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라니 믿기지 않네요."'정자교 붕괴 사고'로 2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지 두 달 남짓 지난 시점에 분당선 수내역에서 출근길 에스컬레이터가 역주행해 14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자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분당선 수내역 2번 출구 14명 부상 사고도미노처럼 넘어지며 겹겹이 쌓여 아비규환4월 정자교 붕괴 두달 남짓 '또 사고'에스컬레이터 이용 안 하겠다는 주민도8일 경기도소방재난본부(경기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20분께 수내역 2번 출구에서 작동 중이던 상행 에스컬레이터가 뒤쪽으로 역주행했다.이 사고로 A씨 등 시민 3명이 허리와 다리 등을 다쳐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다른 시민 11명은 비교적 가벼운 상처를 입어 치료를 받은 뒤 현재는 귀가한 것으로 파악됐다.경기소방이 제공한 사고 당시 지하철 폐쇄회로(CC)TV 영상에는 출근 시간대 줄지어 탑승하던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역주행하는 모습이 담겼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려던 시민들은 이를 보고 급하게 뛰어 대피했고, 앞서 탑승해 있던 이용객들은 에스컬레이터가 빠른 속도로 역주행하자 도미노처럼 줄줄이 넘어졌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이용객들이 에스컬레이터 하단부에 겹겹이 쌓이고 나뒹굴어지며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사고 현장 인근에 있던 김모(26)씨는 "갑자기 쾅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아래에 깔려 있었다"며 "보는 것조차 당황스러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와서 사람들을 하나둘 실어갔다"고 증언했다.지난 4월 발생해 사망 1명 등 사상자 2명을 낸 정자교 붕괴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공 교통수단에서 에스컬레이터 사고가 발생하자 시민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인근 주민 황모씨는 "반대편 지하철 출구가 공사 중이어서 늘 이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는데 사람이 늘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사고가 나니 불안하다"며 "앞으로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수내역 운영 주체인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이날 사고가 발생한 에스컬레이터가 지난달 10일 실시된 월 단위 정기 점검에서 '이상 없음'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코레일을 통해 에스컬레이터를 위탁 관리하는 업체는 매달 1회씩 수내역 내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안전 점검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달에도 10일께 점검이 예정돼 있었다.코레일 관계자는 "사고 즉시 승강기 작동을 멈추고, 이동을 차단하는 등 안전 조치를 실시했다"며 "철도특별사법경찰대와 한국승강기안전공단에서 진행하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사고 원인을 파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철도특별사법경찰대 관계자는 "관련 사고가 과거에 발생했는지를 포함해 사고 원인을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분당선 수내역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 현장. 2023.6.8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분당선 수내역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 현장. 2023.6.8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분당선 수내역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 현장. 2023.6.8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분당선 수내역 에스컬레이터 역주행 사고 현장. 2023.6.8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소설가 구효서를 한 문장으로 소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험적 글쓰기와 대중적 이야기를 오가는 다양성의 작가. 인생 대부분을 서울에서 산 그의 도시적 감수성이 나오다가도, 어떤 작품에선 유년기를 보낸 인천 강화도의 토속적 정서가 나온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중편 '풍경소리'(2017·이상문학상 대상작)에선 도시적 분위기와 토속적 정취를 결합한 듯한 느낌도 든다. 최신작 '통영이에요, 지금'(2023·해냄)은 아기자기하면서 애틋한 로맨스다. 구효서는 이러한 자신의 글쓰기를 "변덕 부리는 것을 멈추지 않기"라고 한다.그가 받은 굵직한 문학상으로 문단에서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제41회 이상문학상', '제45회 동인문학상', '제16회 대산문학상', '제6회 황순원문학상', '제6회 이효석문학상', '제27회 한국일보문학상' 등등.구효서는 다작하는 소설가다. 이제까지 장편 30권에 소설집 10권을 냈고, 산문집도 여러 권이다. 다작의 힘은 매일 오전 9시 작업실로 출근해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쓰고 오후 6시 퇴근하기로 유명한 전업 작가의 성실함과 그의 '변덕 부리기'에서 나온다. 구효서의 '글샘'은 어디서부터 솟는 걸까. 구효서는 그 원천이 고향 강화도라고 말한다. ■점토처럼 쌓여 정서의 토양이 된 강화도구효서는 1957년 9월 18일 오전 10시 6분 45초께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창말에서 2남 4녀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적은 창말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창후리 사태말이다. 구효서가 나고 자란 마을은 하점면 창후리와 이강리, 양사면 인화리에 걸쳐 있는 별립산(해발 399.8m) 끝자락이다. 마을 서쪽으로 창후리 포구를 낀 강화군 본도의 북단이자 접경지역이다.창말은 소금 창고(倉庫)가 있었던 동네라서, 사태말은 아주 오래전 큰 사태(沙汰)가 났던 동네라서 이름이 붙었다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다. 옛 지명이 그렇듯 유래가 정확하진 않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창말, 사태말, 샛말을 아우른 지역의 공식 지명은 창교동(倉橋洞)이었다. 소금 창고와 배를 댈 수 있는 잔교가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화남 고재형(1846~1916)이 1906년 강화도를 여행하며 한시를 짓고, 마을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여 쓴 '심도기행'(2008년 김형우·강신엽 역)에 나온 '창교동'이란 제목의 한시를 보자.'창교동은 서쪽 편 바닷가에 있는데,(倉橋洞在海西濱) / 이씨 구씨 서당엔 봄빛이 가득하다.(李具書樓共是春) / 한가로운 가운데에 소란함이 있다고 말하니,(因說閑中還有攪) / 석공과 소금 장수의 왕래가 빈번하기 때문이라네.(石工鹽賈往來頻)'창교동은 '청해 이씨'와 '능성 구씨'가 많이 살았다. 석공과 소금 장수 왕래가 빈번한 마을이었다. 구효서가 바로 능성 구씨로, 그의 가족뿐 아니라 일가친척이 창교동 일대에 모여 살았다. 구효서는 지금도 해마다 4월 진달래 필 무렵 부모님 묘에 성묘하러, 추석과 설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가끔 혼자 밴댕이를 먹으러 고향에 온다."태어나서 처음 맞은 세계가 강화도였습니다. 저에게 최초로 각인된 세계이자, DNA라고 할 수 있겠죠. 나에게 있어 모든 그리운 것의 기준, 또는 아름답거나 따뜻하거나 하는 것의 기준,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제 고향 강화도죠." 구효서는 장편 '라디오 라디오' (1995·고려원, 2006 개정판·해냄), 단편 '시계가 걸렸던 자리'(2005·창비), 산문집 '소년은 지나간다'(2018·현대문학), 함민복 시인 등 16명이 함께 쓴 산문집 '강화도 지오그래피'(2018·작가정신) 등을 통해 소설과 산문을 넘나들며 여러 차례 강화도에 관한 글을 썼다. 주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썼다. 한국전쟁 이후 접경지역인 강화도 마을 곳곳에 달린 '유선 라디오 스피커'나 마을 무당이 소설 속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강화군 초등학교 대항 체육대회 때 귀가 중 길을 잃었다가 부근리의 거대한 고인돌을 보고 방향을 가늠했던 기억, 흩날리던 삐라를 줍던 기억, 꽃이 만발한 산 고개나 개구리 잡던 기억 등 1950~60년대 강화도 농어촌 마을 풍광이 생생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 보는 거대한 고인돌의 실루엣은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다음 그의 작품에서 몇몇 대목을 소개한다. '샛말 너머 공 첨지댁 사내가 달빛 아래 홀로 게를 잡았던 날도 몇몇 호란의 뼈*가 그의 살갗을 스쳤다. 삼백 수십 년이 흘렀어도 짜디짠 소금 기운 때문에 예리한 뼛조각 끝이 쉬이 무디어지지 않아 게 잡는 사람들의 살갗에 상처를 남기기 일쑤였다.' (산문집 '소년은 지나간다' 中) *병자호란 때 죽은 이의 뼈를 뜻함.'누구네 부엌엘 가든 거기에는 삐라가 가득가득 넘쳐흘렀으니까요. 땔 나무의 반은 삐라였습니다.' (장편 '라디오 라디오' 中)구효서는 강후초등학교에 다녔다. 한 학년에 한 반씩인 시골학교였다. 강후초등학교는 2000년 폐교돼 최근까지 이 학교 1회 졸업생인 서예가 심은(沈隱) 전정우의 미술관으로 쓰였다가 현재 강화군이 문화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집에서 가는데 10리(약 4㎞), 오는데 10리를 6년을 걸어 개근했어요. 유년 하면 그 작은 발로 그냥 끝없이 걸었구나…. 보이는 게 하늘, 바다, 산 이 세 개밖에 없었어요. 차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봤으니 기억에 쌓였겠죠. 매일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우리한테 차곡차곡 마치 점토같이 쌓이잖아요. 그게 정서의 토양이 되는 겁니다. 작가가 돼서 이걸 하나하나 풀어쓰게 되는데, 요즘 와서는 조금 더 빨빨거리고 돌아다닐 걸 아쉬움이 들기도 하네요." 강화군 창교동·능성 구씨 일가 출신 마을 풍경 담은 장편·산문집 다수 출간 읍 우시장 번성했지만, 자연스레 퇴락 모든 것의 기준이 제 고향 강화도죠 어린 시절 교동도에서 소 장수들이 소 떼를 배에 싣고 창후리 포구에서 내려 강화읍 우시장으로 끌고 갔던 기억이 흥미롭다. 소 장수들은 구효서 같은 동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한두 마리를 강화읍 우시장까지 몰고 가게 했다고 한다. 구효서는 "소만 오면 아이들이 창후리 포구에 새까맣게 몰려 소를 먼저 차지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잊혀가는 강화 우시장이 구효서의 기억에는 아직 남아 있다.