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7일 창간 대중일보가 걸어온 길

경기인천 지역언론의 서막 연 '지령 1호'
강제통합 아픔 딛고 '신문의 역사' 맥잇다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15-01-02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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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 태동한 대중일보, 경인일보로 70년 명맥 이어져
직할시되기 전까지 경기도 속해 '경기도민 대변지' 역할
도청사 수원이전·신문 강제 통합 언론지형 대지각 변동

1973년 통합 '경기신문' 출발… 기사 70%가량 인천권등 지방소식 채워져
1982년 경인일보로 제호변경 언론자유화 이후 창간신문사서 주요 역할
미디어시장 다변화 신문산업 침체 '언론 본연' 잊지않아야 해법찾기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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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경기 언론의 뿌리는 1945년 10월 인천에서 창간한 일간 신문 대중일보다. 해방 이후 우후죽순 생겨난 신문, 통신 등 여러 언론 기관과 달리 대중일보의 물적, 인적 기반은 탄탄했다.

일제강점기 개항장 인천의 신문 제작·보급 인프라가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개항장 지식인'들이 대중일보의 성장 기반을 탄탄하게 닦았다. 신문의 최종 소비자인 독자를 생각한 '대중(大衆)'이라는 제호를 선택한 것은 당시로선 눈에 띄는 일이었다.

배포 지역이나 지향성을 반영해 제호를 정했던 일반적인 흐름과 달랐기 때문이다. 대중일보는 신문 제작의 목표가 독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제호였다.

대중일보는 인천에서 태동해 현재 경인일보로 70년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 시간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한국전쟁과 함께 피난 시절을 보냈고, 만성적 경영난은 늘 경영진의 목줄을 죄던 문제였다. 권력은 언론을 제 손아귀에 묶어 두기 위해 언론 검열과 탄압을 일상적으로 자행했다.

언론이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억눌려있던 시기였다. 유신 독재가 가속화되던 1973년에는 신문사 강제 통합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이같은 굴욕의 사건들이 대중일보~경인일보 70년에 새겨져 있다.

인천, 경기 언론의 역사를 볼 때 염두에 둬야 할 사실 두 가지가 있다. 해방 후 약 20여년 간 경인지역 언론의 중심지는 인천이었다. 인천의 신문사가 수원으로 본사를 옮기기 전까지 경기도의 어느 도시에도 변변한 신문사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인천이 1981년 직할시가 되기 전까지 경기도에 속한 대도시였다는 점이다. 1970년대까지 인천 언론, 경기 언론이란 분류는 큰 의미를 갖지 못했고, 대부분 '경기도민 대변지'를 표방했다.

# 대중일보에서 시작된 인천·경기 언론사(史)

대중일보 창간 멤버의 면면을 살피면 그 이력이 굵직굵직했다. 이러한 인적 구성은 해방 이후 창간된 다른 신문들과 달리 '준비된 신문'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였다.

대중일보는 1945년 10월 7일 인천에서 고주철이 창간했다. 고주철은 인천 애관극장 부근 고주철 의원의 의사였다. 또 고주철은 우리나라 최초 미술사학자인 고유섭의 숙부였다. 개항기 인천의 의사 중에는 본업뿐 아니라 언론,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활동에 참여한 이들이 적지 않았고, 이같은 부류에 고주철도 포함됐다.

창간 이사장 송수안은 일제강점기 일본어로 된 신문인 조선시보, 매일신보의 인천지사장을 맡았다. 신문 보급의 중요성, 신문의 역할과 가능성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공무국장은 인쇄업의 선구자로 불렸던 이종윤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인쇄를 공부하고 마이니치 신문에서 실무를 익혔다.

편집국 구성원 역시 화려했다. 편집국장 엄흥섭은 소설가였다. 그는 소설 '새벽바다'에서 개항장의 화려한 모습 뒤에 가려진 부두 빈민굴을 그렸다. 엄흥섭은 어떤 기자상을 지향했을까. 그가 1937년에 발표한 '통속작가에게 일언'이란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엄흥섭은 "작가란 언제든지 그 시대의, 그 환경의, 그 민중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작품은 그 시대, 그 환경, 그 민중의 좋은 거울인 동시에 등대여야 한다"고 했다. 작가를 기자로, 작품을 기사로 바꿔 읽어도 크게 뜻이 달라지지 않는다.

