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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h+] 책상에 옷을 입히다

    [with+] 책상에 옷을 입히다 지면기사

    최근에 내 책상에서 단편소설을 써서 탈고했다. 당연한 듯 보이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소설의 중요 부분을 내 책상이 아닌 '바깥에서', 그러니까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써 왔던 것이다. 책상은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쫓길 때나 인쇄를 할 때만 마지못해 앉았다. 그러니 내 방, 내 책상에 들어앉아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쓴 것이 나름대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책상이 홀대를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항상 큰 책상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하면서 6인용 탁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식탁으로, 하나는 책상으로 사용하면서 그 꿈을 이뤘다. 마침내 프린트도 올려놓을 수 있고 읽던 책들로 작은 탑을 쌓아도, 스탠드며 향초며 공기정화용 식물까지 모두 거뜬히 담아 놓고도 자리가 넉넉한 책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거기 앉아 책을 읽고 공부할 수는 있어도 소설은 안 써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작업은 '새 소설 쓰기'이고 책상의 가장 큰 의무 또한 소설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책상과 나, 둘 다 그 일에 실패했다. '나는 집에서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인가 보다, 도서관이든 카페든 사람들 속에 익명으로 섞여야 글이 가장 잘 나오는 모양인가보다'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해왔다. 친구의 선물 평직으로 짠 러그 깔아차고 딱딱한 책상 포근하게 바뀌어자꾸 '인력' 느껴지며 소설쓰기 성공 그런데 아주 작은 전환점이 생겼다. 어느 날 팔뚝에 닿는 책상의 감촉이 너무 차가워서 무심코 친구가 선물한 얇은 러그를 반으로 접어 깔아보았다. 러그는 평직으로 짠 직물로, 기하학적 패턴 안에 우주인이 무중력 상태에서 떠 있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러그를 깐 책상에 앉아보았더니 내 팔이 닿는 부분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으로 바뀌어 있었다. 책상은 옷을 입은 것처럼 아늑해 보였다. 러그를 책상에 깔아놓은 후부터 자꾸 책상의 '인력'을 느꼈다. 좀 더 자주 앉았고, 앉아서 무중력 상태인 우주인을 들여다보다 말도 걸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 [with+] 당신의 별점은 몇 점인가요

    [with+] 당신의 별점은 몇 점인가요 지면기사

    오래된 영화 잡지에 '개봉작 20자평과 별점'이라는 코너가 있다. "별이 다섯 개!"라고 강조하던 어떤 침대 광고처럼 별 5개는 최고의 칭찬이다. 별 1개부터 반 개 단위로 매겨지는 이 평은 최신 영화에 대한 정보를 한꺼번에 확인하고 싶을 때 꽤 유용하다. 별 개수와 한 줄의 평으로 그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부터 관람 여부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공개적으로 글을 쓴 지 오래되었다. 출판된 책은 없지만 이름과 얼굴을 내놓고 신문과 같은 지면에 글을 쓰다 보면 댓글이 달릴 때가 종종 있다. 사실 칭찬하는 댓글보다는 비난하는 댓글이 더 많다. 처음으로 내 글을 비난하는 댓글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간단한 한 줄이었는데 그 한 마디가 반복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글을 쓰다가도 그 댓글이 생각나면 더 이상 글이 잘 써지지 않고 의기소침해졌다.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한 후에는 댓글창을 일부러 확인하지 않는다. 가끔 궁금해질 때면 찾아 들어가서 보긴 하지만, 대부분 후회로 끝난다. 이제는 포털 사이트의 뉴스 댓글 창이 숨김으로 되어 있는 것이 편안하고, 농담처럼 이야기하던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게 됐다.작가들도 창작물 평가 궁금해 한다요즘 인터넷서점 별점·한줄평 강력신인작가들 '별점 테러' 타격 더 커 작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터넷 서점 독자들이 매기는 별점이 화제에 올랐다. 작가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사안에서 통일된 의견이 나오는 일은 흔치 않은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도 목소리가 커지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요즘 인터넷 서점은 꽤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별 개수에 따른 평점 분포와 연령과 성별로 구분된 구매자 분포까지 확인 가능하다. 흥미로운 지점은 별 5개와 별 1개의 간극이다. 대부분의 책은 1개까지 별점은 거의 없고, 별이 3개에서 5개 사이에 몰려 있다. 최근 화제가 됐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경우 별 5개는 55.4%, 별 1개가 25.1%로 평가