인천강화옹진축협에 따르면 강화읍 남산리 현 미래지향아파트 자리에 있던 우시장은 1995년 12월 31일 문을 닫았다. 강화 우시장은 1930~1950년대 현 강화읍 행정복지센터 자리에 있다가 서문 밖 인삼 수납장 공터로 이전해 1970년대까지 운영됐고, 이후 남산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주요 농경지이면서 한성과 개성을 잇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던 강화도엔 오래전부터 소가 많았고, 우시장도 발달했다. 1948년 강화문화관이 펴낸 향토잡지 '강화' 제1호(2007년 강화문화원 복각)를 보면, 당시 강화군 전체에서 사육한 가축은 소 4천365마리, 돼지 5천596마리, 닭 2만8천571마리에 달했다.강화 우시장엔 경기도 서부, 강원도와 충청도, 황해도에서도 장사꾼들이 몰렸다고 한다. 강화 우시장의 규모가 어떠했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공식 기록은 찾기 어렵고 강화도에 오래 산 노인들을 통해서 그 모습을 일부 되새길 수 있다. 강화문화원 부원장을 지낸 유중현(80) 씨는 "소가 많은 집은 소 주인과 소를 먹이고 키워준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우시장에 팔 땐 소 주인과 키워준 사람이 솟값을 반반씩 나눴다"며 "옛날엔 육우용(고기소)이 아니라 농사를 지으려고 집집이 소를 기르고 시장에서 사고팔고 했는데, 트랙터나 경운기가 보급되면서 자연스레 우시장도 쇠퇴하게 됐다"고 말했다.강화 우시장이 얼마나 컸는지 날치기도 성행했다. 조선일보 1955년 4월26일자 신문에는 강화경찰서가 강화 우시장 일대에서 수차례에 걸쳐 현금 1만환을 훔친 날치기 일당 2명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교동도에도 우시장이 컸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까지 교동도의 생활권은 강화도가 아닌 황해도 연백군과 개풍군 등지였다. 교동도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정착해 형성한 시장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 우시장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한기출(74) 교동향교 전교는 "교동도와 연백군은 간조 때 우마(牛馬)가 지나다닐 정도로 물이 빠져 배를 타지 않고도 소를 몰 수 있었다"며 "교동의 소가 강화도로 간 것은 휴전선으로 북쪽 왕래가 막힌 이후"라고 했다. 구효서가 어릴 적 봤던 소몰이 풍경은 남북 분단 상황이 만든 것이다. ■결국엔 다시 쓰게 될 고향 이야기1972년 열다섯 살부터 삶의 무대는 강화도에서 서울로 이동한다. 제1호 국가산업단지인 수출산업공단 제1단지(일명 구로공단)가 조성된 영등포구 구로동이다. 당시 서울에서도 변두리에 속했지만, 구효서의 일상은 180도 바뀐다. "가족들은 공단으로 일하러 나가고, 저는 어렸으니까 학교에 다녔어요. 강화도에서는 농경사회니까 일과 삶이란 게 구분이 안 됐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노래도 하고 사물놀이도 하고 퍼져 앉아서 농담도 하고 그러잖아요. 서울 가니까 딱 분리가 돼서 그런 낭만이 없어졌어요. 가족도 밤에만 만나고, 집에선 잠만 자고, 아침이면 다 직장으로 가니까 이상한 거예요. 농경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 껑충 점프하고 나니 정말 삭막하더라고요."구효서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빠듯한 살림에 물감값과 레슨비가 감당이 되질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그림을 포기하지 못했는데, 미술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에잇, 글이나 쓰자"며 펜과 노트만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막상 쓰기 시작하니 그림 그리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군대와 대학을 마치고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마디'로 등단했다. 초창기부터 실험적 기법과 도시적 감수성의 소설을 쓰면서도 전통적 글쓰기에도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효서는 문단에서 꾸준한 글쓰기 활동으로도 유명하다."매일매일 꾸준히 조금씩 씁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못하는 것도 (많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책 한 권을 내고 나면 그 책의 성격과 내용과 경향하고 아주 다른 쪽을 기웃거리는 이상한 버릇이 있어요. 쓸거리가 있어서 쓰는 게 아니라 또 무슨 변덕을 부릴지 고민하는 거죠. 그 변덕의 결과물로 작품이 하나 나옵니다. 또 하나는 강화도에서 서울로 가서 촌놈 티 벗으려고 엄청나게 도시화하려 했는데, 아무리 도시화를 하려 해도 촌놈일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강화도에서 막 도망치려 나왔다가 그 피로감에 다시 고향으로 들어오는, 이렇게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15살 무렵 서울로 온가족 상경 1987년 단편소설 '마디'로 등단 매일 꾸준히 글쓰기 활동 이어가 도시별 음식을 테마로 한 '요요시리즈'강화도 젓국찌개 소재 소설 만들고파 구효서가 2021년부터 잇따라 쓴 장편 '옆에 앉아서 울어도 돼요?'(2021·해냄), '빵 좋아하세요?'(2021·해냄), '통영이에요, 지금'(2023·해냄)은 작가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소설은 '요요 시리즈'로 통칭하는데, '슬로 시티·라이프·푸드'(Slow City&Life&Food)를 표방한다. 최신작 '통영이에요, 지금'은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의 벚꽃이 흩날리는 봄, 운치 있는 아이스크림 카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 여성과 두 남성의 사랑 이야기다. 학생운동 리더이자 수배자, 그와 연인이었다는 이유로 고문·강압수사를 받은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하게 돼 고문을 폭로(양심선언)한 경찰이 나온다. 아기자기한 통영에서의 현재 시점과 1980년대 엄혹한 시절 모습이 교차한다. 사람과 사람 간 사랑이 어디까지 애틋해질 수 있을지 써보고 싶었다는 게 구효서의 설명이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게 가능할지, 그게 평소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서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을 끌어왔다고 한다. "1978년에 입대했는데 이듬해 10·26사태가 있었고, 그다음 해 5·18이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다 겪고 복학하니 1981년이었어요. 그때부터 10년간 우리 사회가 (군부정권 독재와 이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엄청났죠. 이번 소설의 인물들은 특정한 모델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당시 운동권 리더였던 학생회장들, 양심선언한 군인과 경찰, 수사계통에 있던 사람들을 비롯해 학생운동을 했건 안 했건, 여학생이건 남학생이건 모두 소설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다만 저는 1980년대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게 아니라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1980년대를 소환한 겁니다."이 소설에선 산양유(염소젖)로 만든 셔벗 아이스크림과 두꺼운 프라이팬으로 원두를 볶은 이디오피아식 커피가 중요한 음식으로 묘사된다. 구효서는 앞으로 '요요 시리즈'를 10권쯤 쓸 계획이다. 그는 이제껏 낸 수십 편의 작품 중 가장 애정 있는 작품으로 "금방 낳아 놓은 새끼가 가장 예쁘다"며 '요요 시리즈' 삼부작을 꼽았다. 늦둥이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통영은 바다가 있고, 남쪽 나라이고, 동피랑에 좋은 카페가 많아요. 산책하고 어슬렁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에 통영만큼 좋은 곳이 없어요. 제가 소설에서 소개하는 음식들은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조금 시간이 들지만 대개 수제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작에서 썼던 목포와 평창도 슬로 시티, 슬로 푸드,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앞으로 '요요 시리즈'에 고향 강화도가 포함될지 물었다. "당연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요요 시리즈' 강화도는 어떠한 음식이 등장할까. 그에게 다시 좋아하는 고향의 음식을 물었다."술 먹고 술병이 났을 때 제일 먼저 피로회복제로 먹는 음식이 젓국찌개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해준 강화도 음식인데요. 돼지고기와 두부가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새우젓으로 끓이는 음식이죠. 어머니는 고기가 귀한 시절 그냥 새우젓만 넣고 끓였습니다. 대신 매운 고추 송송 썰어서 칼칼하게 해서 그거 먹으면 기운을 차리게 돼요."강화도 젓국찌개는 현재 '젓국갈비'로 널리 알려진 토속음식이자 강화 사람들의 '소울푸드'이다. 강화도 앞바다에선 해마다 2천400t가량의 젓새우가 잡힌다. 가을에 잡아 젓갈을 담그는 '추젓'의 전국 생산량 70%가 강화도에서 나온다. 그 옛날 먹을 것이 부족해도 새우젓만큼은 넉넉하게 있었다고 한다. 강화도 가정집에서 만든 젓국은 따로 정해진 조리법이 없었다. 호박이 나는 집에선 호박을, 감자를 심은 집에선 감자를 넣고 끓였다.강화 사람들이 집에서만 먹던 젓국에 돼지고기를 넣어 강화읍 시장에서 판 지도 오래된 모양이다. 강화도에선 소만큼 돼지도 많이 키웠다. 앞서 소개한 향토지 '강화'에서는 1948년 당시에도 "강화종이라는 특수품종으로 발전돼 그 육미가 특이하며 품종이 우량하여 현재 각 지방에 종돈으로 다량 공급되니, 이는 도서로서 형성된 지방인 천혜로 전염병 등의 침입이 전무하다는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고 했다.강화읍 관청리에서 34년 동안 젓국갈비 전문점을 운영해 원조로 통하는 '일억조식당' 임경자(63) 사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강화 사람들은 돼지 젓국을 먹었고, 저도 어릴 적 어머니가 늙은 호박과 두부를 넣고 끓여주던 기억으로 돼지갈비를 넣어 새로 개발한 음식"이라며 "전문점들이 생겨나면서 강화 밖에서도 유명해졌다"고 말했다. ■문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유튜브, 넷플릭스 등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필두로 영상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책을 점차 읽지 않는 분위기다. 챗GPT 같은 초거대 인공지능(AI)이 소설까지 쓰는 시대다. 구효서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없앨 수 없는 '법'으로 존속할 것으로 본다. 모든 언어가 문법으로 이뤄졌듯 영상 언어 또한 언어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챗GPT에 대해선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문법의 기본은 문장을 쓰는 것이고 문장을 익히는 것이며 문학을 하는 것이죠. 