문화부장을 맡았던 기자 김도인은 인천에서 문예지 '월미'를 창간한 문인이다. 또 그는 연극 모임에 몸담고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한 연극인이면서 불우한 아이들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했다. 진종혁은 1927년 문학 동인지 '습작시대'의 발행·편집인이었다.

대중일보는 이후 인천신보(1950년 9월), 기호일보(1957년 7월), 경기매일신문(1960년 7월)으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꿨다. 해방 이후 1950년대 까지 중부지방의 신문으로 대중일보 외에도 인천일보와 경기신문 2개사가 운영됐다.

1952년 창간한 인천일보는 1955년 경인일보로 개제하고 1962년 폐간됐다. 지금의 인천일보, 경인일보와 다른 신문이다. 경기신문은 수원시 팔달구에 자리잡은 자유당 경기도당부의 기관지였다.

# 3대 신문 경쟁 체제 구축

1960년대 경인지역 언론사에서 기억해야 할 신문은 3곳이다. 대중일보를 잇는 경기매일신문을 비롯해 인천신문(1960년 창간), 경기일보(1966년)가 3강 체제를 유지했다.

이들 3대 신문사는 초기에 모두 본사를 인천에 뒀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경기도에서 본사를 둔 일간지는 없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당시 경기도의 중심도시였던 인천뿐 아니라 도내 전역으로 신문망을 확대하려고 노력했다는 데 있다.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도에 취재망을 확산했다. 3대지 중 가장 역사가 긴 경기매일신문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신보라는 제호를 1959년 기호일보로 바꾼 이유에 대해 한국 언론 연구원이 펴낸 '한국 신문 백년사'(1983년)는 "인천이란 국한된 지역적인 성격을 벗어나 도내 전역을 대상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인천에 본사 인력을 배치하고 경기도 주요 도시에 지사망을 갖춘 시스템으로 신문사를 운영했다.

1960년대 3대지의 지면 내용과 편집 방향을 분석한 연구는 없다. 단편적인 자료와 증언 등에 따르면 경기매일신문의 사풍은 '만년 야당지로서의 지조와 기개'를 중요시했다. 인천신문은 지역 문화 창달의 역할에 치중한 게 차별화된다.

경기일보는 창간사에서 '의견 형성력'을 강조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의제 설정 능력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신문은 3대지 중 처음으로 1963년에 문화면을 신설했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또 전국 4개 도시 고교 초청 야구대회, 전국 초·중·고 음악 콩쿠르, 경기도 초·중·고 미술실기대회 등 대규모 체육·문화 행사를 개최하는 역량을 갖췄다. 1960년대 후반 인천신문의 변화가 이뤄졌다.

1968년 창간 8주년을 맞아 제호를 경기연합일보로 바꿨다. 이어 1969년 4월 사옥을 인천에서 수원 교동으로 이전했다. 인천에 둥지를 튼 신문사가 수원으로 옮긴 첫 사례였다. 그 이듬해인 1970년 10월에는 신문 이름을 연합신문으로 개제했다.

이 과정에서 인천신문을 창간한 허합 사장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허합 사장은 수재의연금 횡령 사건으로 경영권을 당시 정권의 실세에 빼았겼는데,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후발주자' 경기일보의 최대 주주는 국제실업이었지만, 이 신문의 '실질적 사주'는 육사8기, 대통령 비서관 출신의 유승원 국회의원이었다. 경기일보는 월간 경기 제작 등 월간지 출판 사업에 공을 들였고, 윤전기 도입 등 사세 확장에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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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청사 수원 이전과 3대 신문 강제 통합

수원에 있는 경기도청사는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광화문 부근에 있었다. 인천과 수원의 경기도청사 유치 경쟁은 치열했다. 도청 소재지가 수원으로 결정되고, 인천에 본거지를 둔 신문사의 수원이전이 시작됐다.

경기도청사는 왜 서울에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서울은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였다. 해방 뒤 서울은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에서 분리됐지만, 청사는 서울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도청 이전 계획은 잠정 중단됐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과 함께 서울 주변의 도시를 개발하는 중장기 계획을 추진했다. 1963년 말 경기도청사의 수원 이전이 확정됐고, 1967년 청사가 완공됐다.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은 경인지역 언론 지형에 지각변동을 이끌었다. 경기연합일보로 제호를 바꾼 인천신문이 1969년 수원 교동으로 본사를 옮기고 이후 제호를 연합신문으로 바꿨다. 발행인쇄인으로 재일교포 이현수가 취임한다. 인천신문을 창간한 허합은 신문사를 빼앗기다시피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인천신문의 수원 이전 과정에 수원 출신 7선 국회의원 이병희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병희는 경기도청사의 소재지가 수원으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1973년 9월1일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연합신문 3대지는 통합해 경기신문으로 출발한다. 군사 정권의 강압적인 언론 통합 조치였다. 당시 인천을 비롯해 전국에서 11개 신문이 사라졌다. 

