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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발생한 1992년 4월29일 한 상인이 화염에 휩싸인 자신의 상점의 불을 끄기 위해 양동이로 물을 퍼붓는 모습. /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 제공

인천대학교 중국·화교문화연구소가 최근 진행한 '제75회 중국관행연구포럼'에서 발표자로 나선 강형원 사진기자는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4·29 폭동으로 미국 한인사회가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

강형원 기자는 당시 LA타임즈 소속으로 폭동 현장을 취재해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강 기자는 "폭동 이후 창설된 한미연합회(KAC)가 한인사회의 대변인으로서 영어로 주류 사회에 한인의 의견과 고충을 전달했다"며 "LA 한인회는 흑인 장학생을 선정해 포상하는 등 흑인 커뮤니티와 교류를 촉진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포럼에서는 29년 전 LA 폭동과 90년 전 조선에서 일어난 '화교배척사건'을 비교했다.

화교배척사건은 1931년 7월 중국 만주의 창춘 만보산 근처에서 중국 관헌이 수로 공사 중이던 조선인 농민을 압박하고 몰아낸 '만보산사건'이 국내에 과장 보도되면서 화교에 대한 감정이 악화한 조선인들이 평양과 인천 등 전국에서 화교를 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전국에서 화교 200여 명이 학살됐고, 인천 화교들도 피해가 컸다.

"LA폭동 이후 한미연합회 창설 주류 사회에 고충 전달·흑인 교류"
이정희 교수, 갈등 조명한 당시 언론 책임도… 사건 비교연구 의미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는 포럼 토론에서 "미국사회에서 종족 간 싸움과 폭동은 흑인과 백인 간 발생해야 하는 사건이었는데, 사회적 약자인 흑인의 타깃이 아시아계 한인에게 향한 게 특징"이라며 "화교배척사건도 통치자인 일본인과 통치를 받는 조선인 간 싸움과 폭동, 즉 독립운동 등의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데, 조선인의 타깃은 화교로 향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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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월3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한인 젊은이들이 총으로 무장해 상점가 등을 지키고 있는 모습. /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 제공

LA 폭동 당시 한인은 흑인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에서 장사하고 점차 상권을 빼앗아 갔지만, 교류나 공생에는 소극적이었다. 1931년 조선 화교 또한 주단포목상점, 잡화상점, 중화요리점, 채소 재배, 노동시장 등의 부문에서 상당한 경제력을 형성해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위협적 존재로 발전했다.

LA 폭동과 화교배척사건 모두 언어 문제로 인한 소통 부족이 종족 간 폐쇄성을 낳았다는 게 이 교수의 시각이다.

언론의 책임도 컸다고 한다.

이 교수는 "LA 폭동 발생 전후 미국 주요 언론은 흑백 갈등을 흑인과 아시아계의 갈등으로 집중 조명해 흑인 종족 폭동의 타깃을 백인이 아닌 아시아계로 돌렸다"며 "화교배척사건이 발발하기 이전 조선에서 발행되던 신문은 만주에서 박해받는 조선인 기사, 국내 공사 현장에서 조선인과 화교 간 갈등을 지속해서 보도해 감정을 악화시켰다"고 했다.

이 교수는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 100년이 다가오고 있고, 내년은 LA 폭동 30년, 올해는 화교배척사건 90년으로 각 사건을 조명하는 중요한 시점"이라며 "폭동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은 전 세계적으로 유사하므로 각 사건을 비교하는 연구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