사람이 생각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문학은 필수 불가결한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문학을 외면할 수 있겠어요. 저도 챗GPT를 해봤는데 멀쩡하게 씁니다. 앞으로 제한 없이 발전하리란 것은 저도 짐작할 수 있겠어요. 이제는 아마도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다 책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누가 어떻게 명령했을 때 어떤 작품이 더 잘 나올지, 그것도 작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최초의 명령자는 언제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챗GPT 자주 사용" 긍정적 반응작품 명령자와 퀄리티는 작가 몫 구효서가 강화도에 대해 쓴 작품 가운데 단편 '시계가 걸렸던 자리'는 유년기가 아닌 현재 시점이다. 그가 생년월일에 더해 '분초'까지 세게 된 이유가 이 소설에서 나온다. 구효서는 마흔일곱이 되던 해 창말 옛집을 다시 찾는다. 'ㄱ'자로 지어진 한옥은 구효서의 아버지가 혼자서 행랑채(대문간 옆 집채)를 지어 'ㅁ'자 됐다. 2023년 현재까지도 그 집은 폐가로 남아있으나, 행랑채는 폭삭 주저앉았다.고향집에 살던 시절 행랑 창문 밖으로 넓은 간척지와 서해가 보였고, 바다 건너 석모도와 교동도가 보였다고 한다.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고자 문 양쪽에 세운 기둥)에는 어린 구효서가 붓글씨 연습할 때 쓴 '구효서'란 글씨가 지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부뚜막과 아버지가 만든 나무 책상도 그대로 남아 있다.구효서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아침 햇살이 막 방문 문턱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고 했다. 마흔일곱 생일 아침, 구효서는 고향집 안방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 햇살이 방문 턱에 떨어져 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 시각은 정확히 오전 10시 6분 45초이었다. 집에선 구효서가 태어난 후에야 비로소 시계를 들였는데, 안방 시계가 걸렸던 벽엔 녹슨 못 하나만 덩그러니 박혀 있었다."강화도에 대해 쓴 이야기는 거의 90% 이상이 유년 얘기입니다. 모든 유년의 기억들은 현재의 내가 기억해내는 것이잖아요? 강화도는 항상 추억의 대상, 기억의 대상이었죠. 현재 나의 기억과 생각이나 느낌들이 고향이라는 것을 만나서 새로운 세계나 느낌이 창출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저와 강화도가 이렇게 부딪히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오는데요, 이것은 강화도가 나한테 작용하는 것이지요. 앞으론 유년 일색이 아니라 새롭게 강화도를 보고 싶습니다. 우리 선산에 가면 가족 묘역에 제 자리가 딱 있어요. 이제 곧 제가 묻힐 곳이 강화도이기도 합니다." 강화 소재 이야기 대부분 유년 시절 별립산 한국 역사의 중요한 장소 이젠 추억 아닌 새로운 고향 보고파 소중한 걸 품고 있는 알 같은 공간 강화도 구효서는 고향 하면 가장 먼저 별립산을 떠올린다. 강후초등학교 교가에도 나오는 별립산은 '장엄한'이란 형용사가 붙어 어렸을 땐 정말로 장엄한 줄 알았다. 성인이 되고 보니 장엄하긴커녕 조그마한 산에 불과했다. 그래도 강화도에 올 때면 별립산부터 찾는다. 별립산을 보면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같은 자전적 소설을 떠올린다고 한다. 박완서의 고향은 황해도 개풍군으로, 구효서의 고향과 멀지 않다.별립산과 강화도는 가깝게는 분단의 현장이면서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미국, 프랑스, 일본과 국제전을 펼친 전선이고, 병자호란과 대몽항쟁을 치른 공간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구효서는 고향을 떠나고 나서야 그곳이 역사의 중심이었음을 생각하게 됐다. 그는 "내가 어릴 적 봤던 산과 지역이 역사 속에서 가늠되는 좌표들이었다"며 "한반도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품고 있는, 그런 알 같은 공간이 예나 지금이나 강화도"라고 말했다. 강화도에서도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 인민군 등에 의해, 또는 이듬해 1·4후퇴 전후로 남측 지역 특공대 등에 의해 강화도 주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소설가 구효서의 고향인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에서 양사면 인화리로 넘어가는 중외산 고개는 주요 민간인 학살 현장이다. 강화도에선 중외산을 강영뫼라고도 부른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진실을 규명한 '강화 지역 적대세력 사건' 조사보고서를 보면, 1950년 9월 29일 밤부터 30일 새벽 사이 강영뫼에서 인민군과 내무서원이 강화도 전역에서 붙잡아 온 주민 43명을 구덩이(참호)에 몰아넣고 학살했다. 이 사건은 1966년 창후리 간곡노인회장을 맡던 이병년 씨가 심도직물공업 김재소 사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에게 지원받아 '강영뫼 73인 순의비(殉義碑)'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면서 알려졌다. 순의비는 창후리 선착장 인근 언덕에 세워졌다가 1981년 도로 공사로 인해 송해면 하도리 강화유격용사위령탑 인근으로 옮겨졌다. 순의비에 쓰인 희생자 73명은 이병년 씨가 개인적으로 조사해 밝혀낸 명단이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순의비 명단 73명 가운데 일부는 개성 송악산으로 끌려가 희생됐다. 현재 순의비는 잡초에 둘러싸인 채 방치되고 있지만, 1970년대엔 반공의 표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어릴 적 구효서와 동네 사람들은 강영뫼를 지날 때 보이는 학살 장소를 '80년 구덩이'라고 불렀다. 80년이 된 구덩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80명이 학살당한 구덩이라는 뜻인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2008년이 돼서야 정확한 희생자 수와 당시 상황이 조사됐기 때문에 정확한 내막을 몰랐던 동네 사람들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구나'하고 생각한 것이다. 구효서는 "친구들과 그곳을 지날 때 늘 마음을 졸이곤 했다"며 "앞으로 강화도 이야기를 쓰면 80년 구덩이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연중기획 아임프롬인천 구효서 소설가 2023.0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유년기 기억을 되살려 가며 쓴 장편소설 '라디오 라디오'(1995) 시절, 태어난 집에서 촬영한 사진. 큰 누님 가족과 함께 살았다. 뒤로 보이는 문 안쪽이 안방이고, 그곳에 지금도 단편소설 '시계가 걸렸던 자리'(2005)의 모티브가 된 시계가 걸렸던 자리가 남아 있다. 아랫 줄 맨 왼쪽이 구효서. /구효서 작가 제공1969년 강후초등학교 교정에서 촬영한 사진. 오른쪽 두번째 소년이 구효서다. /구효서 작가 제공강화군 남산리 옛 우시장 모습. 촬영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강화군 제공1970년 겨울 강후초등학교 6학년 임종석 담임선생님과 학생들. 반이 하나밖에 없었고, 한 반에 학생은 무려 61명이었다. 뒤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 두 번 째가 구효서. /구효서 작가 제공2011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의 구효서(앞줄 왼쪽 끝). 오른쪽으로는 다와다 요코(일본), 정현종, 잉고 슐체(독일), 벤 오크리(영국), 앤드류 모션(영국), 르 클레지오(프랑스), 신달자, 아미야 데브(인도) 등 여러 나라 작가들이 보인다. /구효서 작가 제공2014년 동인문학상 시상식. 왼쪽부터 이문열, 신경숙, 오정희, 정과리, 꽃다발을 든 구효서 부부, 김화영, 김미현./구효서 작가 제공구효서가 출생 직후 이사해 열다섯 살때까지 살았던 강화군 창후리 창말 한옥집. 2023.0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구효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강화군 창후리 창말 한옥집 문설주에 어린 구효서가 붓글씨 연습을 하며 쓴 '구효서'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다. 2023.0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 있는 '강영뫼 73인 순의비'. 주변에 잡초가 무성한 채로 방치돼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배드민턴으로 하나 되는 셔틀콕 한마당 '2023 제21회 용인특례시·경인일보배 전국생활체육 OPEN 배드민턴 대회'가 지난 3~4일 이틀간 용인실내체육관 일원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경인일보와 용인시가 주최하고 용인시체육회와 용인시배드민턴협회가 주관한 이번 대회에는 전국 687개 팀 1천374명의 선수들이 참가해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특히 이번 대회는 코로나19로 3년 만에 재개된 지난 20회 대회 대비 참가 인원이 두 배가량 늘었고, 지난 1일 사실상의 코로나19 엔데믹이 선언된 직후 '마스크 없는' 대회로 치러졌다는 점에서 배드민턴 동호인들의 묵은 갈증을 해소하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전국 687개 팀 1374명 빛났던 투혼작년 대회보다 참여 인원 2배 늘어연령·실력별 구분 남-여·혼합 복식 경기는 남·여 복식과 혼합복식 방식으로 진행됐다. 연령에 따라 30대(~39세)·40대(40~49세)·50대(50~59세)·60대(60세~)로, 실력에 따라 준자강·A·B·C·D1·D2·D3·초심 등으로 각각 구분됐다. 랠리포인트 25점 1세트 방식의 조별 예선리그를 통과한 각 조 1위 팀이 본선 토너먼트를 통해 최종 승부를 가렸다.각 등급별 우승·준우승·3위 팀에는 상금과 부상으로 배드민턴 용품이 차등 지급됐고 일반 참가자들에게도 대회 첫날 개회식에 맞춰 자전거, 배드민턴 용품, 건강관리식품, 쌀 등 푸짐한 경품이 전달돼 큰 호응을 얻었다.지난 3일 김방울·이세화 선수의 선서로 시작된 개회식에는 이번 대회를 주최·주관한 배상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과 이상일 용인시장, 장순복 용인시체육회 사무차장, 최종식 용인시배드민턴협회장을 비롯해 윤원균 의장과 김운봉 부의장을 필두로 김상수·김진석·황미상·박인철·김영식·안치용·임현수·김길수·신나연·이교우·이윤미·박병민 의원 등 용인시의회에서 대거 참석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춘숙(용인병)·권인숙(비례) 국회의원과 국민의힘 김준연 용인을 당협위원장, 경기도의회 정하용 의원도 현장을 찾아 자리를 빛냈다.용인시배드민턴협회 이명진 전무와 박민욱 운영이사, 용인시지도자연합회 임혜빈 코치, 용인클럽 박연우 회장, 상미클럽 박종찬 고문, 라원클럽 임재영 회장, 모현클럽 박훈식 회장, 상갈클럽 장욱선 회장 등은 대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장과 공로패 등을 받았다.배상록 경인일보 대표이사 사장은 "배드민턴을 즐기는 동호인들은 건강해 보일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셔서 부럽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며 "대회에 함께해준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 /취재팀※취재팀=황성규 지역사회부(용인) 차장, 김성주 문화체육부장, 이지훈 기자(사진부)3일 오전 용인실내체육관에서 '2023년 제21회 용인특례시·경인일보배 전국 생활체육 OPEN 배드민턴 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2023.6.3 /취재팀배드민턴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열띤 경기를 펼치고 있다. 2023.6.3 /취재팀배드민턴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열띤 경기를 펼치고 있다. 2023.6.3 /취재팀