경기신문은 수원에 본사를 둔 연합신문 주도로 통합됐고, 본사 소재지도 수원으로 결정됐다. 3대 신문사의 통합 성명서는 1973년 7월 31일 인천에서 발표됐다. 경기매일신문 발행인 송수안은 통합에 끝까지 반대했지만, 군사 정권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 3사의 통합에 대한 언론계 원로의 시각은 어땠을까. 연합신문은 1973년 8월 15일자 주간인천 주필을 지낸 고일(高逸), 경기매일신문 편집국장 출신의 박민규(朴旼奎) 두 원로의 대담을 '경기 언론의 전기(轉機)'에 실었다. 

고일은 "경기언론이란 관점에서 경기도 전역을 개관할 때 언론 활동은 인천 등지로 편재해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사실"이라며 "(그토록 많은 신문이 성쇠를 거듭했지만) 원칙적인 의미에서 확고한 경기언론이라는 이미지를 심지못한 사실"을 강조했다. 

박민규는 "경기언론은 해방전후를 통해 사실상 지역사회계발이란 사명감에서 많은 기여를 했다"면서도 "과연 뚜렷이 내세울 기록적인 현상이었는가 하는데 대해선 크게 의문시 됩니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그리고 1980년대

경기신문 편집국 기자들은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연합신문 출신들로 채워졌다. 편집국장은 경기일보에서 맡았고, 인천분사 편집 책임자는 경기매일신문 출신이 담당했다.

통합 초기 인천에서 근무하는 기자가 15명으로 수원 본사(12명)보다 많았다. 인천분사 기자 구성은 연합신문(6명), 경기일보(5명), 경기매일신문(4명)이 고르게 분포된 편이었다.

통합 이후 인천 언론이 암흑기를 맞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왜곡된 것이다. 경기신문 기사의 70%가량을 지방 소식으로 채웠고, 지방소식은 '인천권', '한수이남권', '한수이북권'으로 나눠 보도했다. 통합 이후 1979년 12월 31일까지 6년 여동안 경기신문에 나온 인천 기사는 2만3천건이나 된다.

1980년 집권한 신군부는 유신 정권의 언론 정책을 이어 1도1사 정책을 편다. 군인들 주도 아래 경기신문 주주가 재편되면서 인천에서는 항만 하역사가, 경기에서는 버스회사가 경기신문 주주로 참여했다. 경기신문은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고 1982년 3월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1987년 언론기본법이 폐기됐고 수원과 인천에서 경기일보, 인천신문(현 인천일보), 기호신문(현 기호일보)이 창간됐다. 대중일보 출신이 1960년대 신문사 편집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1987년 언론자유화 이후 창간된 신문사의 창립 멤버에도 경인일보 기자 다수가 이름을 올렸다.

# 신문의 위기와 대중일보

'신문의 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미디어 플랫폼 다변화 등의 이유로 침체 국면에 접어든 신문 산업이 활로를 뚫기 힘든 시대라는 뜻이다. 서울보다 지역 신문이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 것이다. 이런 때 70년 전 시작된 경인일보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45년 10월 7일 대중일보 창간사를 보자. "모든 부면을 향해 적극적으로 진언(盡言)하고 정력적으로 보도하지 아니하면 안될 절대의 사명이 있는 것." 일제의 강압 통치에서 벗어나 '우리 언론'을 만든 것에 대한 기대감이 창간사에 묻어난다. 

유신 독재에 침묵했던 경기신문의 1975년 4월 7일자 사설의 제목은 '신문의 날'이었다. 경기신문은 사설에서 "흔히들 신문을 사회의 공기라고들 한다. 때로는 가슴에 훗훗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또는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릴 수조차 없는 때도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의 현실이 과연 사회의 공기로서 그 사명을 다했는가 하는 것과 또 신문인 스스로도 제구실을 다하려 얼마만큼이나 노력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썼다.

신문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이를 지키지 못하는 부끄러움, 어떤 상황에서도 언론의 본연을 잊지 말자는 교훈이 경인일보 70년사에 담겨 있다. 이는 곧 신문의 위기를 극복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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