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싸인 ‘장충단제’ 사진,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자료서 발견돼

대한제국군 열병식, 태극기 문양 송홍예문, 구경하는 민중들 모습 등

자료 발굴한 홍현도 연구사 “문헌만 존재하던 장충단제 실제 모습 확인”

홍현도 국가유산청 연구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자료에서 발굴한 ‘Notes sur la Corée’(1904)에 수록된 장충단 제례 현장 사진. 자료가 작성된 1904년 이전 사진으로 보인다. /홍현도 제공
홍현도 국가유산청 연구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자료에서 발굴한 ‘Notes sur la Corée’(1904)에 수록된 장충단 제례 현장 사진. 자료가 작성된 1904년 이전 사진으로 보인다. /홍현도 제공

을미사변과 갑오농민운동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사망한 군인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900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건립된 ‘장충단’의 제례 현장 사진이 발견됐다. 문헌으로만 남아있던 장충단 제례 현장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 자리에 1900년 11월 조성된 장충단은 1894년 갑오농민운동과 명성황후가 피살된 1895년 을미사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사망한 관군을 기리기 위한 제례를 치른 현충시설로, 오늘날의 ‘국립현충원’ 격이다. 장충단에서는 봄·가을로 대한제국 원수부(국방부)가 주관하는 제사를 지냈으며, 한일 강제병합 1년 전인 1909년 10월까지 총 19차례 제사를 치렀다.

홍현도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연구사는 프랑스 육군 중위 아드리앵 마티외 베르네레(Adrien-Mathieu Verneret)가 1904년에 작성한 ‘Notes sur la Corée’(조선에 관한 기록)를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자료에서 최근 발굴했다. 이 자료에는 그동안 찾을 수 없었던 장충단 제례 현장 사진이 수록돼 있다.

장충단 제례와 관련해서는 1909년 촬영된 장충단사 기념사진(일본관광기념사진첩)과 ‘보트위크 사진첩’ 속 장충단사 기념사진 등에 나온 인물 사진 정도만 존재할 뿐 제사를 지내는 현장 사진은 발견된 적이 없다.

홍현도 연구사가 4일 경인일보에 공개한 장충단 제례 현장 사진을 보면, 장충단사 앞에 군복을 갖춘 대한제국 군인들이 도열해 열병식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중앙에 있는 건물은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었던 요리정이다.

사진 오른쪽 하단의 장충단 입구에는 소나무로 만든 태극기 문양의 홍예문이 세워져 있으며, 울타리 밖에선 주로 흰 옷을 입은 민중들이 제례를 구경하고 있다. 국기 게양대가 높이 솟아 있으며, 곳곳에 태극기가 걸린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사진 오른쪽에는 제사를 지낸 장충단사와 양위헌도 보인다.

홍 연구사는 “장충단제는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등을 둔 전통 제례를 따르는 동시에 낮에 서양식 옷을 입고 열병식을 진행하는 등 서양 방식이 섞여 있었다”며 “특히 외국 공사들을 제사에 초대하고, 신문 공고를 통해 희생된 장병들의 유족도 초대했다는 점이 독특하다”고 말했다.

이어 홍 연구사는 “대한제국 군대가 장충단제 때 덕수궁 쪽부터 장충단까지 행진을 한 기록이 있는데, 외국 공사들을 초대하는 등 대한제국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며 “장충단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현충시설이면서 동·서양의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주는 시설이라는 시각도 있다”고 했다.

장충단제는 1909년 11월 장충단에서 조선 식민지화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추도회가 진행되면서 중단됐다. 일본은 1919년 장충단을 공원으로 바꾸고, 1942년 장충단 동쪽 언덕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박문사를 건립해 장충단의 역사와 정신을 지우고자 했다. 장충단의 건물 대부분은 1960년대까지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 장충단공원 조성 과정에서 모두 철거됐고, 현재 장충단비와 장명등만 남았다.

홍 연구사가 발굴한 ‘Notes sur la Corée’는 조선의 군사, 지리, 사회 분야를 관찰해 기록한 정보 보고 성격의 자료로 보인다. 자료 속 장충단 사진은 1904년 이전 진행된 제사일 것으로 추정된다. 홍 연구사는 “문헌으로만 남아있던 장충단제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자료”라고 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