경기도 농민들이 땀 흘려 수확한 친환경 농산물은 농장에서 학교까지 철저한 공공의 관리 속에 식탁에 오른다. 경기도는 2009년 친환경 급식을 시작했고 2019년 공공기관 직영으로 전환했다.지난 2019년부터 친환경 학교급식 공급체계를 주관한 경기도농수산진흥원과 23·24일 양일에 걸쳐 농가부터 학생 식탁까지 농산물이 이동하는 과정을 동행 취재했다.1천400여개 학교에 매일 같이 친환경 농산물이 공급되는 과정은 신비로울 정도로 체계적이다. 공공에서 이처럼 급식에 관심을 쏟는 까닭은 미래 경기도를 책임질 인재가 친환경 농산물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안성시 죽산면에 위치한 3천300㎡ 남짓의 땅에 대파가 나란히 줄을 지은 채 무성히 자라 있다. 대파 주위에 듬성듬성 자라난 잡초들은 농약과 제초제를 치지 않은 친환경임을 증명해준다. 이곳은 경기도 친환경 학교급식의 원재료가 되는 대파, 양파 등을 재배하는 농가다.안성 죽산면 3천여㎡ 대파 농장제초제 사용 않고 '특A급' 생산경기도농수산진흥원은 도내 친환경 학교급식 공급체계 현장 점검의 일환으로 친환경 농산물이 학교에 공급되기까지의 과정을 점검하기 위해 23일 이곳을 찾았다.이곳 농가들은 대체로 10~11월쯤 씨를 뿌리고 5~6개월 재배 과정을 거쳐 이맘때쯤 본격적으로 대파를 재배한다. 친환경 재배 과정으로 자란 대파는 농약은 물론 제초제도 전혀 치지 않아 모양이 가지각색이다. 이 중에서도 잎 부분이 고르게 녹색을 띠고 줄기가 끝까지 곧게 뻗어있는 특A급으로 분류된 대파만이 학생들의 식판에 올라갈 수 있다.도내 학생들의 음식 재료를 책임지는 농가들은 친환경 재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장창덕 안성시 친환경학교급식출하회 회장은 "이곳의 채소들은 모두 시료채취를 통해 무농약 검사를 받고 친환경 인증 표시로 분류하고 있다. 농약을 전혀 치지 않기 때문에 제초제도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해충이나 잡초 관리가 더욱 힘들다. 자라난 잡초들은 모두 손으로 뽑아내고 있다. 애지중지 키운 만큼 신선도에 있어선 자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이곳 밭에서 1차 선별된 대파는 10kg 박스에 담아져 인근 저온저장고로 이동된다. 저장고는 신선도 유지를 위해 영상 2도의 쌀쌀한 온도로 맞춰져 있다. 최대 2~3일 정도만 보관한 뒤 당일 새벽 친환경농산물유통센터로 보내져 검수와 소분 작업이 진행된다."해충 제거 힘들어도 애지중지"저온저장고서 2~3일 만에 출하모든 식재료가 곧바로 유통센터로 보내지는 것은 아니다. 감자, 양파, 무, 고구마, 당근 등 손질이 많이 필요한 채소는 밭에서 재배된 뒤 전처리 업체로 보내져 1차 세척과 손질 작업이 이뤄진다. 학교 급식소에서 자칫 재료 손질에 시간이 오래 소요될 경우 학생들이 시간에 맞게 급식이 제공될 수 없기 때문에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전처리 업체를 거칠 수밖에 없다.■ 친환경급식, 안성농장에서 고암중까지전처리 업체 중 한곳인 양평농협에선 10여명의 직원들이 위생복과 위생마스크를 착용한 채 새벽에 농가에서 올라온 양파 손질에 한창이었다. 흙이 듬성듬성 뭍은 양파는 기계에서 1차 세척과정을 거치고 이후 직원들은 껍질을 제거한뒤 2차 세척을 통해 센터로 배송한다.오후 5시 30분쯤이 되면 이른 새벽 각 농가와 전처리 업체에서 손질된 채소가 친환경농산물유통센터로 모여 검수와 검품 작업이 이뤄진다. 농가와 전처리 업체에서 이미 두차례 선별 작업을 거쳤지만 센터에서는 더욱 까다롭게 검수와 검품 작업을 진행한다. 양파, 당근, 대파 등 신선 채소는 박스에서 무작위로 꺼내 반으로 잘라 상태를 확인한다. 작업이 끝나면 입고 날짜와 수량을 표시한 뒤 다음 작업장으로 이동한다.농가·업체서 채소 선별 후 검수·패킹… 급식판까지 하루만에 까다로운 검수, 검품 작업을 통과한 채소들은 마지막 단계인 소분 패킹 작업 단계로 보내진다. 이 단계에선 출하 전 급식소마다 요청한 주문 수량과 채소 종류를 일일이 확인한 뒤 수량에 맞게 소분한다. 이후 패킹과 지역별 분배, 출고전 스캔을 모두 마치면 도내 1천400여개 학교로 보내질 식재료 작업이 대략 밤 12시쯤 끝난다. 이른 새벽 밭에서 채소가 전달돼 학생들의 식판까지 옮겨지기 전 손질과 배분까지 모든 과정이 단 하루 만에 이뤄진다.친환경농산물유통센터, 배송사 통해 각 학교별로영양사들 유통기한·위생상태 확인한뒤 본격 조리"재료 좋아 다 먹어… 다이어트 못참아" 긍정 반응 현장 점검 이튿날인 24일 오전 6시 진흥원은 양주시의 한 농산물 배송업체인 '온푸드'부터 찾았다. 친환경농산물유통센터에서 보내진 농산물들이 이 곳에 보내면 배송업체는 각 학교별로 재분류하고, 운송하고 있다. 사업에 미참여하는 성남시를 제외한 도내 30개 시군, 37개소의 지역 배송업체가 온푸드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진흥원은 저온저장고의 보관 상태, 거래명세서와 배송지별 재분류 현황 등을 점검했다. 실제 배송이 진행되는 오전 8시 40분. 진흥원은 양주 고암중학교 급식실을 방문해 학교 검수 현황을 지켜봤다. 배송업체로부터 대파, 양배추, 양파 등이 도착하자, 학교 영양사들은 품명과 학교명, 배송일자, 유통기한을 직접 소리 내어 읽으며 확인했다. 이후 품목들의 무게, 온도를 체크하고 포장지를 뜯어 위생상태를 육안으로 점검하며 체크리스트에 기록했다. 최종 품목 상태 확인이 끝나자 영양사들은 본격적인 조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학교급식이 완성되는 동안 양주시의 '청솔유기농'이란 전처리 업체를 방문했다. 지난 2021년부터 학교급식 공급을 시작한 청솔유기농은 현재 도내 1천400개 학교에 공급되는 감자, 당근, 양배추 전처리의 30% 정도를 담당하고 있다. 농장에서 보내진 양배추는 이곳에서 직원들이 뿌리를 자른 후 겉잎을 벗겨내 깨끗한 상태를 만들고 무게별로 포장하며 가공된다. 감자의 경우 총 5단계 이상을 거쳐야 한다. 가공라인에 올려진 감자는 세척된 후 자동 박피 과정을 거치고, 4명 이상의 작업자들이 직접 남은 껍질을 박피했다. 그 후 다시 세척되고 건조된 후에야 진공팩에 포장됐다. 감자는 물기가 없어야 갈변되지 않기 때문에 포장 과정에서도 작업자가 직접 건조 상태를 확인하는 등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연천으로 이동해 학교로 보내지는 김치의 71%가 생산되고 있는 경기농협식품을 찾았다. 김치공장은 30명 이상의 작업자들이 각 단계에 맞게 김치를 가공 중이었다. 먼저 세척된 배추는 작업자들이 직접 속을 열어보며 이물질 여부를 확인하는 선별 과정을 거친다. 이후 양념속이 배춧잎 사이로 채워지면 엑스레이(X-RAY) 투시기를 통과해 금속물질 혼합여부를 검사하고, 포장돼 저온창고에 보관된다. 이때 양념속은 경기농협이 학생들의 입맛과 영양 등을 고려해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김치 보다 고춧가루의 캡사이신 농도를 40% 정도 낮춰 덜 맵고 짠 상태로 제작된다. 실제 학생들의 친환경급식에 대한 생각을 듣기 위해 다시 고암중으로 자리를 옮겼다.오후 12시 급식실에서 학생들과 같은 식탁에 마주한 최창수 경기도농수산진흥원 원장은 급식의 맛, 학생들의 영양 상태 등을 물었다. 원장 옆에 앉은 한 학생은 "재료를 좋은 걸 쓰는 것 같다. 채소나 김치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편이다"고 말했고, 맞은편 여학생은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 조금만 먹으려 노력하는데, 급식을 먹을 때마다 못 참고 더 담는 편이다"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김정화(55) 고암중 영양사는 "올해부터 학교가 자율배식을 시작했다. 농산물 등 편식이 우려되는 반찬들을 학생들이 남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잔반 없이 배식하고 있다. 3~4월 진행한 급식 만족도 조사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한 학생들이 많은 상황"이라고 말했다.이틀 동안 친환경 농산물이 길러지는 순간부터 학교에서 배급되는 전 과정을 점검하며 지켜본 최창수 원장은 "모든 처리 과정을 새벽부터 밤까지 지켜 보니, 많은 분들의 노력이 합쳐진 덕분에 학생들에게 안전하고 고품질의 급식이 제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번 더 깨닫게 됐다"며 "이번 점검에서 농가와 각 업체를 직접 방문해 많은 애로사항을 들었는데, 현재 공급 시스템이 더 발전하고 더 건강한 식품이 제공될 수 있도록 보완할 점들을 연구하겠다"고 말했다. /서승택·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최창수 경기도농수산진흥원장이 양주시의 전처리 업체를 방문해 양배추의 가공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양주시의 한 전처리 업체에서 감자가 세척되는 모습/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양주시의 한 전처리 업체에서 세척된 감자가 자동 박피되는 모습/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양주시의 한 전처리 업체에서 자동 박피된 감자를 작업자들이 추가 박피하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양주시의 한 전처리 업체에서 박피돼 세척, 건조된 감자를 진공 포장하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연천의 김치 가공업체인 경기농협 공장에서 완성된 김치가 엑스레이(X-RAY)를 통해 이물질 검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상 없는 김치들은 작업자들을 통해 포장, 보관된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연천의 김치 가공업체인 경기농협 공장에서 작업자들이 김치를 선별하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연천의 김치 가공업체인 경기농협 공장에서 작업자들이 선별된 김치에 양념속을 넣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양주 고암중 급식실에서 친환경 우수농산물로 완성된 급식을 학생들이 배식하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24일 양주 고암중 급식실에서 최창수 경기도농수산진흥원 원장이 학생들과 식사하며 급식에 대한 만족도 등을 듣고 있다./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
