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망대]2063년의 기생충

조승헌

발행일 2019-07-04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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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 가족 '뻔뻔함' 당당함 기인
공생으로 낯 펴도록 사회화된 우리
소유욕 조종하는 배후는 축적 욕망
생사 양극화 보편적인 '소설 곰탕'
시간여행 복귀 않는건 여기가 행복


경제전망대 조승헌2
조승헌 인천연구원 연구위원
살아가는 순간순간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로 기록되고 흔적을 남긴다. 0이라는 시간 좌표에서 시작해서 길어야 100년 동안 지구 공간의 극히 일부에 존재하다 떠나는 것이 일생이다. 우주의 스케일로 보면 무한대분의 일도 안되는 티끌일 뿐이다. 궤적을 벗어나 또 다른 좌표를 찍는 건 환생이요 영생으로 이어지는 길이 될 터이고, 차원을 달리하여 공중부양의 상태로 존재한다면 열반이거나 영혼과 귀신의 단계로 존재 이전을 하는 것이라.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기생의 다양성을 생각해 본다. 제 한 몸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남에게 의지하고 붙어사는 걸 기생이라 풀어보자. 송강호 가족의 '뻔뻔함'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자본에 독점적으로 기생하는 조여정 가족이 제 것인 양한 자본을 나누고 공생하자는 게 뭐가 문제이고, 염치를 따질 일이냐, 라는 사회적 당당함이 깔렸음이라. 기생이란 말에 찡그렸던 낯을 공생으로 펴도록 사회화된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 좌표로 존재한다. 영화의 공간을 다시 헤집고 들어가되, 김영탁의 '곰탕'이라는 소설을 얹어보자. 그리고, 공중부양을 해서 굽어보자. 평창동이나 성북동 임직한 윗동네와 물난리를 겪는 아랫동네에서도 반지하 집을 설정한 영화 기생충, 2019년. 하층민이 사는 부산 해안지역과 해일에서 안전한 윗동네를 펼쳐 보이는 소설 곰탕, 2063년.

위에서 내려다보면 세상이 작아 보이고 소유욕이 높아진다. 밑에 있으면 올려보는 세상이 커 보이고 밑에 깔린 작은 것과 공감대가 맺어진다. 밑에서 하루는, 위에서 보면 서너 시간이다. 시간은 기회비용을 통하여 소득과 소비를 움직인다. 시간당 소득이 높을수록 돈을 많이 써야 자기 수준에 걸맞은 소비를 한 듯 뿌듯해한다. 놀러 가도 고급 호텔에 묵는 것이 자신의 시간 기회비용에 부합하는 합리적 소비라 여긴다. 소득과 소비를 많이 하려면 시간 소유욕이 커지니 자신의 시계를 빨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블랙홀 시계를 가지고 있다. 절대 시간의 종언을 말한 아인슈타인을 들먹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안다. 치달리는 시계의 좌표와 따라가는 나의 좌표 사이가 벌어질수록 힘이 들고 쇠약해지고 자율성이 떨어진다. 좌표상에서 운동한 물리량이 자본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을 보고 인생성공이라 하는 건, 자본에 자발적으로 기생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찾는 예속을 합리화하는, 영혼 없는 칭송일 뿐.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지만, 원래 남의 것이었으나 이제 내 것이 된 것에 쏠리는 집착은 훨씬 강하다. 자신의 소유욕에 깔린 진솔한 밑바탕을 보려면 감정이 배인 소유물로 시험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 자신과 관련 있는 처녀보다 유부녀의 겁탈에 더 분노하는 당신이라면, 저열한 마초의 관점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자기 수양이 부족함을 고민해야 할 만하다. 안타깝게도 이런 인간이 많다면, 이런 걸 조물주를 탓하랴. 복지 지원을 늘리는 것, 최저 임금을 올리는 것, 세금을 올리는 것에 울화가 치민다는 건 내가 번 돈을 지키려는 소유욕이 발동한 것이며, 그 소유욕을 조종하는 배후는 쟁취와 축적의 욕망이다. 원래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데 들인 공과 땀과 음모의 세기가 클수록 빼앗은 것은 더욱 내 것이라는 집착이 강해지는 법이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뭐라 해야 하나. 사유재산권과 자본주의의 수호자, 자본하고만 공생하려는 자, 단 하나의 기생도 부정하는 결벽주의자라고 떳떳한 비난을 할 만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의 좌표(2019년, 한반도)에는 비난받는 자와의 동일화에 실패하고 모방의 허무에 지친 질투가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과 사의 양극화가 보편적이고 당연한 2063년 소설 곰탕의 대한민국을 떠나 지금 2019년으로 시간여행을 온 소설 속 사람들이 복귀하지 않는 건, 과거인 지금 여기가 더 행복해서일 테다. 역사상 처음으로 부모세대보다 가난할 것 같다는 청년세대에게 다짐받는다. 2019+44년 자신의 공간좌표가 윗동네인가, 아랫동네인가에만 꽂혀있다면 그대들은 평생 기생충 인생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조승헌 인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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