)구효서는 강후초등학교에 다녔다. 한 학년에 한 반씩인 시골학교였다. 강후초등학교는 2000년 폐교돼 최근까지 이 학교 1회 졸업생인 서예가 심은(沈隱) 전정우의 미술관으로 쓰였다가 현재 강화군이 문화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집에서 가는데 10리(약 4㎞), 오는데 10리를 6년을 걸어 개근했어요. 유년 하면 그 작은 발로 그냥 끝없이 걸었구나…. 보이는 게 하늘, 바다, 산 이 세 개밖에 없었어요. 차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봤으니 기억에 쌓였겠죠. 매일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우리한테 차곡차곡 마치 점토같이 쌓이잖아요. 그게 정서의 토양이 되는 겁니다. 작가가 돼서 이걸 하나하나 풀어쓰게 되는데, 요즘 와서는 조금 더 빨빨거리고 돌아다닐 걸 아쉬움이 들기도 하네요." 강화군 창교동·능성 구씨 일가 출신 마을 풍경 담은 장편·산문집 다수 출간 읍 우시장 번성했지만, 자연스레 퇴락 모든 것의 기준이 제 고향 강화도죠 어린 시절 교동도에서 소 장수들이 소 떼를 배에 싣고 창후리 포구에서 내려 강화읍 우시장으로 끌고 갔던 기억이 흥미롭다. 소 장수들은 구효서 같은 동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한두 마리를 강화읍 우시장까지 몰고 가게 했다고 한다. 구효서는 "소만 오면 아이들이 창후리 포구에 새까맣게 몰려 소를 먼저 차지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잊혀가는 강화 우시장이 구효서의 기억에는 아직 남아 있다.인천강화옹진축협에 따르면 강화읍 남산리 현 미래지향아파트 자리에 있던 우시장은 1995년 12월 31일 문을 닫았다. 강화 우시장은 1930~1950년대 현 강화읍 행정복지센터 자리에 있다가 서문 밖 인삼 수납장 공터로 이전해 1970년대까지 운영됐고, 이후 남산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주요 농경지이면서 한성과 개성을 잇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던 강화도엔 오래전부터 소가 많았고, 우시장도 발달했다. 1948년 강화문화관이 펴낸 향토잡지 '강화' 제1호(2007년 강화문화원 복각)를 보면, 당시 강화군 전체에서 사육한 가축은 소 4천365마리, 돼지 5천596마리, 닭 2만8천571마리에 달했다.강화 우시장엔 경기도 서부, 강원도와 충청도, 황해도에서도 장사꾼들이 몰렸다고 한다. 강화 우시장의 규모가 어떠했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공식 기록은 찾기 어렵고 강화도에 오래 산 노인들을 통해서 그 모습을 일부 되새길 수 있다. 강화문화원 부원장을 지낸 유중현(80) 씨는 "소가 많은 집은 소 주인과 소를 먹이고 키워준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우시장에 팔 땐 소 주인과 키워준 사람이 솟값을 반반씩 나눴다"며 "옛날엔 육우용(고기소)이 아니라 농사를 지으려고 집집이 소를 기르고 시장에서 사고팔고 했는데, 트랙터나 경운기가 보급되면서 자연스레 우시장도 쇠퇴하게 됐다"고 말했다.강화 우시장이 얼마나 컸는지 날치기도 성행했다. 조선일보 1955년 4월26일자 신문에는 강화경찰서가 강화 우시장 일대에서 수차례에 걸쳐 현금 1만환을 훔친 날치기 일당 2명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교동도에도 우시장이 컸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까지 교동도의 생활권은 강화도가 아닌 황해도 연백군과 개풍군 등지였다. 교동도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정착해 형성한 시장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 우시장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한기출(74) 교동향교 전교는 "교동도와 연백군은 간조 때 우마(牛馬)가 지나다닐 정도로 물이 빠져 배를 타지 않고도 소를 몰 수 있었다"며 "교동의 소가 강화도로 간 것은 휴전선으로 북쪽 왕래가 막힌 이후"라고 했다. 구효서가 어릴 적 봤던 소몰이 풍경은 남북 분단 상황이 만든 것이다. ■결국엔 다시 쓰게 될 고향 이야기1972년 열다섯 살부터 삶의 무대는 강화도에서 서울로 이동한다. 제1호 국가산업단지인 수출산업공단 제1단지(일명 구로공단)가 조성된 영등포구 구로동이다. 당시 서울에서도 변두리에 속했지만, 구효서의 일상은 180도 바뀐다. "가족들은 공단으로 일하러 나가고, 저는 어렸으니까 학교에 다녔어요. 