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석가모니의 비구 승가 해산과 탁발 없는 조계종

홍기돈

발행일 2018-09-10 제22면
글자크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링크
  • 메일보내기
  • 인쇄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메일전송
걸식은 육신 욕망 끊는 수행이자
가장 적극적인 무소유의 실천
타인 통해 자신 존재 깨닫는 계기
한국 1964년부터 '탁발 금지'
타당한 근거 어디엔가 있길 바라


월요논단 홍기돈2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당분간 조계종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불교계 상황은 암울할 듯하다. 총무원장 설정을 탄핵했다고는 하나, 그간 만연했던 악습을 청산해 나갈 세력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계종의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측에서는 현재의 간선제를 반대하고 있다. 선거인단 대부분이 자승 전 총무원장의 영향력 아래 있으므로, 자승 전 총무원장의 지원을 받는 후보가 새로운 총무원장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공론화되지 않았을 뿐 기실 자승 전 총무원장을 둘러싸고 제기된 여러 의혹들도 사소하다 치부하기는 곤란한 수준이다.

혼란한 불교계를 접하면서 석가모니의 비구 승가 해산 일화가 떠올랐다. 공양물의 배분을 두고 비구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자 석가모니는 승가를 해산시켜 버렸다. 이후 뉘우친 비구들이 하나, 둘씩 다가와 사죄하며 모였을 때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출가의 목적이 생활필수품을 마련하는 데 있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데 있다는 내용이었다.

"걸식이라는 것은 삶을 영위하는 가장 미천한 방법이다. 세상에서 걸식하러 돌아다닌다는 것은 욕하는 말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바른 목적을 추구하는 자라서 걸식하는 삶을 산다. 왕에게 이끌려서도 아니고, 도둑에게 이끌려서도 아니며, 빚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생계 때문에도 아니다. 오직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근심·탄식·고통·절망에 빠져 있고, 괴로움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괴로움의 무더기가 끝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다."(상윳따니까야- '걸식경')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구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 즉 걸식(乞食, 탁발)이 아닐까 싶다. 주지하다시피 음식 섭취 문제는 생존에 직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식하라는 것은 음식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초기승가에서는 음식에 대한 집착 및 욕망을 막기 위하여 음식의 저장·취사를 금지하였다. 그러니 걸식은 육신의 욕망을 끊어내는 수행이자 가장 적극적인 무소유의 실행이었던 셈이다. 또한 낮은 자리로 내려갔으니 하심(下心)을 수행하는 방편이기도 하였으며, 타인을 통하여 비로소 자신이 존재할 수 있음을 매양 깨닫게 되니 아상(我相)을 끊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겠다. 다른 한편에서는 걸식 과정에서 중생의 삶을 이해하고 포교해 나가기도 했으리라.

중요한 수행 방식이었던 만큼 석가모니 역시 걸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예컨대 잡아함경의 '걸식경(乞食經)'을 보면, 가사 입고 지팡이 짚은 석가가 아침 일찍 발우를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면모가 표현되어 있다. 심지어 탁발에 실패하여 굶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래도 석가는 걸식의 원칙에 따라 공양을 걸렀다. 마명(馬鳴)의 '붓다차리타'에 따르면, 인간의 숙명에 대해 고뇌하는 태자에게 사문(沙門)의 삶을 일러준 존재는 정거천(淨居天)의 왕이었다. 출가한 태자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처음 들었던 사문의 생활 방편, 즉 걸식을 이어나갔으니 끝까지 초발심을 이어나간 셈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조계종에서는 1964년부터 탁발을 금지하고 있다. 탁발 금지의 이유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대략 네 가지 정도가 확인되었다. 승려라 사칭한 이들로 인해 발생하는 민폐를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많았고, 타 종교에 대한 배려라는 주장도 있었다. 일각의 주장이기는 하나, 화폐를 중심으로 경제 체제가 바뀐 데 대한 적응이라는 해석도 있었고, 승려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설도 나타났다. 글쎄, 나로서는 이 가운데 어느 것도 탁발 금지의 근거로 타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모쪼록 내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탁발 금지의 타당한 근거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기를 희망해 본다. 계율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비구라면 마땅히 걸식으로써 삶을 이어나가야 했던 시대의 치열한 수행 자세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드러난다면 더욱 반가운 일이겠다.

/홍기돈 가톨릭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홍기돈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