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가천(嘉泉) 그리고 우현(又玄)

이영재

발행일 2016-06-16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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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이길여'가 터 잡고 진료 시작한 '용동 117번지'
일제 강점기 미술학자 '고유섭'이 태어난 곳이기도
한 터에서 우현과 길병원이 탄생했다는 의미있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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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인천본사 경제부장
1958년 인천 용동에서 진료를 시작한 '이길여 산부인과'가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병원을 찾은 서민들의 삶과 당시의 의료현실을 엿볼 수 있는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낮은 곳을 보듬으며 반세기 넘게 의료봉사를 펼쳐 온 '의사 이길여'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기념관은 1960년대를 전후한 산부인과의 모습을 3개 층에 재현했다. 1층에는 접수대와 진료실, 2층에는 수술실과 병실의 모습이 실제처럼 연출됐다. 3층에는 의사 이길여가 쓰던 왕진가방 등 소품이 전시돼 있고, 방문객을 위한 기념촬영 장소도 마련됐다. 3개 층이라고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참 작은 규모다. 하지만 날마다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던 환희와 감동이 전해지듯 그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이길여 산부인과는 개원 때부터 남달랐다. 의료기관들이 입원 환자에게 받던 '보증금'을 받지 않았다. 보증금이 없어 치료를 받을 권리조차 박탈당해야 했던 시대적 환경을 의사 이길여가 바꾼 것이다. 돈 없는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치료비 대신 고마움의 표시로 환자와 가족들이 가져온 쌀, 생선, 고구마, 감자, 채소 등이 가득했다. 산모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려고 인천에선 처음으로 초음파기기를 도입했다. 산모와 가족들이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몰려 들었다. 산모의 손쉬운 이동을 돕기 위해 설치한 엘리베이터는 인천의 명물로, 아이들의 놀이기구가 됐다. 그렇게 이길여 산부인과는 어려운 이들의 곁에서 늘 그들과 함께했다.

진료를 기다리는 산모를 더 빨리, 더 많이 보기 위해 바퀴 달린 의자도 개발(?)했다. 의자에 바퀴를 달아보니 진료대 사이를 빠르게 오갈 수 있었다. 차가운 철제 청진기가 행여 산모의 피부에 닿아 싸늘하게 느껴질 까 봐 청진기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는 내용은 이제 많은 이가 알고 있다. 그래서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은 의과대학을 만든 이후 줄곧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청진기'를 선물로 주고 있다. 따듯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환자를 대하라는 뜻이다.

길병원은 박애(博愛)·봉사(奉仕)·애국(愛國)을 원훈으로 삼고 있다. 고통받는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다가가 인술을 베푸는 것이 의무이고, 나를 키워준 조국에 대한 은혜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삶에서 느껴왔던 신조를 원훈으로 정한 것이다.

의사 이길여가 중구 용동 117에 자리를 잡고 진료를 본 것은 어쩌면 우연이고, 돌이켜 보면 가천과 인천의 필연일 수 있겠다 싶다. 미국 유학에 필요한 비행기 삯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를 도와 요즘의 계약직 또는 아르바이트 형태의 진료를 하다 보니 환자를 두고 유학을 떠날 수 없었다. 유학을 미루고 환자를 돌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천이 고향이 됐다.

특히 이길여 산부인과가 터를 잡은 용동 117은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서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한 학자이자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우현(又玄) 고유섭(1905~1944년)의 생가 터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우현은 이곳에서 태어나 40세의 나이로 병사하는 짧은 생애 동안 회화사와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등 다양한 연구를 편 우리 미술사의 역사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한 터에서 우현이 태어나고 길병원이 태어났다는 사실, 또 하나의 의미있는 역사로 기록될 듯 싶다.

/이영재 인천본사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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