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0)] 강점기의 독립 열망 담아낸 '근화창가 제 1집'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0)] 강점기의 독립 열망 담아낸 '근화창가 제 1집' 지면기사

    '금지곡=공공장소나 방송에서 부를 수 없도록 규정된 노래.'표절이나 저속한 가사 등 곡마다 금지 사유가 붙어있지만, 숨은 의도가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근현대사에 등장한 수많은 금지곡 가운데에는 아픈 역사가 담긴 금지곡이 있다.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평택 '근화창가'가 그렇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를 관통한 비극적 시기에 사연 없는 금지곡이 어디 있겠냐 싶지만, 민족과 역사를 노래할 자유마저 빼앗긴 과거가 아프다. 무엇보다 근화창가에 수록된 곡이 이제는 잊힌 곡들이라는 점이 아쉬움을 더한다.근대 일본·서구 음악에 맞춰 제작된 '창가' 계몽적 가사·씩씩한 느낌 특징조선 역사·고난 극복 등 내용 '금지 처분'… '총독부 창가집'과 정반대 성격'금지 창가집 희귀본' 故 노동은 교수가 발굴·소장… 유족들, 평택시에 기증'조지아 행진곡' '하이카라부시' 등 당시 유행곡 차용… 음악사적 가치 커'한국근현대음악관'에 보관… 민족음악 지킨 지영희 기린 '국악관'도 바로 옆 ■ 근화창가 제1집창가는 근대기 한국에 수용된 일본 및 서구 음악에 맞춰 제작된 노래로, 창가집은 주로 계몽적 가사와 씩씩한 느낌이 나는 특징을 띤다. 주로 교과서처럼 사용됐다. 평택 한국근현대음악관이 보유하고 있는 근화창가 제1집은 일제강점기에 금지된 항일·애국창가집으로 금지된 창가집 가운데 3번째로 실물이 발견된 희귀본이다.1921년 민족음악가 노영호가 펴낸 창가집으로, 1923년 3월 10일 2판이 나오기도 했다. 당초 계획은 제2집, 제3집과 같이 시리즈로 제작할 계획이었겠으나, 1집을 끝으로 근화창가의 이름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를 제작한 노영호는 출판사 무궁화를 뜻하는 근화사의 사주로 근화창가집 출판을 맡았다. 또 제작에 있어서 작·편곡자, 작사가로도 참여한 인물로 알려졌다. 가로 12.6㎝, 세로 19.5㎝(초판본 추정)와 가로 12.7㎝, 세로 16.3㎝(이판본 추정)에 민족의식이 담겼다. '조선의 자랑'과 '을지문덕', '강감찬', '어머니의 사랑', '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9)] K-팝 태동 이끈 파주 장파리 미군클럽 '라스트 찬스'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9)] K-팝 태동 이끈 파주 장파리 미군클럽 '라스트 찬스' 지면기사

    # 경기도문화유산탐방# K-팝의뿌리 # 대중음악의산실# 꿈의무대 # 미군 # 역사의명암 # 라스트찬스"일제 강점기를 겪고 한국전쟁으로 눌릴 대로 눌린 한국인의 흥이 다시 폭발할 수 있던 계기가 파주 라스트 찬스 아니었을까." 파주 파평면 장파리의 한 주민은 화려했던 1960·70년대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한국 대중음악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미군 클럽이다. 흔히 미 8군을 중심으로 얘기하지만 1960·1970년대 미군 부대 인근에 들어선 수 많은 클럽들이 외화벌이에 나서고 있었다.미군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클럽들은 블루스에서부터 재즈, 하드록 등을 연주할 수 있는 밴드를 무대에 세웠는데, 실력만큼은 미국 현지에 웬만한 밴드를 능가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활동했던 밴드들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음악에 가장 빠르게 반응했고, 유행은 빠르게 한국의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미군클럽은 당시 아티스트뿐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고 배우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꿈의 무대였다. 그때의 청년들이 미군에서 내국인으로 대상을 넓히면서 한국 대중음악이 르네상스를 맞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문화와 문화, 빛과 그림자가 엉킨 공간 장마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7월 초의 덥고 습한 날씨에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에는 지나는 행인 하나 보이지 않았다. 특별할 것 없는 접경지역 시골 마을의 풍경이었다.그러나 이 마을이 특별한 건, 한국과 미국의 문화가 뒤섞이고 또 한국 근현대사의 명과 암이 뒤엉킨 장소 '라스트 찬스 클럽'이 위치하고 있다.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마을 초입에 위치한 160㎡ 넓이의 단층 건물로, 입구 옆에 'LAST CHANCE'라고 적인 간판이 없었다면 낡고 작은 식당, 심지어 창고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특징을 찾아보자면 건물 외벽 조약돌 모자이크 장식이 독특하고, 미국 서부 개척시대 상점건축과 같은 느낌을 준다. 1950년대 세워진 '조약돌 장식' 건물그리스·이집트 등 다양한 문화 담아1960~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8)] 양평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혈의'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8)] 양평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혈의' 지면기사

