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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보건소서 성병 검진" 증언

실태조사도 안해 피해규모 '깜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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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둔 미군을 대상으로 한 기지촌에서 성매매에 종사했던 여성, '미군 기지촌 위안부'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이 인정된 지 (2018년 2월 항소심) 1년7개월여가 지났다.

성매매를 불법으로 규정하고도 기지촌을 묵인하는 것에서 나아가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군 위안부는 한국사 이면에 가려지고 방치되면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연내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예상되는 가운데, 미군 기지촌 위안부의 삶과 정부의 개입 여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쟁점 등을 살펴본다. → 편집자 주·관련기사 3면

"수렁 속에서 한 발 한 발 옮긴 것 같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아."

추석을 앞두고 만난 장영미 할머니는 찾아올 가족 없이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평택 안정리에 거주하는 장할머니는 유기견들과 함께 쪽방에서 외로운 삶을 살고 있다.

1948년 생인 장 할머니는 식모와 그 가족을 데리고 살 정도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된 장 할머니는 여러 사람의 손을 전전하다 13살 때 주인집 딸의 텃세에 못 이겨 집을 나오면서 미군과의 악연이 시작됐다.

일하면서 먹고 잘 곳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서울 이태원으로 간 뒤 미군을 따라 송탄으로, 대구로, 또 평택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미군의 부속처럼 살아왔다.

그의 기억 속에서 한국 정부는 방관자가 아닌 또 하나의 포주였다. 주민등록증 조차 없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보건소 가서 성병 검진을 받았고, 공무원들이 나서 보건증 검사를 하러 다니기도 했다.

장 할머니는 "당시 보건증 있는 애들은 남아있고 보건증 없는 애들만 숨고 했지"라며 정부의 개입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장 할머니의 사례처럼 대부분의 미군 위안부는 한국사의 굴절 속에서 누군가는 가족같이 지내던 이웃에 속아, 업소로부터 소개비를 받아내겠다는 의도를 갖고 접근한 사람들에 속아 미군 기지촌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의 방조, 또 적극적인 관리 감독 속에 고립된 삶을 살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순덕 평택 햇살사회복지회 대표는 "정부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필요할 때 이용하다 이제와서 모른채 하고 있다"며 "실태조사나 신고센터 등도 단 한차례 진행하지 않아 피해 규모 조차도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