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인 이상 사업장 50대 건설 일용직'
피재자(被災者). 피해자의 오기가 아니다. 재난으로 해를 당한 사람을 의미한다.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겐 온정의 손길을 보내곤 하지만, 산업재해 피재자에 대한 시선은 상대적으로 싸늘하기만 하다. 일터에서 죽거나 다친 사회적 재난의 피재자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도 말이다.
경기도는 산업재해 피재자가 가장 많은 광역지자체다.
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임종성(광주을)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공받은 지난해 지역별 산업재해 최신 현황 자료를 보면 경기도의 사고재해자 수는 2만4천930명으로 전국 9만2천383명의 27.0%로 집계됐다. 경기도의 사고 사망자 수는 전국 882명 중 235명(26.6%). 산재 사고 사망자 4명 중 1명 이상이 경기도에서 나온 꼴이다.
노동자들의 피로 물든 경기도다. 유명을 달리한 피재자들을 단순히 숫자로만 나열해선 안 될 일이다. 경기도는 17개 광역지자체 중 사업장과 노동자가 가장 많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피재자가 가장 많은 '산업재해 1번지' 오명을 계속 뒤집어쓰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경인일보는 숫자로 남은 산재 사건을 보다 깊숙이 들여다보기 위해 정의당 강은미(비례) 의원실에 고용노동부가 공개한 2018~2020년 3년간의 재해조사 의견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3년 치 총 1천706건 중 422건에 도내 발생 산업재해 사건이 담겨 있었다. → 그래프·표 참조
재해조사 의견서는 업무상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거나 노동력을 상실한 피재자들의 산업재해 경위와 원인, 대책을 조사해 기록한 공문서다. 오는 2022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재해조사 의견서를 보다 고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울러 의견서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고를 반면교사 삼는 재발방지 대책을 담아야 한다는 게 산업안전 분야의 최신 화두다.
떨어짐 46.2%… 화재·폭발 11.7%
재해 발생후에야 안전 난간 설치
경기도 재해 피재자의 일반 모델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50인 이하 사업장에서 떨어짐(추락)으로 목숨을 잃거나 다친 50대 일용직 건설 노동자'다. 재해조사 의견서 분석을 통해 도출해낸 대표적인 중대재해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자.
철근콘크리트 공사 하청 업체 소속 58세의 철근공은 지난해 12월1일 오후 1시8분 평택시 고덕면의 한 군사시설 신축공사 현장에서 떨어져 숨졌다.
중년의 건설 노동자는 50인 미만의 중소 전문건설업체의 일용직이었다. 시스템 비계 3단 발판 위에 쪼그리고 앉아 벽체 철근 조립 작업을 하다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5.3m 높이에서 토사 바닥으로 떨어져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튿날 끝내 숨졌다.
당시 피재자는 안전모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추락을 방지하는 안전대가 없었다. 몸을 지탱해줄 안전 난간은 재해 발생 이후에야 설치됐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한 명의 목숨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재해 방지 시설물을 설치한 것이다.
50세의 일용직 형틀목공은 지난 2019년 5월10일 오전 9시30분 안성시 석정동 아양택지개발지구 근린생활시설 신축공사 현장에서 숨졌다. 사고 당시 무자격자가 조종한 무인 타워크레인이 그가 서 있던 보 거푸집을 건드렸다. 3.3m 높이에서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다.
이 노동자도 안전대 없이 일하고 있었다. 이 현장의 산재 역시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추락할 위험이 있는 높이 2m 이상의 장소에서는 사업자가 노동자에게 안전대를 착용시켜 추락 사고를 방지해야 한다. 보호구보다 노동자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건설 산업 현장이다.
전체 피재자 496명 중 229명(46.2%)이 떨어짐(추락) 산재다. 산업재해 통계를 보면 '무리한 동작'을 하다 재해를 입었다는 식으로 피재자에게 귀책을 묻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안전이 보장돼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작업을 하다 추락하는 사업자의 안전 의무 해태를 지적해야 마땅하다.
떨어짐에 이어 화재·폭발이 58명(11.7%)으로 뒤를 이었다. 화재나 폭발은 사고 발생 시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져 피재자 수 집계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피재자의 연령대는 50대를 중심으로 마름모꼴 그래프를 그렸다. 도내 중대재해 다발 기초지자체의 오명은 화성시가 썼다.
중대재해 청정구역 단 한 곳도 없어
화성시는 피재자가 51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용인시(49명)와 평택시(30명)가 이었다. 신도시 개발 등 건설 현장이 몰린 지자체에서 중대재해가 자주 발생했다는 풀이가 나온다. 31개 시·군 중 최근 3년간 중대재해 청정구역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운영위원)는 "안전보건공단의 슬로건이 '안전은 권리입니다'로 바뀐 지 2년이 지났다. 노동자의 안전보건 권리는 국가와 지자체가 해야 할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역할"이라며 "경기도가 전국에서 사업장과 노동자가 가장 많아 산재 피재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과 태도는 안전은 권리라는 안전보건공단 슬로건과 유리된 발상이다. 일자리가 많고 기업하기 좋은 도시에 그쳐선 안 된다. 노동자에게 안전은 기본권"이라고 말했다.
/배재흥·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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