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살아남아 공동체 복원한 제주 어르신들 진심으로 존경”
제주 출생, 부모님따라 부평서 초중고
‘동일방직 노동자 테러’ 접하고 충격
대학시절 ‘인천 5·3민주항쟁’ 참여도
부친 여의고 제주서 농사 돕는 아들에
“1년만 해봐라” 모친 권유에 기자로

1986년 5월3일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역 앞 인천시민회관사거리가 인파로 뒤덮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인 수많은 군중은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날 광장을 가득 채운 물결에 스물여섯의 청년 김종민도 몸을 맡겼다. 군사 정권에 오랫동안 억눌린 시민 분노가 폭발했다. ‘운동권’도 아닌 김종민도 그 흐름을 거부할 수 없어 시민회관 앞으로 달려가 동참했다. 인천 5·3민주항쟁을 경험한 김종민은 ‘제주 4·3’의 기억과 아픔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알리는 기록자가 됐다. 결코 쉽지 않은 노정이었고, 지금도 그 길 위에 서 있다. 아임프롬인천 쉰한번째 초대 손님은 제주4·3평화재단 김종민 이사장이다. 그는 제주 4·3이 제주 공동체의 아픈 역사를 넘어, 어떤 고난도 극복해 낸 제주 공동체의 끈질긴 생명력과 회복력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 인천 부평에 뿌리 내린 ‘제주 소년’
김 이사장은 제주에서 태어났고 인천 부평에서 줄곧 학창시절을 보냈다.
김 이사장이 태어난 1961년 제주에선 감귤 농사를 짓는 가정이 많지 않았다. 감귤 나무 두 그루로 대학 등록금을 번다는 ‘대학나무’라는 말이 나오기 한참 전이었다. 보리나 메밀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밥벌이도 안 됐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는 제주 재산을 팔아 부평에 논 3천평(9천900여㎡)을 사 육지로 이주해 4남매를 키웠다. 김 이사장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됐을 무렵 부모는 서귀포 효돈으로 이주했다. 부모 대신 장남이 어린 3남매를 돌봤다.
“부모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다가 부모가 제주로 내려가 안 계시니까 완전히 애어른이 됐지. 그때만 해도 촌지가 아주 흔했던 일이라, 운동회 때 찬조금을 낸 학생 이름을 구령대 앞 천막에 걸어놓을 정도였죠. 촌지 안 냈다고 선생님에게 뺨을 맞기도 했었죠.”
1975년 인천에 고교 평준화 정책이 도입되면서 학군이 조성됐다. 부평고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특수지 고등학교’(전기 일반계 고교)로 지정됐다. 인천 중심지와 상당히 거리가 먼 부평고는 교통 여건 등을 고려해 평준화 정책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 학교’였다. 부평고는 4년 간 특수지 고등학교로 유지됐다. 입학시험이 어려웠고, 학업 성적 우수 학생이 대거 몰렸다. 특수지 고교 기간(4~7회 졸업생) 도성훈 인천시교육감(5회), 맹성규 더불어민주당 의원(7회) 등이 공부했다. 김 이사장은 6회 졸업생이다.
■ 귀농 꿈을 품은 청년, 지역신문 기자가 되다
김 이사장이 고려대 사학과 2학년을 마칠 무렵 제주에 계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어머니가 계신 제주도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제주대 사학과 편입을 준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제대 후 복학도 하지 않으려는 그에게 어머니는 “졸업은 하고 제주로 오라”고 했다. 귀농의 꿈을 갖고 있었던 김 이사장은 ‘애기능 캠퍼스’라고 불리는 이공계 캠퍼스에 살다시피했다. 농과대학에서 수업을 들으며 ‘조직 배양법’, ‘멀칭 재배법’ 등을 배우며 귀농을 준비했고, 1986년 4학년 학기말 시험을 마친 뒤 제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감귤 농사를 지었다.