강화도에서는 농경사회니까 일과 삶이란 게 구분이 안 됐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노래도 하고 사물놀이도 하고 퍼져 앉아서 농담도 하고 그러잖아요. 서울 가니까 딱 분리가 돼서 그런 낭만이 없어졌어요. 가족도 밤에만 만나고, 집에선 잠만 자고, 아침이면 다 직장으로 가니까 이상한 거예요. 농경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 껑충 점프하고 나니 정말 삭막하더라고요."구효서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빠듯한 살림에 물감값과 레슨비가 감당이 되질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그림을 포기하지 못했는데, 미술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에잇, 글이나 쓰자"며 펜과 노트만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막상 쓰기 시작하니 그림 그리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군대와 대학을 마치고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마디'로 등단했다. 초창기부터 실험적 기법과 도시적 감수성의 소설을 쓰면서도 전통적 글쓰기에도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효서는 문단에서 꾸준한 글쓰기 활동으로도 유명하다."매일매일 꾸준히 조금씩 씁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못하는 것도 (많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책 한 권을 내고 나면 그 책의 성격과 내용과 경향하고 아주 다른 쪽을 기웃거리는 이상한 버릇이 있어요. 쓸거리가 있어서 쓰는 게 아니라 또 무슨 변덕을 부릴지 고민하는 거죠. 그 변덕의 결과물로 작품이 하나 나옵니다. 또 하나는 강화도에서 서울로 가서 촌놈 티 벗으려고 엄청나게 도시화하려 했는데, 아무리 도시화를 하려 해도 촌놈일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강화도에서 막 도망치려 나왔다가 그 피로감에 다시 고향으로 들어오는, 이렇게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15살 무렵 서울로 온가족 상경 1987년 단편소설 '마디'로 등단 매일 꾸준히 글쓰기 활동 이어가 도시별 음식을 테마로 한 '요요시리즈'강화도 젓국찌개 소재 소설 만들고파 구효서가 2021년부터 잇따라 쓴 장편 '옆에 앉아서 울어도 돼요?'(2021·해냄), '빵 좋아하세요?'(2021·해냄), '통영이에요, 지금'(2023·해냄)은 작가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소설은 '요요 시리즈'로 통칭하는데, '슬로 시티·라이프·푸드'(Slow City&Life&Food)를 표방한다. 최신작 '통영이에요, 지금'은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의 벚꽃이 흩날리는 봄, 운치 있는 아이스크림 카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 여성과 두 남성의 사랑 이야기다. 학생운동 리더이자 수배자, 그와 연인이었다는 이유로 고문·강압수사를 받은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하게 돼 고문을 폭로(양심선언)한 경찰이 나온다. 아기자기한 통영에서의 현재 시점과 1980년대 엄혹한 시절 모습이 교차한다. 사람과 사람 간 사랑이 어디까지 애틋해질 수 있을지 써보고 싶었다는 게 구효서의 설명이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게 가능할지, 그게 평소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서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을 끌어왔다고 한다. "1978년에 입대했는데 이듬해 10·26사태가 있었고, 그다음 해 5·18이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다 겪고 복학하니 1981년이었어요. 그때부터 10년간 우리 사회가 (군부정권 독재와 이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엄청났죠. 