머리 전체를 감싸는 인상적인 디자인의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 윤희정은 그가 재즈 공연을 시작한 지 3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 어느덧 우리나라 재즈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유명한 재즈 가수는 자신의 이름을 딴 노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도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자신만의 블루스가 있다. 윤희정에게도 윤희정의 블루스가 있다.'나 어릴 적 고향에 가고파/언덕 너머 푸르른 하늘/(중략)/나 살던 곳 그대로 있을까/수도 곡산 언덕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지금쯤 무엇을 할까/(중략)/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도 어머니의 고향은 순천 한 동네 살며 중매결혼에 가마 타고 말 타고 혼인을 하셨지/(후략)'(곡 YHJ blues, 이판근 곡·윤희정 작사)윤희정이 가사를 붙인 이 노래 'YHJ blues'는 윤희정이 고향 인천을 잊지 않고 살아온 인천사람이라는 사실을 소개하는 데 참 좋은 노래다. 노래 가사처럼 윤희정은 평안도 출신 아버지와 순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3년 2남 4녀 6남매 가운데 둘째로 인천 동구 송현동에서 태어나 자랐다.인천은 실향민이 많은 도시인데 윤희정의 아버지 또한 그랬다. 윤희정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북에서 만나 결혼했다. 부부는 한국전쟁 때 외동아들을 데리고 피란길에 오른다. 혼란한 피란길에 부부는 서로를 놓쳐 잠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시기도 있었는데, 어머니는 인천에, 아버지는 수원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어느 날 서로의 소식을 듣게 된 부부는 상봉했고 어머니가 자리를 잡은 인천으로 아버지가 찾아와 가족이 모두 인천에 눌러앉았다.한국전쟁 영향으로 송현동에는 피란민이 모여들었고 수도국산과 수문통 인근에는 피란민촌이 형성되며 인구가 계속 늘었다. '2018년 인천 동구 도시생활사 조사'를 보면 '송현동'이 1962년에는 1동부터 4동까지 분할됐고, 1966년에는 송현동 인구가 인천시 전체 인구 52만5천827명 중 8%를 차지하는 4만1천887명이었다. 송현주공아파트 자리에는 '수용소촌'이, 옛 수문통 인근에는 '수문통 피란민촌'이 있었다. 실향민의 도시 인천 출신 윤희정송현동 수도국산 피란민촌서 자라인천항 개항 계기 서양 음악 유입 YHJ blues 속 '수도 곡산'이란 지명이 눈에 띈다. 윤희정이 송현동에서 성장하며 들었던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지명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수도국산'의 오기(誤記)다. 현재 수도국산에는 윤희정이 기억하는 달동네는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동네 흔적을 간직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대신 옛 기억을 전해주고 있다.수도국산은 '송현배수지'가 들어서면서 불린 이름이다. 송현배수지는 1910년 12월부터 급수가 시작된 상수도 공급 시설이다. 상수도 시설은 근대 도시가 갖춰야 하는 기본 인프라 중 하나인데, 인천은 원래 우물이 적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수질 또한 나빴다고 한다. 개항 이후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물 확보가 최대 숙원으로 떠오르며 만들어진 것이 송현배수지다. 인천 최초 상수도 시설이자 도시계획시설이라는 의미도 있다. 송림산 혹은 만수산이라 불리던 해발 고도 56.8m인 낮은 산에 자리 잡았다. 부지 면적 3만6천780㎡에 저수조 3개를 갖췄다. 인천부(인천 옛 이름) 거주 일본인을 위해 설치된 수도시설로 특히 조선인이 모여 살았던 송현동과 송림동 주변은 그 혜택을 잘 누리지 못했다고 한다.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신나게 불렀던 기억이 있네요. 그곳의 울림이 너무 좋은 거예요. 윤희정의 유년 시절 기억 속 수도국산은 더없이 훌륭한 '놀이터'로 남아 있다. 그는 "허허벌판에 어마어마하게 큰 물통이 서 있었고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넓은 평지가 있어 뛰어놀았는데, 지금은 친구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윤희정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중앙시장에서 '대동양행'이라는 가전제품 판매점을 크게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언제나 라디오와 전축이 빼곡했다.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상점에 붙은 양행(洋行)이라는 글자가 낯설게 느껴진다.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를 역임한 김윤식 시인은 '양행'이라는 이름에 대해 "서양 물품, 박래품을 파는 행상이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1950~60년 당시 '양행'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던 시절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풍기는 이름으로 사용됐다"고 했다.세련된 이름 덕에 아버님의 장사가 잘 됐기 때문이었을까. 윤희정의 어린 시절에는 산동네 꼭대기에 집이 있었는데, 이사할 때마다 점점 내려와 대동양행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집을 장만했다.신식 물품을 파는 세련된 아버지는 귀도 예민했다."아버님이 특히 귀가 예민한 분이셨어요. 고교 시절 장난을 치곤 했는데, 제가 진열대에 있는 아무 라디오나 전축 스위치를 켜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님은 '야 명희야, 위에서 다섯 번째 선반에 있는 일곱 번째 라디오 끄라우'라고 하셨어요." 윤희정 본명은 김명희다.윤희정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아버지에게서 찾았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 불렀다. 윤희정은 '학교 공부'보다 '음악 공부'를 더 좋아했는데, 윤희정의 다른 형제들은 노래보다 학교 공부를 더 잘했다. 윤희정의 어머니는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고 늘 강조했다. 어머님이 자라면 자고, 밥 먹으라면 밥 먹는 착한 오빠와 동생들이었다. 그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 오빠는 1971년 사법시험을 최연소 수석으로 합격한 서울대 출신 김병준 변호사다. 판사 출신인 김병준 변호사는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시 고문변호사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안상수 전 인천시장과는 서울대 동기라고 한다. 윤희정의 다른 동생들 대부분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 재직했다.'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고 강조한 어머님 말씀이 윤희정에게도 결과적으로는 통했다. 학창시절 책보다는 통기타 공부에 더 열심이었던 윤희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가수가 됐다. 음악적 재능 있는 아버지 닮아중학교 2학년 친구따라 기타 배워고등학교 졸업 후 가수 인생 시작 윤희정은 1965년 3월부터 1971년 2월까지 인성여중·고에 재학했다. 통기타 열풍이 막 불기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소개로 따라간 인천YMCA '싱얼롱'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기타를 처음 배웠다. 그때부터 공부보다는 기타 치고 노래하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학교에서는 음악반 활동을 했다. 교실에 있던 풍금과 통기타를 윤희정이 연주하며 학교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을 이끌고 합창대회를 나가기도 했다. "'선라이즈 선셋',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그런 노래가 유행하던 시기였어요.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신나게 불렀던 기억이 있네요. 학교 건물을 보면 각 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어요. 그곳의 울림이 너무 좋은 거예요. 100원일까, 10원이었을까 돈을 받고 공연을 하면 계단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찼죠." (웃음)재즈 가수 윤희정은 포크 가수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해인 1971년 '제1회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에서 우승하며 KBS의 월급을 받는 '전속가수'가 됐다. 당시 노래자랑은 지금 우리가 아는 전국노래자랑과는 다른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월별 우승자를 뽑고 우승자끼리 다시 경쟁을 펼쳐 최종 승자를 뽑는 요즘으로 말하면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프로그램이다. 1972년에는 첫 앨범도 발매했다. 이렇다 할 경력도 없는 풋내기가 전국 단위 경쟁에서 우승한 데에는 학창시절 영향이 컸다고 윤희정은 기억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가진, 내가 보석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교를 막 졸업한 윤희정이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인천은 대중음악적 자양분이 풍부한 도시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인천을 빼놓을 수 없다.인천은 인천항 개항을 계기로 각국의 외교관, 선교사, 군인, 기술자, 상인, 선원 등을 통해 서양의 음악이 광범위하게 유입됐다. 특히 인천 부평의 미 군수 지원 사령부인 애스컴(ASCOM)을 통해 다양한 서구 음악 장르가 퍼져 나갔다. 애스컴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미군이 반드시 거쳤던 관문이었는데, 이곳에서 미군들이 머물다 동두천, 송탄, 평택 등으로 배치받았다. 애스컴에서는 젊은 미군이 좋아한 재즈와 팝 음악을 곧바로 들을 수 있었다. 최신 악기, 원판 LP 등을 부대 주변에서 구하기 쉬웠다. 부대 주변에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클럽이 많았는데, 국내 밴드와 가수들에게는 이들 무대가 자연스럽게 음악적 내공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50년대 말 애스컴 미군들이 좋아했던 여가수는 김시스터즈, 패티김, 리나박 등이었다고 한다. 인천 중구 신포동 일대에도 외국인 전용 클럽이 성업했다. 외국인 선원과 기술자들은 이곳에서 재즈, 블루스 같은 자신의 고향에서 즐겨 듣던 음악과 위스키, 맥주를 벗 삼아 향수를 달랬다. 인천에서 성장한 국민가수 송창식, 밴드 키보이스의 김홍탁·박상규, 사랑과 평화 이철호 등은 이들 클럽을 통해 전파된 팝송을 들으며 훗날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인천이 음악도시로 불리는 이유다.윤희정은 2년여의 전속가수 활동이 끝나고 결혼과 출산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가수 활동도 시들해졌다. 이후 노래가 하고 싶어 가스펠 가수로 활동하며 해외를 누비기도 했다. 