  • [with+] 천민 시인 홍세태

    [with+] 천민 시인 홍세태 지면기사

    홍세태(1654~1725)는 천민 시인으로 조선 후기, 효종 때 무관인 홍익하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양반들과 다르지 않은 수학과정을 거쳤다. 일찍부터 서당에 다녀 5세 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8세쯤에 글을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기록 중에는 그의 출신을 다르게 전하는 기록도 있다.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홍세태가 이씨 집안의 노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농사일을 게을리 한다 하여 주인이 그를 죽이려는 것을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던 김석주와 이항이 돈을 주고 노비의 신분을 벗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홍세태는 두 사람을 부모처럼 받들었다고 전한다.경우야 어떻든 글공부를 열심히 하던 그는 1675년 3년마다 실시하던 식년시 잡과, 기술직을 뽑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한학관에 뽑혀 중국어를 양반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동갑내기인 김창흡, 이규명 등을 비롯한 사대부들과 시를 짓고 함께 감상하는 낙송시사(洛誦詩社)를 만들어 우정을 쌓았다. 글솜씨 뛰어나 사대부들과 어울려외국사신 동행 의전에 관한 글 전담지방목장 관장 종6품 감목관 지내 그는 1682년 통신사 윤지완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1698년에 역과 합격 때에 제수된 이문학관에 실제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문학관이란 조선시대 승문원에 속하여 외교문서를 처리하는 벼슬로 중국으로 가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아했던 것이다.우리나라에 온 중국사신이 조선의 시문을 보고자 했을 때 좌의정 최석정이 숙종에게 그의 시를 추천하여 홍세태는 임금의 호감을 사게 되었다. 그 일로 제술관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으나 호사다마라 할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삼년상을 치르느라 사직하였다. 다시 관계에 나간 것은 1702년이었다.그 후 홍세태는 1705년 둔전장(屯田長)이 되고 1710년에 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에 임명되어 어전의 조회와 의례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1713년에는 서부주부 겸 찬수랑(西部主簿兼纂修郞)이 되었고 1715년에는 제술관이 되어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동행하는 수행원으로 의

  • [with+] 문쾅의 시대

    [with+] 문쾅의 시대 지면기사

    "좋겠다, 너는. 아직 애가 문쾅까지는 안 할 테니."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은 종종 나에게 말했다. '문쾅'이란 엄마와 이야기하다 말고 짜증이 난 아이가 제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가 버리는 거다. 나도 안다. 어린 시절 많이 해본 짓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우리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나보다 더 큰소리로 방문을 발로 차고 쳐들어 왔지만. 우리 집 문짝은 몇 번이나 부서질 뻔했다. 내 딸은 여덟 살,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다. 중학교 2학년쯤 되면 우리 아이도 그러겠지, 막연히 상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나에게 너무 이르게 찾아왔다. 단짝 친구 집 폐 끼치는 것 같아서여덟살 딸에게 출입금지 시켰더니짜증 내며 방문 '쾅' 어이없는 현실 문제는 단짝 친구였다. 단짝 친구 생기는 거야 좋지. 온종일 놀이터에서 함께 놀아도 모자란 것쯤 나도 안다. 친구 데리고 우리 집에 가면 안되냐고 조르는 것, 이해한다. 그래서 자주 그렇게 해주었다. 과일도 깎아주고 풍선껌도 주고 가끔은 저녁도 챙겨주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 엄마도 미안한 마음에 우리 아이를 초대했다. 문제는 너무 자주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친구 엄마에게 폐를 끼치는 일 같아서 보다 못해 친구 집 출입금지를 명했더니 아이가 짜증을 버럭 냈다. "아니, 엄마 말을 거스를 참이야?" 나도 버럭, 잔소리를 쏟아냈다. 조막만 한 녀석이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따지고 들기에 조리 있게, 고작 여덟 살은 반박도 못 할 수준으로 심도 있게 설명도 했다. 아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나에게 대들었다. "이건 내가 안 가기로 결정한 거지, 엄마가 그렇게 시켰기 때문은 아니야!" 어라? 순순히 수긍하지는 않겠다는 거지? 나도 오기가 생겨 다시 한번 단단히 대답을 받아냈다. "안 가겠다는데 엄마는 왜 내 대답을 의심해?" 그러고는 그것, 아직 나에게 오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쾅'이 일어난 것이다. 아아, 지금 내 눈앞 광경이 현실이라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거실에 앉아 잠깐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지금