이번 소설의 인물들은 특정한 모델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당시 운동권 리더였던 학생회장들, 양심선언한 군인과 경찰, 수사계통에 있던 사람들을 비롯해 학생운동을 했건 안 했건, 여학생이건 남학생이건 모두 소설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다만 저는 1980년대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게 아니라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1980년대를 소환한 겁니다."이 소설에선 산양유(염소젖)로 만든 셔벗 아이스크림과 두꺼운 프라이팬으로 원두를 볶은 이디오피아식 커피가 중요한 음식으로 묘사된다. 구효서는 앞으로 '요요 시리즈'를 10권쯤 쓸 계획이다. 그는 이제껏 낸 수십 편의 작품 중 가장 애정 있는 작품으로 "금방 낳아 놓은 새끼가 가장 예쁘다"며 '요요 시리즈' 삼부작을 꼽았다. 늦둥이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통영은 바다가 있고, 남쪽 나라이고, 동피랑에 좋은 카페가 많아요. 산책하고 어슬렁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에 통영만큼 좋은 곳이 없어요. 제가 소설에서 소개하는 음식들은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조금 시간이 들지만 대개 수제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작에서 썼던 목포와 평창도 슬로 시티, 슬로 푸드,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앞으로 '요요 시리즈'에 고향 강화도가 포함될지 물었다. "당연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요요 시리즈' 강화도는 어떠한 음식이 등장할까. 그에게 다시 좋아하는 고향의 음식을 물었다."술 먹고 술병이 났을 때 제일 먼저 피로회복제로 먹는 음식이 젓국찌개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해준 강화도 음식인데요. 돼지고기와 두부가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새우젓으로 끓이는 음식이죠. 어머니는 고기가 귀한 시절 그냥 새우젓만 넣고 끓였습니다. 대신 매운 고추 송송 썰어서 칼칼하게 해서 그거 먹으면 기운을 차리게 돼요."강화도 젓국찌개는 현재 '젓국갈비'로 널리 알려진 토속음식이자 강화 사람들의 '소울푸드'이다. 강화도 앞바다에선 해마다 2천400t가량의 젓새우가 잡힌다. 가을에 잡아 젓갈을 담그는 '추젓'의 전국 생산량 70%가 강화도에서 나온다. 그 옛날 먹을 것이 부족해도 새우젓만큼은 넉넉하게 있었다고 한다. 강화도 가정집에서 만든 젓국은 따로 정해진 조리법이 없었다. 호박이 나는 집에선 호박을, 감자를 심은 집에선 감자를 넣고 끓였다.강화 사람들이 집에서만 먹던 젓국에 돼지고기를 넣어 강화읍 시장에서 판 지도 오래된 모양이다. 강화도에선 소만큼 돼지도 많이 키웠다. 앞서 소개한 향토지 '강화'에서는 1948년 당시에도 "강화종이라는 특수품종으로 발전돼 그 육미가 특이하며 품종이 우량하여 현재 각 지방에 종돈으로 다량 공급되니, 이는 도서로서 형성된 지방인 천혜로 전염병 등의 침입이 전무하다는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고 했다.강화읍 관청리에서 34년 동안 젓국갈비 전문점을 운영해 원조로 통하는 '일억조식당' 임경자(63) 사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강화 사람들은 돼지 젓국을 먹었고, 저도 어릴 적 어머니가 늙은 호박과 두부를 넣고 끓여주던 기억으로 돼지갈비를 넣어 새로 개발한 음식"이라며 "전문점들이 생겨나면서 강화 밖에서도 유명해졌다"고 말했다. ■문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유튜브, 넷플릭스 등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필두로 영상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책을 점차 읽지 않는 분위기다. 챗GPT 같은 초거대 인공지능(AI)이 소설까지 쓰는 시대다. 구효서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없앨 수 없는 '법'으로 존속할 것으로 본다. 모든 언어가 문법으로 이뤄졌듯 영상 언어 또한 언어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챗GPT에 대해선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문법의 기본은 문장을 쓰는 것이고 문장을 익히는 것이며 문학을 하는 것이죠. 사람이 생각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문학은 필수 불가결한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문학을 외면할 수 있겠어요. 