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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이준아 '하찮은 진심' ①

입력 2024-01-01 20:47 수정 2024-01-01 21:19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1-02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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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우하늘 부장의 녹취록 中>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냥 나는 그런 톱니바퀴라는 겁니다. 조직을 톱니바퀴에 곧잘들 비유하잖아요. 나는 말이에요, 좀 녹슬고 삐걱거리긴 하지만 어쨌든 필요한 톱니바퀴라는 거죠. 거슬린다고 무작정 빼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톱니바퀴들이라고 무사할 것 같습니까?

우하늘 부장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는 중년의 남자였다.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라면 또 허둥지둥 떠들다가 실언을 했겠거니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그의 경우엔 상당히 뜸을 들여서 한다는 말이 그 지경이라 더 문제가 컸다.

나는 그를 심층-이라고는 하지만 한참 철 지난 압박 면접을 어설프게 흉내 내려다 참혹하게 실패 한 중소기업의 민낯이라 할 수 있는-면접자리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나와 한 방에 들어간 지원자들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표정에서 여유가 묻어나와 나는 질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진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대체 왜 여기에 지원한 걸까 싶은 스펙들이 면접관의 입을 통해 하나씩 드러났다. 이를테면 '어학연수를 통해 언어 말고도 그 나라의 식문화를 많이 접했다고 되어있는데, 그때 그 경험을 제품개발에 활용한다면?' 같은 식이었는데, 나에게는 그렇게 엮을 만큼 특별한 이력이랄게 없어서 질문의 뉘앙스가 이상하게 뒤틀렸다.

"여기 보면 공백 기간에 사진 동아리 활동을 길게 했는데, 그 시간에 다른 역량을 키워볼 수도 있지 않았어요?"



그것은 숫제 질문이라기보단 추궁에 가까웠다. 나로서도 그다지 떳떳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좋게 포장해 동아리 활동이라고 했을 뿐 실상은 썸타던 (혹은 타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여자애한테 홀려서 무보수로 걔 쇼핑몰 사진을 찍어주러 다녔던 시기인지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사진이 좋은 매개체였습니다', 제법 괜찮은 임기응변이었다고 자위하기도 잠시, '우리가 식품회사인데, 자소서 대충 봐도 식품에 대한 인사이트가 전혀 없는데, 지금이라도 보탤 말이 있어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는 드디어 망했구나 싶었다. 그때 끼어든 사람이 우부장이었다.

 

"어, 음, 저기 근데, 사실 우리 회사가 일 순위라서 다니는 사람은 없지 않아요? 다른 데를 도저히 못 넘어가니 어영부영 오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골라서 뽑을만한 처지는 못 된다 이거지요."

때아닌 구원투수의 등장에 모든 지원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나를 제외한 다른 지원자들의 얼굴엔 혐오랄까, 경멸이랄까, '이 회사 정말 싫다'라는 무언의 강렬한 깨달음 같은 것이 동시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건 그의 말을 대하는 다른 면접관들의 태도였다. 그렇게 깔끔하게 무시할 바에야 도대체 그를 왜 거기에 데려다 놓았을까. 그 자리에 있던 지원자 중 최종적으로 입사가 결정된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아무래도 나를 제외한 지원자들이 모두 구직의사를 철회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각오한 대로 상대방의 불쾌지수를
높이는 데 범상치 않은 재주가 있었다
용문님이 우부장님 흉내를 그렇게
잘 낸다면서요? 우리도 좀 보여줘 봐


"아니 이름은 또 왜 그렇게 쓸데없이 청순해? 그 얼굴에 하늘이란 이름이 가당키나 해?"

옆자리에 앉은 홍대리는 그의 이름을 두고 자주 불만을 내비쳤다. 그녀가 총애하는 남자 아이돌의 활동명이 '온하늘'이었는데 그는 '우하늘'이었기 때문이다. 다방면으로 불쾌한 중년의 남자가 그녀의 최애와 같은 이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무조건 그녀의 푸념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그렇게 한바탕 쏟아붓고 나면 그녀의 기분은 눈에 띌 정도로 회복이 되어 있었고, 입사 오 년 차인 그녀의 기분이 나아진다는 것은 이 년 차인 나의 정시퇴근 확률 역시 높아진다는 신호였다.

그해 여름, 신규 밀키트 라인의 최종승인을 앞두고 부장급인 그는 거래처로 외근을 나갈 일이 많아졌다. 그를 따라다니며 자료를 챙기고 회의록을 작성할 직원이 필요했는데 모든 여직원이 노골적으로 그를 회피한 덕에 부서 내 유일하다시피 한 남자직원인 내가 그의 보필을 떠맡을 때가 많아졌다.