    장마를 앞둔 6월 말. 덥고 습한 날씨에도 양평군에는 활기가 돌았다.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즐기려는 방문객과 연잎이 수놓은 두물머리를 즐기려는 관광객 등이 지역에 활기를 더했다.양평군 양서면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도 평일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행되는 탄신 136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몽양을 잇다-몽양의 눈빛'을 관람하려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19세기 태어나 대일항쟁기 최고의 셀럽(유명인을 뜻하는 Celebrity의 줄임말), 몽양 여운형의 삶과 그가 남긴 유산을 쫓아본다.독립운동가, 사상가, 언론인….1886년 5월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태어난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사상가, 선교사, 언론인, 여행가, 교육자로 알려져 있다. 190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노비 문서를 불태워 해방했으며, 고향집에 기독교 광동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배우 송강호 주연의 영화 'YMCA야구단(2002)'으로 알려진 한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 야구부 주장으로 일본 원정경기까지 다녀온 인물이기도 하다.무엇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신한청년당의 발기인이자 도쿄에서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한 독립운동가,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해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되면서 사임할 때까지 언론인으로 살았다.아버지 사망후 노비 문서 불태우고고향집에 '광동학교' 세워 신학문 교육도쿄에서 '독립 역설'… 대중적 인기 광복을 맞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1947년 암살됐다는 것이 그를 설명하는 이력이다.대일항쟁기에 극좌와 극우 모두로부터 외면받으면서 2008년 뒤늦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기까지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잊힌 인물이기에 몽양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설명이다.19세기에 태어난 21세기형 셀럽"오직 인간은 낳을 때부터 평등이니 주종지의(主從之義)는 어제까지의 풍습이요. 오늘부터는 그런 오래된 생각을 탈피하고 제각기 알맞은 직업을 찾아라."배재학당, 우무학당에서 공부하며 신학문을 배우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7)] 오산 'UN군 한국전쟁 초전기념비·옛 동판·한국노무재단 안내판'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7)] 오산 'UN군 한국전쟁 초전기념비·옛 동판·한국노무재단 안내판' 지면기사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 16분. 오산 죽미령에서 지축을 흔드는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한국전쟁에 미 지상군 참전을 알리는 소리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 제24사단의 일부 병력이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으로 향했다. 7월 1일 더글라스 C-54기를 타고 미군 540명이 일본 후쿠오카를 출발해 부산에 도착했다. 지휘관을 맡은 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로 불린 이들은 연일 쏟아지는 장맛비를 뚫고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다시 대전에서 오산 죽미령으로 이동해 전선을 형성했다. 조그마한 능선이지만 경부국도와 철도를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에서 스미스부대원들은 향후 3년여간 이어진 전쟁의 신호탄을 쏜 셈이다.1950년 7월5일 오산 죽미령서 '미군 첫 전투'당시 주역 '스미스 특임대' 장병들 휴전후 방한540개 돌로 '구 초전비' 쌓아 전우들 희생 기려개인 땅에 지어져 이전… '신 기념비' 건립돼'옛 기념비 동판' 한때 분실… 하와이서 발견지갑종씨가 사들여 미군 도움으로 들여와'KSC 안내판' 1972년 미군이 주변 정리뒤 부착2020년 죽미령에 스미스평화관·평화공원 개장 유엔군 초전기념비오산에는 두 개의 초전기념비가 있다. 구분하기 쉽게 '구(舊)'라는 접미사가 붙은 초전기념비는 한국전쟁이 중단된 직후 1955년 스미스 부대 장병들이 돌아와 전사한 전우를 기리며 540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전투 당시 B중대 1개 소대가 배치됐던 99고지에 위치해 1990년대까지 오산주민들 사이에서 'UN탑'이라고 불렸다.또 하나는 1982년 4월 건립된 것으로 1980년 화성문화원장이 국방부장관과 교통부장관, 경기도지사 등에 건의해 마련된 '신(新) 초전기념비'가 있다.이 가운데 구 초전기념비는 불리한 전황 속에서 역사성을 인정받아 ▲초전기념비에 부착됐던 옛 동판 ▲한국노무재단(KSC) 안내판과 함께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이들 경기도문화유산은 UN군 초전을 기억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6)] 안산·시흥 염전 달리던 '소금운반용 궤도차'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6)] 안산·시흥 염전 달리던 '소금운반용 궤도차' 지면기사