저도 챗GPT를 해봤는데 멀쩡하게 씁니다. 앞으로 제한 없이 발전하리란 것은 저도 짐작할 수 있겠어요. 이제는 아마도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다 책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누가 어떻게 명령했을 때 어떤 작품이 더 잘 나올지, 그것도 작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최초의 명령자는 언제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챗GPT 자주 사용" 긍정적 반응작품 명령자와 퀄리티는 작가 몫 구효서가 강화도에 대해 쓴 작품 가운데 단편 '시계가 걸렸던 자리'는 유년기가 아닌 현재 시점이다. 그가 생년월일에 더해 '분초'까지 세게 된 이유가 이 소설에서 나온다. 구효서는 마흔일곱이 되던 해 창말 옛집을 다시 찾는다. 'ㄱ'자로 지어진 한옥은 구효서의 아버지가 혼자서 행랑채(대문간 옆 집채)를 지어 'ㅁ'자 됐다. 2023년 현재까지도 그 집은 폐가로 남아있으나, 행랑채는 폭삭 주저앉았다.고향집에 살던 시절 행랑 창문 밖으로 넓은 간척지와 서해가 보였고, 바다 건너 석모도와 교동도가 보였다고 한다.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고자 문 양쪽에 세운 기둥)에는 어린 구효서가 붓글씨 연습할 때 쓴 '구효서'란 글씨가 지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부뚜막과 아버지가 만든 나무 책상도 그대로 남아 있다.구효서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아침 햇살이 막 방문 문턱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고 했다. 마흔일곱 생일 아침, 구효서는 고향집 안방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 햇살이 방문 턱에 떨어져 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 시각은 정확히 오전 10시 6분 45초이었다. 집에선 구효서가 태어난 후에야 비로소 시계를 들였는데, 안방 시계가 걸렸던 벽엔 녹슨 못 하나만 덩그러니 박혀 있었다."강화도에 대해 쓴 이야기는 거의 90% 이상이 유년 얘기입니다. 모든 유년의 기억들은 현재의 내가 기억해내는 것이잖아요? 강화도는 항상 추억의 대상, 기억의 대상이었죠. 현재 나의 기억과 생각이나 느낌들이 고향이라는 것을 만나서 새로운 세계나 느낌이 창출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저와 강화도가 이렇게 부딪히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오는데요, 이것은 강화도가 나한테 작용하는 것이지요. 앞으론 유년 일색이 아니라 새롭게 강화도를 보고 싶습니다. 우리 선산에 가면 가족 묘역에 제 자리가 딱 있어요. 이제 곧 제가 묻힐 곳이 강화도이기도 합니다." 강화 소재 이야기 대부분 유년 시절 별립산 한국 역사의 중요한 장소 이젠 추억 아닌 새로운 고향 보고파 소중한 걸 품고 있는 알 같은 공간 강화도 구효서는 고향 하면 가장 먼저 별립산을 떠올린다. 강후초등학교 교가에도 나오는 별립산은 '장엄한'이란 형용사가 붙어 어렸을 땐 정말로 장엄한 줄 알았다. 성인이 되고 보니 장엄하긴커녕 조그마한 산에 불과했다. 그래도 강화도에 올 때면 별립산부터 찾는다. 별립산을 보면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같은 자전적 소설을 떠올린다고 한다. 박완서의 고향은 황해도 개풍군으로, 구효서의 고향과 멀지 않다.별립산과 강화도는 가깝게는 분단의 현장이면서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미국, 프랑스, 일본과 국제전을 펼친 전선이고, 병자호란과 대몽항쟁을 치른 공간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구효서는 고향을 떠나고 나서야 그곳이 역사의 중심이었음을 생각하게 됐다. 그는 "내가 어릴 적 봤던 산과 지역이 역사 속에서 가늠되는 좌표들이었다"며 "한반도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품고 있는, 그런 알 같은 공간이 예나 지금이나 강화도"라고 말했다. 강화도에서도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 인민군 등에 의해, 또는 이듬해 1·4후퇴 전후로 남측 지역 특공대 등에 의해 강화도 주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소설가 구효서의 고향인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에서 양사면 인화리로 넘어가는 중외산 고개는 주요 민간인 학살 현장이다. 