동네에서는 ‘가짜 대학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농업학교 나온 애들도 농사짓기 싫다 하는데, 서울서 대학 나온 놈이 왜 농사를 짓냐”는 시선이었다. 아버지 제삿날, 친척 어른이 ‘제주신문 모집 공고’를 들고 왔고, 어머니는 1년만 기자로 일할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그의 삶은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1987년 8월 제주신문에 입사했다. 그해 6·10항쟁의 여파로 형성된 ‘민주화 바람’이 제주지역까지 불어왔다. 1988년 3월 제주신문은 ‘제주4·3 특별취재반’을 구성했고, 막 수습을 마친 그도 합류했다. 김 이사장과 제주 4·3의 만남이 시작됐다.

1989년 제주신문서 ‘4·3의 증언’ 연재
보도 중단된뒤 언론 민주화 운동 시작
해직후 제민일보 창간 ‘4·3은 말한다’
456회까지 사료·현장 찾아 엄밀 검증
“제주 4·3과 인천 5·3 의미 계승해야”
■ 제민일보의 탄생과 ‘4·3은 말한다’
1년간 준비를 마치고 1989년 제주신문은 ‘제주 4·3의 증언’을 시작하며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에 나섰지만 57회차 보도 후 중단됐다. 사주를 상대로 한 ‘언론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사주가 전두환 형제들하고 서로 호형호제하던 사이였어요. 전두환 동생이 새마을운동중앙본부장을 맡았고, 제주지부장을 신문사 사주가 맡았지. 당시 제주지부장은 도지사보다 힘이 셀 정도였어요. 그 추운 날 집에 가지 못하면서 신문사에서 밤샘농성도 했지만, 1990년 1월에 집단 해고를 당하게 됐죠.”
해직 기자들은 도민을 주주로 하는 ‘제민일보’를 세웠다. 1990년 6월 제민일보 창간과 동시에 4·3 취재를 다시 시작했다.
창간 기획으로 시작된 ‘4·3은 말한다’ 시리즈는 10년간 총 456회에 걸쳐 연재됐다.
“시리즈 이름을 보면 4·3은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야. 당시 송상일 편집국장이 아직 4·3 진상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뭘 안다고 4·3‘을’ 말한다고 이야기하냐, 우리는 진실 그 자체를 밑바닥까지 탐구하고, 4·3 그 자체가 팩트로서 말하도록 하자라고 했지. 그래서 4·3‘은’ 말한다가 된 거예요. ”
김 이사장은 취재에 임할 때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취재 과정은 검증의 연속이었다.
“그때 발행 부수가 꽤 됐고 기사에 누군가의 아버지, 삼촌 이름이 나오고 하는데 오류가 있었다면 시리즈가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겁니다. 검증의 돌다리. 검증에 검증을 하고 ‘이게 이랬을 것이다’, 정황상 분명하다 할지라도 이게 사료로 정확한 뒷받침이 안 된다면 쓰지 않았지.”
관계 당국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경찰이 보도 내용을 조사하는 전담반을 만들고 뒷조사를 시작했다. 김 이사장이 취재를 위해 제보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경찰을 만나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취재반은 철저하게 검증한 내용만 보도했고, 증언을 대충 뭉개면서 쓰지 않고, 증언자의 이름, 나이, 주소를 ○○리까지 쓰고, ‘쿼테이션 마크’(인용부호) 속에 담았지. 그럼 경찰이 그 사람에게 가서 ‘당신이 진짜 김 기자한테 그런 말을 했느냐’라고 묻고, 심지어는 경찰이 ‘호적을 떼어왔는데 당신 동생이 호적에는 없는데 왜 기자한테 그런 말을 했냐’고 추궁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출생 즉시 호적 신고를 하던 때가 아니었거든요. 보도 이후 주민들이 사실 관계를 검증해줄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검찰과 경찰도 검증을 해준 거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한 비상계엄은 제주도 사람들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고 한다.
