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우 칼럼] 수화를 언어로 인정하는 대한민국

이준우

발행일 2015-11-10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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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들 삶의 질 향상시키고
자존감 높여주는 ‘한국 수어법’
정치권, 공식·제도적 인정하는
법안통과 외면말고 서둘러야
그들에겐 교과서 문제보다
언어로 인정 받는게 더 급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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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우 강남대 사회복지 전문대학원 교수
2013년에 4개의 수화언어 관련 법안이 국회에 발의될 때만 해도 수화를 주된 언어로 사용하며 살아가는 농인들은 환호했고, 금방이라도 수화가 언어로 인정될 것처럼 들떠 있었다. 수화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설움을 경험해왔던 날들을 이젠 더 이상 현실에서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여겼기에 한없이 기뻐했다. 하지만 2015년이 저물어가는 지금까지도 수화언어 관련 법안은 통과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본격적인 논의는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폐기 처분되어가는 형국이다. 수많은 농인들이 낙심하고 좌절감에 빠져들고 있다. 자신들의 언어를 언어로 인정해 달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조차도 외면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

농인들이 손과 표정으로 의사소통하는 언어인 수화는 음성언어 중심의 사회에서 지속해서 단죄되거나 폄하되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수어’가 아닌 ‘수화’로 명명되어 왔던 것이다. 수화를 언어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농인들은 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시각적인 정보수용이나 농인의 특성에 적합한 정보제공 등을 외면받거나 소외되어 그 결과 정보화 사회에서 가장 정보에서 배제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최근 국립국어원과 한국농아인협회가 우리나라의 농인들을 위해 하나의 커다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경우는 아주 특별하다. 무려 1만535개의 수화 전문용어를 표준화하여 사진과 영상으로 구성된 수화 콘텐츠를 개발하는 사업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의 대표적인 유물 총 650점의 설명을 수화로 만드는 일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올해 이들 사업이 마무리되고, 내년 초에 농인들에게 제공될 터인데, 벌써부터 농인 사회에서는 기대가 크다.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다양한 용어들이 수화로 정리되어 있지 못했기에 답답했고, 정부가 만든 박물관들을 가도 재미와 의미를 경험할 수 없었던 농인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엄청난 수화 콘텐츠가 정부 주도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기만 하다. 그렇지만 이것뿐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농인을 위한 ‘수화’ 중심의 정보 제공을 구체적으로 시도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농인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수화가 언어적 서비스로 제공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농인들도 글을 알 테니까 자막으로 정보를 접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 하지만 농인들 자신은 언어로서의 수화에 의한 완벽한 의사소통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수화가 훨씬 편하다. 수화가 모어(母語)이고 한국어는 제2언어인 것이다. 솔직히 구화나 문자는 농인들에게는 참 성가시고 힘든 방식이다. 농인들은 단지 말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아니라 말하는 방법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농인들이 수화를 사용하는 것을 무능한 것으로 치부하는 음성언어 중심의 사회에서 교육, 취업, 정보 접근, 문화향유, 지역사회 참여 등 전 영역에서 농인들을 소외시키고 차별하는 ‘사회 인식 및 제도’와 ‘교육 및 문화 환경’ 등에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수어법’ 제정은 향후 농인 복지와 교육, 치료와 재활 등이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수화가 언어로서 공식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되면 수화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다. 동시에 농인들의 자존감을 높여 삶의 질 또한 높이는데 큰 힘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정보통신 관련법’ 등 농인에 차별적인 제도들에 대한 개정 운동이 뒤따라 일어나고 그 다음 사회적 서비스들의 개선이 본격화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음성언어가 주류인 우리 사회에서 의사소통의 장애로 인해 다양한 정보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농인들에게 수화통역서비스를 지원하는 일이 보다 더 법적으로 확대될 것이고, 이는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언어를 권리로서 보장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정치권에서 ‘한국 수어법 제정’을 하려는 움직임은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안 된다! 대한민국은 수화를 언어로서 공식적·제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 시작이 ‘한국 수어법’이다. 농인들에게는 교과서 문제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수화를 언어로 인정받는 일이다.

/이준우 강남대 사회복지 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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