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아임 프롬 인천·(16)] 신포동 미군 클럽 휘저은 한국 대중음악 레전드 "지금의 K팝, 뿌리는 인천"

입력 2023-12-20 19:40 수정 2024-01-09 15:02
지면 아이콘 지면 2023-12-21 11면

 

어린시절 영종도에서 피란살이 했던 김홍탁입니다

초교 들어가자 6·25… 공무원 부친 '숙청'
집 지킨 모친… '영종 만석꾼' 조부 의탁
"아름다운 곳… 슬픔 많았지만 추억도"
"전쟁 이전 아버지 끌려갔다" 증언 주목

어머니가 선물한 기타… 음악에 눈 떠
동산고 시절 '캑터스' 리더로 클럽 연주
'키보이스' '히파이브' '히식스' 명성
'서울재즈아카데미' 설립… 후배 양성
"내년엔 고향에서 큰 콘서트 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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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김홍탁.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우리나라 최초 록밴드로 불리는 키보이스를 비롯해 히파이브, 히식스 등의 밴드를 이끈 인천 출신 전설의 기타리스트 김홍탁.



김홍탁의 유년 시절 인천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김홍탁은 해방 직전인 1944년 인천 내동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 성공회 성당인 내동 성공회성당이 잘 보이는 집이었다.

김홍탁의 아버지(김창선)는 창영초등학교를 나왔고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법원 공무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보다 4~5년 아래인 김홍탁의 어머니 홍정희 역시 창영초등학교 출신이다. 아버지는 책과 공부와 음악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결혼 전까지 곱게 자란 여성이었던 것 같다고 김홍탁은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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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탁의 부친 김창선 씨와 모친 홍정희 씨. /김홍탁씨 제공

김홍탁의 유년 시절 기억은 한국전쟁으로 시작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1학년이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김홍탁은 인천 영종도로 피란을 가야 했다. 영종도에는 친척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피란 과정에서 아버지·어머니와 잠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김홍탁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영종도로 피란을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법원 공무원인 아버지는 인민군에게 끌려갔고 어머니는 집을 지켜야 했던 상황이었다. 김홍탁의 아버지는 1·4후퇴가 지나서야 인천의 한 경찰서에서 식물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이 남하하며 점령한 남측 지역에는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다. 경찰과 관청 공무원 등은 가장 우선적인 숙청 대상이었다. 이들은 북한군에 의해 수감되거나 학살됐고, 가족들도 고초를 겪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김홍탁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에 아버님이 북한군에 끌려갔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북한군이 남쪽에서 활동했다는 얘기인데, 김홍탁의 진술이 흥미롭다.

해방 이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됐지만,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도 남북의 소규모 군사 충돌은 수시로 일어났다. 남한과 북한 모두 38선을 월경해 작전을 펼친 사례도 확인된다.

하지만 북한군의 월경은 주로 남한의 군·경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민간인을 납치한 사례는 드물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월경작전은 주로 강원도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1950년 들어서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위해 북한군의 월경이 급감했다고 한다.

전쟁기념사업회 전쟁기념관에서 6·25전쟁사를 연구하는 고한민 학예연구사는 "인천지역은 전쟁 발발 후 사흘 만에 점령됐다. 김홍탁이 전쟁 발발 후의 일을 그 전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조금 기묘하게 들리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만약 김홍탁의 기억이 맞는다면 조사해 확인해 볼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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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 금광.

김홍탁은 영종도로 피란을 가서 99칸짜리 할아버지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창영초에서 영종초등학교로 전학해 학적을 옮겼다. 김홍탁의 조부는 영종도에서 금을 채취하는 사업을 한 김종현씨다.

김홍탁은 할아버지에 대해 "조금 과장하면 영종도에서 우리 할아버지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니지 못할 정도의 거부였다. 만석꾼 소리를 들으신 분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영종·용유지 발간위원회가 펴낸 '영종·용유지'에는 김홍탁의 조부 김종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김종현(金鐘顯)은 운서동 출신으로 본래 재산이 많았는데, 금광을 발견해 거부가 되었다. 쌀 한 가마에 8원 하던 1939년, 영종초등학교 증축 기금으로 1만원을 기증하였고 삼목도와 신불도, 용유도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송덕비가 신불, 삼목, 용유도에 보존되어 있다'.

용종·용유지 기록처럼 김홍탁의 조부를 기리는 송덕비가 현재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에 남아있다. 영종초등학교는 현재 영종국제물류고 부지에 1920년 영종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고 2012년 영종하늘도시 내 신축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 내 공사가 한창인데 '김종현·서원일 양씨 송덕비'에는 김종현씨가 1만원을, 서원일씨는 3천원을 기증했다고 새겨져 있다. 현재 쌀 한 가마 가격을 20만원으로 환산하면 당시 1만원은 현재 2억5천만원에 이르는 큰돈이다.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김홍탁에게 유년 시절 영종도는 더없이 즐거운 놀이터였다.