강화도에선 중외산을 강영뫼라고도 부른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진실을 규명한 '강화 지역 적대세력 사건' 조사보고서를 보면, 1950년 9월 29일 밤부터 30일 새벽 사이 강영뫼에서 인민군과 내무서원이 강화도 전역에서 붙잡아 온 주민 43명을 구덩이(참호)에 몰아넣고 학살했다. 이 사건은 1966년 창후리 간곡노인회장을 맡던 이병년 씨가 심도직물공업 김재소 사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에게 지원받아 '강영뫼 73인 순의비(殉義碑)'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면서 알려졌다. 순의비는 창후리 선착장 인근 언덕에 세워졌다가 1981년 도로 공사로 인해 송해면 하도리 강화유격용사위령탑 인근으로 옮겨졌다. 순의비에 쓰인 희생자 73명은 이병년 씨가 개인적으로 조사해 밝혀낸 명단이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순의비 명단 73명 가운데 일부는 개성 송악산으로 끌려가 희생됐다. 현재 순의비는 잡초에 둘러싸인 채 방치되고 있지만, 1970년대엔 반공의 표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어릴 적 구효서와 동네 사람들은 강영뫼를 지날 때 보이는 학살 장소를 '80년 구덩이'라고 불렀다. 80년이 된 구덩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80명이 학살당한 구덩이라는 뜻인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2008년이 돼서야 정확한 희생자 수와 당시 상황이 조사됐기 때문에 정확한 내막을 몰랐던 동네 사람들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구나'하고 생각한 것이다. 구효서는 "친구들과 그곳을 지날 때 늘 마음을 졸이곤 했다"며 "앞으로 강화도 이야기를 쓰면 80년 구덩이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연중기획 아임프롬인천 구효서 소설가 2023.0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유년기 기억을 되살려 가며 쓴 장편소설 '라디오 라디오'(1995) 시절, 태어난 집에서 촬영한 사진. 큰 누님 가족과 함께 살았다. 뒤로 보이는 문 안쪽이 안방이고, 그곳에 지금도 단편소설 '시계가 걸렸던 자리'(2005)의 모티브가 된 시계가 걸렸던 자리가 남아 있다. 아랫 줄 맨 왼쪽이 구효서. /구효서 작가 제공1969년 강후초등학교 교정에서 촬영한 사진. 오른쪽 두번째 소년이 구효서다. /구효서 작가 제공강화군 남산리 옛 우시장 모습. 촬영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강화군 제공1970년 겨울 강후초등학교 6학년 임종석 담임선생님과 학생들. 반이 하나밖에 없었고, 한 반에 학생은 무려 61명이었다. 뒤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 두 번 째가 구효서. /구효서 작가 제공2011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의 구효서(앞줄 왼쪽 끝). 오른쪽으로는 다와다 요코(일본), 정현종, 잉고 슐체(독일), 벤 오크리(영국), 앤드류 모션(영국), 르 클레지오(프랑스), 신달자, 아미야 데브(인도) 등 여러 나라 작가들이 보인다. /구효서 작가 제공2014년 동인문학상 시상식. 왼쪽부터 이문열, 신경숙, 오정희, 정과리, 꽃다발을 든 구효서 부부, 김화영, 김미현./구효서 작가 제공구효서가 출생 직후 이사해 열다섯 살때까지 살았던 강화군 창후리 창말 한옥집. 2023.0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구효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강화군 창후리 창말 한옥집 문설주에 어린 구효서가 붓글씨 연습을 하며 쓴 '구효서'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다. 2023.0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 있는 '강영뫼 73인 순의비'. 