그는 각오한 대로 상대방의 불쾌지수를 높이는 데 범상치 않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면접 이후로는 딱히 부딪힐 일이 없기도 했고, 어쨌거나 가장 곤란한 자리에서 간접적인 도움을 받은 적도 있는지라 개인적인 억하심정은 없었는데 장시간 밀착해서 다니다 보니 역시 소문대로 밉상이구나 싶었다. 그는 스몰토크 따위는 개나 줘버린 듯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도 불현듯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는 했다.

"어, 음, 용문씨는 사실 여자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타입은 아니야, 그건 본인도 잘 알지? 멀끔하고 세련되게 잘 생겨서 이름이 용문이면 그건 매력적인 반전이지만, 그러니까 음, 용문씨처럼 용문이처럼 생겨서 용문인거면, 그건 그냥 용문인거지."

가뜩이나 덥고 습한 날씨에 느닷없이 투하되는 그의 팩트폭격을 듣고 있자면 이게 과연 현실인가 싶을 만큼 정신이 아득해졌다. 와, 진짜 저렇게까지 말한다고? 살면서 대단히 의로운 어른을 만난 적도 없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 어른도 본 적이 없던 나는 어떤 면에선 그와 함께할 외출이 기대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는, 하는 일도 별 볼 일 없고, 하는 일 외의 시간도 지루한 무성영화 같기만 한 내 일상에 유일하게 컬러풀한 에피소드가 되어 준 것이다. 나는 속으로 부글부글하면서도 회사로 돌아가 동기인 김이현에게 짓밟힌 나의 자존감에 관한 이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김이현은 원래도 잘 웃어 주는 편에 속했지만, 특히나 우하늘 부장과의 일화에는 그녀가 정말로 재미있을 때만 짓는 특유의 표정을 가식 없이 보여주곤 했다. 큰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물고 '푸흐흐' 바람이 터져 나오는 소리와 함께 한껏 반달이 되는 그녀의 눈은 우부장으로부터 당하는 모욕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로 내 마음을 단숨에 녹여버렸다. '용문님은 말을 진짜 재미있게 해요.' 그러면서 내 어깨나 등을 가볍게 쳤는데, 우습게도 그 시간이 내가 회사에 다니며 월급날을 제외하고 보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유일한 때였다.

지루하고도 지난한 일들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회사에서 그녀에게만큼은 마주치면 그저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우하늘 부장이 나에게만 친히 말로 내려치는 강펀치는 그녀를 웃게 하는 나만의 치트키가 되었다. 인간으로서의 내 존엄성쯤이야 내던지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우하늘 부장의 말투나 표정, 손짓까지도 제법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는데,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오며 가며 엿보는 사람들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렇게 김이현만을 위한 막간 쇼로 시작이 되었던 내 장기는 알음알음 유명세를 타기에 이르렀다.

"용문님이 우부장님 흉내를 그렇게 잘 낸다면서요? 우리도 좀 보여줘 봐."

사람들의 반응은 그가 일장연설을 시작하기 전 내뱉는 특유의 기합 소리와 말머리에 '어, 음' 하고 뜸을 들이는 화법, 그리고 내 이름 '용'자에 힘을 주어 말할 때 목소리가 살짝 뒤집히는 부분에서 가장 열광적이었다. 그를 지나치게 희화해 버린 건 아닐까 일말의 주저함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나에 대한 인신공격이 주 내용이니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찌질함을 주제 삼아 우부장의 목소리를 빌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무엇보다도 김이현을 웃게 하는) 일상 속 소소한 변주곡은 두어 달 지속되는가 싶더니 대규모 회식 자리를 맞이하여 어떤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는 항상 회식 초반에는 본인 앞에 놓인 음식만을 천천히 음미했다. 메뉴가 싸구려 냉동 삼겹살이든, 고급 참치든지 간에 그는 일단 그날의 음식에 몰두했는데, 마치 그 시간에 주어진 사명은 오직 영양분을 섭취하는 데 있다는 듯한 진중한 표정이 압권이었다. 한창 술자리의 흥이 달아오르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져도 간간이 입술만 씰룩거릴 뿐 제 페이스대로 식사를 모두 마치기 전까진 절대로 그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연히 건배에도 관심이 없었고, 알아서 제 잔을 채워 이따금 목을 축이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고 각자의 친분 정도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 대화가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제야 슬그머니 탐색에 나섰다. 한 손엔 제 몫의 술병을, 다른 한 손엔 잔을 가볍게 쥐고 스윽, 그가 나타나는 자리에는 별안간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감이었다.

