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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권선구 고색동에 남아 있는 옛 벽돌공장 영신연와 굴뚝과 사택 전경. /수원특례시 제공

'영신연와'. 지난 1973년 벽돌 제조공장으로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에 지어져 50여년 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서수원 지역의 근대 건축물이다. 지금은 인터넷 포털 지도나 내비게이션 애플리케이션 등에서 검색되지 않을 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영신연와는 일제강점기 이후 건축물 수요가 폭발했던 지난 1970~1990년대만 해도 매년 1천만 장에 달하는 벽돌을 찍어내며 당시 수원지역 산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우리나라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호프만식 가마'를 공장 내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도 크다.

하지만 영신연와는 지금 '보존'과 '개발'이란 갈림길 앞에 섰다. 영신연와를 포함한 24만8천여㎡ 부지가 고색지구 도시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돼 민간개발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신연와의 역사적 가치에 따라 도시재생 등을 통해 원형 보존해야 한다는 시민들 의견과, 공장은 철거하고 기록만 일부 전시하는 방안과 함께 도시개발을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개발주체 측 입장이 맞서고 있다. 이에 영신연와는 현재 어떤 모습이고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 살펴본다.

■ 한때 하루 수 만장 벽돌 찍어 낸 산업유산

영신연와는 벽돌공장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늘어난 건축물 수요와 근대 산업화 등에 벽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국내에 우후죽순 벽돌공장이 들어섰는데 영신연와도 그렇게 서수원 지역에 건립된 공장 중 하나다. 당시 수원의 유지였던 박지원씨가 부지를 사들여 지난 1973년 완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70~1990년대 해마다 1천만장 벽돌 찍어내며 국내 산업발전에 큰 역할


영신연와는 1970~1980년대 인근 동보연와(현재 태산아파트 자리)와 경쟁하며 연간 1천만장의 붉은 벽돌을 쉴 새 없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공급이 늘어 가격 경쟁력이 낮아지고, 고층 아파트의 도입으로 구조재와 마감재가 변화하면서 3D산업이었던 벽돌공장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영신연와 역시 20년간의 눈부신 영화를 뒤로한 채 1993년 가동을 중단했다.

지금 공장 주변 넓은 부지는 일부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용도로 쓰거나 중고차 차고지, 창고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부지는 과거 공장이 가동될 당시 수많은 벽돌을 쌓아두던 공간이었다. 흙을 채토해 반죽하는 제토 과정을 거쳐 네모난 벽돌 모양으로 성형한 뒤 1달간 건조하기 위해 쌓아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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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연와 공장 내에서 벽돌이 소성되던 내부 가마의 모습. /수원특례시 제공

■ 우리나라 마지막 원형 보존 '호프만식 가마'


영신연와는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호프만식 가마'를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독일의 기술자 프리드리히 호프만(1818~1900)이 고안해 명명된 호프만식 가마는 열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여 벽돌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방식이다. 긴 타원형으로 가마를 배치해 예열과 소성(燒成), 냉각, 요적(窯積) 등 벽돌생산 과정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다.

길이 62.5m, 폭 13.7m, 높이 3.2m 규모의 영신연와 가마도 이와 같은 방식이 적용됐다.

총 22개 가마입구가 있어 각 가마별로 벽돌을 쌓은 뒤 예열하고 1천200도씨 이상으로 구운 다음엔 다시 열을 식혀서 벽돌을 빼내기까지 과정이 순환돼 매일 5만장 이상 벽돌이 생산됐다. 가마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3교대로 가루 석탄을 공급하기도 했으며 안정적 노동력 공급을 위해 노동자들을 위한 사택도 제공됐었다.

국내 유일 '호프만식 가마' 옛모습 간직… 22개 가마 연결 44m 굴뚝 눈길

우리나라에 영신연와와 같은 호프만식 가마는 수십여곳에 달했었으나 지난 2020년 기준 3곳만 현존한다. 이 중 한 곳은 터널식으로 개축해 호프만식 가마를 확인할 수 없고, 다른 한 곳도 원형이 남아있지 않아 가마와 사택이 모두 남아 있는 곳은 영신연와가 유일한 것으로 파악된다.

영신연와를 직접 찾아가 보면 드높이 서 있는 굴뚝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데, 이는 22개 가마와 모두 연결되는 약 44m 높이에 달하는 굴뚝이다. 외벽이 매우 낡은 모습이지만 굴뚝 상부엔 아직 '영신연와'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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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식 가마의 아치형 입구가 드러나 보이는 영신연와 벽돌 가마와 굴뚝. /수원특례시 제공

■ "이제는 어디로 못 가"… 아직 남아 있는 사택 거주자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영신연와에는 근로자들이 사용했던 사택도 있었는데 이 또한 현재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시 일했던 몇몇 노동자가 여전히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기도 하다.

영신연와 입구 쪽 벽돌식 건물 4개 동이 노동자들이 살던 숙소인데 방과 부엌이 각 1칸씩 이어져 각 동마다 12호실씩 총 50여 가구가 거주했다. 원래 2개 동뿐이었던 사택은 벽돌산업의 활황으로 지난 1981년 4개 동으로 늘었다. 사는 동안 자녀가 늘면서 직접 파벽돌을 주워 방을 증축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도시개발구역 포함돼 '원형 보존 vs 일부 전시' 시민·개발자 입장 '팽팽'


하지만 사택동의 현재 모습은 폐허와 다름없다. 거주하던 노동자들이 이주하면서 그대로 두고 간 세간살이와 옷 등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곳곳이 무너져 내린 슬레이트 지붕과 벽돌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6명은 여전히 사택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사택에 거주하는 이상길(75)씨는 "청춘에 이곳에 와서 부인과 함께 일하며 아이들 낳고 키우고 잔뼈가 굵어 이제는 어디로 갈 수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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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연와를 지키는 수원시민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지역 작가들이 수원시청 로비에서 열린 관련 전시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수원특례시 제공

■ 용역 통해 '근현대 유산 가치' 확인됐으나 도시개발 가능성

운영이 중단된 이후 아무런 보호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영신연와는 오랜 시간이 흐르며 빠른 쇠락이 진행됨에 따라 지붕과 외벽체 등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수원시는 겉보기에 낡은 것과 달리 관련 용역을 추진해 영신연와의 근현대 산업유산의 가치를 확인했다. 지난 2020년 진행한 '수원 영신연와 벽돌공장 일원 기록화 조사 용역'을 통해서다.

문화재 실측업체가 문화재 위원과 건축학과 교수 등과 함께 용역에 나서 관련 자료 수집과 현황, 실측, 도면, 사진촬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영신연와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했다. 수원시정연구원 수원학연구센터가 발간한 '벽돌공장 영신연와'에도 영신연와에 대한 이야기와 노동자들의 구술이 채록돼 있다.

폐허 다름없지만 사택 못 떠나는 6인 "청춘을 바친 곳… 이제 어디 못 가"


하지만 영신연와와 사택 일대는 현재 고색지구 도시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돼 철거될 위기에 놓여 있다. 사유지에 건축된 사유 재산이어서 향후 도시개발사업 진행에 따라 영신연와가 존치되거나 보존될지 또는 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을지 등은 모두 미지수다.

이에 수원시는 향후 영신연와 공장의 보존 및 활용 가능성과 독일과 일본 등에서 호프만식 가마를 활용한 사례 등을 기록화 조사에 포함시켜 향후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이에 수원특례시 관계자는 "영신연와는 보는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흉물로, 누군가에게는 보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라며 "수원시에 남은 마지막 산업유산에 대해 시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준석기자 joons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