주변에 잡초가 무성한 채로 방치돼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배드민턴으로 하나 되는 셔틀콕 한마당 '2023 제21회 용인특례시·경인일보배 전국생활체육 OPEN 배드민턴 대회'가 지난 3~4일 이틀간 용인실내체육관 일원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경인일보와 용인시가 주최하고 용인시체육회와 용인시배드민턴협회가 주관한 이번 대회에는 전국 687개 팀 1천374명의 선수들이 참가해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특히 이번 대회는 코로나19로 3년 만에 재개된 지난 20회 대회 대비 참가 인원이 두 배가량 늘었고, 지난 1일 사실상의 코로나19 엔데믹이 선언된 직후 '마스크 없는' 대회로 치러졌다는 점에서 배드민턴 동호인들의 묵은 갈증을 해소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전국 687개 팀 1374명 빛났던 투혼작년 대회보다 참여 인원 2배 늘어연령·실력별 구분 남-여·혼합 복식 경기는 남·여 복식과 혼합복식 방식으로 진행됐다. 연령에 따라 30대(~39세)·40대(40~49세)·50대(50~59세)·60대(60세~)로, 실력에 따라 준자강·A·B·C·D1·D2·D3·초심 등으로 각각 구분됐다. 랠리포인트 25점 1세트 방식의 조별 예선리그를 통과한 각 조 1위 팀이 본선 토너먼트를 통해 최종 승부를 가렸다.각 등급별 우승·준우승·3위 팀에는 상금과 부상으로 배드민턴 용품이 차등 지급됐고 일반 참가자들에게도 대회 첫날 개회식에 맞춰 자전거, 배드민턴 용품, 건강관리식품, 쌀 등 푸짐한 경품이 전달돼 큰 호응을 얻었다.지난 3일 김방울·이세화 선수의 선서로 시작된 개회식에는 이번 대회를 주최·주관한 배상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과 이상일 용인시장, 장순복 용인시체육회 사무차장, 최종식 용인시배드민턴협회장을 비롯해 윤원균 의장과 김운봉 부의장을 필두로 김상수·김진석·황미상·박인철·김영식·안치용·임현수·김길수·신나연·이교우·이윤미·박병민 의원 등 용인시의회에서 대거 참석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춘숙(용인병)·권인숙(비례) 국회의원과 국민의힘 김준연 용인을 당협위원장, 경기도의회 정하용 의원도 현장을 찾아 자리를 빛냈다.용인시배드민턴협회 이명진 전무와 박민욱 운영이사, 용인시지도자연합회 임혜빈 코치, 용인클럽 박연우 회장, 상미클럽 박종찬 고문, 라원클럽 임재영 회장, 모현클럽 박훈식 회장, 상갈클럽 장욱선 회장 등은 대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장과 공로패 등을 받았다.배상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은 "배드민턴을 즐기는 동호인들은 건강해 보일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부럽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며 "대회에 함께해준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 /취재팀※취재팀=황성규 지역사회부(용인) 차장, 김성주 문화체육부장, 이지훈 기자(사진부)3일 오전 용인실내체육관에서 '2023년 제21회 용인특례시·경인일보배 전국 생활체육 OPEN 배드민턴 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2023.6.3 /취재팀배드민턴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열띤 경기를 펼치고 있다. 2023.6.3 /취재팀배드민턴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열띤 경기를 펼치고 있다. 2023.6.3 /취재팀
경기도 농민들이 땀 흘려 수확한 친환경 농산물은 농장에서 학교까지 철저한 공공의 관리 속에 식탁에 오른다. 경기도는 2009년 친환경 급식을 시작했고 2019년 공공기관 직영으로 전환했다.지난 2019년부터 친환경 학교급식 공급체계를 주관한 경기도농수산진흥원과 23·24일 양일에 걸쳐 농가부터 학생 식탁까지 농산물이 이동하는 과정을 동행 취재했다.1천400여개 학교에 매일 같이 친환경 농산물이 공급되는 과정은 신비로울 정도로 체계적이다. 공공에서 이처럼 급식에 관심을 쏟는 까닭은 미래 경기도를 책임질 인재가 친환경 농산물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안성시 죽산면에 위치한 3천300㎡ 남짓의 땅에 대파가 나란히 줄을 지은 채 무성히 자라 있다. 대파 주위에 듬성듬성 자라난 잡초들은 농약과 제초제를 치지 않은 친환경임을 증명해준다. 이곳은 경기도 친환경 학교급식의 원재료가 되는 대파, 양파 등을 재배하는 농가다.안성 죽산면 3천여㎡ 대파 농장제초제 사용 않고 '특A급' 생산경기도농수산진흥원은 도내 친환경 학교급식 공급체계 현장 점검의 일환으로 친환경 농산물이 학교에 공급되기까지의 과정을 점검하기 위해 23일 이곳을 찾았다.