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이성을 되찾는 날 저들을 죽일 것이오

권순대

발행일 2019-10-14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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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
배경은 1794년 프랑스 혁명과정
"이성을 잃고 우리를 죽이지만
이성을 되찾는 날 저들을 죽일것"
카미유 데물랭 대사는 역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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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지난 9월 27일부터 10월 13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게오르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이수인 각색·연출) 공연이 있었다. 이번 공연은 해설자 역할을 하는 배우가 샹송으로 연극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거나 라이브 반주에 맞춘 구음과 군무를 연출한 것이 특징이다. 연극 '당통의 죽음'은 제목 그대로 당통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배경은 1794년 프랑스. 1794년은 1789년 국민의회 선포와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서부터 1795년 혁명재판소 폐지와 국민공회 해산까지의 시간에 속해 있다. 1792년 공화정 선포, 1793년 루이 16세 처형, 그리고 1794년 4월 당통과 같은 해 7월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이 그 사이에 있었다. 혁명의 시간은 세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미 아닌 것과 아직 아닌 것 사이에서 그 경계선이 때로는 모호하고 겹치며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혁명의 시간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확장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794년 당통의 죽음도 그 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혁명의 시간을 지나며 인류에게 제출된 권리선언은 네 개의 판본을 가지고 있다. 첫째 판본은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국민의회가 채택한 이 선언은 자연법을 계승한 인간의 권리와 혁명 후의 시민권을 포함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거대한 전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선언은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모든 인간은…"으로 시작하는 선언에서 '모든 인간'은 그저 형식적 수사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백인, 남성, 부르주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판본은 1791년의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올랭프 드 구즈는 1789년의 판본에서 배제된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를테면,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0조와 정확하게 짝을 이룬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가질 수 있다"는 말이 빈말에 그친다고 외친 여성, 올랭프 드 구즈는 1793년 단두대에 오른다.

셋째 판본은 1793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이 선언은 로베스피에르의 초안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특히 재산권을 사회적 행복권의 측면에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에게 일자리를 조달하거나,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주어, 구성원의 생계를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제 10항에서 주장하고 있다. 당통이 처형된 지 3개월 후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에 오른다.

넷째 판본은 1795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 오른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만들어진 이 선언은 앞의 세 판본에 비해 권리를 축소하고 의무를 강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소유권은 자신의 재산, 수입, 노동과 근면의 산물을 향유하고 처분하는 권리"이며, "좋은 아들, 좋은 아버지, 좋은 형제, 좋은 친구, 좋은 남편이 아니라면 누구도 좋은 시민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좋은 여성은 어디에도 없다. 프랑스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1944년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당통이냐 아니면 로베스피에르냐가 아니다. 문제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또 다른 목소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가 아닌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 사라지고 묻혔으나 여전히 남겨진 목소리 말이다. "이성을 잃은 오늘 우리를 죽이지만 이성을 되찾는 날 저들을 죽일 것이오"라며 당통과 함께 사라진 카미유 데물랭의 대사는 그래서 역설적이다. 이 말은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에게 속하기보다는 올랭프 드 구즈에게 더 적합한 것이 아닐까. 연극 '당통의 죽음'을 그렇게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권순대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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