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의 기억

[전쟁과 분단의 기억·(3)] 노르웨이 야전병원 '노르매시'

쓰러져가던 판잣집은 혈맹이 남기고 간 평화의 증표였다
입력 2023-03-06 20:14 수정 2023-06-07 16:25
지면 아이콘 지면 2023-03-07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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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동두천의 한 육군 부대로 전입한 한 군 관계자는 관할 훈련지 내에 방치된 한 '목조시설'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분명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시설처럼 보였지만, 무성히 자란 잡초에 둘러싸인 채 어떠한 문패도 없이 관리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발견한 시설이 6·25전쟁 당시 노르웨이 참전용사들과 파견 의료진들이 3년 동안 사용했던 야전병원 '노르매시'(NORMASH)라는 사실을 주민들을 통해 알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지구 반대편 노르웨이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달려온 이방인들의 피와 땀이 뒤섞인 유산이 어찌 이리 수십 년 동안 방치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당혹스러웠다.


곧장 그는 동두천시에 시설 관리와 보수, 문화재 지정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시는 당장 투입할 예산과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이대로 노르매시가 지닌 역사·문화적 가치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결국 군인 본분을 이어가면서 틈틈이 직접 보존에 나서기 시작했다.


2010년, 훈련지 내 방치된 건물 발견
당시 동두천시 관리 어렵다 답변에 나서
홀로 전기공급·주소등록 등 보존 노력

'노르매시' 1951년 민간 의료진이 개원
전쟁상황서 군·일반인 포함 9만명 진료
전후 남아 '국립중앙의료원' 건립 지원
2월 노르웨이 국회의장단 등 현장 방문
양국 우호 상징… '문패'마저 도둑맞아

"역사 담긴 문화유산 누군가는 지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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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노르웨이 파견 의료진들이 상주했던 야전병원 '노르매시' 앞 문패가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채 비석만 남아 있다.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 '문패'도 도둑맞았던 노르매시, 한 군인에 의해 재탄생하다




동두천시 하봉암동에 위치한 노르매시를 찾았다. '군사시설'이라 적힌 표지판과 철책선에 둘러싸인 노르매시 앞은 이날도 군 관계자가 지키고 있었다.


노르매시는 군 훈련장 안에 위치해 원래는 민간인의 출입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군사 지역과 분리되도록 제작된 철제 울타리와 노르매시만 왕래 가능한 쪽문을 직접 만들면서 사람들이 보다 손쉽게 시설 견학을 할 수 있게 됐다. 13년 전 노르매시는 국가기관과 지자체에 방치돼 건물만 달랑 있었지만, 시설 청소부터 전기 공급, 주소 등록까지 그의 손을 거치며 재탄생됐다.

군 관계자는 "건물의 등기부등본도 직접 했다. 외벽 목재는 부식돼 있었고, 건물 밖은 잡풀이 무성해 '흉물' 수준이었다"며 "노르웨이 야전병원이라는 역사적 가치에 걸맞은 문화재로 지키고 싶었다. 예산 등을 이유로 시로부터 관리를 거부 받았지만, 지자체가 하지 못한 보존을 마음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펜스 제작, 예초작업, 전기 연결 등의 관리를 지금까지 제가 줄곧 맡고 있다"고 말했다.

기획
야전병원의 정문과 보초소. /동두천시 제공

노르매시는 한국전쟁에 투입된 군인과 지역민들을 치료하기 위해 1951년 7월 노르웨이 국적의 민간 의료진들이 개원한 외과병원이다. 1954년 10월 폐원할 때까지 3년간 의료진 623명이 군인, 민간인을 포함해 대략 9만명을 진료했을 만큼, 전쟁 상황에서 전략 보강과 피해 지원에 큰 힘이 됐다.

전쟁 유산뿐 아니라 한국의 의료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점도 노르매시 가치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다. 노르웨이 의료진들은 노르매시 폐원 이후 공식적인 임무를 마쳤음에도 한국에 남아 덴마크, 스웨덴 의료진과 함께 '국립중앙의료원' 건립을 지원했다.

이렇게 1958년 문을 연 국립중앙의료원은 10년 동안 3국의 지원을 받아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서 저렴한 수가로 양질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의료시설이었다.

