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천하는 인천책

[내가 추천하는 인천책·(3)] 왕지윤 인천보건고 교사-오정희 '중국인 거리' (소설집 '유년의 뜰' 수록)

가난한 이들의 '경유지' 반세기전 차이나타운
입력 2022-07-20 18:49 수정 2022-12-08 14:58
지면 아이콘 지면 2022-07-2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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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중국인 거리'가 수록된 오정희 소설집 '유년의 뜰'. 오정희 지음. 문학과 지성사 펴냄. 323쪽. 2017년 9월20일 출간
국어교사로서 '한국 근대문학관'에 방문할 일이 생겨 지하철을 타고 인천역에 내린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소박하고 조용하게 엎드려 있는 인천역사(驛舍)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일면 화려해 보이는 근세풍의 차이나타운을 찬찬히 걷다 보면,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전혀 다른 시공간에 도착해 길을 잃어버릴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서서히 달라지는 거리의 면모도 어쩐지 시간을 지연시키는 거대한 장막에 덮여 맥을 못 추고 있다고 할까. 방문이 잦아지면서 퇴색되긴 했으나 이방인의 거리가 안겨주는 강렬한 첫인상은 꽤 오래 남았다.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는 석유 배급소 소장이 된 아버지를 따라 해인촌이라 불리는 중국인 거리에 이사를 오게 된 아홉 살 소녀네 가족들과 이웃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1979년 봄 '문학과 지성'에 실려 처음 발표됐고, 1981년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인 '유년의 뜰'에 묶였다. 1998년 재판과 2017년 개정판으로 출간돼 지금까지 독자들과 만나고 있는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다. 특히 단단하고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반세기 너머의 풍경과 분위기를 재현해 내면서 정교한 기억의 편린을 펼쳐 보인다.

1950년대 후반, 인천 응봉산 자락. 청·일 조계지 경계에 놓인 계단과 언덕을 사이에 두고 적산가옥으로 늘어선 일본인 거리가 끝나고 중국인 거리가 시작되는 곳이, 소설 '중국인 거리'의 공간적 배경이자 작가의 유년의 뜰인 '중앙동 1가 19번지'다.

오정희는 "1955년 조양석유 인천출장소 소장으로 취직한 아버지를 따라 충남 홍성에서 인천으로 이사했다. 신흥초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해 5학년을 마칠 무렵인, 1959년까지 약 4년간 인천에 살았다"(인천문학전람, 381쪽)고 한다. 현재는 중국음식점 복림원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목조건물 이층집에 머물렀던 셈이다.

도살장에 부려놓고 온 소들의 쇠똥냄새가 가시지 않은 트럭 짐칸의 거친 요동, 살갗을 파고드는 매운 칼바람을 견디며 찾아온 여덟 식구는 새벽거리에서 낯설고도 친숙한 공기를 맞닥뜨린다. 외형적으로는 가장인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온 것이지만, 이들의 이주는 궁핍해진 가정 형편을 견디지 못한 일종의 도피다.

인천제분 인천공장의 하얀 밀가루와 저탄장에 실릴 검은 석탄가루를 훔치는 아이들의 노략질은 전후 극심했던 허기를 시각적으로 대비시킨다. 공복에 회충약을 먹거나 해인초를 끓인 물을 마셨을 때 피어오르는 노란 빛깔의 회오리 역시 단순한 현기증을 넘어서서 씻어낼 수 없는 가난의 이미지를 후각적으로 각인시킨다.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온 이들을 환대하는 다정한 이웃은 없다. 실제 접점이 거의 없었음에도 어른들은 중국인들을 향해 '뙤놈들'로 부르며 경멸하거나 무관심했고, 아이들은 끊임없는 상상과 호기심으로 그들을 아편쟁이나 밀수업자, 오랑캐이자 백정으로 탈바꿈시킨다.

이국인 병사에게 몸을 허락한 여자들은 양갈보라 불리며 이층집에 세 들어 살았는데, 허벅지와 젖은 속옷을 드러내는 그녀들을 할머니는 짐승으로 치부했다. 가출을 꿈꾸는 치옥이나 이민을 꿈꾼 메기 언니, 그리고 성당 보육원에 보내진 제니의 운명처럼 이곳의 사람들은 이곳을 정착지가 아닌 경유지로 삼고 있다.

1979년 발표… 2017년 개정판
1950년대 소녀의 가족 이야기
제분공장·저탄장 시각적 대비
불행·죽음의 풍경속 성장 서사


사춘기를 겪는 소녀의 성장 서사라고 하나, 그녀의 주위에는 불행과 죽음이 가득하다. 헛구역질과 난산의 고통을 이어가는 엄마, 파혼 후 조카딸에 의지해 살며 한 번도 자식을 낳아보지 못한 할머니, 미국으로 갈 거라는 희망을 죽음과 맞바꾼 메기 언니, 계모의 학대를 받던 중 버려진 치옥이까지.

가족과 이웃, 친구의 비극적인 삶은 초조(初潮)를 경험하는 '나' 역시 그들의 운명에서 쉽게 비껴가기 힘들 것임을 암시한다. 생명을 잉태하는 봄이 반복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죽음의 기억만이 늘어나는 아이러니 속에서 소녀는 자란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풍경이 달라지는 골목길은 나를 설레게 한다. 이 소설은 읽을 때마다 다른 감정과 표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의 미로(迷路)를 품고 있다. 명확한 주인공의 운명과 감정의 기복이 뚜렷한 결말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불친절할 수 있지만, 표정을 알 수 없는 중국인 남자로 인해 긴장하는 소녀의 혼란에 몰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세 가지 색의 물감을 들인 빵과 용이 장식된 엄지손가락만한 등불이 담긴 중국인 남자의 종이꾸러미처럼, 소설 밖에서 우리가 만나는 삶의 질문 역시 미처 준비하지 못한 대답을 당혹스런 방식으로 건넬 것이다. 차가운 공기 속에 연한 봄의 숨결이 숨어 있다는 소녀의 고백을 떠올리며 소설이 던진 질문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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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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