    영화 '엄마없는 하늘아래(1977)'의 첫 장면은 황량한 염전 풍경과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이 대조를 이루며 시작된다(왼쪽 스틸컷). 스치듯 지나가는 1970년대 염전의 풍경에는 목조 창고와 줄 지은 전봇대 등으로 이국적인 느낌마저 든다.이 가운데 화물차라고 하기엔 적재 공간이 길고, 열차라기에는 작은 탈 것 하나가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열차 보다 작은 꼬마 열차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염전에서 소금을 운반할 때 사용하던 이른바 '가시렁차'라고 불린 궤도차다.안산·시흥, 근현대 소금산업 중심1969년 수입산 유입에 위기 맞아신규 염전 개발로 부흥기도 잠깐시화지구 개발·오염에 쇠퇴일로국내 제염 산업은 고려시대 기록물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간 관련 유물이 문화재로 지정된 적은 없었다. 경기도가 지난해 안산 동주염전 소금운반용 궤도차를 경기도 등록문화재로 등록한 것이 사실상 최초의 사례가 됐다.소금 산업은 어떻게 안산·시흥, 경기도민의 삶을 지탱해왔고, 왜 하향길을 걸었을까. 동주염전 소금운반용 궤도차가 지나온 궤도를 따라 소금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환경 오염이 앗아간 삶의 터전, 경기도 염전 서해는 조석간만의 차로 소금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근현대 소금 산업의 중심이 안산·시흥이었다는 사실과 활발하던 경기도 제염산업이 환경오염으로 사실상 맥이 끊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운반용 궤도차' 발견해 복원한때 한번에 20량·시속 20㎞ 운행염전 한켠에 십수년간 잊힌채로"안산 생활사 자료 보전 노력 필요"1908년 발간된 '한국염업조사보고'에 따르면 인천, 김포와 함께 당시 안산군은 제방이 없는 염전으로 유명했다. '한국수산지(1911)'에서도 '안산군 연안에는 염전 개발을 위해 적당한 곳이 적지 않다'며 '1년 생산액은 약 336만근(2천t)'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안산지역의 제염 산업은 역사가 오래됐고 주요 소금 생산지로서 주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인근 시흥시 정왕동 일대에도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5)] 안산 산업화의 증인 '경3륜 T600' '목제솜틀기'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5)] 안산 산업화의 증인 '경3륜 T600' '목제솜틀기' 지면기사

    오는 7월 정식 개관을 앞둔 안산산업역사박물관. 화랑호수를 뒤로 한 박물관의 고요한 외부 풍경과 달리, 안산시의 산업역사를 망라한 박물관 내부는 관람객들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전시물들을 두르고 있는 포장재 속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숨겨져있었다. 안산산업역사박물관은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오래된 첨단'이 잠들어있다. 대표적으로 경기도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기아 3륜 T600'과 '목제 솜틀기', '동주염전 소금운반용 궤도차' 등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과거의 첨단들이 지금의 안산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안산을 넘어 경기도, 대한민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제조업의 정점, 자동차 산업자동차 산업을 제조업의 정점으로 보는 산업 전문가가 적지 않다. 해외에 수출할 정도의 수준을 갖춘 자동차 회사가 있는 나라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만 봐도 이런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전후, 아무런 기반이 없던 대한민국이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어떻게 갖추게 됐을까.한국 최초의 자동차가 1903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들어온 이래, 자동차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1920년대에는 전문 정비소·제조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자동차도 크게 줄었지만 드럼통과 미군 폐차에서 얻은 엔진으로 재생 자동차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1955년에서야 국내 기술·인력으로 조립된 최초의 자동차 시발 자동차가 등장하는 데, 이미 국산화율이 50%에 달했다는 점에서 재생 자동차를 다룬 경험이 토대가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자동차 공업 5개년 계획이 발표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의 노력도 크게 기여했다.이후 시대를 특징할 수 있는 여러 자동차 모델이 나왔지만, 안산산업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경3륜 T600은 한국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제품이다. 기아자동차가 자전거 부품 제조 공장에서 대표적인 자동차 생산업체가 되는 과정을, 또 작지만 효율적인 디자인으로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19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4)] 부천 '한미재단 소사 4-H 훈련농장 사일로'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4)] 부천 '한미재단 소사 4-H 훈련농장 사일로' 지면기사

