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아임 프롬 인천·(18)] 극장에서 살던 송림동 시네마 키드 권칠인입니다

입력 2024-01-17 20:25 수정 2024-01-18 14:01
지면 아이콘 지면 2024-01-18 5면
지난 3일 오후 인천 중구 중앙동2가 인천영상위원회 건물 앞에서 만난 권칠인 영화감독. 인천영상위원회 사무실 이전 계획이 있는데, 권 감독은 근대건축물인 현 사무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며 인터뷰 장소로 인천영상위원회를 택했다. 2024.1.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나의 시네마 천국 인천… 삼치거리 사람들 얘기 영화로 만들고파" 


친가·외가 모두 강화도에 뿌리 내려
조부 개척교회 일구고… 부친은 의사
초교때 동구로… 중학교때 영화 관심
1970년대 인천내 영화관 15곳 달해
감독 되고자 한국영화아카데미 2기로

첫 작품 흥행 실패후 '싱글즈'로 재기
2011~2016년 인천영상위 운영위원장
"촬영하기 좋은 장소로는 주목 받지만
복합적 정서, 잘 다룬 작품은 드물어"
엄혹한 시절에 공동체 일군 '인하의집'
'인천 정서' 담은 작품으로 연출 의지


'영화의 도시'는 서울 충무로일까, 부산국제영화제의 부산일까. '인천 시네마 키드' 권칠인의 답은 단연 인천이다. 그에게 고향 인천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화적인 도시다. '서울민국'인 대한민국에서 서울에 붙어 있으면서도 가장 변두리성이 짙은 인천의 정서가 영화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권 감독의 친가와 외가 모두 강화도에서 뿌리내린 집안이다. 증조모는 '전도부인'이라 불린 초기 기독교 전파에 큰 역할을 한 교인이었다. 전국에서도 규모가 컸던 1919년 3월18일 강화읍 만세시위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권 감독 조부는 목사 안수를 받아 강화에서 개척교회를 일궜다.

감리교 집안의 영향으로 부친과 그 형제들은 배제학당,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과대학)를 졸업했다. 먼저 의사가 된 권 감독의 큰아버지 권요한은 1932년 10월 강화읍 신문리에 '구세의원'이란 병원을 개업했다.

"저희 아버지는 의사가 된 후 큰아버지의 구세의원에서 일하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강화 길상면 온수리 전등사 밑에 '평화의원'을 개업해 독립했어요. 집도 그쪽으로 이사했습니다. 워낙 시골에 병원을 차린 건데, 아버지가 민중 속으로 파고들자는 나로드니키(Narodniki·인민주의) 사상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권 감독 가족은 1965년 인천 동구 송림동 활터고개 쪽으로 이사왔는데, 그의 큰형이 당시 인천중학교(제물포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뒷바라지하기 위한 이유가 컸다. 아버지는 서림국민학교(현 서림초) 인근에 '서림의원'을 개업했다.

권 감독의 둘째 형과 누나는 서림국민학교에 다녔는데, 권 감독은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현 경인교대 부설초)에 입학했다.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는 지금의 미추홀구청 자리다.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는 경인교대를 따라서 2006년 계양구 효성동으로 이전했으나, 1969년 지은 학교 건물은 그대로 남아 구청사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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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애관극장.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이 '시네마 키드 권칠인'의 본격적 시작이다. 권 감독은 송림동 현대극장부터 미림극장, 문화극장, 도원극장, 오성극장, 애관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 인천의 극장이란 극장은 모조리 다녔다.

"개봉관, 재개봉관, 삼봉관 등 지금과는 영화 관람 문화가 많이 달랐죠. 인천에 극장이 기형적으로 많았던 시대에 성장기를 보냈다는 게 저한테는 큰 세례였던 것 같습니다."

인천에 극장이 얼마나 많았을까. 영화진흥위원회가 간행한 '한국영화자료편람'을 보면, 1976년 10월말 기준 경기도 시절 인천시 소재 극장은 애관·동방·인천·자유·오성·미림·문화·현대·도원·장안·한일·부평·금성·백마·대한 등 15곳이다. 이 가운데 8곳이 중구·동구에 있었다. 나머지 극장은 남구(현 미추홀구) 3곳, 북구(현 부평구) 4곳이었다. 강화군에도 강화극장이 있었다.

극장이 106곳에 달한 서울에 비할 순 없었지만, 당시 경기도청 소재지인 수원시에는 극장이 4곳뿐이었다. 인천엔 신작을 상영하는 개봉관이 6곳이나 있었는데, 수원은 개봉관이 한 곳도 없고 모두 재개봉관이었다. 경기도 주민이 최신 영화를 보려면 서울이나 인천으로 가야했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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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권칠인 감독은 학업보단 학교 방송국 PD, 민요회 활동 등을 더 열심히 했다고 한다. /권칠인 감독 제공

형들은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권 감독은 부평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형들은 의대 진학을 택했으나, 권 감독은 1980년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권 감독이 건축학도가 되고자 했던 건 실은 문학가나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서였다.