"영종도는 그 당시에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갯벌에서 너무 즐겁게 놀았어요. 썰물이면 물을 따라 나가면서 망둑어, 조개를 잡았고요. 겨울철에는 백운산에서 꿩 사냥을 했어요. 여러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함께 산을 에워싸는 거예요. 그렇게 산으로 올라가면 꿩들이 맨 꼭대기에 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그렇게 잡은 꿩은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가져가고 그랬죠. 6·25전쟁의 슬픔도 많았지만 그런 즐거움, 그런 재미도 많이 있었죠."

레전드 기타리스트 김홍탁의 음악 인생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이 끝나고 영종도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송현동으로 이사와 동산중학교에 입학한다. 김홍탁의 모친은 불구나 다름없는 남편을 돌보며 중앙시장 인근에서 지물포를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집안 어른들이 3층짜리 건물을 마련해 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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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중 2학년 시절 김홍탁. /김홍탁씨 제공

중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의기소침해진 아들에게 어머니는 기타를 선물했고 김홍탁은 음악에 눈을 떴다. 김홍탁은 동산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학교 동기·선배 등과 함께 캑터스(Cactus)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캑터스 멤버는 기타를 연주하는 김홍탁을 포함해 동기인 장동선(색소폰)·이백석(베이스), 1년 선배인 김부일(드럼), 전라도에서 기타 선생을 하다 인천으로 올라온 서너 살 위의 조현(기타) 등 5인조로 구성됐다. 김홍탁이 막내였음에도 밴드의 리더를 맡았다.

캑터스는 일주일에 한 차례 신포동에 있는 미군만 드나들 수 있는 '유엔 맥주' 등 클럽 무대에서 연주도 했다. 김홍탁은 "신포동 일대에 미군만 출입이 가능한 클럽이 적어도 4~5곳 이상은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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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고 1학년 시절 김홍탁. /김홍탁씨 제공

인천에는 미군 부대가 주둔했다. 특히 미군기지 주변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클럽이 많았는데, 김홍탁의 캑터스와 같은 국내 밴드와 가수들에게는 이들 무대가 자연스럽게 음악적 내공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김홍탁은 "말하자면, 우리나라 지금 K팝의 시작은 인천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평론가나 학자들은 조금씩 다른 학문적 견해가 있을 수 있는데, 음악하는 많은 이가 인천이 뿌리임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김홍탁이 지금까지 전설의 기타리스트로 불리며 스타 연주자로서 길을 가게 된 것은 '키보이스' 일원이 되면서다. 국내 팬에게는 '키보이스'로, 미8군 무대에서는 '락앤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미8군 무대에 서려면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다. 오디션 결과에 따라 AA·A·B·C·D 등급이 매겨져 출연료가 결정됐다. 키보이스는 데뷔 후 단 한 차례도 AA 등급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키보이스는 한국의 비틀스로 불리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김홍탁은 1967년 키보이스를 돌연 해체해 충격을 준다. 최정점에 있는 키보이스를 대중에게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1968년 조용남(기타리스트), 한웅(키보드), 유영춘(보컬), 김용호(드럼)와 함께 히파이브(He5)를 꾸린다. 1년여 동안 4장의 앨범을 냈다. 히트곡들도 생겼다. 특히 '초원'은 대박이 났다. 전국에 노래 제목을 딴 '초원 다방'이 수도 없이 생겼다.

그는 1970년 히파이브를 해체하고 다시 6인조 히식스(He6)를 결성한다. 김홍탁은 히식스를 자신의 음악 인생 '최고의 팀'으로 꼽았다. 당시 최고의 방송국으로 여겨지던 TBC(동양방송)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며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이름을 알렸다. 방송국보다 시설이 좋았다고 여겨지던 명동의 라이브 클럽 '오비스 케빈'은 히식스의 단골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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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이스 히트앨범과 히식스 데뷔앨범.

김홍탁은 1972년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7년 한국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가장 보람되고 기억에 남는 일은 동시대 음악을 배우는 실용음악학교를 세워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 힘쓴 일이다.

김홍탁은 1995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용음악 고등교육기관 '서울재즈아카데미'(현 SJA실용전문학교)를 설립하고 2009년까지 원장으로 일했다. 대중음악 영역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유명 뮤지션이 이곳 출신이다.

김홍탁은 기회가 된다면 고향 인천에서 큰 콘서트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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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고향을 생각하잖아요. 고향을 떠올리면 내가 인천에서 태어난 것이 참 다행이고 행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으로 내년이면 꼭 80세가 되는데 그동안 고향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년에는 인천에서 큰 콘서트를 한번 하고 싶어요. 그런 계획을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인천이라는 내 고향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행복한 일을 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음악 속에서 살면 행복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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