  • [with+] 시인 정조가 수원시장을 위하여

    [with+] 시인 정조가 수원시장을 위하여 지면기사

    수원 화성을 축성한 정조(조선 22대 왕)는 시인이었다. 정조는 시인으로서 고갈되지 않는 상상력의 샘물을 언어의 두레박으로 공급하며 인간 정신을 우위에 두었다. 평소 책 읽기와 글쓰기를 즐겨 했던 정조가 추구했던 인간 정신은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을 통해 인문학의 정수를 펼쳤다. 여기에 19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던 정조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500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한시로 그 심상을 드러냈다. 개혁 군주로서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는데 그의 시편들은 근본적 철학과 시적 상상력이 고도로 함축된 문화유산으로 남았던 것. 정조가 시인이 되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서 찾을 수 있다. 11살 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영조와 노론 세력은 정조의 애원을 싸늘하게 외면했다.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한 후 정조는 왕 위에 오를 때까지 죽음의 문턱을 오가며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비극적인 아버지의 죽음으로 파생된 외로움과 고독은 그에게 시를 쓸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외로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고독의 정원에서 시심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 이로써 정조가 극복한 트라우마는 강력한 군왕으로 성장시킨 모토가 되었고, 콤플렉스는 고뇌에 찬 강인한 인간관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정조가 물려준 세계유산 '수원화성''남문 언덕' 수원을 넘어 'K-문화'역사·실제성 갖춘 '무공해 스토리' 이 가운데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는 넘지 못하는 언덕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어린 정조에게 자기 키만 했을 뒤주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가로막고 있는 언덕을 경계로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밖에…. 넘을 수 없었던 이 언덕은 정조 재임 시절 최고 업적으로 평가받는 수원 화성 축조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런 아버지로 인해,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이장한 후 1796년 수원에 동서남북 사대문이 들어서면서

  • [with+] 불행으로 얻는 행복감

    [with+] 불행으로 얻는 행복감 지면기사

    얼마 전 거실을 청소하다가 청소할 만큼 몸이 건강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몇 년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목 디스크와 허리 디스크를 지병으로 가지고 있는 데다 '테니스 엘보'라는 병을 앓게 되어 팔의 통증이 심할 때였다. 팔에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다녔지만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집안 청소조차 하지 못했고 우울과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병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청소할 수 있는 현재의 삶이 얼마나 감사한 삶인가.그러고 보니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의 아이엠에프 사태로 인해 남편의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고 나서 아이엠에프 사태 이전에 돈 걱정 없이 살았던 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적도 있었다. 돈 걱정 없이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왜 인간은 불행을 겪어야만 겸손해지고 감사를 배우게 되는 걸까. 행복 출발점인 감사 모르는건 불행건강 위협 미세먼지 있었던 까닭에요즘 공기 맑으면 기쁨 맛볼 수 있듯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마을에 한 가난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마을의 랍비를 찾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호소했다. "우리 집은 게딱지만한데 아이들은 주렁주렁 딸린 데다가, 제 아내만한 악처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나라에서 가장 악처일 겁니다. 아, 저는 어떡하면 좋을까요?""자네 염소를 가지고 있는가?""물론이죠.""그렇다면 염소를 집안에 들여놓고 기르게나."농부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튿날 다시 찾아와 말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악처에다 염소까지……! 더는 못 참겠습니다.""닭을 기르고 있는가?""물론입니다.""그럼 닭을 전부 집안에 들여 기르게나."사나이는 또다시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이튿날 또 찾아왔다. "이젠 세상이 끝장입니다!""그렇게 괴로운가?""마누라에다 염소에다 열 마리 닭에다! 오오! 하느님 맙소사!""그럼 염소와 닭을 모두

