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

[인천인물 100人 ·70]문인 김도인

출판인·신문기자·교육운동가·연극인·소설가… 개화기 인천문화 중심에 서다

   

 




   >70< 문인 김도인

  

   
"인구 십만을 산(算)하는 인천에 이곧을 본위(本位)로 삼는 출판물 한개쯤 없을소냐? 미력이나마 공헌이 있고저 출생하였으니 왈 '월미(月尾)'."('월미'발간사 중) 1937년 1월 7일, 월간지'월미'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 인천엔 '창간호' 한 권이 전해지고 있다. 연세대 도서관에 박혀 있던 이 책은 2001년에야 세상의 빛을 다시 봤다. '인천문화비평'호에 특집으로 '월미'의 영인본이 게재된 것이다. '월미'는 원래 '백미(白尾)'란 이름으로 창간이 준비됐다고 한다. 이 잡지의 편집·발행인 김도인(金道仁)은 잡지 명을 월미로 바꿔 창간호를 낸 이유를 '제호변경에 대하야'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양자(兩者)가 다 자의(字意)가 깊고 예술미가 있거니와 백미(白眉)는 보통적이 않이로되 뜻이 높은 것, 월미는 우리 인천을 표시하는 점에 있어서 적당하다."



   김도인은 잡지 명칭을 정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인천성'을 담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월미'를 편집할 때 인천을 지리적·정서적·문화적 중심축으로 삼았다. 인천 중심적 편집방향은 '월미'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다. '

   인천을 노젓는 이들', '인천의 인물은 누구누구?', '인천지형의 곡선미' 등 지역성을 반영하는 글이 앞부분에 배치돼 있다. 이어서 '인천', '가정란'이란 고정꼭지를 마련해 '권투계의 장래', '가정상식' 등 지역 소식과 실생활에 필요한 상식을 전달하려 했다. '월미'는 문예전문지가 아닌 지역종합소식지로 기획, 발간됐다.

   김도인이 개화기와 해방 전후에 인천에서 활동하면서 '굵은 선'을 그은 건 분명하다. 그는 당시 인천에서 가장 의미있는 잡지를 발행한 것은 물론 신문기자로, 교육운동가로, 연극인으로, 문인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인천의 무대 중앙을 장식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그의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김도인이 태어나고 죽은 연대조차 확실치 않다.

   
  1937년 '월미'를 발간할 당시 김도인은 항정에 거주했다. 지금까지도 이곳에는 일본식 건물이 몇 채 남아 있다.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11일자로 김도인을 인천지국 기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5일엔 '본인 뜻에 따라(依願)' 해직했다. 동아일보사에 연락해 김도인에 대해 물었지만 상세한 신상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김도인의 행적은 당시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인천에서 활동한 극작가 진우촌(秦雨村·1904~?)이 주도한 지역 문학청년들의 동인지인 '습작시대'에도 참여한 김도인. 그는 '나의 결투장'이란 글을 통해 '습작시대' 동인들의 '미숙함'을 비판한 김기진(金基鎭·1903~1985)에게 공개서한을 보낸다. 이 서한에서 보인 다음과 같은 '단호함'은 김도인의 젊은 패기를 보여준다.

   "일보를 압섯다는 이들의 주제넘은 꼴이란 대개 이와가튼 모양이니 여긔서 더욱 습작시대의 출발한 뜻이 깁거니와 …(중략)…우리의 칼날이 엇더한지도 몰으고 어는새 나대이는 것은 너무나 경망한 짓이 안일까합니다."

   그는 연극 및 공연에도 손을 댔다.

   인천 지역 최초의 지역신문인 대중일보(大衆日報)는 1947년 3월 18일자로 인천 문학·연극·미술 동맹 등 여러 단체가 주최한 종합예술제 흥행책임자로 김도인 등 3명을 '검속'(鈐束·엄중하게 단속)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들 단체는 경찰에 연극 '하곡(夏穀)'을 상영하기로 허가받고 취주, 시낭송, 무용 공연 등을 했다는 이유로 인천 경찰서의 단속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앞선 1926년 김도인은 진우촌과 함께 연극모임 '칠면구락부'에 참여해 활동했다.

   김도인은 8·15 해방 후 대중일보에 다양한 형식의 산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5년 11월 10일자는 그가 '소년소설'이라 이름 지은 '말다툼'을 싣고 있다. 같은 날 대중일보는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한 김도인의 '야담' '삼불당(三不堂)'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는 1부 32회, 2부 5회까지 나간 뒤 중단됐다.

   안정현 인하대 강사는 지난 2003년 '인천학연구' 2-1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김도인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습작시대'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 '월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다. 그리고 미군정기에는 인천문학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 인천문학동맹의 기관지인 '인민문학'의 발간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여러 단체와 연극 '하곡'을 상연하였는데 … 이처럼 김도인은 인천지역에서 활동을 왕성하게 한 문인이었다."

   김도인은 1945년 말부터 '월미'속간을 추진했다. 작업은 인천 본정(本町) 2정목(丁目) 10번지(현재 중구 중앙동 2가)에서 진행됐다. 지난 12일 중앙동 2가 제물포조약길에서 만난 이종학(82)씨는 2정목 10번지의 위치를 기억해 냈다. 1946년 황해도 장연에서 월남해 이곳에 정착한 이씨는 "해방 이후 최고였지, 본정(중심가)이니까, 시청도 있었지. 하여튼 사람이 늘 끊이지 않았어"라며 당시 거리 분위기를 전했다.

   해방이 가져다 준 '활기'가 '월미' 속간을 부추겼을 것으로 보인다. 대중일보 기사는 '월미'를 '향토지'(1945년 11월 13일), '대중적 향토종합지'(1945년 12월 21일)로 소개했다. 다음 해 1월 10일자 기사는 '월미'인쇄가 오는 1월 중순에 이뤄질 예정임을 알리고 있지만 다시 발간된 월미의 그 모습은 아직껏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도인이 교육활동을 했다는 기사도 보도된 적이 있다.

   동아일보는 1935년 2월 14일자에 '강화 동검도에 사립학교 설립'이란 제목의 2단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김도인이 "300여명 학령아동이 노상에서 방황한다는 기막힌 사정"을 듣고 "소규모 사립학교를 설치"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전했다.

   
  ▲ 중구 중앙동 2가에서 60년간 살아온 이종학씨가 옛 본정 2정목 10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서 김도인은 <<월미>> 속간 작업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2001년 이희환 박사가 '인천문화비평' 9호에서 '월미'를 발굴전재하고 김도인을 조명한 뒤 6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가 남겼던 흔적은 주 활동무대였던 인천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김도인의 출생과 유년시절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없다. 김도인에 대한 공식적 기록은 1948년 8월 25일자 대중일보에 실린 수필이 마지막이다. '월미'문예란을 맡았다고 알려졌고 1946년 월북한 송영(1903~1978)과 친분을 가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김도인이 월북했을 거라는 말도 있다. 전쟁통에 행방불명됐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도 있다.

   기자가 취재를 하며 이곳저곳에 수소문하던 중 강화교육청 한 관계자에게 연락을 받았다.

   "관련 서류를 찾아 봐야 하고, 그가 강화에서 교육활동을 하던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이분을 찾는 데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이제는 김도인의 구체적 행적을 밝히고, 유물을 찾아내고, 정리할 때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명래기자·problema@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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