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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전 P가 지구 반대편으로 갔다
만남을 기약 못하는 서먹한 침묵 속
서로 애써 "놀러와-자주 오면되지"
지금 쓰는 신문의 마지막 칼럼처럼
일상이 이별인데… 안녕. 응, 안녕


에세이 박소란2
박소란 시인
몇 달 전 P가 이민을 갔다. 지구 반대편 먼 나라로. 한 해의 절반쯤 타국의 낯선 도시들을 전전하며 생활해오던 그는 지난해 말 아예 그곳 어디쯤에 일자리를 구한 뒤 완전히 떠나버렸다. 떠나기 전 몇몇이 모인 자리에서 P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해 초조한 기색이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이건 분명 마지막이니까. 손쉬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니까.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마다 그는 애써 찬 분위기를 데우려는 듯 "놀러 와", "막상 멀지도 않다니까, 꼭 놀러 와"를 반복했다. "뭘, 자주 들어오면 되지" 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이별의 무게를 경감시키기 위한 일종의 제스처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사실 P가 한국에 있을 때도 우리는 그다지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사는 게 바빠,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었으니. '그가 이국에 산다 한들 크게 다를까. 페이스톡이며 스카이프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그럭저럭 편해진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할지라도. 늘 그렇듯 마음 또한 서서히 멀어지고 말지라도. 하지만 우리는 "이제 만날 수 없겠네" 대신 "자주 톡 하자"를 택한다. 이별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받아 안기엔 너무 연약한 존재들인 것이다.

마지막이란 왜 늘 이 모양일까. 어설프기 짝이 없을까. 한두 번도 아닌데 익숙해 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곰곰 되짚어본다. 아무래도 여태껏 나는 대체로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마지막을 맞아왔던 것 같다. "그날 병실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잖아", "그게 우리의 마지막 통화일 줄이야"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선 곧잘 '끝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잘했을 텐데' 하는 회한에 잠기곤 했던 것. (하지만 뭘 더 어떻게?) 그러니 마지막이란 사실을 알고 맞는 마지막은 퍽 친절한 것이라 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구나. 마지막 술잔, 마지막 이야기, 마지막 웃음….' 안다 한들 그러나 회한이 남지 않을 리 없다. 도리어 사소한 일들에 대한 후회가 커지는 것도 같다. 그때 P가 속초로 놀러가자 했을 때 군말 않고 따라 나설걸. 지난번 생일에는 좀 더 근사한 선물을 할걸. 실은 내가 얼마나 P를 좋아하는지, 말할걸. 더 자주 말할걸. 마지막이란 알고 맞든 모르고 맞든 으레 피할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인가 보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라면,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순간은 결국 작별 인사. 지금 이 순간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므로.) 이별 또한 밥을 먹듯 잠을 자듯 아주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 "맞아, 그 애가 떠나던 날 같이 밥을 먹었는데 말이야, 그때 후식으로 나온 푸딩이 참 맛있었지", "다행이지 뭐야, 맛있는 걸 먹여 보낼 수 있어서" 좀 더 가볍게, 좀 더 산뜻하게 그 마지막을 곱씹을 수 있다면. 기쁘게 추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마지막이란 그런 것이라면 좋겠다.

나는 지금 마지막 칼럼을 쓰고 있다. 지난 2년여 동안 '경인일보'에 연재하며, 신문에 글을 쓰는 일이란 참 어려운 것이구나 알게 되었다. 솔직하기 위해 애썼지만 때때로 나는 솔직하지 못했는데, 무엇보다 내 밑바닥에 자리한 편협한 생각이 언론의 고상한 품격을 떨어뜨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늘 고만고만한 정도를 이야기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는 자책이 나로 하여금 다른 시작을 재촉했는지 모른다.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신문에 실린 글을 P가 꼬박꼬박 읽어주었다는 것. 멀리 떠난 지금도, 아직까지,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잘 읽었다는 톡을 보내준다는 것. 이제 우리는 다른 구실을 찾아야겠구나. 또 다른 마지막과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해야겠구나.

그러고 보면 안녕, 이란 말은 참 괜찮은 것이다. 마지막일 때도 시작일 때도 우리는 이렇게 한다. 안녕. 응, 안녕.

/박소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