그러나 현재 노르매시는 이러한 역사적 설명이 남아있는 공식적인 문패조차 없는 상황이다. 군 관계자가 노르매시를 관리하기 수년 전 이미 도굴꾼들이 노르매시 기록이 적힌 동판 원문을 훔쳐갔기 때문이다. 국가와 지자체가 방관한 전쟁 유산의 상처가 글 한 자 없이 비어있는 노르매시 앞 비석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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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매시 야전병원의 내부 모습. /동두천시 제공

■ 노르매시, 대한민국과 노르웨이 평화와 협력의 '교두보'


노르매시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노르매시를 직접 세우고,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는 한국을 돕기 위해 찾아온 노르웨이 정부와 국민들이다.

지난 2월 10일 마수드 가라카니 노르웨이 국회의장과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노르웨이대사를 비롯 노르웨이 방한단 10여명이 노르매시를 방문해 시설을 견학했다. 이들은 앞서 동두천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내에 위치한 노르웨이 참전비에 헌화했다.

노르웨이 방한단이 노르매시를 향해 던진 메시지는 '평화'와 '협력'이다. 마수드 가라카니 의장은 "우리가 여기에 방문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관련된 노르웨이 역사를 알 수 있고, 그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함"이라며 "이곳 방문은 앞으로도 한국과의 유대 관계가 지속될 것이란 걸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노르매시 파견을 계기로 노르웨이와 한국의 관계는 두터워졌다.

노르매시 폐원 1년 후인 1955년 노르웨이 의료진과 참전용사들은 '노르웨이 한국연합'을 결성했고, 1977년 노르매시 설립 25주년을 맞아 참전용사들은 '노르웨이 한국참전용사협회'라는 단체를 추가 설립해 한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양국 우애 증진 등을 추진했다.

이후 1984년 노르웨이 한국 포럼, 2009년 노르웨이 한국친선협회 등 노르매시가 맺어준 인연들은 현재까지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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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0일 마수드 가라카니 노르웨이 국회의장이 동두천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내 노르웨이 참전비 앞에서 참배하고 있다. 2023.2.10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 잊지 말아야 할 '희생', 현실은 '방치'


73년 전 한국을 원조한다는 유엔의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노르웨이는 분주히 의료진 파견과 파병을 했다. 1951년 7월 이름도 낯선 한국을 돕기 위해 의사 85명, 간호사 123명, 성직자 7명, 장교 및 부사관 98명, 장병 294명 등 노르매시 스태프 600여명은 3년간 쉬지 않고 환자를 치료했다.

노르매시 스태프들은 본래 6개월 근무한 후 복귀해 교대될 예정이었지만, 자발적으로 복무기간을 1년 이상 연장했을 정도로 높은 열정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2명은 근무 도중 사고사하는 희생도 발생했다.

그러나 양국 관계 발전과 한국을 향한 희생정신의 상징이 된 노르매시는 한때 철거 위기에 놓였을 만큼, 상황이 녹록지 않다. 목조건물이라 건물 내부는 곳곳에 곰팡이 흔적이 많아지고 있고, 하천과 맞닿아 있어 범람 시 침수 위험도 큰 상황이다.

문제는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지 못해 아직 지자체의 관리 예산을 편성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동두천시는 올해 상반기에는 시 지정 문화재, 하반기에는 도 지정 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노르매시 보전에 앞선 군 관계자의 근심이 가장 크다. 내년 전역 예정인 그는 자신조차 노르매시를 관리하지 않으면 이대로 유산이 가진 가치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에 차있다. 그는 지금도 국가와 지자체에 노르매시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와 문화재 등록을 요구하는 등 홀로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과거 지자체에서 현장 감독을 나온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아직도 문화재 등록은 안 됐고, 시설 보수는 내가 한다. 가장 두려운 건 내년에 내가 전역하면 이 시설도 같이 철거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될 정도로 방치된다는 사실"이라며 "그나마 노르웨이에서 지속적으로 노르매시를 찾아오니 최근 시에서도 문화재 등록 등의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군인이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전쟁 역사가 담긴 문화유산인 만큼 후대를 위해 누군가는 나서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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