    벚꽃이 한창인 4월의 부천 소사 여우고개. 벚꽃비가 내리는 풍경 사이로 건물이라기보다는 폐창고에 가까운 건물 몇 동이 화사한 경치와 대비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8동의 건물과 굴뚝같은 모양의 사일로(가축 사료인 사일리지를 만들어 저장해 두는 원통형 창고) 하나가 남아, 이 곳이 농업국가였던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만든 '부천 한미재단 소사 4H 훈련농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한때 전국에서 몰려든 훈련생들로 활기가 넘쳤던 곳이지만, 지금은 이 건물 몇 동만이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지금은 그 기록도 찾기 힘든 한미재단 훈련농장에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의 결과가 어떤 과실로 맺어졌을까.전후 한국사회에 상당한 영향 끼친 한미재단 한미재단(American Korea Foundation-AKF)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설립된 비공식 원조기관이다.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구호단체가 설립됐는데, 그 중 한미재단은 피폐해진 전후 한국을 체계적으로 지원했다.사절단이 먼저 현지조사를 수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구호활동을 펼쳤는데, 미국 내에서 기부받은 물품과 기금이 한미재단을 통해 전달되면서 한국의 보건에서부터 사회복지, 교육 등 적재적소에 적절히 분배될 수 있었다.특히 농업구조와 농촌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조직된 청년단체 4-H와 함께 한국 농업 전반의 고도화를 견인, 경제적 기초를 닦아 지금과 같이 선진국 반열로 도약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그런 한미재단은 왜 부천에 4-H 훈련농장을 지었을까. 부천은 가까이 서울과 인천을 마주하고 있어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기도농사시험장·잠종제조소·소사연초시험장 등이 당시 부천에 자리했던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한국전쟁 비공식 구호단체 '한미재단'서울·인천 가까운 부천에 훈련농장 건립 한미재단은 전후 복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4년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 한미재단 만찬회에 참석해 한국의 재건 의지를 강하게 피력한 연설을 봐도 그 중요성을 가늠해 볼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3)] 말레이지아교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3)] 말레이지아교 지면기사

    4월의 따스한 봄 햇볕이 내리는 날의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과 금촌·광탄을 오가는 차량들이 쉴새 없이 고산교를 통과하고 있다. 그 옆으로 생긴 지 오래돼 보이는 다리 하나는 과거 자신의 역할을 고산교에 잠시 양도하고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오래된 다리 하나가 경기도근대문화유산인 '말레이지아교'다. 여느 도시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리 중 하나로 보이지만, 콘크리트를 긁어서 새긴 듯한 '마레이지아교'라는 글자와 건축연도 등이 말레이지아교가 떠받쳐온 시간의 무게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 2019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은 그 해 첫 해외순방일정으로 말레이시아를 방문했다. 일정 중 하나로 한-말 비즈니스포럼에 참석한 문 대통령은 "1960년대에는 말레이시아가 보내준 원조금으로 한국 파주에 '말레이시아교(현 말레이지아교)'라는 다리를 지었다"며 오랜 우호 관계를 자랑했다. 이어 "20여년 후에는 반대로 한국기업이 말레이시아에 '페낭대교'를 세우기도 했다"며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을 두 교량을 통해 소개했다.소박한 교량, 국가 경제의 자부심 되다.길이 60m, 폭 7.4m. 2차선의 철근콘크리트로 어떠한 멋도 내지 않은 교량이다. 1966년 아직 우리나라가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할 때, 말레이시아 정부가 보낸 대외 원조자금 5천 달러 상당으로 건설이 추진됐다. 경기도와 당시 파주군도 각각 300만원, 200만원을 보태 경기북부 경제의 핵심 지역인 조리읍에 말레이지아교가 들어설 수 있었다.경인일보(당시 제호 인천신문)와 대한늬우스 등에서 준공식 당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데 수백명의 인파가 몰려 말레이지아교의 개통을 축하했다.독특한 멋이나 건축양식이 있는 것도 아닌 말레이지아교가 주목을 받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경제의 자부심을 상징이기도 해서다. 한국전쟁의 상처서 못 벗어난 1966년말레이시아 정부의 '5천 달러' 원조해외 원조가 필요한 시기를 보냈던 한국이 20년도 채 되지 않은 1982년 말레이시아에 동양 최장의 사장교를 건설하는 기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2)] 방화수류정 자개상, 근대건축도면 일괄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2)] 방화수류정 자개상, 근대건축도면 일괄 지면기사