그 날은 대형마트와의 거래성사를 축하하는 자리답게 웬만한 회식은 얼굴만 비추고 마는 김이사까지도 제법 늦게까지 남아있던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아무리 우부장이라도 설마하니 김이사가 사원급들을 모아놓고 한창 훈화 말씀에 열을 올리고 있는 불가침영역까지 넘보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김이사는 진즉부터 에이스인 김이현을 옆자리에 앉히고 연신 건배를 권하고 있었다. 나는 그 날따라 유독 얇은 치마를 입고 온 그녀의 허벅지가 신경 쓰였는데 그렇다고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그건 더 오해를 살만한 일이라 의식적으로 시선을 김이사의 미간으로 모으는 중이었다. 취한 간부는 누구보다도 대하기가 어려운 존재인 법. 눈치를 봐서 김이현과 자리를 바꿔 주고 환심을 좀 사볼까 싶었건만, 액션 없는 마음만 앞서나간 사이 김이사는 눈에 띄게 취기가 오르는 중이었다. 김이사의 행동이 아슬아슬 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김이현에게 업무상 애로사항은 없는지, 술잔은 왜 비우지 않는지 재차 질문하며 안 그래도 가까운 거리를 자꾸만 좁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제때 엉덩이를 들지 못한 스스로의 아둔함을 자책했다. 지금 끼어들었다간 십중팔구 김이사가 넌 뭐냐며 도끼눈을 뜰 텐데, 김이현을 구하고 김이사의 미움을 살만큼 우리가 각별한 사이인지, 아니 그것보다도 김이현이 지금 곤란한 상황이 맞기는 한 건지, 어쩌면 그녀는 영향력 있는 이사와의 내밀한 시간을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니 근데 김이현이 그런 캐릭터였나, 나 홀로 마음이 널을 뛰었다. 게다가 원래도 표정관리를 잘 하는 김이현이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어서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우부장이었다. 꼭 봐야 할 용건이 있는 사람처럼 진지한 얼굴을 쑥 내밀어서 김이현과 김이사는 물론 그들을 예의주시하던 나까지도 움찔했다.

"음, 저기 김이현 사원, 고맙다는 말을 좀 하고 싶은데. 김용문 사원 말로는 김이현 사원이 이번 계약 건 백업을 그렇게 야무지게 해줬다고."

별안간 김이현을 사이에 두고 김이사와 우부장이 나란히 술잔을 받쳐 든 진풍경이 펼쳐졌다. '아 네', 김이현이 우물쭈물 건배하는 시늉을 하며 잔을 들자 채 비우지 못한 소주가 찰랑거렸다. 우부장은 '아니 음, 나는 그냥 수고했단 말 하려고', 하며 건배를 거부하는 듯 애매한 손길을 보이더니 다시 느릿느릿 일어섰다. 하지만 김이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우부장의 손에 들린 소주병을 가볍게 낚아채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부장님은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그 말에 우부장은 정지버튼이 눌린 사람처럼 우뚝 멈춰섰다. 그러더니 하암, 짧은 들숨을 내뱉었다. 그 일련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 음, 나는 여직원한테는 술 안 받습니다. 괜한 오해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김이현씨도 술이나 따르자고 입사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 술은 내가 알아서 마십니다."

그러고는 마치 짱짱하게 감긴 태엽이 풀린 목각인형처럼 뚜벅뚜벅 속도를 높여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어정쩡하게 소주병을 들고 선 김이현과 이제껏 김이현이 주는 술을 연거푸 들이켜던 김이사의 주변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김이사는 우부장이 쏟아 낸 말들을 미처 다 소화 시키지 못한 표정으로 잠시 옷매무시를 가다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예열이 끝난 솥처럼 화르르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이 우부장,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우하늘 부장의 녹취록 中>

내가 하는 말들이 조직에 해를 끼칠 만큼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진실이랑 구분도 못 하게끔 주고받는 게 더 큰 골칫거리지요.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당당합니다.

"내가 그동안 아슬아슬하다 했어. 아니, 아무리 입사동기라지만 그래도 이사가 바로 옆에 있는데, 우부장님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다음 날 아침부터 한껏 들뜬 표정의 홍대리가 출근하는 나를 붙들어 세웠다. 컨디션 난조를 핑계로 회식에 불참하더니 언제 또 소식은 전해 들었는지 더 자세한 자초지종을 졸라댔다.

