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뿌리를 찾다·5]떠난자와 남은자들

통합주도 연합신문 출신 기자 가장 많아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13-08-16 제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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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엔 경기매일·경기일보측 기자 스카우트 방식
언론계 떠난 인사들 공기업·대학교등 새둥지 틀어
업무·광고·윤전부 직원들 대다수 직장잃는 아픔도


1973년 출범한 경기신문은 서로 다른 '유전자'를 지닌 신문사의 구성원들이 한데 모여 구성됐다.

통합을 주도한 연합신문 출신 기자들의 수가 가장 많았지만,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에서 온 기자들은 각 포지션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3사 통합 이후에도 언론계에 남은 이들이 있지만, 떠난 이들도 상당수였다. 1972~1973년 전국언론인방명록을 기준으로 보면, 최소한 100명 이상이 직장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기매일·경기일보의 업무·광고·출판·보급·윤전부 직원 대다수는 한순간에 실직자 신세가 됐다.

초기 편집국 구성은 연합신문쪽에서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측 기자들을 '스카우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경기매일 정치부 차장이었던 우성균(禹聖均)은 정경부 기자로 이동했고, 경기일보 경제부 기자였던 정용준(鄭用準)은 경기신문 편집부 기자로 옮겼다.

인천분사는 주재기자 명단에 3개 신문사 출신이 고루 분포됐다. 모두가 인천에서 취재 경력이 있는 기자들로 구성됐다.

경기매일에서는 전중열(全仲烈·전 정치부장), 최인재(崔寅載·전 취재부 차장), 장용석(張容碩·전 지방부 기자), 최성양(崔成洋·전 지방부 기자) 등 4명이 채용됐다. 경기일보에서는 정진철(鄭鎭哲·전 정치부장), 김창수(金昌洙·전 사회1부장), 장사인(張師仁·전 사회1부차장), 최용균(崔勇均·전 사회2부차장)이 경기신문에 들어갔다.

통합 전 연합신문 인천주재기자 9명 중 손병균(孫炳均), 최만석(崔萬錫), 이용기(李用起), 정명수(鄭明水), 김지선(金知善), 박근원(朴根源) 등 6명이 인천분사 주재로 인사가 났다.

직위가 국장·부장·차장에서 부장·기자로 '강등 인사'가 난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전 국장기자', '전 부장기자'라는 호칭이 있었다고 한다.

3사 통합으로 직장을 잃은 이들은 큰 혼란을 겪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몸담은 언론계를 떠나 다른 직장을 찾아야했다.

인천상공회의소가 열흘에 한 번씩 발행한 순간(旬刊) 인천상의보에 기자들 여럿이 입사했다.

경기매일신문에서 편집부국장 오종원(吳鍾元), 기자 조재학(趙載學) 등이 인천상의 홍보팀에 들어갔고, 경기신문에서 일하던 정진철(鄭鎭哲), 김경하(金景夏)가 훗날 합류했다.

1975년에 주간지인 경기교육신보가 창간됐는데 경기일보 사회2부장 출신이던 서강훈(徐康勳·현 기호일보 회장)이 주축이 됐다.

이밖에도 언론계를 떠난 기자들은 공기업, 대학교, 새마을운동중앙회, 건설회사 등에 새둥지를 틀었다.

경기매일과 경기일보 업무쪽 직원들은 대부분 흩어졌다. 경기신문의 업무국·공무국 직원들 대부분이 연합신문 출신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경기매일·경기일보의 창간 주역들과 주주들 역시 언론계에서 퇴장했다.

경기매일 발행인 송수안은 자녀들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경기일보 부사장이었던 김응태는 인하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경기매일과 경기일보의 주주들은 경기신문에 합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신문 창간 당시 업무국장을 지낸 임상규(79) 전 경인일보 사장은 "3개 신문사의 자본, 부채, 신문부수를 고려해 연합신문이 67%, 나머지 2개사가 33%의 지분으로 참여를 하려 했는데, 경기매일·경기일보 주주들이 투자를 포기해 연합신문쪽이 100% 지분참여를 해 경기신문을 창간했다"고 전했다.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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