가스펠 가수로 활동하던 어느 날 "재즈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한 기획사 관계자 제안에 따라 우리나라 재즈 연구자이자 작곡가인 이판근 선생을 만났다. 1992년 일이다. 1992년 해외 활동 중 재즈 가수 권유 받아1997년 '윤희정&프렌즈' 교육 형식 콘서트 진행100차례 진행 김건모 등 제자 되어 대중화 기여 "재즈를 배우러 갔는데, 들려주는 음악의 사운드가 '도'도 아니고 '미'도 아니고 '솔'도 아니고 이상해요. ~쉐 ~쉐 이래요. 음이 정확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게 왜 이러냐'고 물어봤더니. 그게 '블러싸운드'라고 그러더라고요. 아지랑이 같은 소리였죠. '도'도 아니고 '레'도 아니고 '미 플랫'이었을까. 쉥쉥 하는 소리가 참 묘하다고 생각했죠."윤희정은 "이 음악을 하면 성공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음악을 하니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이판근 선생은 "왜 재즈를 하려 하느냐, 재즈를 배우는 것은 거적을 뒤집어쓰는 일이다. 너무나 큰 고생이다"라며 만류했지만, 윤희정은 재즈 공부를 시작했다. 야단도 맞았고, 숙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다이아몬드를 팔려면 깎아내고 또 깎아내야 제대로 되잖아요. "어렵고 힘들지만 해 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가진, 내가 보석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이아몬드를 팔려면 어마어마하게 많이 깎아내고 또 깎아내야 제대로 된 보석으로 다듬어지잖아요." 윤희정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즈의 얼굴이 된 데는 '윤희정&프렌즈' 공연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97년 한 극장 관계자가 먼저 제안했고 윤희정이 수락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이들을 무대에 세우기로 기획했다. 자신도 재즈를 배우는 입장이면서 '셀럽'을 가르쳐 함께 무대에 서는 교육 형식의 콘서트였다. 결과는 대성공. 그렇게 1997년부터 2011년까지 100차례 공연했다. 김건모, 박경림, 남경주, 홍사덕, 송일국 등 200여 명이 제자가 되어 윤희정과 함께 재즈를 퍼뜨렸다.그의 재즈 인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6일에는 경기도 양평에 있는 '카포레' 컨벤션홀에서 자신의 딸 '쏘머즈'(싱어송라이터), 'CEOJ Band' 등과 함께 무대에 선다.윤희정은 자신의 음악적 성공을 인천에서 찾았다. 그는 "인천은 내가 태어난 곳이다. 내게는 근원적인 뿌리"라며 "그 인천이 준 자양분을 먹고 살았으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고 했다. ■이야기플러스|윤희정을 가수로 만든 '싱얼롱Y'1960년대 젊음의 혈기 발산처 전국 유행 음악교육 프로그램 '싱얼롱 Y'는 YMCA가 1963년부터 선보인 음악 교육 프로그램이다.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한 전석환 작곡가가 '젊은이들이 음악을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 함께 부를 노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제안해 시작된 행사다.1회 행사의 이름은 '싱얼롱 with YMCA'였는데, 시간이 지나며 '싱얼롱-Y'로 바꿨다. Y는 YMCA, 젊음·청년(youth), 그리고 당신(you) 등을 뜻하는 의미로 쓰였다.1963년 4월 서울 종로에 있는 YMCA '친교실'에서 첫 행사가 열렸다. 연세대 음대에서 공부하고, 주한 미8군 장교클럽에서 활동한 전석환 작곡가가 매주 토요일 전자오르간과 통기타를 들고 직접 진행했다. 고(故) 박상규 등 인천 출신 뮤지션 3인으로 구성된 '코코넛 트리오'가 옆에서 도왔다. 전석환이 채보·편곡한 악보와 가사를 나눠주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동요와 미국 노래, 민요 등을 가르쳤다. 간단한 율동도 소개했다.1회 행사 참석자는 13명에 불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교실이 비좁아 '서울YMCA 강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3개월 만에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을 가득 메웠다. 입소문이 나자 오전부터 줄을 서는 일이 벌어졌고, 행사를 매주 2차례로 늘리자는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1963년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전석환을 출연시켜 같은 형식의 '다함께 노래하자'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KBS는 1964년 라디오 프로그램 '3천만의 합창', 1965년 TV 프로그램 '노래의 메아리'를 신설하기도 했다.싱얼롱-Y는 1965년 군산을 시작으로 인천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인천YMCA는 당시 '공보관'에서 전석환의 후배가 행사를 진행했다. 인천 출신 재즈 가수 윤희정도 중학교 재학 시절 1년 동안 행사에 참여하며 노래와 기타를 배웠다. 윤희정 1집(1972년)에는 전석환 작사·작곡 '버들피리'가 수록돼 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재즈가수 윤희정.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 출신 재즈 가수 윤희정.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윤희정이 일반인에게 재즈를 가르치고 무대에 세우는 공연 '재즈 프렌즈 파티'의 공연 모습. 2013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윤희정 제공인천 출신 재즈 가수 윤희정.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윤희정&프렌즈' 공연 무대에 선 윤희정과 배우 이하늬. 윤희정은 이 공연에서 가수, 배우, 법조인, 정치인 등 유명인에게 재즈를 가르치고 함께 노래했다. 윤희정을 스타로 만들며 재즈를 대중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7년 첫 공연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100차례 이어졌다. /윤희정 제공윤희정과 딸 쏘머즈1960~1970년대 '싱얼롱 Y'로 전국에 싱얼롱·통기타 열풍을 일으킨 작곡가 전석환.
사흘간 의정연수 과정 '술판'일부 부적절 신체 접촉 정황추행혐의 민주 시의원 '탈당'부천시의회가 '의원 합동 의정연수' 과정에서 만찬을 빙자한 '술판'을 벌인 것으로 드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앞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의힘 여성의원들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에 고소(5월23일자 8면 보도=부천시의회 국힘 여성의원들 '민주 의원 성추행' 고소장)된 가운데 의원들의 '과도한 음주'가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시의회를 향한 시민들의 비판이 들끓는 양상이다.게다가 해당 시의원이 민주당을 자진 탈당했지만,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의원직 사퇴 등 추가 징계를 요구하고 나서며 파문이 확산될 전망이다.23일 부천시의회 및 정치권 등에 따르면 의원들은 지난 9~11일 사흘간 전남 진도, 목포, 순천 등에서 의정연수를 가졌다. 연수 첫날인 9일과 10일 만찬에는 수차례 술잔이 오갔고, 남성의원의 성추행 및 성희롱 발언이 불거지는 등 '말썽'이 났다. 이 같은 모습은 10일 만찬이 진행된 전남 순천의 한 식당 폐쇄회로(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확보된 9분58초 분량의 영상을 보면, 연수에 참가한 의원들은 연수 참가자들과 함께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부딪치며 단체로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춤을 추는 듯한 장면도 수차례 연출됐다. 이들의 만찬 테이블 위에는 적잖은 술병도 놓여 있었다.이 과정에서 여성의원을 향한 민주당 A 의원의 부적절한 신체접촉 장면도 포착됐다. 술에 취해 몸을 휘청이던 A 의원은 자신의 주변에 있던 여성의원의 볼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자리를 이동해 구석에 자리한 국민의힘 여성의원과 시의회 직원의 목 등을 팔로 끌어안기도 했다. 의원 25명과 의회 직원 21명 등 총 46명이 참여한 이번 의정연수에는 예산 3천400만원이 쓰였다.한편 민주당 경기도당은 의혹을 받고 있는 부천시의회 A 의원이 탈당했다고 밝혔다. 앞서 민주당 도당은 전날 "부천시의원 성추행 의혹에 대해 바로 자체 조사를 실시해 진상을 파악하고, 사실일 경우 엄격한 잣대로 최고 수위로 징계할 것"이라고 밝히며 진상 조사에 나선다고 경고한 바 있다.부천시 여성총연합회는 이날 부천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을 탈당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무소속 시의원을 강력 규탄한다"고 했고, 국민의힘 경기도당도 성명서를 통해 "이번 성추행 사건을 강력 규탄하며, 사건 혐의 의원의 즉각적인 의원직 사퇴를 촉구한다"고 압박했다.성추행 피해 의원들은 같은 날 경기도의회 국민의힘 대표단을 찾아 피해 상황과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곽미숙 대표는 "이번 사안은 단순히 부천시의회만의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되며 지방의원을 떠나 여성 전체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며 "국민의힘 여성 지방의원들의 집단 규탄 등 단합된 대응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연태·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CCTV 영상 캡처
수원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우회전을 하던 시내버스에 치인 초등학생 A군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가운데(5월10일자 인터넷보도='우회전 위반' 시내버스에 깔린 수원 초등학생 숨져)한 시민이 사고 현장에 A군을 추모하는 시민들이 놓고 간 꽃과 과자 등을 치우는 등 난동을 부려 경찰이 출동했다.11일 수원서부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낮 12시께 전날 사고가 난 수원 호매실동의 한 횡단보도 옆에서 B(30대·여)씨가 소동을 부리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지구대로 임의동행됐다.B씨는 30여분간 하늘로 떠난 A군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하나둘 놓고 간 과자와 꽃, 추모 편지 등을 찢거나 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다. B씨는 A군의 가족은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B씨가 정신 병력이 있는지 등을 조사 중이다.한편 수원서부서는 전날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어린이 보호구역 치사) 혐의로 시내버스 운전자 C(50대)씨를 입건했다. C씨는 스쿨존에서 시내버스를 몰고 우회전을 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던 초등학생 A군을 친 혐의를 받고 있다./이상훈·조수현기자 sh2018@kyeongin.com11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의 한 사거리에 전날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시내버스에 치여 숨진 초등학생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023.5.11 /박소연기자 parksy@kyeongin.com
