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칼럼

[경인칼럼]'신사와 숙녀'의 종언

유럽에선 관행적 인사말 사용하지 않기로
우리나라 '성중립' 국제적 수준 크게 미달
폭력으로 중단 퀴어축제 '성평등의식 민낯'
소수자 배려하는 도시의 개방·관용성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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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 인천연구원 선임연구위원·객원논설위원
'신사와 숙녀'라는 호명을 유럽의 지하철에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행사나 연설을 시작할 때 관용적 인사말인 '신사, 숙녀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영국은 2017년 7월부터, 네덜란드는 2017년 12월부터 모든 열차와 역사 안내방송에서 승객들을 '신사 숙녀'라는 호칭 대신 '여행자(travelers, passengers)'로 바꾸어 쓰고 있다. 남자와 여자로만 나누는 기존의 성 구분이 성소수자를 소외시키고,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을 고착화시키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사는 남자를 높여 부를 때나, 사람됨이나 몸가짐이 점잖고 교양이 있으며 예의 바른 남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서양이나 동양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신사'는 교양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급이나 권세 있는 지방의 토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새로 형성된 중산층 계급인 젠트리(gentry)가 영국 신사의 어원이었다. 한편 한자어 '신사(紳士)'는 중국 명·청 시대의 지배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신사'계급이 근대화 과정에서 상업에 진출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신사라는 뜻의 '신상(紳商)'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출현했다. 개항기 인천에서 활동한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協會)라는 단체의 구성원을 보면 서상집, 박명규 등 주로 객주 상인들이었다.

신분제와 모더니티를 버무린 '신사와 숙녀'라는 말의 퇴장은 어쩌면 시간문제였을지도 모르고, 또 사소한 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소수자 배려라는 명분은 존중할만하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선진국들의 배려 정책은 세심하다. 스웨덴학술원은 2015년, 자신의 성을 남녀로 구분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을 위한 대명사 '헨(hen)'을 공식단어로 등록했다. 스웨덴어로 남자(han)와 여자(hon)를 합성한 단어이다. 미국도 성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본격화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본인의 성을 표시할 때, 남성 또는 여성이 아닌 중립적인 성('ze'나 'they')을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캘리포니아주는 공공건물의 화장실에 남녀 구분 표지판을 없앤 '성 중립화'를 의무화한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1인용 화장실의 경우 성 정체성의 구분 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문단과 연극계를 비롯한 문화예술계와 일부 대학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드러났지만 여전히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성중립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국제적 수준에 크게 미달한다. 국가가 주민등록번호로 양성 구분의 '대못'을 숫자로 박아 놓은 상태이니 말이다. 직업을 가진 여성들만 여의사, 여교사, 여학생, 여비서. 여군, 여류시인, 여류화가 등으로 나눠 부르는 우리 관행에 대한 '정치적 언어 수정(political correctness)'도 시급해 보인다.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민주주의적 과제가 남아있지만 일상공간에서의 성소수자 배려와 젠더중립적 실천도 중요하다.

지난 9월 인천 동구 동인천역 광장에서 열릴 성소수자들의 축제인 퀴어축제가 기독교 단체의 위협과 폭력으로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태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성평등의식의 민낯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세계가 주목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세계도시를 지향하는 인천에서, 그것도 개방성과 다문화성을 장소성이라고 내세우던 개항장 인근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도시의 개방성과 관용성, 시민의식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리트머스지와 같다. 세계도시와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도시라면 마땅히 문화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다문화도시여야 한다.

/김창수 인천연구원 선임연구위원·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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