“제주 사람에게 계엄은 각별한 문제예요. 1990년대 취재를 할 때만 하더라도 한글을 모르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계엄 때문에’ ‘계엄 시국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고 했거든. 그러니까 이번에 계엄 사태 때 제주도민이 느끼는 트라우마는 장난이 아닌 거지.”
2000년엔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됐고, 진상조사 보고서가 작성됐다. 김 이사장은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진상보고서 집필에 참여했다. 2003년에는 추가 조사 내용과 구체적 피해 실태가 담긴 추가 진상보고서가 나왔는데 마을별 희생자, 집단학살 사건, 행방불명된 희생자 유해 발굴 등의 내용이 담겼다.
제주시 봉개동 한라산 중턱 39만5천380㎡의 넓은 면적에 조성된 제주 4·3평화공원에는 희생자들의 위패를 모신 봉안소, 추모승화 광장, 행방불명 표석 등이 위치해 있다.
공원에 자리한 기념관 내 전시실에는 김 이사장이 취재했던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이 담겨있다. 전시실을 조성할 때도 설명 문구를 기사 형태처럼 헤드라인, 중간제목을 뽑아 가독성을 높였다.

■ 인천 5·3 민주항쟁과 제주 4·3
지난해 6월 제주4·3평화재단은 인천시교육청과 업무협약을 맺었다. 앞서 인천시교육청이 지난 2023년 11월 제주교육청과 역사·평화교육 활성화를 위해 업무 협약을 체결한 연장선이었다.
김종민 이사장에게 자신이 학창시절을 보낸 인천의 학생들이 제주도와 제주 4·3을 배우고, 제주 학생들이 인천에서 5·3민주항쟁을 배우는 것은 남다른 의미다. 김 이사장은 제주 4·3과 인천 5·3 민주항쟁의 의미를 계승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교류를 통해 상반기에는 인천지역 학생들이 제주 4·3 평화 기념관을 방문하고, 하반기에는 제주지역 학생들이 인천으로 와 교육청이 운영 중인 난정평화교육원을 방문하고 있다.
김 이사장의 부평고 선배인 도성훈 교육감은 “아이들이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했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체험으로 느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교류였다”면서 “5·3에 참여했던 김 이사장이 제주 4·3과 인천 5·3의 다리 역할을 하며 인천과 제주와 연결 관계를 확장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제주 공동체의 강인한 생명력 ‘제주 4·3’

평화공원에 들어서면 돌담이 둘러싸고 있는 조형물이 보인다. 어린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남편을 잃고 도망가던 중 눈보라에 뒤덮이는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김 이사장은 이 조형물을 보며 어린 시절 참혹한 일을 겪은 유족들을 생각한다고 한다.
“제주 4·3 희생자 유족 중에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분들이 많은데, 심지어 그 어린 아이들을 앞에 세워 놓고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총살할 때 만세를 부르도록 시킨 일도 있었다고 해요. 7살 때 부모 돌아가시고, 집은 깡그리 불에 탔는데 어떻게 살았겠어요. 죽기 살기로 산 거야. 그 분들 증언을 들어보면 원시 시대처럼 나뭇가지를 꺾어 얼기설기 놓고 지푸라기를 얹어 머물 곳을 겨우 마련했던 거야, 강한 비바람이 오면 그 안 바닥은 물로 흥건해지고, 그렇게 버틴 사람이 지금 여든이 훌쩍 넘었거든요. 그래서 어르신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살아줘서 그 어린 아이들이 살아남아 자라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끝내 아름다운 제주 공동체를 복원시킨 거죠.”
제주 4·3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노력한 김종민 이사장은 이제 제주 4·3이 가야할 방향을 이렇게 제시한다.
“제주 4·3때 그 시절 남성들의 한 세대가 사라져버릴 정도의 대규모 학살극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참극이지만, 이걸 극복해 낸 제주도민의 삶은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생각해요. 이들이 ‘평화’ ‘인권’의 정신을 심화시켜 왔다는 것이 자랑스럽죠. 평화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민들의 에너지를 느끼고 갔으면 합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