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스토리] '도시재생' 변화의 바람부는 인천·경기지역 마을

생기잃은 마을 한켠에 심은 '예술꽃씨 한줌'

김성호·민정주 기자

발행일 2016-04-29 제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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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 스토리 구도심지역 오래된거리 숭의목공예마을
인천 남구 숭의목공소 거리.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값싼 가구 밀려들어 설자리 잃은 '목공소'
'도시개발사업 참여' 발벗고 나선 지자체
환경 개선·DIY 열풍 주도… 활기 되찾아

기지촌 밤문화만 살아있던 '체념의 도시'
예술창작공간 등 주민 공동체 가치 살려
골목 벽화·로데오 꽃길… 얼굴엔 웃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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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며 번성하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쇠락하는 마을이 있다. 마을의 쇠락을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치부하며 외면하고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곳에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맞물려 무너진 공동체를 회복하고 사람들이 떠나는 쇠락한 마을을 살리려는 '도시재생', '마을 살리기'의 움직임이 전국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중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인천 남구 '숭의목공예마을'과 평택 안정리 마을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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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목공예센터. /인천 남구 제공

#인천 남구 숭의목공예마을

경인전철 도원역과 제물포 사이에는 가구나 나무로 된 소품을 만드는 목공소 10여곳이 밀집해 있는 '숭의목공예마을'이 있다.

인천에서 거의 유일하게 목공소가 밀집해 있는 곳이다.이곳은 불과 20~30년 이전만 하더라도 지역의 명소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저마다 집에서 사용할 가구와 집을 꾸밀 재료와 소품들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19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목공소의 수는 지금의 2배는 족히 넘었다. 이곳의 작업시설로는 모자라 다른 곳에 작업장을 갖추고 영업을 하던 목공소들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값싼 목재가 밀려 들어오고 값싼 가구가 공장에서 생산되며 목공소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줄었다. 일거리가 없어진 목공소들은 직원을 줄이고 외부 작업장을 없애면서 버텨봤지만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마을이 조금씩 활기를 찾으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학생과 젊은이들, DIY 열풍에 따라 목공소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는 지자체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됐다. 남구는 지금 인천에서도 대표적인 구도심이다. 지난 1988년에 남동구, 1995년 연수구가 남구에서 떨어져 나와 분구되며 기존 남구는 성장 동력을 잃고 세수도 줄었다. 돌파구를 찾던 남구는 지난 2012년 목공예 거리에 주목, '숭의목공예마을' 만들기에 나섰다.

목공예수업
목공예수업 모습. /인천 남구 제공

우선 2012년 정부가 공모하는 '도시활력증진지역개발사업'에 참여해 예산을 확보하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실천하기 시작했다.2013년에는 창작공방을 만들어 목공예를 중심으로 다양한 교육 사업을 벌였다. 이 마을에 사람들이 찾게끔 목공예 저변을 넓히기 위한 취지였다.

2014년에는 관과 상인들이 소통·협력할 수 있는 협의체인 숭의 목공예마을 협동조합이 설립된다.

조합원들은 우선 마을 환경 개선에 나섰다. 할머니들의 그림 그리기 대회를 열어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우체통도 예쁘게 고쳐주고, 쓰레기가 넘쳐나던 공터에 텃밭을 만들어 주민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상인과 마을 주민과의 유대 관계가 깊어진 지금은 조합 상인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집을 고쳐주는 봉사활동도 일상화돼있다.

지난해에는 '목공예센터'가 문을 열었다. 어지간한 가구 설계부터 제작까지 모든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교육 장소로 오전·오후·저녁으로 강의가 꾸준히 열리고 있다. 창작공방과 목공예센터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강사로 활동하거나, 목공예 동호인이 되어 이곳 목공예마을을 찾고 있다.

이태익 남구청 교육지원팀장은 "일거리가 없어 오후 6시면 문을 닫았을 목공소들이 지금은 일거리가 많아져 밤에도 작업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아르바이트를 고용하는 업소도 생겨나고 있다"며 "사업 초기이던 2013년과 비교하면 업소 매출이 몰라보게 증가할 정도로 마을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고 말했다.