    화홍문은 '수원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엄밀히는 화홍문의 수문 7곳을 통해 쏟아지는 물보라와 어우러진 '화홍관창'의 모습을 8경 중 하나라 말한다. 가족과 연인의 나들이 장소는 물론, 밤의 비경이 미려해 한 데 모여 있는 방화수류정·용연과 함께 경기도의 대표 관광 코스로도 각광을 받는 '화홍문의 물보라'는 사실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장마철 취수원인 광교저수지에서 수량을 댐을 통해 방류할 때가, 평소에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철철 넘치는 물보라로 변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지난해 10월 선정된 경기도 등록문화재 11건 가운데 수원에 있는 문화재는 2건이다. 두 문화재 모두 화홍문과 엮여 있는 문화재란 점이 흥미롭다.수원박물관에 소장돼있는 '방화수류정 자개상'과 '수원 화홍문 기타복구공사설계도'가 포함된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도면 일괄'(94점)이 도 등록 문화재로 모두 일제강점기 때 제작됐다. ■'방화수류정 자개상', '사통팔달' 수원의 숨결'방화수류정 자개상'은 일제 강점기 때 제작된 공예품으로, 수원 화성의 주요 문화재인 방화수류정과 용연, 화홍문이 한 데 어우러진 보기 드문 자개상이다.자개 조각을 모양대로 잘라 넣는 근대의 나전기법을 활용한 공예품으로서 마치 풍경화를 입힌 듯 상판의 회화적 문양이 정교하게 들어간 것이 큰 특징이다. 상의 네 곳 모서리와 다리에도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는 점에서는 이 작품을 대했던 당대 예술가들의 진중한 마음과 노고도 엿볼 수 있다.이 자개상의 제작 연대(1910년대 중반~1936년)는 상을 뒤집으면 보이는 '이화형美'의 표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 표식은 수원을 비롯한 대도시를 배경으로 당시 관광, 예술 산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찍은 일종의 '상표'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대한제국 황실의 지원을 받아 1908년에 '조선의 전통적 공예미술의 진작'의 취지로 만들어진 '한성미술품 제작소'에 뿌리를 둔다. 이를 1911년 일본인이 넘겨받아

  •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 전쟁의 상흔이 깃든 '피난민 태극기'

    [경기도 근대문화유산 탐방·(1)] 전쟁의 상흔이 깃든 '피난민 태극기' 지면기사

    시간은 흐르지만, 사람은 시간에 뿌리를 박고 줄기를 뻗는다. 시간을 양분 삼아 뿌리로, 줄기로, 가지로 삶은 뻗어나간다.우리가 근대문화유산을 발굴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전통문화유산에 비해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근대문화유산에는 찬란한 과거의 영광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과 한국전쟁의 상흔, 산업화 시대를 헤쳐온 선배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지금 우리의 일상이 선배들이 일궈놓은 토대에서 나온 것인 만큼 근대문화유산만큼 우리 사회의 모습과 나아갈 방향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경인일보는 경기도의 근대문화유산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는 대화의 장을 만든다. → 편집자주1987년 8월 31일미 육군 2사단 소속 중령 존 휘트만은 평소 알고 지내던 당시 동두천시 광암동 동장에게 낡은 태극기 하나를 꺼내 보였다.한국전쟁에 참전하셨던 아버지가 한 피난민에게 받은 태극기라고 간략하게 소개한 태극기. 이미 음양陰陽을 뜻하는 태극 무늬에서 양陽에 해당하는 붉은 색 염료는 빛이 바라 흑백 필름으로 비춘 모습같이 보였다.우리가 흔히 쓰는 태극기에 비해 태극 무늬는 크고 상대적으로 건곤감리乾坤坎離가 작게 그려져 있어 태극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에서 제작된 것이 아닌, 누군가가 직접 그려서 만든 태극기로 보였다.또 앞면만 채색됐다는 점에서 공식적인 행사나 선체 등 밖에 걸기 위해 제작된 태극기가 아니라 액자와 같은 것에 넣어져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는 태극기였다.존 휘트만 중령이 전달해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는 간단한 사연 외에 특별한 내력이 전해지지 않았던 낡은 태극기는 '피난민 태극기'라는 이름으로 2002년 5월 동두천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개관할 때 다시 기증돼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있다.태극기의 꿈그간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유추해보자면, 피난민 태극기는 한국사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가까스로 전세를 반전시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