'성공한 공직자 윤대희'를 만든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몇 차례 만나고 그를 알아갈수록 장관에 오르기 전까지의 공직 이력보다 그 후 민간 경력이 그를 온전히 더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09년부터 우창록 법무법인 율촌 명예회장과 함께 대한민국 교육봉사단 '씨드스쿨'의 오랜 후원자로 서 있다. 씨드스쿨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자존감 향상, 재능 계발, 진로 탐색을 돕는 대학생 일대일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그는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전직 경제 관료 모임 '재경회'가 2011년 공동 기획한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코리안 미러클' 1~7기 편찬위원으로 지금까지 활동한다. 경제 관료와 언론인, 전문가 증언을 남긴 기록물로 이들의 성공과 실패, 갈등과 고뇌의 경험이 흥미진진하다.그는 한국의 경제 성장 경험을 주변 국가에 전하는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Knowledge Sharing Program)에도 수석 고문으로 참여했다.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지역 개발도상국을 돌며 한국의 경제 성장 경험과 사례를 공유했다. 이처럼 가난의 대물림을 끊고, 기록을 남기고, 유용한 경험을 전파하고 나누는 역할에서 그는 장관의 경력보다 더욱 큰 보람과 명예를 느낀다. 탁월한 조정자로서 기질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그의 유년 기억은 인천 숭의동 115번지 허름한 초가집에서 시작된다.나 어릴적 숭의동은 용광로 같은 동네였어요.계층 가리지 않고 모두 섞여 돕고 도왔죠.윤 전 장관은 1949년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 동네는 1980년 구획정리사업으로 숭의동 83의 17로 지번이 바뀌었는데, 현 극동아파트 북측이다. 부모님은 충북 괴산 출신으로 '오로지 자녀 교육'을 위해 1938년께 네 살배기 장남과 두 살 된 딸을 등에 업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인천으로 이주했다. 물려받거나 모은 재산도, 배운 기술도 없어 닥치는 대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윤 전 장관이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떡 장사로 자녀들을 키웠다. 숭의동은 주민이 출신, 직업, 계층을 가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섞이는 용광로와 같은 동네였다.6·25 한국동란 때 피난민 있던 동네아이들은 중국인 묘지서 '보물찾기'떡 팔아 홀로 자녀 키우신 어머니매일 하시던 말 "공꼬 좋아하지 말라"'공짜 경계론' 자리잡게 된 가르침"부모님은 충청도에서 올라오셨고, 6·25 한국동란 때 이북에서 피난 오신 분이 많았어요. 물론 인천 토박이도 있었고. 이웃끼리 담장 없이 다 터놓고 김장 같이하고, 동네 어른들이 모여 바둑과 장기 두면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배우고, 어려운 일 있으면 서로 도와주는 일종의 '멜팅 폿'(melting pot)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풍경이죠."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숭의동은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인천의 벽촌(僻村)이었다. 모두 가난했지만 누구나 힘껏 일하고 자녀 교육에 힘을 쏟으면 삶이 조금 더 윤택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던 시절이었다. 윤 전 장관보다 14살 위인 큰형은 하와이 이민자들이 용현동에 세운 인하공대 2기생으로 입학했다. '동네 1호 대학생'이었다. 당시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 "동네 좀 벗어나서 놀자, 그러면 낙섬에 갔어요. 갯벌에서 망둥어(망둑어) 낚시를 하고 게를 잡고. 염전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거기서 수영을 배웠죠. 어떻게 보면 우리 어릴 때 헬스클럽 같은 곳이었어요." 미추홀구 용현동은 지금과 달리 1950~60년대에는 육지 끄트머리 소금밭이었다. 뭍에서 육안으로도 보인 작은 섬 '낙섬'은 1929년 조선염업주식회사가 그 일대 바다를 염전으로 개발하면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염전에 물을 대는 저수지는 인근 용현초, 숭의초 아이들의 물놀이터였다. 낙섬 염전은 1966년 소금 생산을 멈췄고, 공기업 토지금고(현 LH)가 1976년 폐염전을 사들이고 용현지구 주택단지 조성사업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제물포역 주변 도화동 현 인천대 제물포캠퍼스 자리(부채산)는 화교 집단 거주지였다. 화교가 재배하는 토마토, 가지 등 작물은 숭의동 아이들의 먹잇감이었다. "몰래 서리하고 막 도망가는 장면이 커서도 가끔 꿈에 나올 정도"로 오래 기억에 남은 공간이다. 이국적 풍경의 거리와 중국인 묘지를 아이들은 놀이터로 삼아 매일같이 오갔다. '무덤에서 보물찾기'에 나선 숭의동 10대 청소년이 묘를 허물고 관 뚜껑을 열어보다 놀라 도망가서 경찰 수사까지 이어진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중국인 묘지의 운명은 기구했다. 성광학원을 인수한 선인학원의 교세 확장에 밀려 만수동으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서 육군 장성 출신 백인엽(1923~2013)씨가 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버려 외교 문제로 비화된 적이 있다. 만수동 묘지 역시 도시 재정비 사업에 밀려 1990년대 부평가족공원으로 이전됐다.어머니는 당시 여느 부모처럼 자녀의 '외적 성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내적 성장'도 강조했는데 그게 '공짜 경계론'으로 이어졌다."어머니가 방앗간 비슷하게 떡 도매를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공꼬(공짜의 사투리) 좋아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어요. 대학 시절 이를 'windfall profit'(횡재)이라는 표현으로 바꿔 지금껏 경계 대상 1호로 삼고 있어요. 그간 여러 인사 검증을 별 탈 없이 통과하고 제겐 과분한 자리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의 '조기 교육' 덕분이라고 할 수 있죠."'야구'를 빼놓고 윤대희라는 인물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구도(球都) 인천'에서 시작된 야구와의 인연은 단지 취미 활동에 그치지 않고 그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숭의초등학교 야구부에서 처음 글러브를 잡은 이후 어느 자리에 가서도 야구와 연결된 끈을 놓지 않았다."1945년 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고 제일 먼저 미군이 들어온 데가 인천입니다. 이 사람들이 인천에 야구 장비를 엄청나게 뿌려댔어요. 거의 모든 초·중·고 각 학교에 배트와 글러브가 보급됐어요. 그래서 초중고교 야구대회가 끊임없이 열렸습니다."식민지 끝나고 미군 가장 먼저 들어온 인천'구도 인천' 야구 인연은 서울대 가서도 계속"부럽더라"… 어머니 한탄에 공직 입문1998년 주 제네바 대표부 참사관 부임 등통상 협상 테이블서 국가 간 이해관계 조정 역할훗날 청와대 수석 한미FTA 협상 주도 자산으로인천의 야구 실력은 전국 무대에서 입증됐다. 1950년대 동산고와 인천고 야구부는 최강 실력으로 맞선 라이벌이었다. 1953~1954년 청룡기 2연패의 인천고는 1955년 대회 결승에서 동산고와 맞붙었다. 용호상박 결전에서 12회말 접전 끝에 동산고가 우승했다. 당시 인천 야구팬 중 동산고를 비난하는 이가 많았다. 3연속 우승팀은 청룡기를 '영구 보존'할 수 있었는데, 같은 인천팀인 동산고가 인정머리 없이 그 꿈을 가로막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동산고는 1955~57년 청룡기를 내리 석권하면서 청룡기 영구 보존의 꿈을 이뤄냈다.윤 전 장관은 서울대 상대 야구부 활동을 거쳐 경제기획원 재직 시절 야구부 '돌핀스'에서 창단 멤버, 주장으로 뛰었고 감독까지 맡았다. 그는 야구에서 "개인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팀워크가 안 되면 결코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체화했다. 조화, 균형, 협력의 틀에서 적재적소의 자원 배치를 통해 성과를 내는 리더의 자질을 갖추는 데 그의 오랜 야구 사랑이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윤 전 장관은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이후 '한국사회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 재학 시절 내내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글을 쓰는 일에 열중했다. 고(故) 변형윤 교수 추천으로 서울은행(현 하나은행)에 입사했다. 서울은행 신용조사부 재직 중 "괴산 살 적에 고등고시에 합격해 보은군수로 내려온 아들을 둔 부모가 그렇게 부러웠다"는 어머니 한탄을 듣고 뒤늦게 고시 공부를 시작해 1975년 행정고시(17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공정거래위 하도급과장, 독점관리과장, 경제기획원 국제경제과장, 재정경제원 재정계획과장 등을 거친 뒤 1998년 주(駐) 제네바 대표부 참사관으로 부임해 3년간 일했고, 다자간 통상 협상 현장에서 국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훗날 청와대 수석으로 한미FTA 협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자산이 됐다.아침 10시 시작해 저녁 8시 끝나던 WTO 회의이어폰 끼고 있다가 한국 컴플레인 오면 즉각 반박했죠."WTO 협상이 워낙 벌어질 때니까, 정말 바빴어요. WTO는 모든 통상 협상의 가장 수준 높은 곳입니다. 회의가 아침 10시에 시작하면 길게는 저녁 8~9시까지 이어져요. 이어폰 끼고 각 나라 발표를 종일 들으면서 한국에 대한 무슨 컴플레인이라도 나오면 즉각 끼어들어 반박해야 했습니다. 일본은 여러 명 나와 있는데 우리는 제 밑에 과장, 사무관 이렇게 3명이 회의 열 몇 개를 들어가야 하니까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어요.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한미 FTA를 위해 제네바까지 갔는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한미 FTA 협상 당시 국내 여론은 찬반 양측이 첨예하게 맞섰다. 참여정부 지지층은 'FTA 반대'였는데 오히려 정부를 불신하는 쪽에서는 'FTA 찬성' 입장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개방이 성공할 수 없지만, 성공하려면 개방으로 가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정치인으로서 힘든 선택을 하고 정면돌파했다. 