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뿌리를 찾다·7]아픔을 딛고(하) - 1980년대

신군부 치욕적 족쇄 끊고 '정론직필 도약'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13-08-23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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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보장교 면 마다 사전검열
정권 낙하산 사장까지 득세
기자들 합심해 경영권 회복
노조결성 편집권 독립 강화


1980년대 신군부 언론정책은 70년대와 비교할 때 그 족쇄가 더욱 강화됐다. 비상계엄 때는 도청과 시청에 파견 된 공보장교(대위)에게 기자들이 면별대장을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 '치욕'의 시기였다.

'언론 정화'를 명목으로 한 '신문 길들이기'가 시작됐고 경기신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대주주이자 사장이었던 홍대건은 주식을 전액 환수당하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73년 경기매일신문·연합신문·경기일보 통합을 정권의 힘으로 주도한 이가 7년여 만에 신군부에 의해 언론계에서 강제 퇴장당한 것이다. 새 주주는 합동수사본부 주도 하에 경기·인천 기업인들로 채워졌다.

이때 항만 하역 3사를 중심으로 한 '인천주주'들이 대거 경기신문에 참여했고, 1980년 11월 대표이사에 박상복(동양석유주식회사 사장)이 선임됐다.

하지만 이로부터 약 7년 뒤인 1987년 3월,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의 비호를 받은 예비역 육군 소령 김장소가 사장직을 차지했다.

김장소의 사장 선임은 경인일보에 노동조합을 출범하게 하는 구실이 됐다. 그는 8개월 만에 해임됐는데, 직원 250명의 '농성'이 계기가 됐다.

보안사에서 군복을 벗고 제일은행 충무로지점장을 하다 온 '낙하산 사장'을 직원의 힘으로 내보낸 것이다.

이듬해인 1988년 3월 경인일보 노조가 탄생했다. 경인일보 노조는 이때부터 '편집권 독립', '임금인상', '경영 개선' 등의 요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경기신문은 1982년 3월,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돼 경기도에서 분리되면서 나온 자연스런 조치였다. 경기·인천 공동의 대변지여야 한다는 차원이었다.

1987년 언론기본법이 폐기되면서 1도1지 체제가 무너졌고, 이듬해 인천에서 인천신문(현 인천일보)과 기호신문(현 기호일보)이, 수원에서 경기일보가 창간했다.

인천신문 대표이사는 경인일보 4대 주주였던 문병하(한염해운 대표)가, 경기일보 대표는 경인일보에서 전무를 지낸 윤석한이 맡았다. 기호신문은 경기교육신보(1975년 창간한 주간지)의 발행인 서강훈이 창간했다.

초대 편집국장은 인천신문 오광철(전 경인일보 인천분실장), 경기일보 오양동(전 서울신문, 매일경제 부장), 기호신문 박민규(전 경기매일신문 주필)가 맡았다.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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