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뿌리를 찾다·6]아픔을 딛고(상) - 통합 후 1970년대

유신의 상처 '지역밀착 취재'로 승화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13-08-19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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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언론의 인천편재 시대
무뎌진 정부비판 '박통 뉴스'
사회 어두운 이면 보도 충실


1973년 9월 경기신문 출범으로 경기·인천 언론은 그 외연을 확장했다. 경기신문은 인천이라는 중심점에서 부챗살처럼 방사상으로 경기도 전역에 퍼지게 된다.

경기언론의 뿌리는 인천이었고, 인천에 본사를 둔 언론사들은 경기도 전역을 취재권역으로 삼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산업화 이후 확대 일로에 있던 경기도 전역을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이 담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이 1967년 수원으로 이전한 뒤에는 도시 지향의 '이촌향도 현상'과 '서울 교외 도시의 확장'이 더욱 가속화됐지만, 이러한 추세에 부응하는 취재시스템은 갖춰지지 않았다. 당시 인천 언론계의 원로조차 '경기 언론의 인천 편재성'을 지적할 정도였다.
┃관련기사 3면

'자율 형식으로 포장된 강제 통합'으로 태어난 경기신문의 한계도 분명했지만, 그 한계가 경기신문만의 것은 아니었다.

통합 이전과 이후의 편집방향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게 당시 일했던 기자들의 중론이다.

1966년 경기일보 창간 당시 공채 1기 기자로 입사했다가, 경기신문으로 옮긴 김창수(75) 인천언론인클럽 부회장은 "통합 이전의 (경기매일·연합신문·경기일보) 1면은 다 비슷비슷했고, (경기신문 통합)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했다.

   
▲ 1970년대 경기신문은 '지역성 강화'에 주력했다. 인천을 비롯한 경기도 전역의 소식을 고루 전하면서, 역사와 인물을 발굴해 기록하는 일에도 힘썼다. 사진은 경기신문이 1977년 초 발간된 '한국신문연감'에 낸 광고사진.
실제 경기매일은 통합을 앞두고 낸 지령 9천호 특집(1973년 8월10일자)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송수안 발행인이 훈장을 받은 사진을 비중있게 싣기도 했다.

경기일보는 육사 8기 출신으로 대통령 비서관을 지낸 유승원 의원이 '실질적 사주'여서 정부 비판기사를 내기 힘든 구조였다. 통합 이전 경기 3사의 신문 1면에는 1980년대 '땡전뉴스'와 비슷한 '박통뉴스'가 있었다.

경기신문 출범으로 인천에 본사를 둔 언론사는 문을 닫았지만, 인천을 기록하는 경기신문 기자들은 쉬지 않았다.

또한, 유신정권에 날카로운 칼끝을 겨누지 못한 '아픔'이 있었지만, 신문으로서 사회비판기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사회 곳곳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고, 지역 개발 과정을 밀착해 지켜보고, 각 지역의 역사와 인물을 기록하고, 지역 문화 발전에 자양분을 제공한 것도 경기신문의 역할이었다.

경기신문 본사는 수원이었지만 인천 소식도 비중있게 다뤘는데, 1973년 9월1일부터 1979년 12월31일까지 경기신문에 소개된 인천 기사는 약 2만3천건이었다.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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