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안, 스물셋 죽음 뒤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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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겪었던 상처… 미룰 수 없는 위로의 시간 [뚜안, 스물셋-죽음 뒤의 벽·(3)] 지면기사
한국도 한때 타국에서 일하다 숨진 가족의 소식을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 했던 유족을 둔 나라였다. 그 기억은 경제 성장의 서사 뒤로 밀려났고, 지금 이 땅에서 일하다 숨진 이주노동자의 유족이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도의 이번 조례는 그 긴 시간 끝에 처음 놓인 디딤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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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주노동자 유족 지원 경기도 조례, 법으로 제정해야 지면기사
베트남 청년노동자 응우옌 반 뚜안(23)씨가 지난 3월 이천의 한 자갈·모래 제조공장에서 컨베이어벨트 설비를 점검하던 중 기계에 끼여 숨졌다. 당시 현장에는 안전 덮개와 비상정지 버튼이 없었고, 2인 1조 작업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비극은 한 이주노동자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해외에 거주하는 유족은 장례와 보상, 수사 과정에서 또 다른 장벽과 마주해야 했다. 경인일보는 특별기획 ‘뚜안, 스물셋-죽음 뒤의 벽’(6월25·26일자 보도)을 통해 국경 밖 유족이 겪은 제도의 ‘몰감수성’과 방치된 유족의 권리를 집중 조명했다.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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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죽음 뒤에도 벽이 있다 지면기사
허락받은 취재만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스물셋, 뚜안씨 죽음 이후 오래 남은 것은 닫힌 문이었다. 위임장을 든 뚜안씨의 사촌누나 린씨와 활동가들은 경찰서 문턱에서 멈췄고, 베트남의 가족은 먼 곳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직계가족이 아니고, 한국에 없고, 말이 통하지 않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말 속에 묻혔다. 죽음 뒤에도 벽이 있었다. 잠입취재로 본 것은 거대한 비밀이 아니었다. 당연하게 지나가던 부조리였다. 공장 천장까지 뻗은 거대한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끼임 사고’ 네 글자는 작았다. 노동자 홀로 그 기계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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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死지… 우리 아버지들의 역사 ‘이주노동’ [뚜안, 스물셋-죽음 뒤의 벽·(2-1)] 지면기사
파독 광부의 시신은 아연관에 담겼다. 장례사와 상의해 관을 맞추고 시신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새지 않도록 완전히 봉한 뒤 비행기에 실었다. 한 사람을 고향으로 보내는 데는 무려 몇 천 마르크가 들었다. 1970년대 서독에서 일한 한국인 광부의 월급은 600마르크 정도(한화 15만원)로 당시 한국 기업 월급이 2만~3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서독에서 일한 광부 김근철씨는 훗날 그 일을 “참 힘들었다”고 기억했다. 김씨는 광산 통역을 맡았다. 이곳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이 병원에 실려 가거나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물건을 사거나 편지를 써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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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의 이주인권 활동가가 짚은 ‘국경 밖 유족의 높은 담장’ [뚜안, 스물셋-죽음 뒤의 벽·(2-2)] 지면기사
경인일보는 이주노동자 사망사건 이후 현장에서 유족 등을 지원해온 활동가와 법률가 등 5명에게 해외에 거주하는 유족을 돕는 과정에서 마주한 문제점을 물었다. 국경 밖 유족이 한국의 수사·장례·보상 절차에서 권리 주체로 서기 어렵다는 진단이 공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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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사망 외국인 노동자 지원 조례 큰 의미” 베트남에서 온 편지 [뚜안, 스물셋-죽음 뒤의 벽·(1-1)] 지면기사
청년 노동자 응우옌 반 뚜안(23)씨가 이천의 한 자갈공장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지 석 달. 경인일보가 지난 9일 경기도의회 본회의 조례 의결 소식을 전하자 일주일 뒤 베트남 응에안에 있는 뚜안씨의 남동생 뚜(21)씨로부터 답신이 왔다. 전국 최초로 제정된 ‘산업재해 사망 외국인노동자 유가족 지원 조례’는 뚜안씨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조례에는 입국 절차 지원, 체류 기간 중 생활 지원, 장례와 시신 송환, 통역과 법률 정보 제공 같은 조항들이 담겼다. 모두 누군가에게는 당연했을 일들이다. 그러나 뚜안씨 가족에게는 무엇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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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외국인 유가족들에겐 너무 멀리 있었다 [뚜안, 스물셋-죽음 뒤의 벽·(1-2)] 지면기사
법은 무엇을 했는지 묻지만 어떻게 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이라서 한 번 더 설명해주고, 한 번 더 기다려주고, 한 번 더 물어봐주는 일은 어떤 법에도 의무로 적혀 있지 않다. 그 ‘한 번’을 사람들은 감수성이라 부르지만 ‘몰감수성’은 죄가 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