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뿌리를 찾다·5]언론 통폐합(하) - 뒤범벅 편집국

인천 분사체제 운영… 혼란속 높아진 위상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13-08-16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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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사 출신 '연합체계' 구축
기자들 영전과 좌천 뒤엉켜
공화당 출신 논설위원 오점


1973년 9월 1일자로 창간호를 낸 경기신문의 초기 편집국은 경기매일신문, 연합신문, 경기일보 출신 기자들이 뒤범벅된 형태였다. 인천은 지사·분실이 아닌 분사(分社)로 운영돼 그 위상이 높았다. ┃관련기사 3면

경기신문 초대 편집국장은 조창환(趙昌煥)으로 경기일보 편집부국장(1966~69) 출신이었다. '신문사의 꽃'이라 불리는 편집국장 자리를 경기일보측에서 맡은 것이다.

편집부국장 오광철(吳光哲) 역시 경기일보에서 왔다. 경기일보 출신의 편집부국장 이벽(李闢)에 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인천언론사'는 경기신문 창간과 함께 언론계를 떠났다고 했는데, '전국언론인방명록'에는 경기신문으로 이적한 것으로 돼 있다.

외근 기자들에게 취재를 지시하는 데스크는 연합신문 출신으로 채워졌다.

정경부장 이진영(李鎭榮)은 연합신문 사회부차장이었고, 사회부장 공석으로 데스크 역할을 했을 사회부 차장 김화양(金和洋)은 연합신문 평택주재기자였다.

편집국에서 인천은 분사 형태로 운영됐다. 서울지사·의정부지사보다 격이 높았다. 인천분사장은 박채근(朴彩根)으로 1980년대 경인일보 사장을 지낸 박상복 동양석유주식회사 회장의 부친이다.

인천분사 편집책임자는 경기매일 편집국장을 지낸 김형희(金亨熙)였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기자 수는 15명으로 수원 본사의 기자(데스크 포함) 12명보다 많았다.

출신 신문사별로 경기매일 4명, 연합신문 6명, 경기일보 5명으로 구성됐다.

이처럼 경기신문 편집국은 경기매일, 연합신문, 경기일보 3사의 '연합 체제'로 출발했다.

경기신문 출범 인사에서 영전한 이도 있지만 좌천된 기자들도 있었다. 각기 다른 3개사가 모여 '연합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혼란도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권에 의한 통폐합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신문은 언론사로서는 보여선 안 될 모습까지도 나타난다.

'신문사의 눈'인 사설을 쓰는 논설위원에 당시 공화당 출신 인사를 앉힌 건 치명적 오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논설위원 김진동(金晋東)은 수원의 7선 국회의원 이병희(李秉禧)의 보좌관을 지낸 인물이었다.

이병희는 육사8기,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을 지낸 뒤 정계에 진출한 유력 정치인이었다.

이병희는 연합신문의 전신인 경기연합일보가 1969년 새 경영진을 짤 때 배후에서 역할을 했고, 당시 김진동이 '경기연합일보 인수팀'에 속해 실무를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편집국 아래 '특집부'라는 직제가 존재했는데, 이 특집부장은 각 군·구의 '보완취재'와 '광고업무'를 병행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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