"고등학생 때 시인 이상(1910~1937)에게 매료돼 그에 관한 모든 책을 섭렵했습니다. 이상이 건축학도예요. 이장호 영화감독님도 건축학과라는 얘기를 들었고, 러시아의 전설적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도 건축학도였죠. 대학을 진학할 때 부모님께 차마 연극영화과를 가겠다는 얘기를 못할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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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한국영화아카데미 2기 입학식. 앞줄 맨 오른쪽이 권칠인 감독. /권칠인 감독 제공

권 감독은 1985년 한국영화진흥공사 부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2기로 입학하면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카메라 등 기자재도 별로 없고, 필름도 워낙 비싸 영화를 찍는다는 행위가 일상일 수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러나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선 필름을 꽤 쓸 수 있었어요. 그때 막 도입되던 16㎜ 동시녹음 카메라와 스틴벡(Steenbeck) 편집기를 경험하는 등 혜택이 많았죠.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별들의 고향'(1974), '바보들의 행진'(1975)을 제작한 유명 영화사 화천공사 기획실에 입사했습니다."

권 감독은 화천공사 입사 6개월 만에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연출부와 조감독 생활이 10년간 이어졌다. 그는 박철수(1948~2013) 감독의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안개기둥'(1987), '접시꽃 당신'(1988), 김호선 감독의 '사의 찬미'(1991) 등 작품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데뷔작 '사랑하기 좋은 날'(1995)은 처음 시나리오 제목이 '서른 살 되기'였다고 한다. 권 감독은 그때 '서른 살 되기'를 제목으로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성장 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데뷔작이 "망해도 엄청 망했다"고 했다. 두 번째 영화 '싱글즈'(2003)가 흥행에 크게 성공해 다시 일어섰다.

"망한 감독이 연출할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요. 유명한 배우 섭외는 제 차례가 오지 않을 것 같고, 여배우 가운데 연기가 훌륭한 배우가 많은데, 그들이 업계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었어요. 그들만의 이야기도 없었고요. 톱 여배우 한두 명과 같이할 이야기를 기획하자고 해서 시작한 영화가 '싱글즈'입니다."

고향에서도 역할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2011년 인천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아 2013년 2월 인천문화재단 산하에서 독립한 사단법인 인천영상위원회 설립을 이끌었다.

2016년까지 인천영상위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영상산업 성장에 이바지했다. 그가 인천영상위에 있을 때 인천 대표 영화제가 된 '디아스포라영화제'(2013년)를 처음 개최했다.

"인천영상위는 중앙정부가 하지 못한 빈칸을 지방정부의 힘을 빌려 채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씨뿌리기 작업으로 시작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인천의 색깔과 딱 맞아떨어지는 대표 브랜드가 됐고요. 인천독립영화협회를 중심으로 지역 영화라는 개념이 움트고 있기도 합니다."

권 감독이 볼 때 인천은 영화를 촬영하기 매우 좋은 장소다. 개항장부터 송도국제도시까지 100년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지역이다. 서울과 가까우면서 바다, 국제공항, 구도심, 신도시 등을 고루 가진 인천은 영화 로케이션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선 인천을 제대로 다루고 있을까.

"영화계에서 인천은 산업적 니즈(needs)가 있지만, 인천의 이미지를 잘 봤느냐 한다면 그건 아닙니다. '마계 인천'으로 그려지죠. 인천에는 아직 '국제시장'(2014) 같은 영화가 없잖아요. '인천상륙작전'(2016) 정도가 있는데, 그 영화에 인천의 모습이 담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또 인천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독자적인 인천의 정서라는 게 굉장히 복합적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2001) 같은 경우가 정확하게 인천을 집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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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서울 자양동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권칠인 감독의 영화 '관능의 법칙' 언론시사회. 맨 오른쪽이 권칠인 감독. /경인일보DB

권 감독이 다음 작품으로 연출하고 싶어 10년째 끙끙거리고 있는 소재는 동인천 '삼치거리 사람들'이다. 최희영 작가가 2014년 쓴 동명의 르포르타주가 모티브다. 권 감독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갔던 술집이 동인천에서 삼치를 파는 선술집이었는데, 지금의 삼치거리 '인하의집'이다.

'삼치거리 사람들'을 보면, 1968년 허름한 선술집으로 연 인하의집은 가난한 예술인들과 대학생, 특히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단골이었다. 인근 대화주조(현 인천탁주)에서 막걸리(현 소성주)를 받아 팔았다. 이 가게가 인하의집 간판을 단 건 1986년이다. 단골 인하대 학생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가게 이름이라고 한다.

"인하의집 1대 사장님은 이 거리에서 삼치구이집을 한다는 사람들이 가게를 내도록 도와줬다고 합니다. 상인들이 모여 1년에 한두 번 야유회도 가고, 수익을 거둬 장학금을 기부하고요. 그 엄혹한 경제환경에서 그렇게 공동체로 같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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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감독은 앞으로 몇 편의 영화를 더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삼치거리 사람들'이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인천의 정서이자 꼭 만들고 싶은 영화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권칠인 감독 영화 가운데 인천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아직 없다. 다음 영화는 인천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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