나는 김이현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내 시선은 쏙 빼놓고 철저히 그저 조금 가까이 앉아있던 제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달했는데, 우부장이 김이현의 술을 거절한 부분에 다다르자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가 가진 특유의 억양과 제스처를 섞어 말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의 절정에서 홍대리의 얼굴에는 묘하게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프다더니, 우부장의 기행이 그녀의 명약이라도 되는 듯했다.

"와, 오늘 거 역대급인데? 용문님 방금 진짜 우부장 같았어."

홍대리는 자꾸 친한 동료들을 불러모아 한 번만 더 보여달라며 나를 부추겼다. 전과는 다르게 부쩍 난처함을 느끼긴 했지만 모처럼 몰두할 화젯거리가 생긴 홍대리의 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눈치였다.

 

부장님은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게요…
음, 나는 여직원한테는 술 안 받습니다
우부장의 변함없는 꼰대 밉상 언사에
놀랍지도 않구나… 암요, 제 주제에 무슨


문제는 나에게도 있었다. 청중의 열기가 달아오를수록 자꾸만 나도 모르게 최선을 다해 모사하고 마는 것이었다. 우부장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한 줌이 더해져 전과는 다르게 영 개운치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진 않았다. 얄팍하게 쌓아 올린 죄책감 따위는 우부장의 변함없는 꼰대 밉상 언사에 바스스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어, 음, 김용문씨 말이야, 혹시 3년 차에 이직 생각하고 있으면 그 맘 접는 게 나을 거야. 3년차가 금값이라는 말도 사람 나름이지 용문씨 같이 애매한 스펙은 힘들어. 김이현이, 그래 김이현이 정도면 충분히 점프할 수 있지. 용문씨는 사실 남자가 너무 없어서 뽑힌 거지 점수로 나래비 세웠음 어림도 없었어요. 이런 회사지만, 조금 더 진득하게 붙어 있다 보면 길이 좀 보이겠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구나, 그날도 나는 이를 악물고 암요, 제 주제에 무슨 이직을요,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이야 아무렴 어떻냐는 듯 자신의 충고에 만족한 얼굴로 이미 저만치 앞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김이현에게 오늘 있었던 일만큼은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밝은 이직 전망과 상대적으로 빈약한 내 장래를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우부장을 따라잡을 것도 없다 싶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앞서 걷던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쩔쩔매고 있는, 너무나도 낯선 그의 표정에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혹시 계약이 문제가 생겼나? 그렇다면 그 안에는 분명 내 실수도 있을 거라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한달음에 그의 곁에 다가갔을 때, 내 우려와는 달리 그는 지극히 사적인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오빠가 깜빡했어…. 그래…. 미안해…. 우부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없는 단어들의 파편들이 맥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곧이어 그의 갈 곳 잃은 눈동자가 내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키가 생각보다 작구나, 나는 고작 그런 생각을 했다.

서로의 시선이 부딪히고 꽤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딴청을 피울 정신을 차렸고, 그 역시 다급히 도보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럴 때 담배라도 태울 줄 알면 좀 덜 민망하려나, 나는 군대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은 때아닌 흡연 욕구를 느끼며 앱으로 택시를 호출했다. 그의 통화가 끝남과 동시에 기사가 배정되었다는 알림이 떠서 자연스럽게 침묵을 깰 수 있었다.

"택시 말이에요, 오늘은 일반호출로 불렀는데도 금방 잡혔어요. 정산 올릴 때 눈치 좀 덜 봐도 되겠는데요."

택시비 정산 같은 사소한 문제로 눈치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되는대로 지껄였다. 그 역시 음, 하고 짧게 반응할 뿐이었다.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내내 말이 없던 그는 (물론 평소에도 다정하게 수다나 떠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회사에 도착하기 직전에 간단한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평소의 일장연설과는 다르게 내가 아닌 허공을 보며 날려버리 듯 한 말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내 머리를 휘저었다.

"어, 음, 저기, 조금 전에 그 통화는 흉내 내지 말아줄래요? 다른 건 다 따라 해도 상관없어, 얼마든지 재미 봐요. 조금 전 것만 잊어주면 좋겠는데."

'하암'. 그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특유의 기합 넣는 소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보통 때라면 그 소리 뒤에 오는 말들이 견딜 수 없었겠지만, 그때만큼은 그 소리 뒤에 이어지는 고요가 나를 더 괴롭게 했다.

→ 8면에 계속([2024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이준아 '하찮은 진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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