이곳 농가들은 대체로 10~11월쯤 씨를 뿌리고 5~6개월 재배 과정을 거쳐 이맘때쯤 본격적으로 대파를 재배한다. 친환경 재배 과정으로 자란 대파는 농약은 물론 제초제도 전혀 치지 않아 모양이 가지각색이다. 이 중에서도 잎 부분이 고르게 녹색을 띠고 줄기가 끝까지 곧게 뻗어있는 특A급으로 분류된 대파만이 학생들의 식판에 올라갈 수 있다.도내 학생들의 음식 재료를 책임지는 농가들은 친환경 재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장창덕 안성시 친환경학교급식출하회 회장은 "이곳의 채소들은 모두 시료채취를 통해 무농약 검사를 받고 친환경 인증 표시로 분류하고 있다. 농약을 전혀 치지 않기 때문에 제초제도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해충이나 잡초 관리가 더욱 힘들다. 자라난 잡초들은 모두 손으로 뽑아내고 있다. 애지중지 키운 만큼 신선도에 있어선 자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이곳 밭에서 1차 선별된 대파는 10kg 박스에 담아져 인근 저온저장고로 이동된다. 저장고는 신선도 유지를 위해 영상 2도의 쌀쌀한 온도로 맞춰져 있다. 최대 2~3일 정도만 보관한 뒤 당일 새벽 친환경농산물유통센터로 보내져 검수와 소분 작업이 진행된다."해충 제거 힘들어도 애지중지"저온저장고서 2~3일 만에 출하모든 식재료가 곧바로 유통센터로 보내지는 것은 아니다. 감자, 양파, 무, 고구마, 당근 등 손질이 많이 필요한 채소는 밭에서 재배된 뒤 전처리 업체로 보내져 1차 세척과 손질 작업이 이뤄진다. 학교 급식소에서 자칫 재료 손질에 시간이 오래 소요될 경우 학생들이 시간에 맞게 급식이 제공될 수 없기 때문에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전처리 업체를 거칠 수밖에 없다.■ 친환경급식, 안성농장에서 고암중까지전처리 업체 중 한곳인 양평농협에선 10여명의 직원들이 위생복과 위생마스크를 착용한 채 새벽에 농가에서 올라온 양파 손질에 한창이었다. 흙이 듬성듬성 뭍은 양파는 기계에서 1차 세척과정을 거치고 이후 직원들은 껍질을 제거한뒤 2차 세척을 통해 센터로 배송한다.오후 5시 30분쯤이 되면 이른 새벽 각 농가와 전처리 업체에서 손질된 채소가 친환경농산물유통센터로 모여 검수와 검품 작업이 이뤄진다. 농가와 전처리 업체에서 이미 두차례 선별 작업을 거쳤지만 센터에서는 더욱 까다롭게 검수와 검품 작업을 진행한다. 양파, 당근, 대파 등 신선 채소는 박스에서 무작위로 꺼내 반으로 잘라 상태를 확인한다. 작업이 끝나면 입고 날짜와 수량을 표시한 뒤 다음 작업장으로 이동한다.농가·업체서 채소 선별 후 검수·패킹… 급식판까지 하루만에 까다로운 검수, 검품 작업을 통과한 채소들은 마지막 단계인 소분 패킹 작업 단계로 보내진다. 이 단계에선 출하 전 급식소마다 요청한 주문 수량과 채소 종류를 일일이 확인한 뒤 수량에 맞게 소분한다. 이후 패킹과 지역별 분배, 출고전 스캔을 모두 마치면 도내 1천400여개 학교로 보내질 식재료 작업이 대략 밤 12시쯤 끝난다. 이른 새벽 밭에서 채소가 전달돼 학생들의 식판까지 옮겨지기 전 손질과 배분까지 모든 과정이 단 하루 만에 이뤄진다.친환경농산물유통센터, 배송사 통해 각 학교별로영양사들 유통기한·위생상태 확인한뒤 본격 조리"재료 좋아 다 먹어… 다이어트 못참아" 긍정 반응 현장 점검 이튿날인 24일 오전 6시 진흥원은 양주시의 한 농산물 배송업체인 '온푸드'부터 찾았다. 친환경농산물유통센터에서 보내진 농산물들이 이 곳에 보내면 배송업체는 각 학교별로 재분류하고, 운송하고 있다. 사업에 미참여하는 성남시를 제외한 도내 30개 시군, 37개소의 지역 배송업체가 온푸드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진흥원은 저온저장고의 보관 상태, 거래명세서와 배송지별 재분류 현황 등을 점검했다. 실제 배송이 진행되는 오전 8시 40분. 진흥원은 양주 고암중학교 급식실을 방문해 학교 검수 현황을 지켜봤다. 배송업체로부터 대파, 양배추, 양파 등이 도착하자, 학교 영양사들은 품명과 학교명, 배송일자, 유통기한을 직접 소리 내어 읽으며 확인했다. 이후 품목들의 무게, 온도를 체크하고 포장지를 뜯어 위생상태를 육안으로 점검하며 체크리스트에 기록했다. 최종 품목 상태 확인이 끝나자 영양사들은 본격적인 조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학교급식이 완성되는 동안 양주시의 '청솔유기농'이란 전처리 업체를 방문했다. 지난 2021년부터 학교급식 공급을 시작한 청솔유기농은 현재 도내 1천400개 학교에 공급되는 감자, 당근, 양배추 전처리의 30% 정도를 담당하고 있다. 농장에서 보내진 양배추는 이곳에서 직원들이 뿌리를 자른 후 겉잎을 벗겨내 깨끗한 상태를 만들고 무게별로 포장하며 가공된다. 감자의 경우 총 5단계 이상을 거쳐야 한다. 