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뿌리를 찾다·6]아픔을 딛고(상)-통합 후 1970년대(관련)

수도권 유일의 정론지… 서민들 삶의 애환 보듬다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13-08-19 제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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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경기신문을 보면 노동 관련 기사가 많은 게 눈에 띈다. 당시 각 기업 근로자들의 임금, 처우 문제에 대한 기사가 많다. 체불임금 사건을 고발하는 기사도 적지 않다. 사진은 1977년 2월17일자 6면 톱기사로 인천 버스안내양의 열악한 처우를 고발한 기사다. 기사를 보면 노동청이 제 역할을 못했다고 우회적으로 지적하는 게 특징이다.
경기신문 창간사설 "도내 전역 균점적 배려·균형" 천명
서울 언론과 경쟁력 제고 '인천' '한수이남-이북권' 나눠
지역인물 소개·사회 고발·미담기사등 기획보도 연이어


   
1970년대 군부의 언론정책이 산파한 경기신문이라지만, 신문으로서의 본연을 잊지 않았다는 건 당시 지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기신문은 서울 거대신문과 경쟁하면서, 지역성을 강화하는 전략으로 생존했다. 독자를 의식하며 행간에 하고싶은 얘기를 써놓은 기사가 적지 않다.

■ "인천에 편재돼 있던 경기언론"

인천은 경기도에 속한 대도시였다. 도세(道勢)도 강했다. 1973년 말 경기도 인구 367만명 중 인천이 71만명으로 가장 많았고 수원·성남이 각각 19만명이었다.

경기도경찰국 등 주요 행정기관 상당수도 인천에 위치해 있었다. 해방 후 경기언론의 역사는 1945년 10월 인천서 창간한 대중일보에서 비롯돼 뿌리가 갈라졌다.

1960년대 말 연합신문(당시 경기연합일보)이 수원으로 본사를 이전하기 전까지 발간된 신문연감 등의 자료를 보면 경기도의 일간지(기관지 제외)는 모두 인천에 있었다.

1973년 경기신문 출범 전 경기 3사(경기매일신문, 연합신문, 경기일보)의 주요 기반은 인천이었다. 취재 대상에서 나머지 지역은 소외돼 있었다.

고일 선생은 1973년 8월의 한 대담 기사에서 "경기언론이란 관점에서 경기도 전역을 개관할 때 언론 활동은 인천 등지로 편재돼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사실"이라며 "확고한 경기언론이라는 이미지를 심지 못한 사실"을 꼬집기도 했다.

경기신문은 창간 사설 마지막 부분에서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해나갈 것임을 강조했다.

"경기신문은 경기도 350만 명의 공동소유임을 깊이 자각하고 도내 전역에 걸쳐 균점적인 배려와 힘을 쏟는 균형있는 신문이 될 것을 분명히 해둔다"고 천명했다.

■ 편집 방향은 '지역성 강화'

경기신문의 창간 목표는 '지역사회 대화의 광장', '내 고장 정보문화 센터의 기능적인 사명'으로 삼았다. 지역성 강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에 나선 것이었다.

당시 경기언론은 서울과의 경쟁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연합신문을 거쳐 경기신문 업무국장을 지낸 임상규(79) 전 경인일보 사장은 "1973년 이전 인천에 본사를 둔 신문사 발행부수가 4천 부도 안 됐다.

서울의 신문들과 동시에 신문을 찍어도 수도권 각 지역에는 보급망이 좋은 중앙지가 지역지보다 먼저 도착할 정도였다"며 "경기도 신문은 존재하기도 힘든 구조였다"고 전했다.

경기신문은 향토지에 걸맞게 편집방향을 바꿨다.

지방소식 70%, 전국 20%, 해외 10% 비율로 신문을 짰다. 전국 소식은 정부발 기사로 주로 1면에 실렸다.

해외 소식은 해외토픽 형태로 속지에 게재됐지만, 공산권 국가에 대한 비판적 외신기사가 이따금 1면 톱기사로 배정된 것도 특징이다.

지방소식은 도정(25%), 시정(20%), 일반사회(20%), 체육·문화(5%) 기사로 채워졌다. 넓은 권역에 있는 독자들을 위한 면배정에도 공을 들였다. 지방소식을 '인천권', '한수이남권', '한수이북권'으로 나눠 소식을 전했다.

경기도와 인천 각 지역의 인물과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은 경기신문의 주요 편집방향 중 하나였다. '기호의 본적지', '경기 인맥의 자취를 찾는 시리즈-명인의 고향', '속담의 고장' 등이 기획됐다.

■ 인천을 기록한 기사들

언론 통폐합으로 기자들의 몸값은 높아졌다. '기자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도청, 시청, 경찰, 상공회의소, 항만, 사회단체 등을 담당하는 '출입처 중심주의'로 움직였다. 하지만 사회의 밑바닥을 훑는 발로 뛰는 기사도 많았다.

경기신문 인천분사 기자들은 1973년 10월부터 '심야의 역군' 시리즈를 시작했다.

밤낮없이 병원생활을 하는 간호양, 연중 휴일이 없는 소방관을 비롯해 건널목 간수, 방범원, 어업통신사, 순찰 경찰관 등을 취재해 실었다.

사회 비판 기사도 있었다. 1974년 9월에는 에너지 파동 이후 인천에 유류암거래가 성행했는데, 불법으로 주유소에 기름을 공급하다가 불이 나 사람이 숨진 사건을 보도했다.

1977년 2월에는 '버스안내양은 고달프다'는 제목의 기사를 사진과 함께 6면 톱에 실었다. 인천 버스안내양 480명 중 3분의1 가량이 '월 25일 격무', '각종질병 발병', '세면·세탁 불가능' 등에 시달린다고 고발했다.

미담 기사도 많았다. 1975년 2월에는 인하대에 장학생으로 합격한 김모군이 등록금이 없어 애태운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가 나간 지 이틀 만에 각계 성원이 이어져 등록금을 마련하게 된 사연도 경기신문에 기록돼 있다.

통합 이후 정권의 기사 검열은 이전보다 오히려 완화됐다.

1972년 비상계엄령 때가 가장 심했는데, 당시에는 중앙정보부 조정관이 각 신문사 편집국장실에서 모든 기사를 검열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사전 검열은 사라졌다.

하지만 도청·시청 기자실에 기관원들이 사무실을 두고 상주하면서 기자 동향을 파악하는 행태는 남아 있었다.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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