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5월15일, 3박4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물론 한국은 여러차례 다녀왔지만 특히 이번 한국행은 필자에게 가장 뜻깊은 방문이었다. 국제 볼런티어 단체인 아시아낙농교류회의 은인인 최병칠 선생을 표창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친구와의 교류가 방문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낙농교류회는 아시아권 낙농학도의 육성과 낙농발전을 지원하고자 설립한 단체로 올해로 창립 40년을 맞았다. 당시 한국정부의 김종필 총리가 고(故)하라타 이사무 교수를 초청, 한국의 초지개발에 대한 기술지도를 부탁한 것을 계기로 설립된 이 단체에서 최 선생은 한일양국 대학생간의 교류, 낙농가 육성 및 낙농관련 대학간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등 커다란 공헌을 했다.

필자는 낙농학원대학에 부임한 1971년, 유기농업 연구차 일본을 방문한 최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 인연으로 필자 또한 한일양국 대학생교류의 코디네이터로서 1975년 8월 한국을 첫 방문하고 이어 그해 10월 아시아 낙농교류회가 설립됐다. 그후 1989년에 필자가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1년간 연구원으로 있을 때, 같은 아파트에서 한가족같이 지낸 한국의 한기영 교수(한경대학교 초대, 2대총장 역임)를 만나 깊은 인연을 맺은데 이어 한 교수의 제자로서 한경대학교 4대 총장을 지낸 낙농학원대학 출신 최일신 교수를 만나게 되자 '정말 세상은 좁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필자가 낙농학원대학 학장을 지낸 1997년부터 한경대학교와 자매대학으로 관계가 돈독해지면서 한일낙농세미나를 개최하고 이어 대만의 대학까지 포함한 아시아낙농회의도 열었다. 그러면서 많은 친구를 얻게 되고 그들이 보여준 도움과 배려, 협조에 대해 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됐다. 안타깝게도 단체설립자인 하라타 이사무 교수가 2012년 12월 85세로 돌아가면서 필자는 그분의 고결한 뜻을 기리고자 상을 제정했다. 그리고 지난 5월, 최 선생의 공적을 표창하고자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번 한국방문에서도 필자는 매우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됐다. 평소 낙농업 발전에 관심이 많은 한국 경인일보 송광석 사장을 만난 것이 바로 그 것이다. 언론인이면서 전문가를 뺨치는 해박한 낙농지식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전문가 이상으로 낙농업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에 실로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비록 이름도 모르고 스치고 지나간 인연이긴 해도 필자는 한국 젊은이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이번 한국방문에서 회합을 마치고 밤늦게 숙소까지 지하철로 이동하게 된 적이 있었다. 워낙 밤이 깊어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젊은이들이 친절하게 승차권 사는 법, 환승하는 법, 숙소 찾아가는 법 등을 세심하게 안내하는 등 호의를 베풀어준 친절이 가슴 한곳에 늘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침몰사고를 전해 들으면서 필자는 13년전에 많은 일본인을 감동케 한 이수현씨가 문득 떠올랐다. 2001년 1월26일, 신오쿠보역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고 자신은 목숨을 잃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전역이 한동안 숙연했다. 이수현씨의 의로운 행동이 일본인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기에 필자 뿐만아니라 많은 일본인이 아직도 이씨를 기억하고 있다.

필자는 낙농학원대학의 졸업식에서 학장으로서 졸업생들에게 이씨의 사랑과 용기를 본받을 것을 마지막 메시지로 당부했다. 이씨의 희생정신이야말로 인간이 지녀야 할 최고의 가치관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서 치러진 이씨의 장례식에 당시 일본정부를 대표해서 모리 수상이 찾아가 조의를 표했고,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살신성인'이란 말로 조의를 표했다고 당시 신문, 방송에서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필자는 지금도 이씨의 숭고한 행동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웃나라, 한국친구들과의 진한 정이 우러나는 교류와 우정에도 늘 고맙게 생각한다. 필자가 한국과 한국 친구들을 생각할 때 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타쿠 카즈오 일본 낙농학원대학 전학장·아시아 낙농교류회 전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