  • [with+] 즐거운 성가심

    [with+] 즐거운 성가심 지면기사

    오늘 반팔을 입었다. 과연 항온동물이 맞는 걸까 싶게 추위도 더위도 많이 타는 나는 얇은 옷 위에 뭔가를 걸쳐 입기를 좋아한다. 춥고 덥고 배고프고 졸린 것을 싫어하는 정도가 성인치고 무던하지가 못해 마흔을 훌쩍 넘겼어도 덜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요 며칠 날씨는 흠잡을 것 없이 좋았다. 그렇지 않은가? 봄의 몇 주간, 활짝 피어난 호사스러운 날씨는 대부분의 인간을 낙천적으로 만든다. 햇볕이 따뜻하고 새순이 파릇파릇한 봄날에는 여간해서 인상을 찌푸리기 힘들다.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은 1층인데, 나무 데크만 놓인 야외 발코니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우려 때문에 여태껏 무용지물인 공간이었다. 그러다 발코니를 가릴 수 있는 천을 사서 둘렀더니 나비효과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노지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 것이다. 쇠뿔은 항상 단김에 빼는 우리 부부는 곧바로 꽃시장으로 달려갔다. 기다란 화분 세 개를 비롯해 흙과 데이지 모종, 튤립 구근 여섯 개, 약간의 야생화 한 아름을 안고 돌아왔다. 이런 욕망은 자꾸 번성하기 마련인지라 어디선가 접이식 테이블도 생기고, 의자도 놓고, 햇빛을 가릴 수 있는 2m짜리 차양도 쳐놓았더니 야외카페가 부럽지 않은 나만의 작업실이 탄생했다. 발코니 꾸미니 카페 못잖은 작업실변명인지 다짐인지 모를 글 쓰다보니어느덧 노트의 마지막 장 펼쳐졌다 이상고온으로 30도에 육박하는 사월의 어느 날, 나는 이 일인용 카페에 앉아있었다. 커피를 정성껏 내리고 멜빌의 '모비딕'을 읽는 것으로 나 혼자만의 오픈식을 경건하게 가졌다. 두 시간이 넘어가자 머리 위에 목욕탕 마크가 모락모락 떠오를 만큼 더웠지만 그래도 굳세게 앉아있었다. 나한테 뭔가가 '내세워지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생각도, 감정도, 상상도 아니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빛으로 달아오른 공기 속에 놓여 있을 때 일정한 상태로 예열되는 '감각'에 가까웠다. 뜨거운 햇빛 속에 앉아있으면 나는 항상 여행지의 해변이 떠오른다. 첫 배낭여행지가 터키와 이집트

  • [with+] 마법의 포장마차

    [with+] 마법의 포장마차 지면기사

    오랜만에 회식이란 걸 했다. 새로운 구성원들이 만난 자리라 낯설 법도 한데, 모두들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술을 먹는다며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신나게 고기를 굽고, 서로의 빈 술잔을 채워주며 웃고 떠들다 보니 꽤 오래 전 부산에 놀러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핑계 삼아 부산까지 간 참이었다. 충동적인 여행이었기에 영화는 한 편 봤고, 그나마도 조느라 제대로 못 봤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시원한 가을 바람과 정겨운 부산 사투리를 듣는 재미로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밤거리에서 신기한 포장마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거리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부산의 꽤 큰 번화가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포장마차였다.온갖 음식을 즉석에서 뚝딱 만들어내는 그 포장마차는 손님들이 주인장에게 "오빠, 나 이거 해도. 양 많이!"를 외치는 곳이었다. 우리 역시 안주를 주문하는 우렁찬 사투리에 반해 남아 있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앉아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여기 오면 이걸 먹어야 한다"라며 바로 추천이 들어왔다. 그 오지랖이 피곤하거나 이상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니 테이블은 분리되어 있지만, 포장마차를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섞으며 일행처럼 노는 분위기였다. 옆자리에서 먹고 있는 안주를 쳐다보다가 "옆자리랑 똑같은 거 달라"고 시키기도 하고, "어디서 왔냐" 물어보며 서로의 안주를 나눠먹기도 했다. 부산영화제 기간이라 외지인이 많아서였을지도 모르고, 그날만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낯선 이에 대한 환대와 서로에 대한 너그러움이 넘치던 가을밤이었다. 살짝 취했던 우리는 처음 안주를 추천해줬던 바로 옆 테이블의 안주를 반이나 뺏어먹고, 우리가 시킨 안주가 나오면 옆 테이블에 다시 덜어주고를 반복했다. 부산국제영화제 핑계 삼아 간 여행포장마차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안주도 나눠먹고 웃으며 이야기꽃 사람간의 접촉이 금기시되는 코로나19 시대에는 시도는커녕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날 부산의 포장마차에서는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우리 테이블뿐만 아니라 둘러앉은