가공라인에 올려진 감자는 세척된 후 자동 박피 과정을 거치고, 4명 이상의 작업자들이 직접 남은 껍질을 박피했다. 그 후 다시 세척되고 건조된 후에야 진공팩에 포장됐다. 감자는 물기가 없어야 갈변되지 않기 때문에 포장 과정에서도 작업자가 직접 건조 상태를 확인하는 등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연천으로 이동해 학교로 보내지는 김치의 71%가 생산되고 있는 경기농협식품을 찾았다. 김치공장은 30명 이상의 작업자들이 각 단계에 맞게 김치를 가공 중이었다. 먼저 세척된 배추는 작업자들이 직접 속을 열어보며 이물질 여부를 확인하는 선별 과정을 거친다. 이후 양념속이 배춧잎 사이로 채워지면 엑스레이(X-RAY) 투시기를 통과해 금속물질 혼합여부를 검사하고, 포장돼 저온창고에 보관된다. 이때 양념속은 경기농협이 학생들의 입맛과 영양 등을 고려해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김치 보다 고춧가루의 캡사이신 농도를 40% 정도 낮춰 덜 맵고 짠 상태로 제작된다. 실제 학생들의 친환경급식에 대한 생각을 듣기 위해 다시 고암중으로 자리를 옮겼다.오후 12시 급식실에서 학생들과 같은 식탁에 마주한 최창수 경기도농수산진흥원 원장은 급식의 맛, 학생들의 영양 상태 등을 물었다. 원장 옆에 앉은 한 학생은 "재료를 좋은 걸 쓰는 것 같다. 채소나 김치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편이다"고 말했고, 맞은편 여학생은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 조금만 먹으려 노력하는데, 급식을 먹을 때마다 못 참고 더 담는 편이다"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김정화(55) 고암중 영양사는 "올해부터 학교가 자율배식을 시작했다. 농산물 등 편식이 우려되는 반찬들을 학생들이 남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잔반 없이 배식하고 있다. 3~4월 진행한 급식 만족도 조사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한 학생들이 많은 상황"이라고 말했다.이틀 동안 친환경 농산물이 길러지는 순간부터 학교에서 배급되는 전 과정을 점검하며 지켜본 최창수 원장은 "모든 처리 과정을 새벽부터 밤까지 지켜 보니, 많은 분들의 노력이 합쳐진 덕분에 학생들에게 안전하고 고품질의 급식이 제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번 더 깨닫게 됐다"며 "이번 점검에서 농가와 각 업체를 직접 방문해 많은 애로사항을 들었는데, 현재 공급 시스템이 더 발전하고 더 건강한 식품이 제공될 수 있도록 보완할 점들을 연구하겠다"고 말했다. /서승택·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최창수 경기도농수산진흥원장이 양주시의 전처리 업체를 방문해 양배추의 가공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양주시의 한 전처리 업체에서 감자가 세척되는 모습/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양주시의 한 전처리 업체에서 세척된 감자가 자동 박피되는 모습/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양주시의 한 전처리 업체에서 자동 박피된 감자를 작업자들이 추가 박피하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양주시의 한 전처리 업체에서 박피돼 세척, 건조된 감자를 진공 포장하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연천의 김치 가공업체인 경기농협 공장에서 완성된 김치가 엑스레이(X-RAY)를 통해 이물질 검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상 없는 김치들은 작업자들을 통해 포장, 보관된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연천의 김치 가공업체인 경기농협 공장에서 작업자들이 김치를 선별하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연천의 김치 가공업체인 경기농협 공장에서 작업자들이 선별된 김치에 양념속을 넣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양주 고암중 급식실에서 친환경 우수농산물로 완성된 급식을 학생들이 배식하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양주 고암중 급식실에서 최창수 경기도농수산진흥원 원장이 학생들과 식사하며 급식에 대한 만족도 등을 듣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