시중에 음모론이 퍼졌다. '참여정부는 한미 FTA 타결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고, 차기 대선에 유리하게 활용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윤 전 장관이 이 내용을 보고하자 노 대통령은 "일국의 대통령이 중요한 통상 협상을 정파에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윤 전 장관은 그때를 면구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했다.노무현 전 대통령 참여정부 시절FTA 반대의견 전했던 면구스러운 기억2001년 합계출산율 1.3 수치에 놀라저출산 보고서 만들어 정책토론회 개최'저출산 고령화' 대책의 토대… 여전히 책임감소관 아닌 현안 끄집어낸 일화 '유연성' 돋보여윤 전 장관은 '저출산 고령화' 의제를 처음 이끌어내기도 했다. 소관 업무가 아닌 현안을 끄집어내 정책 입안까지 이끄는 과정을 보면 공직자로서 책임감과 유연성이 돋보인다."2002년 재정경제부 국민생활국장이 돼 업무보고를 받는데 합계출산율이 1.3(2001년 기준)으로 돼 있길래 담당 사무관에서 '미스 프린트인 것 같으니 다시 한번 확인해 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어요.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누구도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 게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당혹스러웠어요. 저출산 보고서를 만들어 KDI(한국개발연구원)에 정책 토론회 개최를 요청했어요. 당시 담당이 UCLA 출신으로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이혜훈 박사였어요. 이게 대통령 주재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올라갔고 저출산 고령화 대책이 된 거예요. 그런데 이게 여전히 해결이 안 되고 출산율은 0.78까지 더욱 악화됐으니 이 정책과 관련된 한 사람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인천은 혼자 풀 수 없는 문제가 많아요.수도권쓰레기매립지, 광역교통망… 지자체 협조 있어야죠.윤 전 장관은 인천 현안을 비교적 잘 꿰고 있다. 공직자 시절 고향 인천의 변화에 늘 관심을 갖고 지냈고, 인천경제자유구역 지정 취지와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다. 그는 "인천 현안이 참 어려운 게 인천 혼자 풀 수 없는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수도권쓰레기매립지 종료, 광역교통망 개선 등 인천시가 오랜 시간 노력해 온 과제는 인접 지방자치단체의 협조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산업구조 개편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인천은 국내 전체 인구의 5.7%, 지역내총생산(GRDP)은 4.7%를 차지합니다. 1%p의 격차가 있는데, 한마디로 제 몫을 못 찾는 거에요. 인천만이 가질 수 있는 비교 우위의 산업을 찾아가는 연구를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정직은 하면서도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친구. -친구 김식만(치과 의사)씨윤 전 장관과 고교 재학 시절 단짝으로 함께 부산까지 무전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 김식만(치과 의사)씨는 친구를 이렇게 기억했다. "제가 1+1=2로 꽉 막힌 사람이었다면 윤대희는 정직은 하면서도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친구였어요. 제가 식물세포라면 그 친구는 동물세포로 볼 수 있죠. 숭의동 시절 깡시장 옆 철로를 걸어가면서도 책을 읽을 정도로 엄청난 노력가였지요. 3학년 때 국제실업 박정기 전무님 선화동 집 2층에서 그 집 아들 태현이와 대희, 저 이렇게 셋이 1년간 숙식하며 공부했는데 가장 늦게 잠들고 제일 먼저 일어나는 친구가 대희였습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을 떠나 50년 넘는 시간을 타지에서 지냈다. 그는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게 인천의 포용성"이라고 말했다. 또 제물포고 시절 배운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을 오랜 공직 생활 귀감으로 삼았다고 했다. 실제 제물포고 출신 공직자 중 '유감스러운 일'로 물러난 이들은 거의 없다는 게 윤 전 장관 자부심이었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윤대희 전 장관.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윤대희 전 장관(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경제개발경험 지식공유사업(KSP) 단장으로 아프리카 가나에서 활동하던 모습. /윤대희 전 장관 제공낙섬 염전.경제기획원(EPB) 야구부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선수가 윤대희 전 장관이고,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8번 선수는 정지택 전 KBO 총재다. /윤대희 전 장관 제공국무조정실장은 장관급으로 정책 조정 책임 장관이다. 장관에 임명된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윤대희 전 장관 제공1968년 제물포고 졸업사진. 사진 왼쪽부터 김진태 전 인천동산병원장, 윤대희 전 장관, 오희철 연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로 모두 천주교 메리놀외방전교회 도화동성당 남학생 센터 회원이었다. /윤대희 전 장관 제공
'4월 말 철쭉의 축제가 돌아왔다'.경기도의 봄꽃 축제로 자리매김한 군포 철쭉축제가 일찍 개화하면서 지난 주말 6만여명의 인파가 몰리는 등 인기를 실감했다.지난 22~23일 철쭉동산에는 말 그대로 사람과 꽃이 함께 어우러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코로나19로 멈췄던 축제가 4년 만에 다시 열리면서 전국에서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주말 가족과 함께 나온 김모씨는 "2019년 축제를 본 뒤 코로나19로 철쭉을 보지 못해 늘 아쉬웠다"면서 "올해 다시 철쭉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을 맞아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단체 관광으로 철쭉동산을 방문한 박모씨는 "대전에서 왔는데, 올해는 지구 온난화로 봄꽃들이 일찍 개화해 아쉬운 점도 많았다"면서 "모처럼 친구들과 철쭉을 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며 웃음을 지었다.군포 철쭉동산 인파 6만명 몰려28~30일 축제, 공연·먹거리 준비철쭉동산에는 약 30만 그루의 철쭉(자산홍, 영산홍, 산철쭉, 백철쭉)이 식재돼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철쭉꽃이 만개하는 장관을 연출해왔다. 하지만 올해는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1주일가량 앞서 개화했고, 시는 축제 개막에 앞서 지난 21일부터 축제 주간을 설정해 동산을 개방했다.시는 주말 이틀간 500여 명의 안전요원과 자원봉사자를 운영했다. 시·군포문화재단·군포도시공사 등 공무원을 비롯 군포경찰서, 모범운전자회, 해병대전우회 등의 협조를 구해 안전요원과 자원봉사자 등을 곳곳에 배치, 관람객 안전에 집중했다. 또 인근 학교장에 협조를 구해 주차공간 확보에도 정성을 쏟았다.철쭉축제 개막식 및 기존 행사(공연·전시·체험·먹거리 등)는 예정대로 28~30일 철쭉동산과 초막골생태공원 등에서 열린다.시는 안전을 고려해 오는 29일 오전 6시부터 30일 오후 8시까지 '8단지 사거리~철쭉동산~소방서사거리' 등 약 500m 구간의 도로를 통제할 계획이다.시 관계자는 "이번 주말에도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하는 만큼 안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군포/신창윤기자 shincy21@kyeongin.com군포 철쭉축제 주간행사가 지난 22~23일 열린 가운데 23일 철쭉동산에 철쭉이 활짝 피어 있다. 군포/신창윤기자 shincy21@kyeongin.com군포 철쭉축제 주간행사가 지난 22~23일 열린 가운데 23일 철쭉동산에 많은 관람객이 몰렸다. 2023.4.23 군포/신창윤기자 shincy21@kyeongin.com
경기도 내 전통주 업계 관계자들이 경기도의회에 모여 전통주 산업 발전을 통한 쌀 소비 촉진 방안을 모색했다.경기도의회 국민의힘은 19일 도의회 대회의실에서 '경기도 쌀 소비 촉진을 위한 전통주 산업 관계자 간담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전통주 업계 관계자들은 간담회에서 ▲전통주 가치에 대한 전 도민적 이해 향상과 주류 다양성 문화 형성을 위한 스토리텔링 마케팅 지원 ▲전통주 주세 감면 혜택 범위 확대 ▲경기도 전통주 판매장 설치 등 판매채널 확대 지원 ▲경기도 쌀(경기미) 사용 확대를 위한 차액 지원 등 도내 전통주 산업의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적 지원 필요성에 목소리를 냈다.이날 도내 30여 개 전통주 생산·유통업체 관계자들이 참여한 간담회에는 곽미숙 도의회 국민의힘 대표의원, 지미연(용인6) 수석대변인, 고준호(파주1) 정책위원장, 김성수(하남2) 기획수석, 윤충식(포천1)·김도훈(비례) 부대표, 심홍순(고양11) 정책위 부위원장 등이 참석해 전통주 산업 관계자들의 생생한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최영은 씨막걸리 대표는 "만약 막걸리 1병에 2만원이라면 소비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문화나 인식의 전환을 위해 각 전통주가 가진 스토리와 가치를 알릴 채널이나 기회를 경기도에서 만들어줬으면 한다"며 "프랑스는 지역 차원에서 와인과 관련된 스토리를 생산해 세계적으로 그 술의 가치가 인정되도록 하고 있는데, 벤치마킹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이어 홍원섭 크레치코 실장은 "전통주 산업 강화를 거시적으로 보자면 소비자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주세 개선이 필요하다"며 "100t 이상 생산하면 주세 감면 혜택이 줄고, 250t 이상 생산은 아예 혜택을 받을 수 없는데, 이러한 구조는 마치 전통주 산업은 '250t까지만 성장하라'는 의미처럼 해석된다"고 짚었다.국민의힘은 이번 간담회에서 제기된 의견들을 취합해 경기도 차원의 정책적 지원책을 마련할 예정이다. 아울러 전통주 산업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규제 완화 및 법 개정사항에 대해서는 국회와 각 정부 부처에도 촉구할 계획이다.곽미숙 대표는 "세월로 빚어진 전통주 업계 관계자들의 소중한 목소리들을 바탕으로 정책적 지원 방향을 설정하겠다"며 "전통주의 시장점유율이 확대된다면 국가적 문제로 떠오른 '쌀 소비' 문제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명종원기자 light@kyeongin.com곽미숙 경기도의회 국민의힘 대표의원이 19일 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경기도 쌀 소비 촉진을 위한 전통주 산업 관계자 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경기도의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