  • [with+] 나무꾼 시인 정초부

    [with+] 나무꾼 시인 정초부 지면기사

    정초부(1714~1789)는 정조 때의 이단전과 함께 시단을 풍미했던 노비 시인이다. 그는 경기 양평 사람이다. 성은 정(鄭 혹은 丁)씨라고 알려졌지만 이름은 분명한 초부(樵夫)다. 나무꾼이란 뜻이다. 그는 명문가인 여씨((呂氏) 집안의 노비였다. 참판을 지낸 여춘영의 노비라고도 하고 승지 여만영의 노비라고도 하지만 어떻든 여씨 집안의 노비였던 것은 분명하다.그는 자존심이 강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은 봉(鳳)이었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시를 아는 사람은 많았다. 그만큼 시가 빼어났다. 그리고 그의 시를 찾아 읽는 독자가 많았던 것이다.노비였던 그의 생김새는 몹시 고괴했다. 그러나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그를 '예스런 선비의 멋진 용모를 가졌고 수염이 아름답고 흉금이 툭 터져 구김살이 없다'는 인물평을 남긴 사람도 있다. 이런 인물평은 그의 시문에 매료되었던 사람의 글일 것이다.명문가 여씨 집안 노비이자 나무꾼기억력 좋아 주인의 글 다 외워버려빼어난 詩 솜씨로 읽는 독자 많았다 정초부는 낮에는 산에 가 나무를 해서 지고 내려오고 밤에는 주인을 모시고 사랑채에서 잤다. 주인은 늘 책을 읽었다. 그는 주인이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외워버렸다. 경탄할만한 기억력이었다. 이런 그를 주인이 가상하게 여겨 자식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학업성취가 빨랐다. 특히 과거시험에 필요한 과시(科詩)를 잘 지었다. 그의 문장은 주인집 자제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당대에 그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예컨대 주인집 자제들을 위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 대리시험을 쳐서 주인집 자제들을 급제시켰다는 소문도 그중의 하나다. 그 대가로 주인이 그를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었다. 여씨 집안에서는 그를 더 이상 노비로 묶어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시문이 훌륭한 나무꾼으로 명성이 높은 그를 종으로 부린다면 이는 사대부 사이에서 평판이 나쁘게 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노비에서 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켰을 것이다.그는 양인

  • [with+] 말할 수 없는 것들

    [with+] 말할 수 없는 것들 지면기사

    작년인가의 일이다. 수원에서 문학 관련 심사 일정이 있었다. 수원까지는 집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여서 나는 일찌감치 출발했다. 중간에 택시로 갈아탔다. 차가 좀 막히는가 했는데 한참 딴생각에 빠졌다 눈을 들어보니 어라, 차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사고가 난 건가요?" 기사님께 물었는데 기사님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글쎄요… 여기가 이런 곳이 아닌데." 수원역 근처였다. 심사장까지는 꽤 남았는데, 시계를 보니 영 불안했다. 사고가 났다 해도 금방 처리되겠지,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기다렸는데 차들은 점점 밀려들 뿐 한 대도 그 길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결국 기사님이 말했다. "내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수원역 쪽으로 얼른 가셔서 버스를 타세요." 차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1차선 도로에 있었지만 나는 내렸다. 내려서 보니 더 가관이었다. 수원역 앞 도로는 몽땅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냅다 수원역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갔는데,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로 늦었다고화 낼 수도 변명 할 수도 없는 일 시위대는 정류장 앞 버스를 막아서고 도로를 점거했다. 버스도 택시도 그 어떤 차도 수원역 사거리를 지나갈 수 없었다. 내가 타야 하는 버스 역시 꽁꽁 붙잡혀 있었다. 안 되는데, 지금 안 타면 진짜 늦는데. 발을 동동 굴러봐야 소용이 없었다. 일단 더 달려 시위 장소에서 떨어진 다음 택시를 잡아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고, 택시 앱을 아무리 눌러봐도 잡히지 않았다. 뛰어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고 애가 탄 심사장 스태프는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무작정 달려 시위 장소에서 더 멀어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싸늘한 날이었지만 코트 속 등이 땀에 젖었고 나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찌어찌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도착했지만 이미 30분이나 지각을 한 상태였다. 너희 불편 알아서 해결 하라는건 약자 향한 지질하고 우스운 허세오만함 차마 입밖에 내선 안될 말 심사가 끝나고 돌아오던 길, 다른 심사위원 한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