박성화 숭의 목공예마을 협동조합 이사장은 "끝없는 침체 속에서 서로 경쟁하던 이들이 이제는 서로 협력하며 함께 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며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변화를 준비해 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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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안정리 마을마토예술제. /경기문화재단 제공

#평택 안정리 마을

안정리 마을에 꽃이 피었다. 골목마다 '설악초'가 벽화로 피었고, 로데오 거리에는 꽃길이 열렸고, 주민들은 가드닝 콘테스트를 치르고, 그래서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고, 저마다의 마음 한 켠에 꽃씨가 심어졌다.

꽃 피기 전 안정리의 겨울은 혹독하고 길었다. 안정리라는 이름보다는, 마을이라기보다는, '기지촌'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 스스로 이를 인정했다. 마을을 체념했다.

평택 안정리에는 일본 강점기에 공군 활주로가 들어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미군 주둔기지가 자리 잡았다.

1970~1980년대는 유흥업과 미제 유통업으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지만, 이후 상권은 쇠락했고 주거환경은 노후했다. 거주민보다 이주민이 10배 많아졌고, 뉴타운 추진 과정에서 주민들의 갈등은 고조됐다.

경기문화재단은 지난 2013년 평택시청의 의뢰를 받아 '안정리 마을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역문화 교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이 프로젝트는 3년 동안 진행됐다. 그간 팽성예술창작공간 '아트캠프'를 운영하며 주민커뮤니티를 활성화하고, 마을축제, 마을자산 발굴 및 브랜드 개발, 마을환경 개선 작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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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센터 도자수업 모습. /경기문화재단 제공

마침 2017년에는 안정리를 비롯한 평택 일대에 통합 미군기지가 조성된다. 이는 안정리 주민들에게 경제 및 공동체 활성화에 대한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여겨졌고, 주민들은 그 미래를 스스로 준비해가고자 했다.

2013년에는 '마토예술제', '코스튬플레이페스티벌' 등 축제를 통한 문화교류에 주력했다.

마을 축제로서 마토예술제는 지역민, 외국인들과 경기지역 일원에서 온 셀러들이 평소 제작한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프리마켓과 문화체험프로그램, 다문화 푸드코트, 문화예술 공연이 결합된 형태로 진행됐다. 2015년에는 프로그램과 공연·전시의 비중을 늘려 문화행사로 자리잡았다.

2014년에는 옛 '팽성보건지소'를 리모델링해 예술창작공간 '아트캠프'를 개관했다. 아트캠프는 주민과 미군 가족들의 교류 및 주민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공간이다.

'쿠킹클래스','시니어들의 카페', '안정리 브랜드 제작소', '수상한 의상실', '오픈 갤러리', '연습실' 등으로 공간을 구성해 교류 및 체험 프로그램 중심으로 운영됐다.

'쿠킹클래스'는 아트캠프 초창기 미군 가족과 주민들의 활동을 증진시킨 아트캠프의 핵심 사업이다. 한국요리에 관심이 많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수준 있는 한국의 음식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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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의상실. /경기문화재단 제공

부엌을 개조해 만든 '수상한 의상실'은 중국, 대만, 독일, 미국, 필리핀 등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이 참여하며 특히 인기가 높았다. 바느질은 여성들의 규방 문화를 체험하고 교감할 수 있는 매체이자 장치였다.

또한, 파일럿 프로그램을 통해 선호 분야를 선정하고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한 사람들 중심으로 활동을 기획했다.

이밖에 상설전시장(생활사박물관) 건립을 목적으로 2014년부터 '안정리 사람들'프로젝트를 진행해 주민 구술, 소장 자료, 기증 유물 발굴 및 수집을 통해 다큐멘터리 영상작업을 진행하고 전시를 열거나, 골목환경 개선사업을 하며 공동체의 가치를 느끼는 시간을 갖는 등 다양한 활동이 벌어졌다.

팽성아트캠프 감독 조지연(경기문화재단 문화재생팀)씨는 "안정리 문화재생사업은 기지촌의 밤 문화만 있던 안정리에 주민들의 창의성으로 빛나는 아침과 오후를 만드는 등 작지 않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며 "작은 회의, 소규모의 프로그램을 통해 시작된 활동은 점차 지역사회라는 공통적인 관심사 속에서 함께 안정리를 고민하고 공적인 활동으로 확장돼 갔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안정리가 겪은 문화적 경험이고 큰 이슈이자 변화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김성호·민정주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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